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두렴
-이육사의 시 ‘청포도’ 전문
7월이면 제일 먼저 이육사(1904~1944)의 시 ‘청포도’가 떠오른다. 조국 광복을 염원하는 마음이 담긴 이 시는 교과서에도 실려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국민 애송시이다.
수인번호 264가 시인의 이름이 된 독립투사 저항시인 이육사의 대표시 ‘청포도’가 태어날 수 있었던 창작의 공간이 경주 남산 탑곡 옥룡암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포항 동해면 삼륜 포도원을 방문하고 시상(詩想)을 얻었지만, 고뇌를 보태어 시를 가다듬어 빛나는 시로 태어나게 만든 곳이 옥룡암이다. 이육사의 유일한 혈육인 딸 이옥비 여사도 부친의 작품 가운데 ‘청포도’를 제일 좋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육사는 1936년(32세)과 1942년(38세) 두 차례에 걸쳐 옥룡암에 내려와 요사체인 삼소헌(三笑軒)에 머물며 요양했다. 당시 이곳에서 교류하던 지역의 인물로 고암 박곤복, 김범부, 최영, 수봉재단 설립자인 이규인 등을 들 수 있는데 특히, 이규인 선생의 심부름갔던 이식우(전 경주고 교장) 선생은 청포도 원고를 앞에 두고 고뇌에 찬 육사의 모습을 목격하였다고 한다. 이후 ‘청포도’는 1939년 8월 <문장>지에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옥룡암은 예전에 신인사지(神印寺址), 불무사(佛無寺)로 불리워 왔던 자리에 다시 세운 작은 절이다. 절 위쪽에는 보물 제201호 탑곡 마애불상군이 있다. 바위에 새겨진 탑은 황룡사 9층 탑의 형태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바위 동서남북에 불상과 비를 피하기 위해 설치한 전각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이육사는 이곳에 머물며 몇 걸음 떨어진 인근의 감실 부처, 보리사, 서출지 등도 산책 삼아 둘러보았을 것이다. 이육사가 옥룡암에 머물며 쓴 작품들은 많지 않다. 정확하지도 않지만 몇몇 작품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신석초에게 보내는 1936년 8월 4일자 엽서 속에는 이육사의 지치고 고단함을 엿볼 수가 시조가 있다. 비록 제목은 없지만 이육사의 유일무이한 시조 작품이다.
비올가 바란마음 그마음 지난 바램
하로가 열흘같이 기약도 아득해라
바라다 지친이넋을 잠재올가하노라
잠조차 업는 밤에 燭태워 안젓으니
리별에 病든몸이 나을길 없오매라
저달 상기보고가오니 때로 볼가 하노라
-1936년 8월 4일자 엽서
이후 이육사는 벗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서 알 수 있듯 1938년 가을 최용, 신석초등과 경주여행을 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신석초와 함께 부여를 여행하기도 했다. 이육사는 경주 옥룡암 머물며 이곳에서의 생활과 심정을 절친 신석초에게 보낸 엽서에서 자세히 엿볼 수 있다.
석초형!‘내가 지금 있는 곳은 경주읍에서 불국사로 가는 도중의 십리허에 있는 엣날 신라가 번성할 때 신인사의 고지에 있는 조그만 암자이다. 마침 접동새가 울고가면 내 생활도 한층 화려해질 수 있다해서 군이 먼저 편지라도 한 장하여 주리라라고 바래기도 하면서 형의 게으름에 가망이 없어 내 먼저 주제넘게 호소하지 않는가
석초형! 혹 여름에 피서라도 가서 복약이라도 하려면 이곳으로 오려므나 생활비가 저렴하고 사람들이 순박한 것이 천년전이나 같은 듯하다 (중략)
-1942년 8월 10일자 엽서
1942년 8월 10일에 보낸 다보탑 사진엽서에는 신석초를 그리워하며 경주로 피서 삼아 놀러 오라 하기도 하고, 써놓은 시편 있으면 보내 달라고 한다. 본인은 마음이 정리되지 않아 시를 쓸 수 없다는 심정을 전하기도 한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