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자 베스트셀러 시인이기도 한 정호승 시인을 ‘슬픔의 시인’ 또는 ‘따뜻한 슬픔의 시인’으로 부르기도 한다. 나는 시인에게 ‘별의 시인’으로 부르고 싶다. 아니 ‘첨성대의 시인’이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시인이 되기까지 문학적 출발점이 바로 첨성대에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첨성대」가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런가 하면 한 해전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동시「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당선되기도 했다. 군 생활 시절에 두 번이나 신춘문예 당선의 영광을 안겨준 작품이 모두 경주를 대표하는 유적지를 소재로 하고 있다. 경주를 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외가가 경주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작품들이 태어날 수 있었다. 시인은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기록상으론 경주와는 아무런 연고가 없지만 어린 시절부터 외가가 있는 경주에 자주 왔다. 시내에서 불국사 가는 길 중간 동방에 외가가 있었지만, 외사촌 형들이 중학교를 입학하면서 공부하기 위해 시내로 나와 살던 곳이 바로 첨성대 근처였다. 문을 열면 환히 첨성대가 내다보이는 그곳은 놀이터였음이 그의 산문집 속에 자세히 그림 그리듯 그려내고 있다. 당시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울타리도 없던 시절이라 첨성대 위에 올라 보고 우물터에서 세수했던 추억들, 그리고 첨성대 하늘 위에 쏟아지는 별들과 할머니 이야기들은 모두 화강암이 되고 시가 되었다. 지척의 반월성과 계림, 왕릉들 모두 첨성대 쪽으로 몰려들어 한편의 아름다운 시가 태어났다. 정서적 고향은 경주라 해도 다름없을 것 같다. 배경이 되고 소재와 주제가 된 작품들 속 등장하는 어머니와 외할머니 등에서 엿볼 수 있다. 시「첨성대」는 ‘할머니 눈물로 첨성대가 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이만큼 시인에게서 첨성대와 외할머니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시인의 첫 시집에도「경주 외할머니」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꼭 나의 할머니 같다. 이외에「검정 고무신」을 비롯하여 산문 속에는 어머니와 할머니 이야기가 빠짐없이 등장한다. 시인이 돌아가신 어머니 관속에 넣어드린「어머니를 위한 자장가」라는 시를 읽으면 눈가가 촉촉해진다. 그의 시에는 유독 별이 많이 등장한다. 발간된 시집들을 다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읽어 본 시집을 예로 들어보면 1997년에 출간된 시집『사랑하다 죽어버려라』에는「별똥별」,「누더기별」등이 있고, 2017년에 출간된 시집『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속에는「별」,「명왕성에 가고 싶다」,「별을 바라보며」등이 있다. 시선집『수선화에게』에는「별들은 울지 않는다」,「별의 길」을 비롯하며 별을 노래한 시들이 여러 편이나 된다. 시집『풀잎에도 상처가 있다』속에는「북두칠성」,「별」,「저녁별」,「개밥바라기별」등 4편이나 별을 노래했다. 물론 제목이 별이 아닌 문장 속에 무수히 많은 별들이 반짝반짝 눈을 뜨고 있다. 시집『별들은 따뜻하다』와 산문집『우리가 어느 별에서』처럼 아예 제목으로 삼은 책들도 있다. 읽어 보지 못하고 살펴보지 못한 시집들까지 다 합하면 별을 노래한 시편들을 합하면 시집 한 권 분량은 족히 넘을 것이다. 이처럼 그의 시 속에 뭇 별들이 등장하는 것도 첨성대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독 날씨가 추워지거나 마음이 쓸쓸해지면 그의 시들이 읽고 싶어진다. 진정한 기쁨은 진정한 슬픔에서 태어난다고 시인은 말했던가? 그의 시들은 붕어빵처럼 따뜻하다. 그리고 어떤 희망적인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날이 추워서일까 문청시절 즐겨 읽던 누렇게 빛이 바랜 첫 시집『슬픔이 기쁨에게』를 다시 꺼내 읽는 즐거움도 가질 수 있었다. 최근에는 그의 시「산산조각」을 좋아한다. 아내는「바닥에 대하여」를 좋아해서 시 낭송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시인은 직접 찍은 첨성대 사진을 노트북 바탕화면으로 사용하고 있을 만큼 첨성대를 사랑한다. 산문집의 마지막 부분에 시인은 아호를 첨성(瞻星), 바라볼 첨(瞻)에 별 성(星), 즉 별을 바라보는 사람이란 뜻으로 스스로 이름을 지었음을 밝히기도 했다. 이제 우리들이 많이 불러주면 된다. 특히 경주사람들이 많이 불러주었으면 좋겠다. 그가 별을 얼마나 좋아하는가는 ‘별’이라는 시를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에 올라가 사다리를 버린 사람은 별이 되었다 나는 사다리를 버리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하고 엄마가 밥 먹으러 오라고 부르시는데도 지붕 위에 앉아 평생 밤하늘 별만 바라본다 -「별」전문 시인은 운명적으로 별을 노래해야만 하는 소명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만약 필자가 신라의 왕이라도 된다면 그에게 첨성대 별지기로 임명하고 싶다. 여생을 첨성대 위에 올라가 평생 별을 보며 시나 쓰라며 아름다운 형벌을 내려주고 싶다. 현실적으로는 첨성대가 보이는 곳에 노래비 하나 만들어 첨성대를 찾는 사람들 눈을 즐겁게 해주고 가슴 따뜻하게 해주고 싶다. 정호승 시인은 첨성대 시인이고 별의 시인이니까. 첨성대 정호승 할머님 눈물로 첨성대가 되었다. 일평생 꺼내 보던 손거울 깨뜨리고 소나기 오듯 흘리신 할머니 눈물로 밤이면 나는 홀로 첨성대가 되었다. 한단 한단 눈물의 화강암이 되었다. 할아버지 대피리 밤새 불던 그믐밤 첨성대 꼭 껴안고 눈을 감은 할머니 수놓던 첨성대의 등잔불이 되었다. 밤마다 할머니도 첨성대 되어 댕기 댕기 꽃댕기 붉은 댕기 흔들며 별 속으로 달아난 순네를 따라 동짓날 흘린 눈물 북극성이 되었다. 싸락눈 같은 별들이 싸락싸락 내려와 첨성대 우물 속에 퐁당퐁당 빠지고 나는 홀로 빙빙 첨성대를 돌면서 첨성대에 떨어지는 별을 주웠다. 별 하나 질 때마다 한방울 떨어지는 할머니 눈물 속 별들의 언덕 위에 버려진 버선 한짝 남몰래 흐느끼고 붉은 명주 옷고름도 밤새 울었다. 여우가 아기 무덤 몰래 하나 파 먹고 토함산 별을 따라 산을 내려와 첨성대에 던져놓은 할머니 은비녀에 밤이면 내려앉는 산여우 울음소리. 첨성대 창문턱을 날마다 넘나드는 동해바다 별 재우는 잔물결 소리. 첨성대 앞 푸른 봄길 보리밭길을 빚쟁이 따라가던 송아지 울음소리. 빙빙 첨성대를 돌다가 보름달이 첨성대에 내려앉는다. 할아버진 대지팡이 첨성대에 기대놓고 온 마을 석등마다 불을 밝힌다. 할아버지 첫날밤 켠 촛불을 켜고 첨성대 속으로만 산길 가듯 걸어가서 나는 홀로 별을 보는 일관(日官)이 된다. 지게에 별을 지고 머슴은 떠나가고 할머닌 소반에 새벽별 가득 이고 인두로 고이 누빈 베동정 같은 반월성 고갯길을 걸어오신다. 단옷날 밤 그네 타고 계림숲을 떠오르면 흰 달빛 모시치마 홀로 선 누님이여. 오늘밤 어머니도 첨성댈 낳고 나는 수놓은 할머니의 첨성대가 되었다. 할머니 눈물의 화강암이 되었다.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첨성대’전문-
나보단도 더 ‘나’를 사랑하는 이 천년을 천년을 사랑하는 이 새로 햇볕에 생겨났으면 새로 햇볕에 생겨 나와서 어둠속에 날 가게 했으면 사랑한다고...사랑한다고... 이 한마디 말 님께 아뢰고, 나도 인제는 고향에 돌아갔으면! -미당 서정주의 시 <석굴암 관세음의 노래> 부문 -관세음보살의 노래 경주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찾는 곳이 불국사와 석굴암이다. 국보 24호인 석굴암은 불국사와 더불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자 세계 최고 불교예술의 걸작품이다. 수학과 기하학, 건축공학 등 고도의 과학과 뛰어난 균형미와 조형미 등 미적 아름다움의 예술성, 종교적으로 승화시킨 장엄한 숭고미 등 어느 한쪽 뛰어나지 않는 부분이 없을 만큼 완벽에 가깝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들도 문자라는 예술을 통해 석굴암을 예찬했다. 석굴암을 노래한 시인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대표적으로 미당 서정주, 월탄 박종화, 청마 유치환, 가람 이병기, 초정 김상옥, 무산 조오현 스님, 고은, 김후란, 박희진, 오세영 등 근·현대를 대표하는 시인들은 석굴암을 둘러보고 한두 편씩 시를 남겼다. 일일이 거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인이 흔적을 남겼다. 언젠가는 한 편 써야지하면서 엄두를 못 내고 있는 필자 같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위대한 예술작품에 영감을 받고 마음이 동해서일까 뛰어난 작품들이 많다. 석굴암을 노래한 시들의 시적 대상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과 본존불 뒤에 있는 십일면관세음보살이다. 대부분 시인은 본존불을 노래하였으나 의외로 십일면관세음보살을 노래한 시인들도 많다. 숨어있듯 석실 안쪽 구경할 수 없는 곳에 있지만, 관세음보살은 예술적 영감을 불러오기에 충분하다. 신라 정신과 서라벌을 가장 많이 노래한 시인으로 미당 서정주와 초정 김상옥 시조 시인을 들 수 있다. 눈 밝은 두 시인 역시 십일면관세음보살을 놓치지 않고 노래했다. 김상옥 시인은 ‘석굴암’이라는 연작 시조로 대불과 관세음보살을 노래하기도 했다. 서정주 시인의 ‘석굴암 관세음의 노래’는 시 낭송 자리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애송시이다. 또한, 월탄 박종화 역시 소설이 아닌 시로 다음과 같이 십일면관세음보살을 노래했다. 웃는듯 자브름하신가 하면 조는듯이 웃으셨네 담은듯 열으신듯 어여쁜 입술 귀 귀울여 들으면 향기로운 말씀 도란도란 구으는듯 하구나. -미당 서정주의 시 -월탄 박종화의 시 <십일면관음보살> 부문 박희진 시인의 등단작이기도 한 ‘관세음상에게’는 실물도 보지 않고 우연히 손에 들어온 석굴암 십일면관세음보살 사진 한 장을 보고 영감을 받아 스물둘 나이에 시를 썼다고 스스로 밝히기도 했다. 자브름하게 감으신 눈을 이젠 뜨실 수도 벙으러질 듯 오므린 입가의 가는 웃음결도 (중략) 미(美)란 사람을 절망케 하는 것 이제 마음 놓고 죽어가는 사람처럼 절호 쉬어지는 한숨이 있을 따름입니다 -박희진의 <관세음상에게> 부문 이외에도 경주 옥룡암 이육사 시인과 교류한 신석초 시인의 ‘석굴암 관세음’이란 시를 읽다 보면 리듬을 타고 석굴암 내부 속으로 점점 빨려들게 만들기도 한다. 대불과 관세음보살을 둘 다 노래한 시인으로는 월탄 박종화, 초정 김상옥, 임학수 등이 있다. 이외에도 미술을 전공한 윤범모 시인은 ‘토함산 석굴암’이라는 장편 시집으로 석굴암을 찬양하기도 했다. 대불을 노래한 시인들의 멋진 시들도 많지만 십일면관세음보살을 노래한 시 위주로 몇 편 인용해 보았다. 관세음보살은 마치 돌아가신 할머니처럼 무릎 베고 잠들고 싶을 만큼 편하게 다가온다. 이름만 불러도 소원 다 들어줄 것 같은 대자대비의 원력이 어두운 세상 곳곳으로 토함산 아침 햇살처럼 퍼져나갔으면 좋겠다. 그 옛날 김대성이 산꼭대기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새긴 뜻을 편협과 이기심 가득한 현대인들은 알 수는 없겠지만 두 손 모으며 합장하는 마음은 비슷할 것이다. 둔황을 비롯한 여러 지역 석굴에서 많은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지만, 반도의 동쪽 끝 토함산 석굴암은 불교예술의 결정판이자 끝판왕이다. 방대한 불교사상을 간략하게 압축하고 압축해서 동해가 보이는 산꼭대기 위에 피워올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꽃이다. 붓다의 눈으로 보면 석굴암은 분명 붓다의 마음이자 문장일 것이다. 한 편의 시(詩)이자 한 권의 경전(經典)일 것이다. 다만 우리가 읽어내지 못할 뿐이다. 석굴암이라는 시와 경전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리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청마 유치환의 대표시 ‘행복’은 이렇게 시작한다. 시낭송 행사에 가보면 청마의 시는 빠짐없이 등장한다. ‘행복’을 비롯하여 ‘바위’, ‘깃발’, ‘생명의 서’, ‘울릉도’ 등 시인은 떠났어도 그의 시는 여전히 애송되고 있다. 청마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경주로 옴으로 인해 경주는 바야흐로 문학의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다. 경주고 교장(1955년 2월~1959년 9월)과 경주여고 교장(1961년 6월~1962년 3월)으로 두 차례에 걸쳐 5년 6개월 정도 경주에서 살았다. 청마의 작품 중 경주를 노래한 시들은 생각만큼 많지는 않다. 산문 1편과 시 7편 정도이다. 물론 경주와 간접적으로 관련된 작품들과 경주 생활 중에 쓴 작품들은 많이 있을 것이다. 청마는 경주에 온지 한 달 만에 안압지와 반월성, 남천을 거닐며 고도 경주의 느낌을 ‘경주에 와서’라는 짧은 산문 한 편으로 표현했다. 경주생활 중에 쓴 시 가운데 대표작으로 황오리 5호총이라는 부제가 붙은 ‘고분에서’를 꼽는 사람들이 많다. 이 시는 발표 당시에는 ‘황오리 5호총’이라고 발표했으나, 추후 발간된 시집에는 제목이 ‘고분에서’라고 되어 있다. 이외에『제9시집』에는 경주의 유적지들이 들어간 시들이 많다. 경주로 온 이듬해 4월 경주 외동 모화리 봉서산 자락에 위치한 원원사지를 방문하고 쓴 ‘원원사지’와 소금강산 굴불사지의 사면석불을 노래한 ‘사면불’과 ‘잠자리-석굴암에서,’ 상봉-계림에서, ‘역투’ 등이 경주를 노래한 대표적 시편들이다. 원원사(遠願寺)! 원원사(遠願사)! 그 무슨 간곡하고 아득한 소망이었기 이도록 애닯게도 이름 들려 남음이랴 -시 원원사지 일부 경주에서 쓴 시들의 공통점은 경주지역 화강석과 많은 대화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위에 언급한 시들 외에도『제9시집』에는 ‘예술- 석수(石手)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감추어 둔 것을 깨뜨려 찾아내는 것이다’ 라는 아포로즘과 단장 54 바위- 얼굴은 안으로 내면을 밖으로 하고 있는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또한 미발표 유고시집속 ‘석상에(石像)에’ 라는 제목의 시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돌아가는 것이다 그 아득한 시원(始元)의 데로 이제는 돌아가는 것이다 (중략) 싸늘한 살갗 하나 사이하고 저쪽과 이쪽이 지척도 아니언만 소리도 닿지 않는 그 억겁 리- 이제는 돌아가는 것이다 -(청마의 시 ‘사면불(四面佛)’ 일부) 흔히 미당 서정주의 ‘석굴암대불’과 비교되기도 하는 같은 제목의 시 ‘석굴암대불’은 경주로 오기 전에 쓴 작품이다. 1953년《신천지》에 발표하였으며 1954년 발행된『청마시집』에 수록되어 있다. 청마는 경주의 자기의 거처를 요지암(遙持庵)이라 이름 짓고 여러 유적지들을 산책하며 사색을 즐겼다. 이 시기는 생떽쥐베리와 사르트르에 빠져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경주시절은 왕성한 문단 활동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경주고 부임 이듬해인 1956년 경북문화상을 받았으며, 1957년에는 한국시인협회 초대회장으로 피선되었으며 예술원장 재연임 피선되기도 했다. 또한 시집『제9시집』을 간행하기도 했다. 1958년에는 아세아재단 자유문학상을 받았으며『류치환 시선』과 자작시 해설집『구름에 그린다』를 발간했다. 1960년에는 시집『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처럼 경주시절은 한국문학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국시인협회장과 예술원 회원이라는 타이틀도 타이틀이었지만 그는 사람을 좋아하는, 술을 좋아하는 로맨티스트였다. 그런가 하면 아나키스트의 면모도 엿볼 수 있다. 관 주도 행사에 학생들이 동원되는 일에 강력하게 반대하였으며, 이승만 정부에 반기를 들며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일로 인해 경주고 교장직에서 물러나는 일을 겪기도 했다. 청마의 시 ‘칼을 갈라’와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등에 그의 강직한 성격과 뜨거운 피가 잘 나타나 있다. 한편으로 청마는 애주가로 경주에 많은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했다. 지금은 사라져서 아쉬움이 큰 쪽샘의 주막집들을 자주 들리곤 했다. 지역의 예술인들은 물론 부산과 대구, 포항 등 멀리서 찾아오는 많은 문인들과 밤을 새우며 술잔을 주고받기도 했다. 멋과 낭만이 함께했던 쪽샘이 사라진 것은 여러모로 아쉽다. 문향이 꽃피던 그곳의 사라짐은 경주의 또 다른 상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허만하 시인은『청마풍경』이라는 저서에서 청마의 흔적을 찾아 원원사지를 비롯하여 쪽샘 등 경주 곳곳을 누비며 청마의 풍경을 그려내기도 했다. 송희복 교수는 유치환의「경주 시절과 시의 공간 감수성」이라는 주제로 청마의 경주 시절의 시를 분석한 연구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청마와 관계된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그를 추억하고 기념하고 있다. 청마문학관과 청마기념관, 청마문학상, 청마문화제 등이 있는 통영이나 거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중에서도 특히, 이영도 시조 시인과의 5000통 넘는 연서를 쓴 편지의 시인 청마를 기념하여 통영우체국을 아예 ‘청마 우체국’으로 이름을 바꾼 일은 특별하다. 청마가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 부산 동구에서도 초량동 산복도로에 전망대와 우체통을 설치하고 그의 예술과 문학정신을 기리고 있다. 5년 6개월을 살다간 이곳 경주에도 청마의 시정신을 기리는 흔적들이 곳곳에 있다. 경주고 교정에는 재직 당시 만든 교훈 ‘큰 나의 밝힘’ 새김돌이 남아 있어 재학생들에게 자긍심을 일깨워주고 있다. 불국사에서 토함산을 오르는 등산로에는 청마시비가 세워져 있다. 청마의 시 ‘석불암대불’의 일부를 새긴 이 시비에 얽힌 웃픈 에피소드도 숨어 있어 재미를 더해 준다. 그의 문학정신을 계승하는 청마백일장도 4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다. 워낙에 뛰어난 시편들이 많아서 묻혀있지만, 경주를 노래한 뛰어난 시편도 많다. 청마의 시를 찾아내고 애송해주는 것이 경주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일일 것이다.
어릴 적 우리들은 형산강을 강이라 하지 않고 그냥 서천이라 했다. 편하게 그냥 서천내라고 불렀다. 시내를 감싸고 흐르는 북천과 남천 또한 북천내, 남천내 이렇게 불렀다. 훨씬 친근하고 정감이 묻어나는 이름들이다. 산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천 건너편 산을 그냥 서산이라 불렀다. 선도산, 송화산, 수도산, 옥녀봉 등을 구분하지 않고 편하게 서산으로 불렀다. 한국의 대표작가 동리에게 서산과 서천은 일반적인 산과 강이 아닌 특별하게 다가오는 산이었다. 서산과 서천이 없었다면 우리 국토에 문학의 씨를 뿌리지 못했을 것이다. 김동리 문학을 한단어로 요약하면 바로 ‘죽음’일 것이다. 대표작 ‘무녀도’를 비롯한 여러 작품 속에 죽음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죽음은 동리 문학의 정중앙을 관통하는 메인 테마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대다수 소설 속에서 죽음은 어김없이 모습과 장면을 달리하며 나타난다. 소설뿐만 아니라 많지 않은 그의 시에도 제일 많이 등장하는 시어가 ‘이승과 저승’이다. 과장하면 시 작품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해도 무방할 만큼 이승과 저승 사이를 오가고 있다. 모든 것은 옆집 선이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된다. 다섯 살 되던 이른 봄 살구꽃이 피기도 전, 골목에서 소꿉놀이하며 놀던 옆집 선이가 홍역으로 죽었다. 거적에 싸인 선이를 지게에 지고 나서는 뒤를, 그녀 아버지가 삽을 들고 따라나서는 골목에 선이 엄마의 울부짖는 소리와 삽짝을 벗어나 서천 징검다리 건너 서산 솔숲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소년은 강 언덕에서 젖은 눈망울으로 지켜보았다. 최초로 목격한 죽음은 바로 첫사랑의 감정을 지녔던 어린 소녀의 죽음이었다. ‘우물속 얼굴’이라는 작품 속에 선이는 이름 그대로, 창봉(동리의 아명)은 창수로 나타난다. 어린 소년 동리에게 서천은 이미 이승과 저승 사이를 흐르는 강이었다. 놀이에서 일부러 져주던 한 살 위 소녀, 선이의 죽음은 문학의 세계로 접어들게 한 원형질이라 할 수 있다. 수필 ‘내 문학의 자화상’과 ‘그 사랑’, 청소년동화 ‘우물속의 얼굴’ 등 여러 작품에서 진솔하게 그려지고 있다. 선이의 죽음은 걷잡을 수 없는 고독과 우울 속으로 몰아넣었고, 술을 마시게 했고, 책을 읽게 만들었다. 경주제일교회 부설 계남학교에 다니던 소년은 틈나는대로 서천 징검다리 건너 서산에 가서 놀다오곤 했다. 지금 위치로 보면, 장군교 건너 부엉마을 뒤쪽 일대의 산이다. 넓게는 흥무공원과 금산재를 기준으로 좌우 선도산과 송화산, 옥녀봉 일대였다. 가장 자주 갔던 곳은 글 속에서는 부헝더미, 부헝듬, 송홋골로 묘사되고 있다. 이곳 부헝덤, 부흥더미는 부엉이가 자주 운다 해서 불리어진 마을이름이다. 동리가 그곳을 찾은 이유는 집에서 가깝고, 작은 연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못가에 서 있는 버드나무와 알록달록 깃털을 가진 물새를 볼 때마다 죽은 선이를 떠올리곤 했다. 혼자 산골짝을 헤메다 오거나 가을이면 가랑잎위에 누웠다 돌아오곤 했다고 에세이 ‘내 문학의 자화상’이나 ‘고독을 삼킨 독서’ 등에 잘 드러나 있다. 이처럼 선이가 묻혀있는 서산은 동리문학의 성소같은 곳이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서천 또한 문학의 모태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는 서천의 모랫벌과 갈대밭을 좋아했고 또 늪을 좋아했다. 늪이 들어간 작품들이 꽤 많다. 소설 ‘늪’과 ‘내 속에 있는 늪’이라는 수필과 ‘명상의 늪가에서’라는 수필집이 있고 시도 있다. 여름에 큰물이 지면 물길의 방향에 따라 섬이 되기도 하고 늪이 되기도 했다. 늪은 다른 한편으로 죽음과도 연결된다. 아울러 서천은 그의 작품 속으로 푸르게 흘러가는 강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서천과 북천이 만나는 금장대 아래서 물살이 소용돌이치며 한바퀴 돌아나가는 그곳이 예기소*이다. 매년 해마다 사람 하나씩 꼭 잡아먹는 이무기가 산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여름에는 목욕하던 사내가, 겨울에는 썰매타던 아이가 빠져 죽었다는 소문을 애기청소가 있는 금장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필자는 잘 알고 있다. 최근 한 달 전에도 이곳에서 시체가 떠올랐다는 신문기사를 본 적 있다. 유년의 동리에게 서천과 서산이 유별했던 이유는 집안의 뿌리가 서면과 건천쪽에 두고 있어 어른들을 따라 묘사를 다녀오는 즐거움과 선도산 고개쯤에서 서천내를 뒤덮은 환한 갈대 때문에 걸음을 멈춰서야했던 일들이 수필 ‘가을의 정취’에 잘 드러나 있다. 글속에 계린이골, 고란(광명), 한실(대곡리) 등 경주 서쪽 지명들이 심심찮게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모친 허임순 여사도 서악이 고향이다. 에세이집 제목이 되기도 한 ‘꽃과 소녀와 달과’ 수필 속에는 서천으로 걸어나가 남천을 돌아 반월성 근처까지 가면 달이 손에 닿을 듯 가까이 느껴졌고, 집으로 돌아왔을 쯤에는 이슬 묻은 바지가 물에 빠진 듯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유난히 서산 진달래를 좋아했다. 일곱 살 무렵, 마른 다복솔 아래 빨갛게 피어 있는 진달래는 작가를 설레게 했고, 한다발 꺾어들고 돌아오면 골목길이 이제껏 느끼지 못한 환한 햇살이 가득 차있었다고 ‘등불이 켜지듯 퍼지는 햇살’이라는 수필에 멋진 문장으로 그려 놓고 있다. 아마도 선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황홀한 행복감을 잊지 못하여 살고 있는 집 뜰에 진달래를 심었다고 수필 ‘봄을 기다리며’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자전적 에세이속에서 꺼내고 싶은 이야기들은 참 많다. 남산에 옥석 주우러 갔던 이야기를 비롯하여 많은 이야기들은 다음에 기회가 있을 것이다. 소년 동리가 성건동에서 서천과 서산으로 걸어나갔던 길목에 ‘김동리선생문학기념비’가 몇 해 전 세워졌다. 뜻 깊은 그날 주낙영 경주시장도 참석해 간밤에 읽은 무녀도를 해석하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생가 복원도 어려운 상황이다. 이왕이면 대표작 무녀도의 배경이 된 애기청소 가까운 곳에 문학비가 하나 세워졌으면 참 좋았을 텐데 하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다. 애기청소, 금장대, 암각화 등과 어울려 경주의 또 다른 명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문학이라는 무형의 자산이 곁들여진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무녀도 소설에는 예기소이나 보통 경주사람들은 애기청소라 부르며, 때로는 예기청소(藝岐淸沼), 예기청수(藝岐淸水)로도 표기함.
사실 이육사는 옥룡암으로 내려오기 전 가혹할 만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폐결핵으로 6개월간 성모병원 입원 후 퇴원하였으며, 부친의 죽음과 큰형 이원기의 죽음이 연이어 있었다. 그리고 의열단 혁명동지 윤세주의 전사(戰死)가 있었다. 가까운 이들의 죽음이 연속으로 이어졌다. 그는 이곳 옥룡암에서 병약한 시인으로서 한적함을 즐겼을지 모르나, 한편으로는 독립운동가로서는 뜨거운 가슴은 멀리 대륙의 독립운동하는 동지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몸이 좋아지면 달려가리라 그렇게 마음을 세우고 있었으리라. 그의 생애에서 옥룡암의 시간들은 몸을 추스르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다음을 기다리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육사의 수필 ’계절의 표정’ 가운데 마지막 부문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벗들이 나를 달랬다. 전지 요양을 하란 것이다. 솔깃한 말이라 시골로 떠나기로 결정을 했지만 막상 떠나려고 하니 갈 곳이 어디냐? 한 번 더 생각해 보지 않 수 없었다. 조건을 들면 공기란 건 문제 밖이다. 어느 시골이 공기 나쁜 데야 있을라구. 얼마를 있어도 싫증이 안 날데라야 한다러면 경주로 간다고 해서 떠난 것은 박물관을 한 달쯤 봐도 금관, 옥적(玉笛), 봉덕종(奉德種), 사사자(砂獅子)를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날 까닭은 원체없다. 그뿐인가, 어디 일초 일목(日草一木)과 일토 일석(一土一石)을 버릴 배 없지마는 임해전(臨海殿) 지초(支礎)돌만 남은 옛 궁터에서 가을 석양에 머리칼을 날리며 동남으로 첨성대를 굽어보면 아테네의 원주(圓柱)보다도, 로마의 원형 극장보다도 동양적인 그 주란 화각(朱欄畵閣)에 금대 옥패(金帶玉佩)의 쟁쟁한 옛날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거기서 나의 정신에 끼쳐 온 자랑이 시작되지 않았느냐? 그곳에서 고열로 인해 죽는다고 하자. 그래서 내 자랑 속에서 죽는 것이 무엇이 부끄러운 일이냐? 이렇게 단단히 먹고 간 마음이지만, 내가 나의 아테네를 버리고 서울로 다시 온 이유는 시골 계신 의사 선생이 약이 없다고 서울을 짐짓 가란 것이다. 서울을 오니 할수없어 이곳을 떼를 쓰고 올밖에 없었다. -수필 ‘계절의 표정’ 일부 아테네 로마보다 더 좋은 경주를 두고 약 때문에 서울로 올라올 수밖에 없는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폐허 같은 고도 경주의 모습을 그는 망국의 마음을 읽었으리라. 무너진 유적을 둘러보며 떠올렸던 쟁쟁하게 울려오는 옛 소리는 아마도 선인들의 외침이거나 민족부흥의 종소리였을 것이다. 그의 마음 한가운데 자리한 것은 독립과 민족성 고취였을 것이다. 그 옛날 화랑들의 기개가 그리웠을 것이다. 일제 식민통치가 그래서 그는 이곳에서도 몸을 추스르며 벗을 그리워하며, 쉽게 시가 써지지 않는 고심을 하며 한편으로는 멀리 중국 대륙의 의열단 동지들이 생각하며 그리웠을 것이다. 이렇듯 경주 남산 옥룡암은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곳이다. 이육사는 이곳에서 3개월 정도 머물다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서 신석초와 나들이하면서 중국으로 가야만 할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1943년 초봄에 북경으로 갔다가 그해 4월 귀국했다 6월에 체포되어 다시 북경으로 압송되어 감옥에서 40세로 생을 마감했다. 옥룡암은 외지의 문인들이 경주에 오면 많이 찾는 곳이다. 올해만 해도 몇 차례 안내자를 자청해서 동행한 적 있다. 시인, 작가들이 이곳을 찾는 까닭은 무엇일까? 절 구경도 구경이지만, 이육사의 시 정신과 문학적 향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절은 자꾸만 쇠퇴해져 가는 느낌이다. 태풍에 상처 난 흔적들은 개보수하면 되겠지만, 스토리텔링이 가득한 옥룡암을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발굴하고활용하지 못함이 아쉽다. 이곳에다가 민족시인 이육사의 시 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문학적 창작공간으로 꾸며 보는 것도 좋겠다. 더군다나 옥룡암은 한때 지역의 인재들이 고시 공부를 하던 명소로 유명하다. 지금도 공부방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기에 잘 활용하여 문학 레지던스(입주작가 창작촌) 공간으로 변화를 모색해보면 어떨까? 아니면 시비(詩碑)를 세워 육사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것도 뜻 깊은 일일 것이다. 이곳에서 육사 백일장, 과 육사시 시낭송대회 등 어떤 형태로든 뜻을 기리고 추모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작은 암자에 사람들이 붐빌 것이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두렴 -이육사의 시 ‘청포도’ 전문 7월이면 제일 먼저 이육사(1904~1944)의 시 ‘청포도’가 떠오른다. 조국 광복을 염원하는 마음이 담긴 이 시는 교과서에도 실려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국민 애송시이다. 수인번호 264가 시인의 이름이 된 독립투사 저항시인 이육사의 대표시 ‘청포도’가 태어날 수 있었던 창작의 공간이 경주 남산 탑곡 옥룡암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포항 동해면 삼륜 포도원을 방문하고 시상(詩想)을 얻었지만, 고뇌를 보태어 시를 가다듬어 빛나는 시로 태어나게 만든 곳이 옥룡암이다. 이육사의 유일한 혈육인 딸 이옥비 여사도 부친의 작품 가운데 ‘청포도’를 제일 좋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육사는 1936년(32세)과 1942년(38세) 두 차례에 걸쳐 옥룡암에 내려와 요사체인 삼소헌(三笑軒)에 머물며 요양했다. 당시 이곳에서 교류하던 지역의 인물로 고암 박곤복, 김범부, 최영, 수봉재단 설립자인 이규인 등을 들 수 있는데 특히, 이규인 선생의 심부름갔던 이식우(전 경주고 교장) 선생은 청포도 원고를 앞에 두고 고뇌에 찬 육사의 모습을 목격하였다고 한다. 이후 ‘청포도’는 1939년 8월 <문장>지에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옥룡암은 예전에 신인사지(神印寺址), 불무사(佛無寺)로 불리워 왔던 자리에 다시 세운 작은 절이다. 절 위쪽에는 보물 제201호 탑곡 마애불상군이 있다. 바위에 새겨진 탑은 황룡사 9층 탑의 형태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바위 동서남북에 불상과 비를 피하기 위해 설치한 전각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이육사는 이곳에 머물며 몇 걸음 떨어진 인근의 감실 부처, 보리사, 서출지 등도 산책 삼아 둘러보았을 것이다. 이육사가 옥룡암에 머물며 쓴 작품들은 많지 않다. 정확하지도 않지만 몇몇 작품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신석초에게 보내는 1936년 8월 4일자 엽서 속에는 이육사의 지치고 고단함을 엿볼 수가 시조가 있다. 비록 제목은 없지만 이육사의 유일무이한 시조 작품이다. 비올가 바란마음 그마음 지난 바램 하로가 열흘같이 기약도 아득해라 바라다 지친이넋을 잠재올가하노라 잠조차 업는 밤에 燭태워 안젓으니 리별에 病든몸이 나을길 없오매라 저달 상기보고가오니 때로 볼가 하노라 -1936년 8월 4일자 엽서 이후 이육사는 벗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서 알 수 있듯 1938년 가을 최용, 신석초등과 경주여행을 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신석초와 함께 부여를 여행하기도 했다. 이육사는 경주 옥룡암 머물며 이곳에서의 생활과 심정을 절친 신석초에게 보낸 엽서에서 자세히 엿볼 수 있다. 석초형!‘내가 지금 있는 곳은 경주읍에서 불국사로 가는 도중의 십리허에 있는 엣날 신라가 번성할 때 신인사의 고지에 있는 조그만 암자이다. 마침 접동새가 울고가면 내 생활도 한층 화려해질 수 있다해서 군이 먼저 편지라도 한 장하여 주리라라고 바래기도 하면서 형의 게으름에 가망이 없어 내 먼저 주제넘게 호소하지 않는가 석초형! 혹 여름에 피서라도 가서 복약이라도 하려면 이곳으로 오려므나 생활비가 저렴하고 사람들이 순박한 것이 천년전이나 같은 듯하다 (중략) -1942년 8월 10일자 엽서 1942년 8월 10일에 보낸 다보탑 사진엽서에는 신석초를 그리워하며 경주로 피서 삼아 놀러 오라 하기도 하고, 써놓은 시편 있으면 보내 달라고 한다. 본인은 마음이 정리되지 않아 시를 쓸 수 없다는 심정을 전하기도 한다. >>다음 편에 계속
경주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일본인의 책을 우연히 경주시립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도서 반납일이 경과될 때까지 수중에 두고 싶은 책이었다. 닭이 알을 품듯 곁에 두고 싶었던 것은 작가에 대해 질문을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모리사키 가즈에는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나 17세까지 대구와 경주, 김천에서 성장했다. ‘경주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는 그녀가 성장한 조선에 대한 회고록이자 수기이다. 책머리 서문에 ‘조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마음이 무겁다’라고 말했듯 피식민지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분명 불편한 것이 많고 원죄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소녀 눈에 비친 조선은 어머니처럼 따스했다. 나의 원형은 조선이 만들었다고 할 만큼 조선의 마음, 조선의 풍물과 풍습 그리고 자연환경이 만들었다고 이야기한다. 책 속에는 대구와 김천에 대한 이야기도 있지만, 특별히 경주에 대한 작가의 유별난 애정을 엿볼 수가 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오래된 도시 경주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본다. 그녀의 아버지 모리사키 구라지는 교사였다. 대구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가 1938년 경주중학교 초대 교장으로 오게 되었다. 건물도 지어지지 않은 학교로 오게 된 것은 이규인 선생과 수봉 가문의 강력한 개교의 의지 때문이었다. 모리사키 가즈에가 경주에 와서 처음 나들이 간 곳은 신록이 한창이던 어느 봄날 무열왕릉 산책이었다. 서천을 건너 기와 조각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밭을 지나 도착한 그곳에서 멀리 토함산 정상과 훤히 내려다보이는 경주평야를 바라보기도 했다. 무열왕릉 비석(국보 25호)을 만져보며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목 부위를 불그스름하게 만든 옛 신라인에게 감탄했다. 그리고 신라 왕릉에 절을 올리기도 했다.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이 삼국 통일 이야기와 신라 시대 이곳 도읍지에서 불국사까지 집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 듣기도 했다. 그다음은 오릉으로 갔다. 문천과 서천이 합해지는 부근, 솔밭으로 둘러싸인 다섯 개의 왕릉을 보며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했다고 했다. 천년 전 왕과 왕비의 목소리를 들리는 듯하여 이내 조용해 졌다고 했다. 경주를 떠올리면 이날의 정적이 되살아나 감회에 잠긴다고 했다. 이외에도 포석정과 계림, 반월성, 안압지 등을 둘러보곤 했다. 특히 석굴암에서는 대불보다는 벽면 부조 불상을 더 좋아했는데 꿈으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여러 번 찾아왔다고 했다. 조선 사람보다 더 조선을 좋아했던 당시 경주 박물관 관장 오사카 긴타로는 <경주의 전설>이라는 책을 만들었고 어린 그녀도 그 책 선물을 받았는데 오래도록 애지중지했다. 오사카 긴타로는 신라의 미소로 알려진 수막새가 국내로 다시 귀환하도록 큰 힘을 보탠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에밀레종(국보 29호 성덕대왕 신종)에 대한 이야기는 어린 소녀에게 많은 감흥을 가져다준 것 같다. 어린아이가 흐느껴 우는 듯한 공명(共鳴)의 음색이 꼭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로 들린다는 이야기에 크게 감명받은 듯했다. 책 속에는 경주 장날에 대한 풍경도 많이 등장한다. 엿장수 가위소리, 약초 파는 사람들, 둥근 도자기 요강을 파는 상인, 그리고 분황사 주변에서 떡메치기하는 장면과 여동생과 걸어갔던 감포로 가는 포플러 가로수길도 선명하게 기억되고 있었다. 어머니와 북천에 자주 갔고, 들꽃을 꺾어 오기도 했다. 북천 건너 경주 이씨 선조가 강림했다는 표암에서 바라본 경주중학교와 안압지, 반월성과 남산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는 남산은 뿌옇게 보랏빛이 돌고, 딩구는 돌에는 자수정이 박혀있고, 성스런운 그 산은 그녀의 아버지도 남산에 묻혔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1943년 4월 초 벚꽃 필 무렵 그녀의 어머니가 서른 여섯 살에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죽기 전 학교 관사에서 혼불이 빠져나가 남산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경주중 1학년 학생이 보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다. 어머니의 혼불이 경주 남산 어딘가 있는 듯하여 그녀의 책 속에 ‘혼불’이라는 소제목을 달았던 것 같다. ‘경주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그녀의 어머니는 경주에서 죽었고 에밀레종 소리에서 엄마를 부르는 어린아이 소리를 들었던 것이 책 제목으로 정해진 결정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한국어판 부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성장한 한 일본인의 수기’이지만 일본 원서에는 ‘나의 원향(原鄕)’일 만큼 경주는 그녀에게 특별했던 것 같다. 1968년 그녀는 수봉재단 창립 30주년 행사에 초대 교장이었던 아버지 대신 초청받아 각별한 후의를 받았다. 한국에서 태어난 일본인 모리사키 가즈에는 주로 탄광촌에서 활동한 시인이자 페미스트 작가이다. 평생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글을 썼으며 이 책 외에도 한국에 관한 여러 편의 책을 썼다. 비록 짧은 5년간의 생활이었지만 그녀에게 경주는 어머니처럼 영원히 그리운 곳이다.
상허(尙虛) 이태준은 한국 근대문학의 첫 번째로 꼽는 명문장가이자 한국 단편 문학의 완성자로 평가한다. ‘시는 정지용 산문은 이태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의 산문은 뛰어났지만 월북을 했다는 이유로 제대로 평가를 받지를 못한 시기도 있었다. 1940년 이화여전에서 작문 강사를 한 경험을 바탕으로 지은『문장강화』는 불후의 명저로 남아있다. 이 책은 당대는 물론 오늘날까지 문예 창작과 문장공부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우리나라 문인 가운데 이 책을 읽지 않은 시인과 소설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1941년에는 현대 수필 문학사에 빠뜨릴 수 없는 또 하나의 명작『무서록(無序錄)』을 출간했다. 수필집『무서록(無序錄)』에는 탁월한 명문장가로서 진면목을 만날 수 있는 문장들로 가득하다. 무서록이란 순서없이 무턱대고 쓴 글이라는 뜻으로 수필 문학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무서록』은 김용준의『근원수필』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수필 문학의 백미, 또는 정수라고 평가한다. 근대 수필의 최고 경지로 평가되는『무서록(無序錄)』에는 경주와 관련된 글이 수록되어 있다. 바로 <여명(黎明)>이라는 작품이다. 길지 않은 글이지만 군더더기 하나 없이 잘 압축된 문장으로 연결되어있다. 석굴암 일출을 보기 위해 여름날 늦은 밤 토함산에 올라서 해 뜨기를 기다리며 석굴암 대불과 일출 장면을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문장 하나하나가 놓치기 아까운 표현들의 연속이다. 글의 마지막 몇 구절 인용해 본다. ‘이윽고 공단 같은 짙은 어둠 위에 뿌연 환영이 드러나심, 그 부드러운 돌 빛, 그 부드러우면서도 육중하신 어깨와 팔과 손길 놓으심, 쳐다보는 순간마다 분명히 알리시는 미소, 전신이 여명이 쪼여질 때는, 이제 막 하강하신 듯, 자리 잡는 옷자락 소리 아직 풍기시는 듯. 어둠은 둘래 둘래 빠져나간다. 보살들의 드리운 옷주름이 그어지고 도틈도틈 뺨과 손등들이 드러나고 멀리 앞산 기슭에서는 산새들이 둥지를 떠나 날아간다. 산등성이들이 생선가시 같다. 동해는 아직 첩첩한 구름갈피 속이다. 그 속에서 한 송이 연꽃처럼 여명의 영주(領主)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수필 <여명(黎明)>의 일부
경주를 배경으로 하는 문학 작품들은 많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빙허 현진건의 장편소설 ‘무영탑’을 꼽을 수 있다. 그것도 경주를 대표하는 불국사, 불국사를 대표하는 석가탑을 모티브로 하고 있으며 작품의 배경 또한 당연히 경주, 서라벌 땅이다. 소설 ‘무영탑’은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이 극에 달하던 시기에 쓴 소설이다. 1930년대는 내선일치 구호 아래 창씨개명과 각종 징집령이 내려지던 험한 시기였다. 작가는 암울했던 시대적 분위기에 현재와 동떨어진 역사적 시간 속으로 이야기를 설정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고자 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작가로서의 책무였는지도 모른다. 이에 앞서 현진건은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근무 중이던 1936년 8월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일장기 말살 사건에 연루되어 1년간 복역하였고 신문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직장을 잃은 그는 양계업을 호구지책으로 삼으며 소설을 썼다. 1938년 7월부터 1939년 2월까지 총 164회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한 작품이 바로 ‘무영탑’이다. 1939년 박문서관에서 초판이 간행되었다. 우리나라 사실주의 대표적 작가인 현진건은 ‘빈처’,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B사감과 러브레터’ 등 뛰어난 단편들을 많이 발표했다. 다수의 작품이 교과서에 수록되어 친숙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장편소설 ‘무영탑’은 분량이 많다 보니 읽은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간략하게 내용을 살펴본다. 신라 경덕왕 시절,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을 세우기 위하여 서라벌로 뽑혀온 부여의 장인(匠人) 아사달에게 서라벌 귀족 이손 유종(唯宗)의 딸 주만(珠曼, 일명 구슬아기)은 마음을 빼앗긴다. 부여의 아내 아사녀 때문에 괴로워하던 아사달도 마침내 주만의 열정을 받아들이지만, 이들에게는 험난한 장애가 가로막는다. 주만을 짝사랑하던 당학파(唐學派) 금지(金旨)의 아들 금성(金城)의 훼방이 그것이다. 더구나, 주만의 아버지 유종은 금성을 피하기 위해 경신(敬信)과 혼약을 정한다. 한편, 3년이나 아사달을 기다리던 아사녀는 아버지의 죽음과 더불어 달려드는 팽개(彭介) 무리의 겁탈 위기로부터 벗어나고자 무수한 고통을 겪으며 서라벌로 달려온다. 드디어 아사달의 석가탑은 완성되었으나 주만은 경신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게 실행(失行)의 죄가 탄로 나서 화형(火刑)당하게 된다. 또한, 아사녀는 탑이 완성된 것도 모르고, 중과 뚜쟁이의 행패 때문에 남편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그림자못(影池)에 빠져 죽는다. 이에 아사달은 두 여인을 합하여 원불(願佛)의 조각을 새기고는 역시 물에 빠져 죽는다. 현진건은 이 소설을 쓰기 10여 년 전 1929년 동아일보에 고도순례-경주 기행문을 한 달간 연재했다. 고도 경주의 유적지들을 둘러보면서 남긴 글들이다. 이중 무영탑과 영지에 관한 글에서는 소설과는 달리 백제에서 온 여인이 아닌 당나라에서 온 여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관한 기록은 불국사고금역대기(佛國寺古今歷代記)라는 조선후기 승려 동은이 불국사의 역사적 배경과 유물·유적 등을 수록하여 1740년에 간행한 사적기가 존재한다. 원본은 동경대학(東京大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 언급된 이야기에서 ‘석공은 이름 없는 당(唐)나라 사람이고, 그를 찾아온 사람은 누이동생 아사녀(阿斯女)’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현진건은 ‘고금창기’와 오사카 긴타로와 오사카 로쿠손가 영지에 관한 전설을 정리한 ‘무영탑 전설’을 바탕으로 소설 ‘무영탑’을 발표했다. 소설에서 현진건은 석공과 부인을 부여 사람으로 묘사하고, 석공의 이름을 아사달이라 했다. 이 역시 역사의식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아사달은 바로 단군 왕검이 도읍으로 정하고 다스린 지명이기 때문이다. 당나라 사람이 아닌 부여 사람으로 설정된 것 또한 현진건의 민족주의적 성향이 반영된 것이다. 소설 ‘무영탑’은 설화를 바탕으로 했고 일부 각색을 하였다. 예전부터 구전되어 오는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형되기 마련이다. 모든 구비문학은 완벽한 전승은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형, 각색되기 마련이다.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할아버지가 손자에게로 넘어가듯 자연스레 가감되거나 가공되기도 한다. 소설 속의 주인공 홍길동과 심청을 두고 지자체 간 서로 자기 고장 인물이라고 주장하며 대립하는 것도 사실이다. 모두 자기 고장의 이야기로 스토리텔링하고 관광 자원화하기 위한 싸움인 것이다. 석유를 두고 바다 싸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원조 논쟁은 이른바 선점 효과를 통해 문화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한 관광객 유치를 통해 지역 경제 활성화와 연계되기 때문이다. 다른 도시에 비하면 경주에는 문화 콘텐츠가 차고 넘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듯 아무리 좋은 것도 활용하지 않으면 그냥 책 속의 이야기일 뿐이다. 책 속에 갇혀있는 것을 꺼내어 상품화가 필요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번 정도 경주를 찾을 것이지만 두세 번씩은 오지 않을 것이다. 이들이 다시 찾아오기 위해서는 새로운 신상품들을 창출해내어야 한다. 소설 무영탑은 여러 가지 형태로 재탄생되기도 했다.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주연의 ‘무영탑’과 김수용 감독의 신영균, 김지미 주연의 ‘무영탑’은 모두 현진건의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다. 여러 편의 창작 오페라가 만들어졌고 무대에 오른 바 있다. 비록 옛날 노래이기는 하지만 가수 이인권이 부른 ‘무영탑 사랑’이라는 대중가요가 만들어져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슴 저미게 한다. 또 국악계에서도 무영탑이라는 거문고 연주곡 4악장이 널리 연주되고 있다. 경주고에는 무영탑이라는 동아리가 60년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시대를 초월하여 무영탑과 아사달과 아사녀가 등장하는 시들도 여러 편 찾아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초의선사가 불국사에 와서 머물기도 했는데 이때 당시 불국사를 회고하며 노래한 9수의 시들 가운데 무영탑과 아사녀가 등장하는 시가 있다. 승천교 밖의 구연지에는 칠보 누대가 물 밑으로 옮겨졌네 무영탑 바라보니 도리어 그림자 있어 아사녀가 지금 와서 비춰보는 것 같네. 그리고 소설 속 아사달과 아사녀의 고향 부여 출신 시인 신동엽(1930~19690)의 대표작이기도 한 시 ‘껍데기는 가라’ 시 중간에 다음과 같이 아사달과 아사녀를 노래했다. 다행히 영지 주변에 조성한 공원에 이 시를 돌에 새겨 놓고 있다.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 일부 한수산 필화사건에 휘말려 불운한 생을 살다간 박정만 시인 또한 장시 ‘떠오르는 탑’에서 아사달과 아사녀를 테마로 사설 연작시를 월간 문학에 연재하기도 했다. 그의 시 전집 속에서 여러 편의 시를 만나 볼 수 있다. 이외에도 많은 작가들 작품 속에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무영탑은 시대를 떠나 영감을 가져다주는 존재임은 확실하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슬픈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는 영지 주변에는 그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영사(影寺)라는 절을 지었고 석불좌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다른 한편으로는 영지석불좌상은 석공 아사달이 아사녀를 위해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띠고 있는 이 석불은 남아있는 것보다 닳아 없어진 부분이 더 많다. 세월을 건너온 흔적이 역력하지만 슬픈 설화를 곁들여 바라보다 보면 희미한 부분이 뚜렷하게 되살아날 수도 있을 것이다. 작년 겨울 어느 날 영지를 찾았을 때 얼음판 위로 뛰어다니고 있는 수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멸종위기 동물을 아름다운 영지에서 만나는 행운을 가질 수 있었다. 다정스럽게 놀고 있는 그들이 마치 아사달과 아사녀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곳은 설화공원이라는 테마로 공원과 둘레길을 조성하여 놓았다. 뭇사람들에게 그 옛날 비련의 주인공들을 회상하며 걸을 수 있는 즐거움을 제공해주고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의 지고지순한 연인들이 불국사 그림자 없는 탑을 둘러보고 그림자 못에서 사랑을 언약하면 그 사랑 반드시 이루어진다’라는 억지 소문이라도 내었으면 좋을 것 같다. 그러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림자 없는 탑과 그림자 못을 찾아 경주를 찾아올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소나무를 좋아하는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런 생각이 확연해진다. 소나무를 좋아하게 될 나이가 되면 삶도 어느 정도 관조적으로 내다볼 시기가 되었다는 것일까? 가르쳐주기라도 하는 듯 소나무는 늙어갈수록 그 품격이 더 해진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소나무에 인격을 부여하였다. 속리산 ‘정이품송’과 그이 부인이 되는 ‘정경부인송’ 그리고 부동산을 소유하고 세금까지 내는 예천의 ‘석송령’이 그렇듯 소나무는 우리의 생활과 밀접하게 함께해 왔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소나무 산지는 첫째, 울진 소광리나 봉화 춘양목등 금강산에서부터 백두대간에 이르는 아름드리 금강송 나무들은 궁궐을 비롯한 건축용 용도로 사용되어왔다. 둘째, 부안 변산반도와 태안 안면도의 소나무는 해안 방풍림 역할과 배를 만들거나 건축용이었다. 마지막으로 경주 왕릉 주변 소나무를 들 수가 있다. 물질적 유용성 위주의 다른 지역 소나무와는 달리 경주 소나무는 정신적 상징성을 지닌, 형이상학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소나무 가지를 타고 하늘에 닿도록 심어졌고, 왕릉 주위를 지키는 호위무사처럼, 죽어서도 함께하기로 작정한 신하들처럼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로 하여금 경주 왕릉의 소나무는 설화나 전설 속 이야기를 곁들이며 들릴 때마다 이상야릇하고 오묘한 느낌과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소나무를 보기 위한 의도적인 여행은 아니었지만 울진, 봉화, 안면도, 변산 등 소나무로 유명한 지역들을 두루 둘러보았다. 하지만 경주 소나무만큼 서정적이고 정감을 가져다주는 소나무는 없었다. 2005년 5월 22일은 획기적인 사건이 하나가 있었다. 팝가수 엘튼 존이 배병우 작가의 소나무 사진을 2700만원에 구입한 내용을 우리나라 언론들이 일제히 보도하였다. 엘튼 존은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고, 세계에서 5번째로 음반판매량이 많은 가수이기도 하다. 배병우가 세계적 작가로 인정받게 되고, 우리나라 사진이 대외적으로 처음 인정받게 되는, 그리고 사진가격 결정의 기준점이 되는 역사적 일이었다. 소나무 사진은 다름 아닌 경주 남산 삼릉숲 소나무 사진이었다. 배병우 작가는 이곳 삼릉 소나무를 찍기 위해 2년간 10만km를 달려 경주를 수도 없이 오고 갔다. 소나무 사진을 찍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녔지만, 경주의 왕릉 소나무가 최고임을 술회했다. 그의 사진집 ‘청산에 살어리랏다’는 김영삼 대통령이 오바마 미 대통령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책 속에는 분명 삼릉숲 소나무들이 한국미를 뽐내고 있었을 것이다. 오래전 삼릉 근처 박대성 화백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뒤뜰을 통해 삼릉 소나무 여럿을 방안으로 들여다 놓고 있었다. 밤낮으로 수묵화 속으로 소나무들이 걸어 들고 걸어 나오는 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