의자들의 경영학
손수성
의자들이 바닥을 팔아 경영을 시작했다
시간의 후미진 골목, 영세한 그늘에서도
묵인된 밀수를 하듯 엉덩이들을 찍어냈다
싱싱하고 헐렁하고, 납작하고 축 처진
그 엉덩이가 갈아 탈, 보험까지 찍어냈다
접이식, 의자를 피하고 회전의자를 찾게 했다
편리의 하늘 아래 구매 욕구만 부풀린 채
빌딩 속 의자들이 안마 모델을 내놓은 이후
등이 휜 엉덩이들은 얼룩 같은 살도 불었다
사물을 주체로 내세우는 방식의 새로움
시는 매 순간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요구한다. 모든 존재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시는 감정의 발산을, 언어유희를 넘어선다. 때묻은 관습적 언어를 새롭게 해야 한다, 이를 두고 릴케는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하고. 폴 발레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지워야 대상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욕망의 끌림에 따라 선택적으로 보고, 통념에 따라 본다. 그러기에 시는 인간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이름 없고 소외된 존재를 적극적으로 호명하여, 비인간이 우리에게 걸어오는 말을 받아적는 일이다. 더더욱 입이 없어서 말할 수 없는 존재의 목소리를 내세우는 일이다. 이때 ‘나’는 시의 주체가 아니고, 시에 몸을 대주는 시의 플랫폼이 된다. 시가 ‘나’를 경유하면서 ‘나’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두고 사물을 포함한 비인간이 주체가 된다고 말한다. 이런 주체의 구성 방식에서 손수성은 자기 목소리를 내는 시인이다.
우선 이 시는 ‘의자’라는 비인간이 주체가 됨으로써 기존 시의 문법과 시작방식을 갱신한다. 당겨서 말하면 이 시에 나오는 모든 행위를 한 주체가 의자라는 것이다. 새로운 경영을 시작한 것도, 엉덩이를 찍어내고, 보험까지 찍어낸 것도, 회전의자를 찾게 한 것도, 안마 모델을 내놓은 것도 모두 의자가 된다. 시인은 왜 그런 시도를 했을까? 이는 입이 없어서 말하지 못하는 존재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혐의를 덮어씌우는 꼴이다.
그러나 웬만한 독자들은 시인의 의도와 지향을 이내 알아차린다. 첫수 초장부터 앉아서 생활하는 전통적 생활방식에 좌식의자가 들어오면서 달라진 변화를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장들에서 시인은 ‘의자’가 물신주의의 음험한 욕망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간의 후미진 골목, 영세한 그늘”의 미학성을 보라. 하도급 업체에서 밤낮 가리지 않는 노동이 “묵인된 밀수를 하듯” 찍어내는 엉덩이들은, 의자이면서 그 의자를 구매할 소비자들의 욕망이다. 이 시인의 개성적인 서정에는 노동과 욕망이라는 현실이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이어진 둘째 수 “싱싱하고 헐렁하고, 납작하고 축 처진/그 엉덩이”를 가진 소비자들의 구색에 맞게, 심지어 손해배상이라는 안전장치(“갈아탈, 보험”)까지 갖추어 유혹의 손길을 펼친다. 이 시가 정작 말하려 하는 것은 셋째 수 초장 “편리의 하늘 아래 구매 욕구만 부풀린 채”에 드러나는 인간의 생리일 터이다. 이 시는 걷기보다는 앉으려 하고, 더 편하게 앉다 못해 안마 기능까지 갖춘 모델을 찾게 되면서 “얼룩 같은 살”까지 덤으로 불어난 “등이 휜 엉덩이” 인간과, 이런 인간들의 생리를 빈틈없이 활용하여 재화를 축적해내가는 물신주의의 음험한 욕망을 비꼬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어느덧 우리 안방을 점령하고 있는 ‘안마 의자’를 보면서, 인간들의 엉덩이에 당하는 의자들의 수난의 목소리도 들으면서, ‘의자들의 경영학’이라는 에둘러가는 제목으로 오늘의 자본주의 일상을 풍자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물을 주체로 내세우는 시인의 의도가 도달한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