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뚝한 옛 절은 하늘과 닿았어도 舊刹岧嶢接上蒼 천년의 지난 일들 이미 처량해졌네 千年往事已凄涼 퇴락한 돌 감실 오솔길에 묻혀있고 石龕零落埋幽徑 댕그랑 구리 풍경 석양에 울려 퍼지네 銅鐸丁當語夕陽 노인들은 지금까지도 여왕을 말하고 遺老至今談女主 옛 종은 여전히 당 황제를 기억하네 古鍾依舊記唐皇 짧은 비석 매만지며 한참을 서있자니 摩挲短碣移時立 깨어지고 이끼 낀 글자 반은 이지러졌네 剝落莓龍字半荒 조선 전기 학자이자 문신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쓴 ‘靈妙舊刹’(영묘구찰)이란 시로, 제목은 ‘옛 영묘사’란 의미다. 선덕여왕과 밀접했던 사찰 이 시의 내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영묘사는 선덕여왕대에 세워진 사찰이다. 영묘사(靈妙寺) 외에도 영묘사(零妙寺), 영묘사(令妙寺) 등으로도 불렸다. ‘삼국사기’엔 선덕여왕 4년(635년)에 완성된 것으로 기록돼 있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엔 ‘당 정관 6년’(632년, 선덕여왕 6년)에 창건한 것으로 돼 있다. 학계는 이 같은 창건 기록의 차이 때문에 창건 연대를 632년 혹은 635년으로 추정하거나, 혹은 632년에 창건을 시작해 635년에 완성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영묘사는 현재 사라지고 없다. 다만 ‘삼국유사’에 “신덕왕(神德王) 4년(915년) 영묘사 안의 행랑에 까치집이 34개나 되고 까마귀집이 40여개나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뤄 보면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찰을 만들 당시 당대의 유명한 승려이자 예술가였던 양지(良志)가 장육삼존불(丈六三尊佛)과 천왕상(天王像), 불당과 전탑의 기와를 만들고 건물의 현판을 썼다고 하나, 이 또한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800여년이 지난 후대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엔 “불전은 3층으로서 체제가 특이하다. 신라 때의 불전이 한둘이 아니었으나 다른 것은 다 무너지고 헐렸는데 유독 이 불전만은 완연히 어제 지은 것 같은 모습으로 서 있다”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면, 이례적인 3층 높이의 건물이 조선 초기까지 남아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변천 과정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조선 중기 문신인 권벌(權橃)이 쓴 ‘충재집’(冲齋集)에 중종 10년(1515년) 화재로 소실되었다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면 그 무렵 폐사(廢寺)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밖에 영묘사와 관련한 몇몇 신비한 이야기도 남아 전해지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원래 영묘사 터엔 큰 못이 있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두두리(頭頭里. 귀신의 일종) 무리가 그곳을 메우고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또, 선덕여왕을 흠모해 상사병을 앓은 지귀(志鬼)라는 젊은이 이야기도 있다. 여왕을 만나지 못한 지귀의 마음속에서 불이 일어나 절의 일부를 태웠으나 승려 혜공(惠空)의 신통력으로 절의 일부를 구할 수 있었다. 고려시대 박인량이 지은 설화집 ‘수이전’(殊異傳)에 나오는 얘기다. 그밖에도 선덕여왕이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서 개구리가 우는 것을 보고 백제의 군사가 여근곡(女根谷)에 숨은 것을 알았다는 이야기는 선덕여왕의 신통력에 관한 세 가지의 사건인 ‘지기삼사’(知幾三事) 가운데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처럼 영묘사와 관련된 전설에 선덕여왕이 즐겨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 사찰은 선덕여왕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 있던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흥륜사 자리가 영묘사 옛 터 그렇다면 영묘사는 어디에 있었을까. 3층 건물이 남아있던 조선 초기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영묘사는 “부(경주부)의 서쪽 5리에 있다”고 했으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선 논란이 있었다. 1962년 5월 26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같은 해 5월 23일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은 월성에서 서쪽으로 5리쯤 떨어진 경주시 성건리 452번지 일원에서 20여 개의 주춧돌과 중방돌 등을 발견했는데, 이곳을 영묘사 터로 추정했다. 그 근거는 ①이곳 근처에 약 40년 전까지도 느티나무 숲이 남아 있었고 ②지금까지도 이 근처에 ‘연꽃둠벙’이라고 불리는 연못이 있으며 ③‘삼국사기’에 따르면 매월당 김시습이 영묘사의 목탑 위에서 시를 읊었다고 하는데, 발견된 절터에 지금까지도 목탑이 남아 있고 ④주춧돌과 대웅전 중방돌의 수법이 삼국시대의 것이라는 판단을 종합했다고 한다. 이후 10여년이 지난 1976년, 경주시 사정동에 있는 흥륜사(興輪寺) 터에서 ‘영묘지사’(靈廟之斜), ‘대영묘사조와’(大令妙寺造瓦)란 글씨가 새겨진 명문기와가 발견되면서 지금은 이곳을 영묘사 터로 추정하고 있다.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실시되지 않아 전체적인 규모는 알 수 없는 상태다. 다만 흥륜사에 대한 몇 차례의 시굴조사와 수습발굴을 통해 금당 터와 동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목탑 터로 추정되는 기단, 동·서 회랑 터가 확인됐다. 이후 해당 조사를 통해 파악한 출토 양상을 검토한 결과 영묘사가 삼국시대에 창건돼 유지되다 통일신라 후기에 대대적으로 재건되었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이곳에선 얼굴무늬 수막새와 수렵무늬 벽돌(狩獵文塼, 수렵문전), 귀신얼굴무늬 벽돌(鬼面塼, 귀면전) 등 많은 기와와 벽돌이 출토됐다. 특히 ‘신라인의 미소’로 불리며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얼굴무늬 수막새도 이곳 절터에서 나온 대표적 유물이다. 그밖에도 이곳에선 각종 토기류와 자기류도 여럿 출토됐고, 당시 인근 민가엔 이 절터에서 옮겨갔을 주춧돌도 많았다고 한다. 이곳 절터에서 영묘사터로 추정되는 여러 유물이 나왔지만, 이보다 앞서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될 때의 이름인 ‘경주 흥륜사지’란 명칭은 바뀌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곳엔 1980년대에 흥륜사라는 새 절이 들어섰다. 옛 흥륜사는 이곳에서 700m 정도 떨어진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에 있었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경주공고 마당에서 나온 기와 조각이 그 근거다. 국립경주박물관은 2009년 경주공고가 배수로 공사를 위해 파헤친 400상자 분량의 흙더미에서 ‘흥’(興) 자가 새겨진 신라시대 수키와 조각을 확인했다. ‘사’(寺) 자만 남은 기와 조각도 이곳에서 출토됐다. 한때 찬란했을 영묘사 터엔 흥륜사란 절이 들어섰고, 흥륜사 터엔 경주공고가 자리 잡았다. 세월의 무상함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다. 김운 역사여행가
층층이 사다리 휘감아 하늘로 오르려하여 層梯繚繞欲飛空 주변의 온갖 산수들 한눈에 들어오네 萬水千山一望通 몸은 노오(옛 신화 속 도인)가 오르내리던 너머로 벗어나 身出盧敖登降外 눈길은 수해(신화 속 잘 달리는 사람)가 오가던 속을 압도하네 眼呑竪亥去來中 은하수 뗏목 그림자 떨어져 처마 앞 비이고 星槎影落簷前雨 달의 월계수 향기 날려 헌함 아래 바람이네 月桂香飄檻下風 동도를 굽어보니 수많은 집들 俯視東都何限戶 벌집이나 개미구멍인양 더욱 아득하네 蜂窠蟻穴轉溟濛 조선 초 학자이자 문신인 김극기(1379~1463)가 쓴 ‘황룡사黃龍寺’란 시다. 황룡사는 신라 궁성인 월성 동북쪽에 있었던 절로, 신라 최대의 호국(護國) 사찰이었다. ◆불국사 8배의 거대 사찰 ‘삼국사기’는 황룡사 창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14년(553) 봄 2월에 왕이 담당 관청에 명하여 월성(月城)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황룡(黃龍)이 그곳에서 나타났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서, 바꾸어 절로 만들고 이름을 ‘황룡’이라고 하였다” 진흥왕 14년 새로운 궁궐을 지을 때 용이 한 마리 나타나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왕이 사찰로 고쳐 짓고 이름을 황룡사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황룡사는 신라의 대표적 사찰이었던 만큼 그 면적이 불국사의 8배에 달할 정도로 거대했다고 한다. 같은 왕 30년(569)에 담장을 쌓아 17년 만에 완성하였으며, 35년(574)에는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조성했다. 진평왕 6년(584)에는 금당(金堂)을 조성했고, 선덕여왕 14년(645)엔 대국통(大國統) 자장(慈藏)의 건의로 9층탑을 건립했다. 553년부터 645년까지 거의 100년에 걸친 대역사(大役事)였다. 이를 통해 국찰(國刹)의 면모를 갖췄다. 그런 만큼 이곳엔 엄청난 물건으로 가득했다. 장육존상과 9층탑은 진평왕 때 천사가 궁중에 내려와 왕에게 줬다는 ‘천사옥대’와 함께 신라를 대표하는 세 가지 보물을 의미하는 ‘신라삼보’(新羅三寶)로 불렸다. 장육존상은 5m 크기의 금동불상으로 추정되며 9층탑은 높이가 80m에 달하는 거대한 탑이었다. 게다가 이곳에 있었던 대종은 성덕대왕신종의 4배에 달하는 구리가 사용된 거대한 종이었다고 한다. 모든 면에서 신라를 대표하는 최고 보물이 존재한 장소였던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신라의 미(美)’를 대표하는 유적인 석굴암이나 석가탑, 다보탑 등은 보물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들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가인 솔거의 금당벽화도 이곳에 있었다. 새들이 진짜 나무인 줄 알고 벽에 부딪혔다는 일화가 이곳의 이야기이다. 황룡사 강당에선 당대 최고 승려였던 원효가 설법을 했다. 그밖에도 원광, 안함, 자장 같은 고승들이 머물며 주요 경전을 강의했고, 역대 왕들은 백좌강회(百高座會), 팔관회(八關會), 연등회(燃燈會) 등에 참석하는 등 나라에 큰 일이 있거나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이곳을 방문했다고 한다. ◆왕권에 신성함 더한 강력한 상징 이 절을 처음 짓도록 명한 진흥왕은 신라 왕실을 석가모니 일족의 재림이라 생각했던 인물이었다. 물론 국왕 자신을 불교 속 전륜성왕과 동일시하여 불법을 지키는 수호자이자 정복자로서 알리는 것은 당대 중국에서도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진흥왕은 여기서 더 나아가 금륜, 은륜, 동륜, 철륜으로 나뉜다는 전륜성왕 등급에 맞춰 자식의 이름을 동륜과 사륜으로 지었다. 심지어 태자 동륜의 아들 이름은 백정(白淨), 며느리는 마야(摩耶)라고 하여 실제 석가모니의 부모 이름과 동일하게 지을 정도였다. 손자가 부처의 부모이니 그 뒤에는 부처가 태어날 차례라는 의미였다. 뜻한 대로 손자 백정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진평왕이다. 하지만 진평왕에겐 아들이 없었다. 결국 그의 딸인 선덕여왕이 여자의 몸으로는 처음으로 신라의 왕이 된다. 이로써 진흥왕 때부터 4대에 걸친 왕실의 쇼는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한 실패로 마무리된 것이다. 그럼에도 선덕여왕은 부처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에겐 여성이 불법을 열심히 지키면 도리천의 왕인 제석천의 아들로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결국 여성 몸을 지닌 당시 생애를, 미래의 부처가 되기 위한 준비 단계로서 인식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거대했던 황룡사는 그 거대함만큼이나 남달랐던 정신세계가 몇 대에 걸쳐 투입돼 만들어진 사찰이었다. 다시 말해 이전의 5~6세기 초반 마립간시대 왕들이 경주 중앙에 거대한 고분을 만들어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면, 6~7세기 신라왕들은 평지에 거대 사찰을 만들어서 왕가의 힘을 과시했다. 결국 진흥왕부터 선덕여왕까지 신라를 대표하는 성골 집안의 불교 수호를 위한 자부심이 만들어낸 사찰이었으니 모든 면에서 크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골 왕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황룡사가 자신들의 불법 수호 의식을 영원히 알리며 지켜지길 바랐다. 경덕왕 13년(754)에 대종(大鐘)이 주조되고, 종루(鍾樓)와 경루(經樓, 불경을 보관하던 누각)가 목탑 좌우에 배치되면서 가람의 일부가 바뀌었지만,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시대까지도 중요한 사찰로 인식되어 국가 주도의 대대적인 수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고려 고종 25년(1238)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린 뒤 수리되지 못하고 오랫동안 방치됐다. 해방 후에는 절터 내에 민가와 논밭 등이 들어서서 상당 부분이 파괴된 상태였다고 한다. 지금은 건물과 탑, 불상이 있었던 자리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주춧돌만 남아 있다. 황룡사 터에 대한 발굴은 1976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8년간 8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회랑(回廊, 건물 주위를 둘러싼 지붕)이 있는 긴 복도 안쪽 편에서 금당(金堂, 부처님을 모신 건물 터), 목탑 터, 강당 터 등 14곳 이상의 건물 터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회랑 외곽과 담장 사이에서는 강당 북서편 부속건물 터 16곳, 강당 북편 부속건물 터 10곳, 강당 북동편 부속건물 터 5곳, 중문과 남문 사이 건물 터 4곳, 남문 터 1곳 동회랑 동편 건물 터 5곳, 절 편 건물 터 2곳 등 43곳 이상의 크고 작은 건물 터가 나왔다. 조사를 통해 절의 영역은 약 8만928㎡에 달하며, 4만여점의 유물을 수습했다. 이를 통해 황룡사는 불타 없어질 때까지 그 구조가 세 번 바뀌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기간에 걸친 황룡사 발굴조사는 고대 사찰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용궁龍宮에 사찰 부지를 마련했다는 기록이 황룡사 터 일대가 저습지였다는 고고학 조사 결과와 일치한다는 점을 밝힌 것은 중요한 성과였다. 이러한 점에서 황룡사 터는 신라사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김운 역사여행가
통일신라 신문왕이 죽자 그의 아들인 효소왕은 아버지의 명복을 빌며 탑을 세웠다. 692년에 조성한 것으로 전하는 황복사지 삼층석탑이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7호로 지정된, 낭산(狼山)의 대표적인 유적 중 하나다. 1942년 탑 해체수리 과정에서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 사리함과 함께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국보 제79호), 경주 구황동 금동여래입상(국보 제80호)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 발굴 유물 중 하나인 금동 사리함 뚜껑 안쪽에 탑을 건립하게 된 경위와 발견된 유물의 성격이 기록돼있었는데,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이 즉위한 지 5년만인 706년에 사리와 불상 등을 다시 탑 안에 넣어 앞선 두 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했다는 내용이 확인됐다. ◆베일 벗는 황복사 황복사(皇福寺)는 ‘삼국유사’에 654년 의상대사(625~702)가 출가했다고 기록된 절로, 건립 연도와 창건자 등 자세한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황복사 탑으로 전해지는 삼층석탑이 있다는 이유로 황복사지 삼층석탑 앞 건물 터는 오래 전부터 황복사지로 불렸다. 엄밀히 따지자면 ‘전(傳) 황복사지’인 셈이다. 그리고 황복사는 삼층석탑 해체 때 나온 금동 사리함 뚜껑에서 ‘죽은 왕의 신위를 모신 종묘의 신성한 영령을 위해 세운 선원가람’을 뜻하는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이란 명문이 드러나 신라왕실의 종묘 구실을 한 왕실사원으로 추정돼 왔다. 사실 이 사찰 터는 일찍이 일제강점기였던 1928년 일본 학자 노세 우시조(1889~1954)가 신라의 왕릉급 무덤에서만 주로 발견되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호석을 발굴해 많은 관심을 받아온 지역이었다. 하지만 경력이 일천한 젊은 학자 노세의 조사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조선총독부는 출토유물의 노출공개를 허락하지 않았고, 이 부조상은 발굴 이후 다시 묻히게 된다. 노세의 첫 발굴 이후 국내 학계에서는 여러 연구 결과 등을 토대로 이 십이지신상이 원래는 왕릉에 썼던 부재였으나, 어떤 이유로 왕릉이 폐기된 이후 황복사 건물의 기단터를 장식했던 것으로 추정해왔다. 십이지신상 면이 완만하게 휘어져 있고 더구나 다른 곳에서는 건물 기단에 십이지신상을 설치한 예가 없다는 점이 그 근거였다. 게다가 절터 인근 들판은 폐왕릉지로 추정돼 왔다. 무덤 조성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석재가 여럿 방치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덤의 주인은 신문왕으로 봤다. 인근에 신문왕을 위한 석탑(황복사지 삼층석탑)이 있다는 게 이유였다. 정리하자면, 이 지역이 홍수 등의 이유로 어느 시점에서 더 이상 무덤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지자 왕릉을 폐기한 뒤 석재를 가져와 건물에 사용했다는 게 학계의 추정이었다. 그러던 중 폐기된 왕릉지에 대한 발굴이 이뤄졌다. 성림문화재연구원은 2016년부터 황복사지와 그 주변에 대한 발굴 조사를 벌였고, 2017년 2월 첫 결과를 내놨다. 결과는 다소 의외였다. 이 왕릉이 실은 어느 누구의 무덤으로도 사용된 적이 없는 가릉(假陵)이란 것이었다. 무덤의 주인은 효성왕(재위 737~742)으로 추정됐다. ‘효성왕이 죽은 뒤 매장을 하지 않고 법류사 남쪽에서 화장하여 동해에 뿌렸다’는 기록을 근거로, 효성왕의 무덤으로 사용하려다가 화장과 산골이 결정되면서 왕릉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폐기된 것으로 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삼층석탑 앞 건물지에 묻혔던 십이지신상도 이 미완성 왕릉에 쓰였던 십이지신상을 재활용했을 것이란 견해가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 그러나 이 또한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성림문화재연구원은 2017년 2차 조사에서, 땅에 뭍혀 있던 십이지신상 면석의 크기를 실측한 결과, 이들은 절터 앞 왕릉에 쓰인 석물보다 크기가 훨씬 작고 뒷부분 탱석 얼개도 달랐다. 미지의 다른 왕릉 석물에 새겨진 십이지신상을 재활용한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신라 왕실사찰의 웅장하고 화려했던 면모도 드러났다. 국내 발굴 사상 최대 규모의 대석단 기단 건물터와 대형 회랑, 연못 등 크고 작은 유적이 무더기로 드러난 것이다. 유적 안에선 금동입불상 등 불상 7점을 비롯해 1000점 이상의 유물도 쏟아졌다. 왕실사원 성격과 관련해 주목한 곳은 탑 아래의 대석단 기단 건물터였다.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터에 덧붙여 동-서 축선을 중심으로 조성됐다. 내부에 대형 회랑을 돌린 독특한 얼개는 경주의 기존 신라 유적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가람 배치 방식이었다. 게다가 건물터 뒤에 삼층석탑이 놓여 있다는 점에서 문-탑-금당의 일반적인 고대 가람 배치와 다른 문-금당-탑의 배치구도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해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쌍탑 가람? 경주 불국사에 가면 대웅전 앞마당에 두 개의 석탑이 나란히 서 있다. 다보탑(국보 20호)과 석가탑(국보 21호)이다. 지금은 터만 남은 감은사지에도 동·서 삼층석탑이 마주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 쌍탑의 시원은 679년 낭산 남쪽에 들어선 사천왕사로 알려져 왔다. 옛 신라에선 1탑이었다가 삼국통일 직후 사천왕사에서 최초로 쌍탑 가람 배치가 나타났고 이후 감은사·불국사를 비롯해 통일신라 사찰의 기본 틀이 됐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다. 그런데 2019년 이곳에서 쌍탑의 기원이 삼국 통일 이전인 옛 신라 때였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쌍탑 목탑터가 발견돼 화제가 됐다. 앞서 언급했듯 황복사는 ‘삼국유사’에 654년 의상대사가 출가했다고 기록된 절이다. 그런데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때 신문왕이 죽자 아들인 효소왕이 692년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탑이다. 의상이 출가할 때와 석탑을 조성한 때가 30년 이상 차이가 난다. 게다가 황복사에서 탑돌이 의식을 주관했던 스님이 공중에 떠서 탑을 돌았고, 그 위신력으로 함께 따르던 무리들도 공중에 떠서 탑돌이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일부 학자들은 ‘공중에 떠서 탑을 돌았다’는 데 주목했다. 석탑에는 기본적으로 계단이 없다. 황복사지 삼층석탑도 마찬가지다. 반면 계단이 놓이는 목탑이었다면 이 같이 묘사했을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이 절터가 황복사가 있었던 자리가 맞다면, 현재 남아있는 삼층석탑을 세우기 전 목탑이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최근 두 개의 목탑지로 추정되는 유구(遺構)가 발견된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이던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목탑 터가 맞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쌍탑 가람이고, 쌍탑의 시작이 늦어도 7세기 중반 옛 신라에서 시작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대다수 학자들은 황복사가 ‘신라 최초의 쌍탑 가람’이라는 의견에 대해 판단을 유보하는 분위기다. 목탑 터로 보기엔 규모가 작고, 중문 터와 탑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게 주요 이유다. 발굴조사를 주도한 성림문화재연구원 박광열 원장도 “목탑 터 바로 옆에 귀부 자리가 있는 것으로 볼 때 종묘와 관련된 곳일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고 했다. 어찌됐건 황복사지 일원에 대한 3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통일신라 이전엔 남북 선상으로 금당지로 추정되는 건물지와 동·서 목탑지, 중문지 등의 유구가, 통일신라 때는 동서 선상으로 십이지신상 기단의 건물지와 황복사지 삼층석탑, 동·서 귀부 등이, 고려시대엔 초석건물지와 관련시설 등이 각각 확인됐다. 결국 삼국유사 기록처럼 통일신라 이전 옛 신라 때도 사찰이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김운 역사여행가
사천왕사의 정확한 폐사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실록, 매월당 김시습의 시집 등을 근거로 조선 건국 직후인 1400년대 초반까지는 절이 있었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경역 안쪽까지 민가가 들어서고 곳곳에 잡풀이 무성했던 사천왕사 터가 다시금 주목받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의 일이다. 1910년대 경주-울산 간 철도 개설에 따른 부분적인 발굴조사가 시작이었다. 이 조사를 통해 신라 불교조각의 걸작으로 꼽히는 녹유신장상(綠釉神將像) 조각과 다량의 기와 조각이 발견되며 사천왕사 터가 확인됐으나, 동해남부선 철도가 절터를 가로질러 놓이면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말았다. 1922년엔 조선총독부가 ‘고적발굴조사사업’의 일환으로 경주의 여러 사찰과 함께 다시 조사를 벌였고, 1928년과 1929년엔 동경제국대 교수였던 후지시마 가이지로에 의해 절터 규모와 범위, 가람의 배치, 주요 유물의 정밀 실측 및 측량 조사가 이뤄졌다. 반면, 광복 이후 60여년 동안은 사지 주변에 대한 간단한 조사 외에 제대로 된 발굴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사천왕사가 전모를 드러낸 것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6년부터 진행한 정밀발굴을 통해서다. 모두 7차례에 걸친 조사를 통해 금당지와 목탑지, 강당지, 부속건물지, 단랑의 회랑지와 익랑지, 중문지 등의 유구가 확인됐다. 출토 유물로는 각종 기와 조각과 금동불상, 비편, 이수편 등이 있다. 특히, 발굴조사 과정에서 금당의 위치 및 크기의 변천, 익랑의 존재, 목탑 기단부 면석에 배치된 녹유신장상의 위치를 확인한 것은 주요 성과였다. 또, 중문 남쪽 귀부 중앙으로 석교가 발견돼 고대건축연구자들에게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신라 대표예술가 양지와 녹유신장상 녹유신장상은 국내 고대 조각품 가운데 첫손에 꼽는 걸작 중 하나다. 녹색 유약을 입힌 벽돌판(녹유전) 위에 만든 이 조각상은 꿈틀거리듯 생생한 조형감이 일품이다. 갑옷 차림에 화살, 칼 등을 든 수호신들이 악귀를 짓밟고 불국토를 지키는 자태가 생동감 넘치게 다가온다. 신라 지배층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불안해하는 민심을 하나로 모아 외적을 누르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지는 듯도 하다. 사천왕사 터에서 녹유신장상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15년이었다. 1915년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이 서탑터에서 녹유전 조각을 발견했으나, 당시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부서져 있어 다시 땅에 묻었다. 이후 1918년과 1922년 발굴조사가 진행됐고 발견된 유물조각으로 연구가 이어졌다. 부서진 파편에 불과했지만 섬세하고 사실적인 표현, 뛰어난 조형성,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며 당시부터 신라 불교조각의 걸작으로 주목을 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이 뛰어난 조각품은 ‘양지’(良志)라는 이름의 스님이 만들었다. 그는 서예가 김생, 화가 솔거, 음악가 백결과 함께 신라를 대표할 예술가로 꼽힐 만한 뛰어난 조각가였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 때 활동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으나 녹유신장상의 제작자라는 점에서 사천왕사가 창건된 문무왕 때까지 활동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양지 스님은 여러 가지 기예에 통달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사천왕사의 녹유신장상뿐만 아니라 영묘사 장육존상과 천왕상, 법림사 주불과 좌우금강신, 석장사 탑삼천불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글씨도 잘 써 영묘사와 법림사 등 큰 절의 현판을 직접 썼다고 전한다. 그러나 작품 활동 외에 전하는 바가 적어 양지 스님의 출신과 이력 등을 두고 각종 설이 분분하다. ‘삼국유사’에 그의 전기가 전한다는 점에서 신라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조각상 형식, 제작 방식 등이 고대 인도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점에 근거해 서역에서 온 외국인일 것이란 추정도 제기된다. 또 신라에 와당 제작술 등을 전한 백제 승려일 것이란 견해도 있다. 녹유신장상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와 복원작업은 첫 발견 이후 90년이 지난 2006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를 하면서 시작됐다. 연구소는 2006년부터 2012년까지 200여점의 파편을 수습했다. 그 결과 수십 년 풀리지 않았던 이 조각상의 실체가 드러났다. 국내 미술사학계에선 사천왕사지에서 나온 녹유신장상이 절 들머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천왕(四天王, 수미산 중턱 사왕천에서 불법을 지키는 네 명의 수호신)의 일종이란 설과, 사천왕의 부하신 팔부중(八部衆,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신) 상이라는 설이 팽팽히 맞서왔다. 그런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를 통해 동·서 목탑의 기단구조와 녹유신장상의 봉안모습이 확인되며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이 드러나게 됐고, 지금껏 녹유신장상에 대한 이해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녹유신장상은 사천왕상 같은 네 가지 상도, 팔부중의 여덟 신상도 아니었던 것이다. 단지 사천왕과 비슷한 옷차림을 한 세 가지 상으로만 복원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머리에 우아한 보관을 쓴 A상, 화려한 투구를 쓴 채 화살을 든 정면의 B상, 옆이 말린 투구를 쓴 채 칼 들고 반가부좌 자세로 앉은 C상 등 세 종류가 전부였다. 녹유신장상으로 사천왕사지 금당 앞 왼쪽과 오른쪽에 세워진 목탑 2기의 기단 벽면을 장식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동탑 발굴에서는 이들 녹유신장상 4기가 탑 기단부에 온전히 박힌 모습으로 출토됐고, 상세히 몰랐던 C상의 전모도 알 수 있게 됐다. 발굴 조각들을 모아보니 A상과 B상은 각 6구씩, C상은 9구나 복원이 가능했다. 기단 벽면 장식 방식은 녹유신장상 세 종류를 한 묶음으로 한 면마다 2번씩 되풀이해 붙인 형태였다. 다시 말해 탑 기단부 한 면에 6개의 녹유신장상이 A-B-C, A-B-C 식으로 배치된 모양이었던 것이다. 추론해보면, 탑 기단부 4면에 붙은 신장상은 24개로, 동탑과 서탑 2기를 장식하기 위해 모두 48점이 제작됐다는 결론이다. 녹유신장상은 각각을 따로 만든 것이 아니라 세 종류의 틀을 만들어 찍어내 배치했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B형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A형은 오른쪽에,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C형은 왼쪽에 두어 신장들이 목탑 주변 사주를 경계하는 듯한 형태를 취했다. 이런 이유로 녹유신장상은 ‘녹유신장벽전’(綠釉神將壁塼)으로 불리기도 한다. 녹유신장상은 ‘녹색 유약을 입힌 장군신상’이라는 뜻이고, 녹유신장벽전은 ‘녹색 유약을 입힌 장군신이 새겨진 벽면 장식용 흙벽돌’이란 의미다. 전자는 예술작품이란 점에, 후자는 기능에 초점을 맞춘 이름이다. -외교적 술수가 낳은 망덕사 사천왕사지에서 7번 국도 건너 남산 쪽으로 눈을 돌리면 절터 하나가 보인다. 사천왕사지와 함께 신라 호국불교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망덕사 터다. 논으로 둘러싸인 절터엔 보물 제69호인 망덕사지 당간지주와 몇몇 건물지와 초석이 남아 있다. 망덕사(望德寺)란 이름을 풀어보면 ‘(당 황제의) 덕을 우러러보는 절’이라는 의미다. 자칫 대국에 굽실거리는 힘없는 나라 백성을 연상할 수도 있겠으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망덕사 창건 경위다. 문무왕이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낭산 자락에 사천왕사를 건립하고 명랑법사를 시켜 문두루비법을 시행하게 하자 신라로 쳐들어오던 당나라 군사들은 두 차례나 바다를 건너다 몰살한다. 그러자 당나라 고종은 옥에 갇혀있던 신라 한림랑 박문준을 불러 물었다. “너희 나라에서는 대체 무슨 비법을 쓰기에, 당에서 두 번이나 대군을 보냈는데도 살아 돌아오는 자가 없는가?” 박문준이 답했다. “저희는 당나라에 온 지 10여 년이 지나 본국의 사정은 잘 모르나, 다만 멀리서 한 가지 일을 전해 들었습니다. 신라가 당나라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했기 에, 그 은덕을 갚기 위해 낭산 남쪽에 천왕사라는 절을 지어 황제의 장수를 비는 법석(法席)을 오래 열고 있다고 합니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즉시 예부시랑 악붕귀를 사신으로 보내 그 절을 살펴보게 했다. 왕은 사천왕사를 보여줘서는 안 된다고 여겨 새로 절을 지었다. 그 절이 바로 망덕사다. 그러나 당의 사신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사천왕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 사신은 “이것은 사천왕사가 아니라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라며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자 신라 사람들은 뇌물로 금 1천 냥을 주며 그를 달랬고, 그 사신은 본국으로 돌아가 박문준이 말한 대로라고 전했다. 그 뒤 당나라 사신의 말에 따라 절의 이름을 망덕사로 불렀다. 망덕사는 이처럼 나당전쟁 당시 당의 사찰단을 속이기 위해 세운 절이다. ‘당나라에 대한 보여주기식 충성’을 통한 신라의 ‘실리외교’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사천왕사와 망덕사에서 주목할 점은, 부처의 힘으로 당의 군사를 물리치고 외세의 침략을 막아냈다는 것이다. 신라인들은 본래 지은 사천왕사를 당나라 사신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황제의 안녕과 수복을 빈다는 거짓 명목을 만들어 그 옆에 새 절을 지었다. 또 사신에게 뇌물을 주면서까지 사천왕사의 존재를 비밀에 부쳤는데, 이처럼 호국불교의 상징물을 지키려 한 신라인들의 노력과 의지가 사천왕사 터와 망덕사 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런 의지의 중심엔 문무왕이 있었다. 김운 역사여행가
경주의 동쪽 지역인 보문동과 구황동, 배반동 일대에는 해발 115m의 야트막한 산이 있다. 낭산(狼山)이다. 동네 뒷산 같지만 옛 신라인에게는 신령스러운 산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실성왕은 이곳에 하늘의 신령들이 내려와 노닌다고 해서 나무 한 그루 베지 못하게 했다. 413년의 일이었다. 낭산 일대에 선덕왕릉, 사천왕사지, 망덕사지,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보물 제665호), 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 최치원의 고택이 있던 독서당 등이 몰려 있는 이유다. ‘삼국유사’에는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출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낭산 일대가 사적 제163호로 지정된 이유다. -명랑법사와 문두루비법 신라는 삼국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작은 나라였다. 그러나 결국에는 고구려와 백제를 물리치고 당의 세력을 막아내며 한반도 통일의 대업을 이뤘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힘은 국민의 단결과 협력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라를 지켜내려는 ‘호국 의지’에서 시작됐다는 게 학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신라인이 강력한 호국 의지를 가질 수 있었던 계기는 ‘불교’였다. 신라인에게 불교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사상이었다. 오늘날 많은 불교 연구자들이 신라 불교의 핵심 중 하나로 꼽는 것도 ‘호국불교’다. 경주 낭산(狼山) 자락, 터만 남은 사천왕사는 불력을 통해 당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겠다는 염원을 가지고 세워졌다. 사천왕사가 신라 호국불교의 대표적 사찰이자 삼국통일의 상징적 사찰로 불리는 이유다. 사천왕사는 문무왕(재위기간 661~681)의 뜻에 따라 지어진 대표적 사찰이다. 삼국통일의 대업은 이뤘지만, 문무왕에게 한반도 지배를 노리던 당나라는 큰 골칫거리였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당나라 연합군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두고 일으킨 나·당전쟁은 문무왕 통치기인 670년 신라가 지원하는 고구려 부흥군이 합세한 연합군이 압록강 너머 당군을 공격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당시 당나라엔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이 외교사절로 가있었고, 당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볼모로 억류된 상태가 됐다. 마침 당나라에 유학 중이던 의상대사는 김인문을 만나 당나라의 대규모 신라 침공 계획을 전해 듣고 서둘러 귀국길에 오른다. 의상대사로부터 이 같은 사실을 보고받은 문무왕은 당나라 대군을 어떻게 막아낼지에 대해 대신들과 논의했고, 각간 김천존은 “근래 명랑법사가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수해왔다고 하니 그를 불러 물어 보라”며 다소 황당한 책략을 제안했다. 명랑법사가 용궁에서 배워왔다는 비법은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이라는 주술적인 밀교(密敎) 의식이었다. 문무왕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명랑법사를 부르게 되는데, 그는 “낭산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 있으니 거기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열면 좋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상황은 더욱 긴박해져만 갔다. 당나라 군대가 서해로 쳐들어온다는 전갈이 막 도착했기 때문이다. 왕은 명랑을 불러 일이 급하게 됐으니 어찌 하면 좋겠냐고 물었고, 명랑은 여러 가지 색 비단으로 절을 세울 것을 제안했다. 문무왕은 명랑의 말대로 낭산 자락에 비단으로 절을 짓고 오방신상을 만들어 세웠다. 드디어 당나라 장수 설방은 군사 50만을 이끌고 서해를 건너고 있었다. 명랑은 계획대로 문두루비법을 활용해 큰 바람과 거센 물결을 일으켜 적의 배를 모두 침몰시켰다. 이듬해인 671년에도 명랑의 문두루비법은 신라로 쳐들어오던 당나라 군사들을 서해에 수장시켰고, 신라는 전란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 후 문무왕 19년(679)에 이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라고 했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사천왕사 건립 배경이다. -왕경 핵심부를 지키려는 문무왕의 뜻 ‘문두루비법을 쓰니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다소 과장이 있었겠지만 “사천왕사의 창건이 통일전쟁 직후, 당의 공격시점에 이뤄졌다는 것은 사천왕 신앙의 호국적 성격을 대변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게 2006년부터 만 7년 동안 사천왕사지에 대한 정밀학술발굴조사를 벌였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측의 설명이다. 불교에 따르면 사천왕이란 수미산 중턱 사방에 머물며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데, 신라에선 호국의 신으로 각광받았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사천왕사 창건의 의미에 대해 “불력을 이용해 민심을 안정시키고 나라를 지키려 한 문무왕의 승부수”라고 요약했다. 사천왕사가 세워진 자리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사천왕사는 경주의 동쪽 지역인 보문동과 구황동, 배반동 일대에 야트막하게 솟은 낭산 남쪽 자락에 있다. 낭산은 동네 뒷산 같지만 옛 신라인에게는 신령스러운 산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413년 실성왕은 이곳에 하늘의 신령들이 내려와 노닌다고 해서 나무 한 그루 베지 못하게 했다. 게다가 사천왕사지가 세워진 곳은 7번 국도변으로 울산 방면에서 경주로 들어서는 입구에 해당한다. 결국 사찰의 사천왕문이 승속의 경계를 지키듯, 왕경을 지킨다는 의미로 이곳에 사천왕사를 세웠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당시 신라인들은 낭산을 수미산이라 여겼고, 사천왕사 자리는 수미산으로 올라가는 승계의 입구에 해당한다”며 “왕경의 중심부가 불국토라는 관념 속에, 사천왕사를 세워 왕경의 핵심부를 지키려는 문무왕의 뜻도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문무왕을 추념하는 비석도 사천왕사에 세워졌다. 현재 사천왕사지 입구 풀숲엔 머리가 잘려나간 귀부 2개가 남아 있다. 최근까지 사천왕사지 인근에서 출토된 비편은 2종류로, 문무왕릉비와 사천왕사사적비로 밝혀졌다. 머리가 잘린 2개의 귀부는 이들 비석을 받쳤던 것들이다. 출토된 비편은 국립경주박물관과 동국대학교 박물관이 각각 소장하고 있다. 금당 앞에 목탑이 동서로 배치된 ‘쌍탑식 가람배치’가 나타나는 최초의 사찰이란 점도 사천왕사의 특징이다. 한편, 불교사학계는 명랑이 행했던 문두루비법의 실체 규명을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아왔다. 학계에 따르면 문두루란 불교의 밀교(密敎)에 속하는 종교의식으로, 산스크리트 ‘무드라’(Mudra)를 음역(音譯, 소리 그대로 옮김)한 말이다. ‘신(神)의 약속’이란 의미다. 문두루법의 구체적 실체는 중국 동진시대 천축(天竺)에서 건너온 승려 삼장 금시리밀다라가 번역한 불경 ‘불설관정경’(관정경)에 담겨 있다. 요약하자면 재앙이 닥칠 때 오방대신의 이름을 둥근 나무에 적어 놓고 그것들로 문두루를 삼으면 모든 재앙과 악귀를 없앨 수 있다는 내용이다. 명랑법사는 사천왕사에서 문두루비법을 행할 때 유가종의 승려 12명을 불러 함께 했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사천왕사 터엔 둥근 구멍이 뚫린 12개의 초석으로 이루어진 방형 건물지가 금당이 있던 자리 옆에 남아 있다. 마침 그 뚫린 구멍의 지름이 20㎝를 웃도는 크기들이라 만약 문두루법에 필요한 원형 기둥을 여기에 꽂는다면 적당하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곳을 명랑이 주문을 외울 때 사용한 단석(壇席) 터로 추정하기도 한다. 김운 역사여행가
경주 남산(南山)은 옛 월성 왕궁의 남쪽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산의 이름도 이 같은 지리적 특성에서 비롯됐다. 남산 서편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를 품은 우물 나정과 신라 첫 궁궐터인 창림사지, 후백제 견훤의 공격을 받은 신라가 종말을 고한 포석정이 있다. ‘신라의 역사가 시작되고 끝난 곳’이 이곳 서남산 자락이다. 서남산 쪽 둘레길인 ‘삼릉 가는 길’은 신라의 왕궁이 있던 월성에서 시작한다. 월성 서쪽 끄트머리 서문 터를 빠져나와 월정교를 건너면 도당산을 마주하게 된다. 도당산은 남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의 끄트머리에 나지막히 솟은 산이다. 1976년 경주 IC와 도심을 잇는 서라벌대로가 개설되면서 한때 남산과 단절되기도 했으나, 2016년 경주시가 끊어진 구간에 길이 80m, 폭 30m 규모의 생태터널(도당산터널)을 만들면서 옛 모습을 되찾았다. 계단 길을 따라 도당산 전망대에 이르면 화백정이란 이름의 정자를 만난다. 경주시가 도당산터널을 만들면서 옛 신라 왕과 왕비가 남산으로 가던 도중 휴식을 한 곳이라는 전설을 담아 정자를 세웠다. 화백정과 도당산터널을 차례로 지나 산을 내려서면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서면 남간마을이다. 월정교를 건너 도당산으로 오르지 않고 천관사지와 오릉을 거쳐 남간마을로 갈 수도 있다. 도당산 앞 이정표가 안내하는 ‘삼릉 가는 길’ 방향을 따르면 된다. 월정교 남단에서 700m 정도 떨어져 있는 천관사지는 김유신과 천관녀에 얽힌 창건설화로 널리 알려진 절터다. 흥미로운 사실은 김유신과 천관녀의 사랑 이야기는 정작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기록된 바가 없다는 것이다. 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로 이어지면서 회자되던 이야기를 설화 형식으로 엮어낸 사람은 고려 중기의 문인 이인로(1152~1220년)였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천관신’(天官神)이 언급되고 ‘삼국유사’에도 ‘천관사’가 등장하는데다, 오늘날까지 천관사지가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신라 때 천관사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 따라서 설화처럼 천관녀가 살던 집터에 ‘천관사’란 절이 세워진 것도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김유신의 집터로 알려진 재매정과 천관사지까지는 거리가 500m 정도란 점에서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 또한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 -큰 인물 키운 땅…남간마을과 나정 남간마을엔 남간사지 석정(돌우물)이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엔 보물 제909호인 남간사지 당간지주가 있고, 그 뒤로는 남산이 배경처럼 솟아 있다. 이 근처 어딘가 있었을 남간사는 신라의 승려 혜통의 집이 있었던 터에 창건한 사찰로 전해지는데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남간사 외에도 이 마을은 불교사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다.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남간마을 일대엔 남간사를 포함해 예닐곱 곳 정도의 절이 모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남간마을은 전체가 절터다. 그래서인지 집집마다 절터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덮개돌이나 석재 등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게다가 신라 불교의 기틀을 다진 자장율사(590~658년)의 집안도 이곳 남간마을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선덕여왕에게 황룡사 9층목탑을 세우도록 건의했고, 울산의 태화강 입구에 태화사라는 절을 세워 신라의 해운물류와 국방의 거점으로 삼았으며, 양산 영축산 밑에 통도사를 건립해 국가적으로 승려를 양성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문무왕 재위 시절, 용궁에서 배워왔다는 주술적인 밀교(密敎) 의식인 ‘문두루비법’으로 서해를 건너던 당나라 설방의 50만 대군의 배를 모두 침몰시켰다고 전해지는 명랑법사도 이곳과 관련이 있다. 명랑은 앞서 언급한 자장율사의 조카다. 다시 말해 명랑의 어머니 남간부인(법승랑으로도 불린다)의 남동생이 자장율사다. 명랑의 두 형 또한 ‘대덕’ 칭호를 받은 덕망 높은 승려였다. ‘삼국유사’엔 명랑법사와 관련한 흥미로운 또 다른 일화도 있다. 명랑이 당나라에 유학한 뒤 돌아오는 길에 바다 용의 청으로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하고 황금 1천냥을 시주받은 뒤 땅 속으로 몰래 들어가 자기 집 우물 밑으로 솟아나왔다. 이후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짓고 용왕이 시주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을 꾸몄다. 유난히 광채가 빛나 절 이름을 금광사라고 했다는 게 대략적인 내용이다. 남간사지 석정이 명랑법사가 솟아나온 우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부 학자들은 이 동네가 남간부인과 연관돼 ‘남간’이란 마을 이름을 갖게 된 것으로 보고, 몇 가지 석조유물이 나온 인근 한 연못(금강못, 또는 금강저수지) 부근이 명랑법사의 출생지이자 금광사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곳에서 600m 정도 떨어진 곳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신화가 깃든 신라의 상징적 유적지 ‘나정’이 있다. 남간사지 당간지주가 있는 곳에서 남쪽으로 1㎞ 정도 떨어진 곳엔 창림사지가 있다. 신라의 첫 궁궐 자리로 전해지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보물 제1867호인 창림사지 삼층석탑은 이 절의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신라 탑의 주요 명품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특히 탑에 돋을새김한 팔부신중(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수호신) 조각이 유명하다.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국보 제16호),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국보 제35호) 등과 더불어 가장 뛰어난 국내 석탑 팔부신중 조각으로 인정받는다. 오랫동안 파괴된 상태로 방치됐다가 1976년 사라진 부재를 일부 보강해 복원됐다. -길에서 만나는 신라 말 비운의 왕들 창림사지에서 남쪽으로 600m쯤 가면 포석정을 만난다. 신라의 의례 및 연회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다. 신라 제55대 경애왕의 마지막 이야기가 이곳에 남아있다. 927년 후백제가 경주로 쳐들어왔을 때에 경애왕이 이곳에서 잔치를 베풀다 견훤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신라의 시작과 끝이 ‘삼릉 가는 길’ 위에 모두 있는 셈이다. 인근엔 보물 제63호인 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이 있다. 신라시대 가장 오래된 불상가운데 하나라고 하는데 세 부처는 얼마나 복스럽게 생겼는지 보는 사람의 입을 자연스레 미소 짓게 만든다. 가까이에 망월사(望月寺)가 있다. ‘달을 바라보는 절’이란 이름이 인상적이다. 절 안에 세워진 작은 육각형 대명전 건물 안에 선덕여왕 위패를 모신 점이 특이하다. 망월사를 지나 아름드리 소나무가 빼곡한 숲에 접어들면 왕릉 3기가 모여 있는 삼릉을 만나게 된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의 무덤이다. 인근엔 경애왕의 무덤이 있다. 아달라왕을 제외하고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은 모두 신라가 기울어가던 시절의 통치자들이었다. 문헌에 따르면 신덕왕 통치 시절엔 천재지변이 특히 많았다고 한다. 봄이 한창인 4월에 서리가 내리고 지진이 일어났으며, 잦은 해일과 떼로 몰려든 까치와 까마귀 탓에 백성들이 힘들어했다고 전한다. 신덕왕의 아들인 경명왕은 기울대로 기운 나라를 어렵사리 떠받치고 있던 왕이었다. 과거의 영화는 이미 사라지고 외세의 침입 앞에 망해가던 나라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허울뿐인 군주였다. 신덕왕의 아들이자 경명왕의 동생이던 경애왕 또한 아버지와 형처럼 불행한 삶을 살았다. 왕건에게 굴종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면서까지 나라를 지키고자 했으나, 결국 후백제의 실력자 견훤에 의해 죽음을 맞았고, 함께 있던 왕비와 후궁들은 후백제군에게 능욕까지 당했다고 전해진다. 김운 역사여행가
1400여 년 전 어느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김유신이 김춘추와 함께 공을 차다가 일부러 김춘추의 옷깃을 밟아 옷고름을 찢어 여동생 문희에게 꿰매게 했다. 그런 인연으로 김춘추와 문희의 만남은 시작됐고, 문희는 임신까지 하게 됐다. 김유신은 그날 이후 임신한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이겠다고 온 나라에 소문을 퍼뜨렸다. 어느 날 선덕왕이 남산으로 행차하는 것을 본 김유신은 뜰에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피워 연기가 치솟게 했다. 선덕왕이 이를 보고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신하들이 답했다. “김유신이 처녀인 누이동생이 임신한 것을 알고 불에 태워 죽이려는 것입니다” 선덕왕이 다시 물었다. “그것이 누구의 짓인가?” 때마침 가까이에서 왕을 모시고 있던 김춘추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선덕왕은 조카의 소행임을 알고 크게 꾸짖은 후 “어서 가 김유신의 누이동생을 구하라”고 명했다. 김춘추는 선덕왕의 명을 받고 달려가 왕명을 전하고 화형을 중지시켰다. 그 후 두 사람은 혼례를 치렀다. 김유신의 막내여동생 문희가 언니 보희의 꾼 꿈을 사서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 김춘추(재위 654~661년)의 왕비가 된 이야기다. ‘삼국유사’의 ‘태종 춘추공’조에 실린 내용으로, 선덕왕의 남산 행차 길이 배경이다. ◆옛 문헌 속 신라 왕의 남산 행차 신라 왕의 남산 행차와 관련된 ‘삼국유사’ 기록은 더 있다. 쥐와 까마귀의 도움으로 신라 소지왕이 목숨을 구한 ‘사금갑’(射琴匣) 이야기가 그 중 하나다. ‘거문고 갑을 활로 쏘아라’라는 뜻의 사금갑은 ‘둘 죽이고 하나 살리기’, ‘오곡밥 먹는 유래’라는 옛 이야기의 원형이기도 하다. 이 사금갑 설화의 배경이 된 곳은 남산 동쪽 자락 서출지(書出池)다. 신라 21대 소지왕 재위 10년(488년) 정월 보름날 천천정(天泉亭) 행차 때의 일이다. 소지왕 앞에 까마귀와 쥐가 몰려와 울더니 쥐가 사람처럼 말했다. “까마귀가 날아가는 곳을 살피시오” 소지왕은 장수에게 명해 까마귀를 뒤쫓게 했다. 장수가 남산 동쪽 기슭 한 연못에 이르렀을 때 한 노인이 봉투를 들고 나타나 왕에게 전하라고 말했다. 봉투 겉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이 봉투를 전해 받은 소지왕은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열어 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점을 치는 일관(日官)은 “두 사람은 보통 사람, 한 사람은 왕”이라고 해석했다. 결국 일관의 뜻을 따라 봉투를 열어 보니 ‘거문고 갑을 쏘아라’고 적혀 있었다. 왕은 궁으로 돌아와 거문고 갑을 향해 활을 쐈는데, 그 안엔 왕비와 정을 통하던 승려가 있었다. 소지왕은 왕비와 승려를 함께 처형하고 죽음을 면했다. 이 일 이후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전해준 못을 서출지라 부르고, 정월 보름은 오기일(烏忌日)이라고 해서 찰밥으로 까마귀에게 공양하는 풍속이 생겼다는 게 ‘삼국유사’가 전하는 내용이다. 남산 서편 자락 포석정에 얽힌 설화도 있다. 통일신라 말기 제49대 헌강왕(재위 875~886년) 때였다. 왕이 포석정에 행차하자 남산의 신이 나타나 춤을 췄다. 그런데 신은 좌우의 신하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오직 왕에게만 보였다. 왕은 친히 신의 춤을 추어 보여줬다. ‘삼국유사’ ‘처용랑과 망해사’조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의 배경이 된 남산은 신라에서 신성시되던 산이었다. 신라인들은 남산을 ‘불국토’인 수미산쯤으로 여겼다. 옛 신라인들은 남산의 단단한 화강암을 쪼아 부처를 새겼고, 평평한 둔덕마다 불탑을 세웠다. 그렇다고 민초들만 남산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통일 이전의 왕부터 천년 왕조의 끝자락 경애왕까지 수많은 신라 왕은 남산을 즐겨 찾았다.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왕궁이 있던 월성에서 신궁으로 추정되는 나정, 그리고 그곳을 좀 더 지나 포석정까지는 행차한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당시는 정치보다 제사에 더 큰 의미를 뒀던 때였고, 남산, 특히 서남산 쪽은 왕이 직접 행차했던 대표적인 제의 공간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신라 왕 숨결 품은 서남산 둘레길 경주시가지 남쪽에 있는 남산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북쪽의 금오봉(金鰲峰, 466m)과 남쪽의 고위봉(高位峰, 494m) 두 봉우리를 잇는 산과 계곡 전체를 남산이라고 부른다. 남산엔 골짜기를 따라 수십 갈래 답사 코스가 나있다. 이 길을 통해 많은 이들이 남산에 오르며 수많은 유적을 만난다. 반면, 경주시가 2010년에 접어들며 조성한 ‘남산 둘레길’은 아는 이가 많지 않다. 남산 둘레길은 남쪽의 고위봉과 북쪽의 금오봉을 잇는 남북 능선을 축으로, 동쪽의 ‘동남산 가는 길’과 서쪽의 ‘서남산 가는 길’ 등 2곳으로 나뉜다. 이들 두 길은 몇몇 유적을 찾아가는 길에 짧은 오르막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남산 자락을 에둘러 가는 평지다. 남산의 낮은 곳을 연결해 걸으며 마을과 들판 곳곳에 있는 문화재를 만나볼 수 있다. 차량이 다니는 도로와도 어느 정도 떨어져 있어 마음 놓고 주변 풍광을 구경하며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길이 갈라지는 곳마다 이정표가 서 있어 한두 곳을 제외하면 길을 이어가는 데 어려움이 없다. 다만 동남산 쪽은 주능선까지 이르는 거리가 서남산 쪽에 비해 짧고 경사도 훨씬 가파른 탓에 ‘동남산 가는 길’에선 남산 주능선을 보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길 막바지인 통일전 근처를 지나면서부터는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남산 능선을 바라볼 수 있다. 동남산 가는 길은 교동 월정교 남단에서 출발해 인왕동 사지(인용사지)~춘양교지~상서장~고청 윤경렬 고택~불곡마애여래좌상~남산탑곡마애불상군~미륵곡 석조여래좌상~경북산림환경연구원~화랑교육원~헌강왕릉~정강왕릉~통일전~서출지~남산동 동·서삼층석탑을 거쳐 염불사지로 이어진다. 거리는 10㎞ 정도로 대다수 구간이 평지라 체력적으로 힘들지는 않다. 쉬엄쉬엄 걷더라도 4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서남산 쪽 둘레길인 ‘서남산 가는 길’은 신라 왕의 주요 행차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의 길’로 불릴만한 길이다. 서남산 가는 길이라는 이름 외에 ‘삼릉 가는 길’로도 불리는데, 이정표나 안내도에도 주로 ‘삼릉 가는 길’로 표기돼 있다. 길은 동남산 가는 길과 마찬가지로 월정교 앞에서 시작한다. 천관사지~오릉~김호 장군 고택(월암종택)~남간사지 석정~일성왕릉~양산재~나정~남간사지 당간지주~창림사지 삼층석탑~포석정~지마왕릉~태진지~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삼릉~경애왕릉으로 이어진다. 월정교 남단에서 천관사지와 오릉을 거치지 않고 도당산으로 난 산길을 따라 화백정과 도당산 터널을 지나 김호 장군 고택 앞으로 합류하는 길을 택할 수도 있다. 전체 거리는 동남산 가는 길과 비슷한 10㎞ 정도로 4시간 정도 걸린다. 삼릉 가는 길은 숲길이 대부분인 동남산 가는 길과 달리,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로 이어져 있다. 걷는 내내 남산을 조망하며 고즈넉한 농촌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특히 가을에 걷기 좋은 길이다. 김운 역사여행가
반월성 남쪽 토끼 고개 옆 半月城南兎嶺邊 무지개 다리 그림자 문천에 거꾸로 비치네 虹橋倒影照蚊川 용은 하늘로 오르며 꼬리 땅에 드리우고 蜿蜒騰漢尾垂地 무지개는 시냇물 마시며 허리 하늘에 걸쳤네 螮蝀飮河腰跨天 고려 중기 문신이자 대표적인 시인인 김극기(金克己)가 쓴 ‘월정교’(月淨橋)란 시의 일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고적(古跡)조에 실려 있다. 그가 노래한 월정교는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졌다. 왕궁인 월성과 남천 남단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는 “경덕왕 19년(760년) 2월에 궁궐 남쪽의 문천(蚊川, 지금의 남천) 위에 월정교(月淨橋)와 춘양교(春陽橋) 두 다리를 놓았다”고 전한다. “원성왕 14년(798년) 3월에 궁 남쪽 누교(樓橋)가 불에 탔다”는 기록도 있다. 그 후 고려 명종 대(1170~1197년)에 시인 김극기가 월정교를 주제로 시를 지었고, 충렬왕 6년(1280년)에 중수한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월정교는 옛날 본부 서남쪽 문천 가에 있었다. 두 다리의 옛터가 아직도 남아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을 근거로 미뤄보면, 월정교는 적어도 13세기 말까지 본래의 기능을 유지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는 1530년 이전 어느 시점에 무너져 흔적만 남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교량건축의 백미 만나다 월성 서쪽 끄트머리 서문 터를 빠져나와 만나게 되는 월정교는 최근까지 남아있던 다리의 흔적을 토대로 2018년 새로 지은 것이다. 폭 9m, 길이 66m, 높이 9m 규모로, 다리 위에 지붕을 씌운 형태로 만들어졌다. 월정교 복원·정비 사업은 1975년 교각·교대 실측조사와 1984년 석재조사, 1986년 발굴조사 등 관련 조사와 학술연구가 밑거름이 됐다. 조사 결과 배 모양의 교각이 남아있는 월정교 석교(石橋) 터와 하류 방향으로 19m 떨어진 지점에서 목교 터가 발견됐다. 석교 터는 교대 석축 일부와 4개의 배 모양 교각이 같은 간격으로 남아 있었고, 교각 주위 상류와 하류에 석재들이 넓은 범위로 흩어져 있는 상태였다. 발굴조사에선 누교(樓橋)형태의 교량으로 추정할만한 목조건물 지붕 부재와 기와류, 쇠못과 기와못 등이 출토됐다. 특히 신라시대 연화문과 고려시대 귀목문(鬼目文) 막새가 출토돼 경덕왕 대에 만들어져 고려 때까지 유지됐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또, 교각 터 사이에선 타다 남은 목재 조각이 수습돼 원성왕 14년의 화재가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이후 문화재청과 경주시는 이 같은 결과를 토대로 2008년 5월 복원공사에 들어가 2013년 교각과 누교를 복원하고 2018년 다리 양쪽 끝에 문루(門樓, 아래엔 출입을 위한 문을 내고 위에는 누각을 지어 사방을 두루 살피는 기능을 가진 건물)를 세워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일각에선 “고증 자료도 없이 중국 다리를 참고해 상상력으로 지은 무리한 복원”이라는 주장도 있다. 일부 학자들은 앞에서 소개한 김극기의 시에 ‘홍교’(虹橋, 무지개다리)란 표현에 주목해 당시 월정교가 아치형 다리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월성과 맞닿은 월정교 북쪽 문루엔 ‘월정교’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통일신라 말기 최고의 문장가로 꼽혔던 고운 최치원(857년~미상)의 글씨다. 사산비명(四山碑銘)으로 불리는 그가 지은 네 개의 비문 가운데 하나인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국보 제47호) 글자를 집자(필요한 글자를 찾아 모음)해 만들었다. 건너편 남쪽 문루에도 현판이 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두 곳 문루의 현판 글씨가 각각 다르다는 점이다. 이곳 문루에 걸린 현판 글씨는 통일신라시대 신필(神筆)로 추앙받았던 김생(711년∼미상)의 것이다. 태사자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太子朗空大師白月栖韻塔碑, 보물 제1877호) 글자를 집자했다. 남쪽 문루 현판의 ‘月’(월)자가 이채롭다. 각기 다른 곳에서 글자를 따왔지만, 마치 월정교에 걸릴 것을 예상이나 한 듯 ‘월’자는 배 모양의 교각 단면을 꼭 닮아 다시 한 번 눈이 가게 만든다. ◆남천 따라 흐르는 유구한 신라 역사 월정교 아래로 흐르는 남천(南川)은 토함산 서북쪽 계곡에서 발원해 불국동~평동~남산동~탑정동~사정동을 거쳐 형산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이다. 문천(蚊川), 사천(沙川), 황천(荒川)이라고도 하는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엔 ‘문천’으로 기록돼 있다. 순우리말 이름인 ‘모그내’를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예부터 경주에는 8가지의 괴이한 현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 하나가 ‘문천도사’(蚊川倒沙)다. ‘문천의 모래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의미다. 물은 하류로 흘러가는데 모래는 거꾸로 상류에 쌓인다는 사실은 문천에 그만큼 모래가 많았다는 의미다. 사천(沙川)이란 이름도 남천의 강바닥이 주로 모래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붙은 것이라고 한다. 남천 주변엔 월성과 월정교, 일정교 등 신라 궁궐과 관련한 다양한 유적이 있다. 하천 남쪽으로는 남산과 도당산, 오릉, 영묘사, 천관사 등 여러 사찰이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뤄 학계는 남천이 신라 왕경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때문인지 월성을 둘러싼 세 하천 가운데 문천에 특히 다리가 많이 놓였다. 월정교와 일정교 외에도 효불효교(孝不孝橋), 유교(楡橋), 대교(大橋), 남정교(南亭橋), 귀교(鬼橋) 등 기록에서 확인되는 다리의 수만 해도 상당하다. 왕경의 중심부와 남산이 신라 왕경인들의 주된 생활공간이었기 때문에, 그 사이를 흐르는 문천에 많은 다리가 놓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측 설명이다. 김운 역사여행가
“14년(문무왕 14년, 674) … 2월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었으며 진기한 날짐승과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에 등장하는 기록이다. 이 기사의 ‘연못’이 바로 월지다. 679년(문무왕 19년) 안압지에 동궁을 지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두 곳 모두 문무왕 재위 시절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궁과 월지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기록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효소왕 6년 9월, 697) △동궁아를 설치하고 상대사 1인, 차대사 1인을 두었다(경덕왕 11년 8월, 752) △동복 아우 수종을 부군으로 삼고 월지궁에 들였다(헌덕왕 14년 1월, 822) △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연이 무르익자 왕이 거문고를 타고 좌우에서 노래를 부르며 매우 즐겁게 놀고 파하였다(헌강왕 7년 3월, 881년) △고려 태조가 기병 50여명을 거느리고 수도 근방에 이르러 만나기를 요청하였다. 왕이 백관과 더불어 교외로 나와 맞이하고 궁으로 들어와 마주 대하며 정성을 다하여 극진히 예우하고 임해전에 모셔 연회를 베풀었다(경순왕 5년 2월, 931) 등의 기록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동궁과 월지는 나라의 경사를 축하하며 외국의 사신들을 영접하는 연회장이자 태자의 공간이었다. ◆문무왕에게 왕권 강화는 ‘숙명’ 동궁을 지은 679년은 당나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한 뒤였지만, 월지를 조성한 674년은 아직 나당 전쟁이 끝나기 전이었다. 이 1년 동안 대규모 전투는 없었다 하더라도, 이듬해 신라의 당에 대한 항쟁이 절정에 이르렀던 것으로 미뤄보면 하루하루가 급박한 형세를 이루고 전쟁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문무왕은 왜 하필 이 시기에 월지를 조성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 의문은 674년 이전인 고구려 멸망을 즈음해 ‘왕권 강화’에 골몰하던 문무왕의 명으로 인공 연못을 조성하기 시작했고, 나당 전쟁 중이던 674년 완성됐다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생긴다. 5년 뒤 조성된 동궁 또한 월지 건설 단계에서부터 함께 지어질 것으로 계획됐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문무왕에게 ‘왕권 강화’는 숙명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숙명은 아버지 김춘추(무열왕)의 즉위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654년 진덕여왕이 죽자 귀족회의에서는 상대등 알천을 왕으로 추대했으나, 비담의 난 이후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춘추·김유신 연합세력에 의해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다. 이는 당시 신라에서 획기적 사건이었다. 그는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였고, 성골 출신인 기존 왕과는 달리 진골 출신으로 왕위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무열왕은 자신의 즉위를 둘러싸고 야기된 진골귀족들의 불만을 회유하면서 정치적 안정을 도모해야만 했다. 무열왕이 백제를 멸한 이듬해인 661년 사망한 이후 즉위한 문무왕 또한 아버지 대와 같은 고민이 있었다. 안으로는 왕권을 계승·발전시켜야 했고, 밖으로는 고구려와 당에 대한 어떤 입장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게 당면 과제였다. 문무왕은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찍부터 외교적·군사적으로 상당히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 결과 668년 고구려를 멸하며 삼국 간의 전쟁을 종식시켰고, 676년엔 백제·고구려 평정을 위해 일시적 동맹을 맺었던 당의 세력도 축출했다. 또 자신의 세력 기반인 무열왕계와 김유신계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권력의 외연을 넓혀갔다. ◆월지·동궁 조성 통해 왕실 권위 기틀 다져 이런 상황 속에서 문무왕은 왕실 권위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월지와 동궁을 조성한 것이다. 특히 문무왕에게 있어서 동궁을 짓는 것은 왕위계승을 위한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29대 무열왕에서 36대 혜공왕까지를 중대(中代)로 구분했다. 이 시기 왕위계승 원칙은 재위 중인 왕의 장자를 태자로 삼아 왕위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성골왕 시기 왕위계승이 왕과 그 형제의 가족이라는 확대가족에서 이뤄진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 문무왕은 신라 역사상 태자로 책봉돼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무열왕은 즉위 2년째 법민(문무왕)을 태자로 책봉했다. 문무왕도 즉위 5년이 되던 해에 신문왕을 태자로 책봉한다. 다만 32대 효소왕과 34대 효성왕은 아들이 없어 각각 동생에게 왕위를 전했으나 장자상속이라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다. 태자 책봉은 왕위계승 문제로 빚어질지 모를 우려를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가 컸다. 왕이 갖춰야 할 자질과 능력을 미리 함양시키려는 뜻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태자궁인 동궁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신라의 동궁은 태자의 거처뿐만 아니라 태자의 교육기관 역할도 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한편에선 문헌 속 임해전에서 펼쳐진 많은 횟수의 주연(酒宴)을 예로 들며 태자 교육기관 내에 연회를 베풀던 임해전이 위치한다는 것에 의문을 표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외국의 사신 접대나 연회가 펼쳐지는 전각이 있는 곳에 태자의 교육기관이 있는 것이 어색하다는 것이다. 동궁의 위치에 대해서도 의견은 엇갈린다. 월지 서편 건물지와 동편 영역을 포함한 곳을 동궁으로 보기도 하고, 월지의 동편을 동궁, 월지 서편을 월지궁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밖에도 국립경주박물관 남측을 동궁으로 보는 견해가 기존에 있었고, 최근엔 월지 서편이 동궁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렇듯 연구자마다 다양한 학설을 제시하고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다만 월지 주변에서 확인되는 동궁 관련 유물, 문헌에서 확인되는 동궁관(東宮官) 기구(機構)속에 월지 관련 관청명 등으로 볼 때 월지 주변에 동궁이 있었던 것은 큰 이견이 없는 분위기다.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어찌됐건 동궁을 따로 세운 것은 왕위계승 준비를 위한 예비 조치로 이해할 수 있다. 문무왕이 순조롭게 왕위를 이어가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말했다. 김운 역사여행가
못을 뚫어 물을 채우니 물고기 소라 자라고 (鑿池爲海長魚螺) 물길을 당겨 중심에 대니 콸콸 흐르네(引水龍喉勢岌峨) 여기서 놀이하다 신라는 나라를 잃었는데 (此是新羅亡國事) 지금은 봄물로 좋은 벼가 자라나네 (而今春水長嘉禾) 조선 초 학자이자 문신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시문집인 ‘매월당시집’(梅月堂詩 集)에 실려 있는 ‘안하지 옛 터’(安夏池舊址)란 시다. 그가 노래한 ‘안하지’는 월성 북동쪽에 있는 ‘월지’(月池)다. ◆‘안압지’란 이름으로 더욱 친숙 ‘동궁과 월지’는 대중들에게 ‘안압지’(雁鴨池)란 이름으로 더욱 친숙한 유적이다. 하지만 안압지는 사실 신라 때 명칭이 아니라, 조선시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등장한다.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드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신라가 멸망한 이후 연못은 웅덩이처럼 변했고,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이 이를 ‘안압지’로 부르면서 시를 쓰는 등 기록을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이 나오기 전 김시습이 ‘안하지’란 표현을 쓴 것으로 미뤄 안압지와 비슷한 발음을 가진 표현이 15세기 무렵부터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측의 설명이다. 이곳에선 1975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의봉4년개토’(679)명 기와와 ‘조로2년’(680)명 전돌이 출토되었는데, 이 유물을 통해 연못 주변 건물지가 문무왕 19년(679)에 지은 동궁(東宮)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안압지란 명칭은 1982년 당시 한병삼 국립경주박물관장에 의해 ‘안압지는 월지’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그 명칭의 타당성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이후 안압지에서 나온 ‘동궁아일’(東宮衙鎰)명 자물쇠, ‘세택’(洗宅)명 목간, ‘용왕신심’(龍王辛審)·‘신심용왕(辛審龍王)’명 접시 등에 새겨진 명문이 ‘삼국사기’ 직관지에 나오는 동궁 소속 관청 가운데 ‘세택’(洗宅), ‘월지전’(月池典), ‘월지악전’(月池嶽典), ‘용왕전’(龍王典) 등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특히 ‘월지악전’(月池嶽典)은 조경을 담당한 관청인데, 소속된 관리 중 수주(水主, 둑과 연못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추정)를 뒀다는 기록으로 미뤄 이곳에서 연못을 관리했고 연못 이름이 월지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에 따라 1963년 사적 18호로 지정됐던 안압지를 포함한 신라왕궁 별궁터 ‘경주 임해전지’는 2011년 문헌기록과 출토유물, 발굴조사 내용 등의 재검토를 통해 ‘동궁과 월지’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3만3000점 신라유물 쏟아진 월지 동궁과 월지에 대한 첫 발굴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이뤄졌다. 1925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는 동궁과 월지 발굴과 관련한 ‘고적 진품 발견-음석으로 만든 도랑’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고적을 연구하기 위해 경주에 가있는 일본 제국대학 교수 원(原) 박사가 지난 20일 경 안압지 부근에서 음석(陰石·오목한 돌)으로 만든 길이 오십일 간(間)의 곡선상의 도랑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고적 중에도 매우 진귀한 것으로 군 당국에서 발굴하는 중이라는 내용이다. 이후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정부는 경주종합개발계획 10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그 일환으로 경주의 여러 유적과 시의 외관을 정비하면서, 안압지도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1974년 11월 준설공사가 시작됐다. 준설 작업 이전 월지는 가끔씩 낚시를 하는 이들이 찾는 넓은 연못에 불과했다. 그러나 준설작업이 시작된 뒤 이곳에서는 다수의 유물이 발견됐다. 양수기로 연못의 물을 빼낸 다음 포클레인으로 진흙을 걷어내는 과정에서 다량의 유물이 섞여 나왔고 월지 호안석축의 일부가 드러났다. 공사는 즉시 중단됐고 이듬해인 1975년 3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전신인 경주고적발굴조사단 주도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됐다. 2년여의 발굴조사 결과 전체 면적이 1만5658㎡(4738평)에 이르는 대형 연못과 그 안에 독립된 3개의 섬이 발견됐다. 연못 가장자리와 섬 외곽에 석재를 쌓아 만든 호안석축과 물이 들어오고 빠져 나가는 입수구·출수구 시설도 확인됐다. 못의 서쪽과 남쪽에서는 대형 건물지를 비롯한 31곳의 건물터도 모습을 드러냈다. 안압지 발굴 당시 조사원으로 참여했던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소장은 “준설작업 이전 안압지는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고 가운데 물이 고여 있는 정도의 상황이었다”며 “그때는 그냥 하나의 못으로만 생각했지 그 안에 돌로 석축을 쌓아서 정연하게 만든 호안이 나올 줄은 아무도 몰랐다”고 회상했다. 당시 출토된 유물은 3만3000여점에 달했다. 이 가운데 1만5000여점이 완전한 형태로 세상 밖에 나왔다. 이처럼 많은 유물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연못 바닥 진흙 덕분이었다. 진흙은 마치 타임캡슐처럼 1200여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유물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가 토해냈다. 유물은 대부분 연못의 서쪽 건물지를 중심으로 호안석축 내부 반경 6m 거리 내의 바닥토층에서 출토됐다. 종류는 기와, 벽돌, 건축부재, 불상, 그릇, 숟가락, 배, 주사위, 금동제 가위, 목간 등으로 다양했다. 출토품들은 경주 지역 고분에서 출토된 부장품과는 달리 신라 궁중생활을 엿볼 수 있는 실생활 용품이 많이 출토됐고, 중국과 일본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한 유물도 나왔다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1975년 4월에는 월지의 중도와 소도 사이에서 뒤집힌 모습의 나무로 된 배가 발견돼 화제가 됐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배 중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완전한 모습으로 출토돼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들 유물은 통일신라의 건축·불교미술·생활상·오락문화 등 통일신라 초기 신라인의 생활을 엿보고, 중국·일본과의 문화교류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는 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측의 설명이다. ◆통일신라 수세식 화장실 유적 발견 ‘화제’ 발굴조사 이후 1980년 9월까지는 유적의 정비·복원 사업이 진행됐다. 발굴 당시 출토된 건물 부재를 기초로 해서 3동의 건물을 복원했고, 나머지 건물 터의 기둥자리에도 화강암을 다듬은 초석을 배치하는 등 오늘날 볼 수 있는 동궁과 월지 유적의 모습을 갖췄다. 동궁과 월지 입구에 들어서면 연못 서편으로 복원된 건물 3동이 있다. 사실 복원 당시 신라 건축에 관한 자료·정보 등이 부족해 당대 건축물 형태로 완벽하게 복원한 것은 아니더라도, 최대한 출토된 부재를 기초로 해 복원했다고 한다. 기둥 위 지붕을 받치기 위한 공포의 부재인 첨차와 주두, 난간을 장식한 살대 등은 모두 출토유물을 복원한 것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07년부터 지금까지 통일신라 왕경의 구조와 성격을 확인하기 위해 동궁과 월지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다. 그 성과로 2017년에는 통일신라 시기 수세식 화장실로 추정되는 석조물과 터널형 수로시설을 발굴해 세간을 놀라게 했다. 지금까지 동궁과 월지에서 나온 유물 일부는 국립경주박물관 월지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발굴 당시 화제를 모았던 목선도 보존처리를 마치고 월지관에 전시돼 있다. 김운 역사여행가
외로운 성은 약간 굽어 반달을 닮고 (孤城微彎像半月) 가시덤불은 다람쥐 굴을 반이나 가렸네 (荆棘半掩猩㹳穴) 곡령의 푸른 솔은 기운이 넘쳐나는데 (鵠嶺靑松氣鬱蔥) 계림의 누른 잎은 가을이라 쓸쓸하네 (鷄林黃葉秋蕭瑟) 태아검 자루를 거꾸로 잡은 뒤로부터 (自從大阿倒柄後) 중원의 사슴은 누구 손에 죽었던가 (中原鹿死何人手) 강가 여인들 부질없이 옥수화를 전하고 (江女空傳玉樹花) 봄바람은 얼마나 금제의 버들을 흔들었나 (春風幾拂金堤柳) 고려 후기 문신 이인로(李仁老, 1152~1220)가 쓴 ‘반월성’(半月城)이란 시다. 이인로가 노래한 반월성은 우리에게 ‘월성’(月城)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신라의 왕궁 터다. ◆왕궁 있던 궁성…초승달 닮아 ‘반월성’으로도 불려 월성은 경주 시내 남쪽 남천(옛 이름은 문천) 가에 있는 토성이다. 101년 성을 쌓은 이후 신라가 멸망(935)할 때까지 843년 동안 신라의 왕성이었다. 모양이 초승달처럼 생겨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불렸고, 왕이 계신 곳이란 뜻에서 재성(在城)이라고도 했다. 규모는 동서 890m, 남북 260m, 내부 면적은 20만7000여㎡(6만2000여평) 정도다. 성벽 전체 길이는 1841m, 성벽 높이는 10~18m 정도로 일정하지 않다. 남쪽은 월성 남쪽을 감아 돌며 자연적인 해자(垓子,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물을 채운 방어시설) 역할을 하는 남천이 흐르고 자연절벽이 있는 곳이라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성벽이 없었던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지금은 조선시대에 쌓은 석빙고만 남아 있다. 아래 두 기사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월성의 축성과 수리에 관한 이야기다. 파사이사금 22년(101년)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이라 했다. 둘레가 1천23보였다. 소지마립간 9년(487년) 월성을 수리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월성은 원래 왜에서 건너온 호공(瓠公)이 살던 집이었는데, 탈해가 호공을 몰아내고 집을 차지했다. 이후 파사이사금 때에 월성을 쌓았다고 한다. 초창기의 신라의 왕궁은 시조 혁거세 때 쌓은 금성(金城)과 파사왕 때 쌓은 월성, 두 곳이었다. 6세기가 되면 금성은 기록에서 사라지는데, 이후 왕궁은 월성과 그 일대만 가리키게 됐다는 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측 설명이다. ◆서서히 베일 벗는 1천년 신라 역사 월성은 1천년에 걸쳐 만들어지고 변화된 왕궁이었던 만큼, 발굴조사도 오랜 기간 이어져왔다. 일제강점기였던 1915년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의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1979∼1980년 문화재관리국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동문 터를 조사해 해자 유구를 찾아냈다. 1985년부터는 해자와 계림 북쪽 건물터, 첨성대 남쪽 건물터, 월성 북서편 건물터 등을 확인했다. 2014년부터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를 통해 월성 내부와 성벽, 해자 등 전체 구역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반달 모양인 월성을 서쪽부터 순서대로 A∼D지구로 나누고, A지구와 월성 내부인 C지구를 먼저 발굴했다. C지구에서는 땅을 3m 정도 파 내려가는 탐색조사를 통해 현재 지표 아래에 통일신라시대 문화층 2개와 신라시대 문화층 5개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8세기 관청으로 추정되는 많은 건물터 유적을 찾아냈다. A지구 서쪽 문터 유적에서는 5세기에 묻은 것으로 보이는 키 160㎝ 안팎 인골 2구와 토기 4점이 발견됐다. 이 유골은 신라가 사람을 제물로 바치고 그 위에 성벽을 조성한 인신공희 사례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다. 또 월성 북쪽에 길쭉한 띠 모양으로 조성한 해자에서는 글자를 쓴 묵서 목간과 수많은 식물 씨앗, 동물 뼈가 나왔다. A지구와 B지구 북쪽에 있는 1호 해자에서는 4세기 중반에서 5세기 초반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 방패 2점과 40㎝ 길이의 배 모형이 출토됐다. 특히 방패의 경우 고대 방패는 실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 월성 출토품은 제작 시기 또한 이르고 형태가 복원이 가능할 정도로 온전하다는 점에서 이목을 끌었다. 의례용으로 보이는 배 모형도 국내에서 확인된 동종 유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실제 배처럼 선수와 선미를 정교하게 표현했다. 단양 신라 적성비(국보 제198호)에 나오는 지방관 명칭인 ‘당주’(幢主)라는 글자를 기록한 목간도 해자에서 나왔다. 내용은 당주가 음력 1월 17일 곡물과 관련된 사건을 보고하거나 들은 것으로, 벼·조·피·콩 등의 곡물이 차례로 등장하고 그 부피를 일(壹), 삼(參), 팔(捌)과 같은 갖은자(같은 뜻을 가진 한자보다 획이 많은 글자로, 금액이나 수량에 숫자 변경을 막기 위해 사용)로 적었다. 신라의 갖은자 사용 문화가 통일 이전부터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됐다. 이전 갖은자가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유물은 ‘동궁과 월지’에서 나온 목간(7~8세기)이었다. ◆‘5세기 어느 여름날 경주’ 모습 되찾다 월성에선 그밖에도 씨앗과 열매 63종, 생후 6개월 안팎의 어린 멧돼지 뼈 26개체, 곰 뼈 15점 등 신라인의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는 출토품도 여럿 나왔다. 이에 따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월성 발굴을 통해 역사적 사실뿐만 아니라 과거 사람들이 생활했던 환경을 밝혀내는 ‘고환경 연구’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이것을 ‘경관 복원’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내물마립간(재위 356~402) 무렵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돋움하던 5세기초 8월 여름날의 경주. 월성 주변 해자 안에는 가시연꽃과 다른 수생식물이 자라고 있다. 연못 주변은 풀이 자라 시야가 비교적 확 트인 공간이다. 계림과 소하천인 발천 일대에는 느티나무가 싱그러운 녹음을 펼치고 있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는 참나무와 소나무 숲이 늘어서 있다. 해자에서는 신라의 국운왕성을 기원하는 행사가 벌어지고 있다. 행사 의장용으로 세운 방패가 늘어서 있은 가운데 소원을 담아 불에 태운 ‘미니어처’ 배가 동동 떠간다. 월성에서는 인근 지역의 지방관인 당주는 곡물수확과 관련된 사건이 일어났음을 보고하고 있다. 당주는 곡물의 숫자를 정확하게 하려고 위·변조하기 쉬운 일(一)과 이(二) 대신 일(壹)과 이(貳)라 쓴 보고서를 제출하고 있다. 인근 공방에서는 수정 원석으로 화려하고 정교한 수정장신구를 만들고, 그 한편에서는 우리에서 키운 맛좋은 6개월 산 어린 돼지를 잡는다. 지금까지 발굴을 통해 얻은 자료를 토대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복원한 ‘5세기 어느 여름날 경주’의 모습이다. 김운 역사여행가
시림의 아름다운 계절 안개가 흐릿한데 (始林佳期淡烟微) 한낮 금닭은 울지도 날지도 않는구나 (白日金鷄際不飛) 석궤에 가을바람 일자 지난 일이 처량하고 (石櫃秋風凄往事) 붉은 등나무 꽃 아래 이슬비가 흩날리는구나 (紫藤花下雨罪罪) 조선 후기 경주 양동사람 이헌하(李憲河, 1701~1775)가 경주 계림(鷄林)을 노래한 ‘계림’이란 제목의 시다. 계림은 경주 김씨 시조인 김알지(金閼智)가 태어난 곳으로 전해진다. ◆김알지 탄생설화 전하는 신성한 숲 탈해이사금 9년(65) 3월의 일이었다. 밤중에 왕이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숲에서 닭 울음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호공(公)을 시켜 살펴보게 했다. 가서 보니 금빛이 나는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의 이야기를 들은 왕이 궤짝을 가져와 열게 하니, 남자 아이가 그 안에 있었는데 용모가 뛰어나게 훌륭했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에 일러 하늘이 그에게 아들을 내려준 것이라 하고 거두어 길렀는데,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이름을 ‘알지’(閼智)라고 불렀다. 또, 금색 궤짝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라 하였으며, 알지가 발견된 ‘시림’의 이름을 ‘계림’(雞林)으로 고치고, 그것을 국호로 삼았다는 내용이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다. 한편, ‘삼국유사’엔 전체적인 줄거리는 비슷하나 ‘삼국사기’와는 다소 다른 내용도 보인다. ‘호공이 밤에 월성 서리(西里)를 지나다 시림에서 큰 빛을 보았는데, 하늘에서 땅으로 드리운 자주색 구름 속에 황금 상자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고 거기에서 빛이 나왔다. 또한 흰 닭이 나무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는 내용이 대표적이다. 왕이 직접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는 ‘삼국사기’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알지’라는 이름이 당시 말로 ‘어린아이’(小兒, 소아)를 뜻한다고 언급한 부분도 차이가 나는 대목이다. 그리고 다음 내용이 이어진다. ‘(탈해)왕은 길일을 가려 그를 태자로 책봉했으나, 그는 뒤에 태자의 자리를 파사왕에게 물려주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았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았으며, 아도는 수류(首留)를, 수류는 욱부(郁部)를, 욱부는 구도(俱道)를, 구도는 미추(未鄒)를 낳으니, 미추가 왕위에 올랐다. 이리하여 신라의 김씨는 알지로부터 시작됐다’ 이에 대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이 이처럼 다소 차이를 보이는 것은 전자가 국가나 왕실의 역사를 기록한 데 반해, 후자는 신이한 이야기까지를 포함해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신라왕실의 본산…56왕 중 38왕이 경주 김씨 성 밖 문묘(文廟, 공자를 모신 사당, 향교) 옆에는 몇 이랑의 황폐한 언덕에 늙은 나무가 쓸쓸하게 서 있으니, 곧 닭 우는 소리가 들렸던 옛 숲이다. -홍성민(洪聖民, 1536~1594), 계림록(鷄林錄) 시림(始林) 앞에 이르러 말에서 내리니 우물이 있었다. 그 가운데 8개의 모서리가 있는데, 또한 돌로 덮어 놓았다. (중략) 시림은 지금 향교 곁에 있는데, 특별히 볼 것이 없었지만 우리나라 김씨가 나온 땅이기에 방황하면서 오래도록 떠날 수 없었다. -김상정(金相定, 1722~1788), ‘동경방고기’(東京訪古記) 시림은 경주부 남쪽 4리쯤에 있는데, 다만 보이는 것은 늙은 수목들이 무성한 것뿐이다. -박종(朴琮, 1735~1793), ‘동경유록’(東京遊錄) 오늘날 경주를 방문한 관광객 상당수는 계림을 스쳐지나가거나 아예 둘러보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계림은 경주를 찾은 선비들이 빼놓지 않고 방문하는 위상 높은 사적지 중 하나였다. 학계는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김씨 왕실의 시조 신화로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을 미추왕대 이후로 본다. 또한 신라의 56왕 가운데 38왕이 김씨였으니, 그 시조인 알지가 태어난 계림은 신라에서 가지는 위상도 그만큼 높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계림의 이러한 상징성은 그것이 나라 이름으로 사용된 점이나 이후 경주 지역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사용된 것을 통해서도 추정할 수 있다. 고려 충렬왕 34년(1308)부터 조선 태종 15년(1415)까지 경주의 명칭은 ‘계림부’(鷄林府)였다. ◆오래된 숲, 유구한 세월의 풍상 계림은 1963년 사적 제19호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첨성대에서 월성 방향으로 펼쳐진 넓은 잔디밭 사이로 난 길 오른편에 계림이 있다. 이곳엔 조선 순조 3년(1803)년에 세운 ‘계림김씨시조탄강유허비’(鷄林金氏始祖誕降遺墟碑, 계림 김씨 시조가 태어난 곳에 세운 비)가 남아있다. 비문(碑文)은 당시 규장각 직제학으로 있던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이 지었다고 한다. 김알지의 탄생에 관련된 설화와 김알지 이후의 김씨 왕가의 계보‧치적, 글을 쓰게 된 동기 등이 담겨 있다. 계림을 거닐며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눈에 띄는 큰 무덤 하나를 만나게 된다. 신라 첫 김씨 왕이었던 제17대 미추왕의 조카였던 내물왕(내물마립간, 356~402)의 무덤이다. 그는 비록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도움을 받으며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 아래 놓이게 만들었지만, 왕의 호칭을 이사금에서 ‘대군장’이란 의미의 마립간으로 바꾸고 김씨왕위 세습을 확립했다. 이후 52대 효공왕까지 김씨 왕조의 시대를 연 것이다. 내물왕릉 인근까지 이어지는 계림 숲은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느티나무와 고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사시사철 사진가들의 발길을 불러 모은다. 특히 가을이면 빽빽한 단풍이 화려한 색을 뽐낸다. 숲 속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교촌마을과 경주향교, 월정교 등도 만날 수 있다. 김운 역사여행가
첨성대는 월성 안에 우뚝이 서 있고 (瞻星臺兀月城中) 옥피리 소리 그 옛날 교화 머금었네 (玉笛聲含萬古風) 문물은 시절 따라 신라 때와 달라도 (文物隨時羅代異) 아! 산수만은 예나 지금이나 한가지네 (嗚呼山水古今同) 고려 말 문신 정몽주(1337~1392)가 쓴 ‘첨성대’(瞻星臺)란 시다. 정몽주의 두 아들이 아버지의 글을 모아 펴낸 문집 포은집(圃隱集)에 실려 있다.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수하에게 암살당하기 전 언제인가 경주를 다녀갔었던 듯하다. 첨성대를 마주한 그는 신라의 쇠망이 남의 일 같지 않음에 한숨처럼 슬픔을 읊는다. ◆1400년 이어진 첨성대 미스터리 첨성대는 1400년 전인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년) 때 만들어졌다. 첨성대가 세워지고 난 뒤 600년이 지나서 편찬된 ‘삼국유사’에 처음 첨성대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만들었다’(鍊石築瞻星臺)는 내용이 전부다. 이후 첨성대는 ‘별을 우러러본다’는 뜻의 ‘첨성’이란 이름을 통해 ‘천문대’로 인식됐고, 고려와 조선을 거쳐 지금까지도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조선시대인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첨성대에 대해 “사람이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했다”고 설명하고 있고, 정조 때 실학자 안정복(1721~1791)은 ‘동사강목’을 통해 “사람들이 가운데를 통하여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문화재청의 국보 제31호 첨성대 설명문도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첨성대는 정말 천체를 관측하는 곳이었을까. 첨성대의 건축 구조를 곰곰이 따져보면 천문관측소라고 하기엔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너무 많다. 조선시대 몇몇 유학자들도 불평을 했을 정도였다. 신라의 옛것은 산만 남은 줄 알았는데/ 뜻밖에 첨성대가 있음을 몰랐구나/ 선기옥형(고대의 천문관측기구)으로 정치를 한 것은 먼 옛날부터인데/ 이 제작은 황당하여 어디에 쓸까나 조선시대 성종 때 유학자인 김종직(1431~1492)은 ‘첨성대’란 시에서 첨성대에 대해 ‘제작이 황당하다’고 묘사했다.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수흥(1620~1690)도 ‘퇴우당집’에 첨성대의 구조를 묘사하면서 기묘하다고 했다. 첨성대 몸체는 원형이며, 회오리 병처럼 생겼다. 높이는 수십척이며, 허리 중간에 문이 나 있다. 땅에서 문까지는 사다리를 타야만 올라갈 수 있다. 그 문에서 위쪽은 안이 비어 있는데, 더위잡아야만 올라갈 수 있다. 정상까지는 수직이다. 제도의 기묘함이 그지없다. 이 같은 논란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지금까지도 학계에선 그 실체를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수미산설·우물설 등 다양한 주장 제기 첨성대에 대한 논란은 ‘첨성대가 별을 관측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면 이렇게 불편하게 제작된 이유는 무엇인가’란 의문에서 출발한다. 의문점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첨성대 중앙에 있는 가로세로 0.9m 규모의 ‘창’의 위치다. 첨성대 꼭대기에서 별을 바라보려고 했다면, 입구를 아래쪽에 두고 그 안쪽으로 계단을 설치하는 게 훨씬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상엔 첨성대 내부로 향하는 문이 없다. 따라서 관측자는 지상에서 사다리를 타고 3.76m를 올라가서 몸을 구부려 좁은 창으로 진입한 뒤, 다시 사다리를 타고 3.38m 위의 꼭대기로 올라가야 한다. 둘째로는 그렇게 올라간 첨성대 꼭대기도 관측을 하기엔 불편해 보인다는 점이다. 우물 정(井)자 모양의 정자석으로 난간을 치고 남은 공간은 가로세로가 각각 2.2m로 좁다. 바닥은 판석으로 덮어두어 내부에서 올라와 닫을 수 있게 해두었는데, 혼천의 등 천문관측 기기를 설치하고 두 사람이 일을 하기에도 불편했을 것이다. 게다가 정자석 등 첨성대 구조물은 특정한 방위를 가리키지 않고 있다. 이를테면 정자석이 각각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면, 관측자는 좀 더 쉽게 관측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천문대 설’에 대한 반론의 핵심이다. 이런 의문으로 인해 첨성대는 근대 학계의 최대 논쟁거리로 부상했다. 1973년 한국과학사학회가 주최한 제1차 첨성대 토론회, 1979년 소백산 천체관측소에서 진행된 제2차 토론회, 1981년 경주에서 개최된 제3차 토론회 등이 이어졌고, 다양한 주장이 제기됐다. 태양에 비치는 첨성대의 그림자로 시간과 절기를 측정했다는 규표설, 중국의 천문서인 ‘주비산경’의 원리에 따라 수학적 원리와 천문현상의 숫자를 형상화했다는 주비산경설, 불교의 수미산을 형상화한 상징적 건축물이라는 수미산설, 최상부에 우물 정(井)자 형태 돌을 얹었다는 점에서 우물의 상징이 투영된 우물설 등이 대표적이다. 반면, 천문대를 고수한 학자들은 첨성대 건립 이후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천문 기록이 네 배 이상 늘어난 점, 특히 행성에 관한 기록이 눈에 띄게 증가한 점을 내세웠다. 최대 쟁점인 중앙 창의 위치에 대해서는 별을 관측하는 밤에 사나운 들짐승으로부터 관측자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설계였다는 가설도 나왔다. ◆하늘과 관련된 포괄적인 의미의 건축물 최근엔 첨성대가 ‘현대적인 의미’ 혹은 ‘본격적인 의미’의 천문대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데에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학자들 사이에서도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분위기다. 요약하자면 ‘첨’(瞻)이라는 한자엔 ‘앙망’의 뜻이 내포돼 있는 만큼, ‘첨성’의 의미를 ‘별을 관측하는’ 곳이 아닌 ‘별을 숭모하는’ 곳 정도로 해석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한국학호남진흥원 서금석 박사는 최근 첨성대 해석과 관련한 지금까지의 다양한 주장을 분석했다. 그는 모든 이설이 천체 관측과 관련된 천문대설을 완벽히 부정하지는 않았다고 분석하면서 “첨성대는 천문대뿐만 아니라 다른 기능도 수행한 다목적 공간이었을 것”이라며 “별을 보는 첨성(瞻星)뿐만 아니라 점을 치는 점성(占星) 등의 역할도 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사실 첨성대가 축조되었던 시절엔 천문·정치·종교·제의·농업은 서로 분리된 게 아니었다. 태양과 별은 절대 신성의 존재였고 그것을 우러르는 것이 정치적·종교적·문화적 제의의 요체였다. 그렇다 보니 천문 관측은 농경이나 종교, 신앙과 밀접했을 것이다. 이 같은 천문관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가 상상하는 ‘현대적인 의미’의 천문대, 다시 말해 관측기구를 만들어놓고 사람이 올라가 하늘을 관측했느냐 아니냐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결국 신라 첨성대는 하늘과 관련된 포괄적인 의미의 건축물, 넓은 의미의 천문대가 아니었을까. 김운 역사여행가
신라 개국의 시조 혁거세 新羅始祖赫居世 알을 깨고 나온 자태 빼어나 剖卵生成岐嶷姿 동국의 천 년 왕업 창건하였으니 東國千年王業創 지금도 사람들 탄생이 기이하다하네 至今人道誕生奇 조선 중기 학자 성여신(成汝信, 1546~1632)의 시문집인 ‘부사집’(浮査集) 권1에 실린 ‘나정’(羅井)이란 시다. 다음은 ‘삼국유사’ 속 나정에 관한 기록이다. 양산(楊山) 아래 나정(蘿井) 옆에서 이상한 기운이 땅에 일고 무릎을 꿇은 흰 말이 있었다. 그곳으로 찾아가 살펴보니 보랏빛 큰 알이 하나 있었다. 말은 사람들을 보자 길게 소리쳐 울다가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알을 깨뜨려 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생김새가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들 놀라 아이를 동천에서 목욕을 시키니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절로 춤을 추고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밝게 빛났다. 이 두 글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 나정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탄생 신화가 깃든 신라의 상징적 유적지다. 혁거세의 무덤으로 알려진 오릉에서 남동쪽으로 1㎞ 거리, 소나무 숲 속에 감춰진 공터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4차례 발굴조사로 드러난 역사적 실체 나정에 대한 발굴조사는 2002년부터 2005년까지 네 차례 있었다. 발굴조사 이전엔 일제강점기에 새로 세운 유허비(遺墟碑)와 전각이 있고, 전각의 북쪽에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 초석 다섯 개가 있었다. 전각과 화강암 초석 둘레엔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전각의 북쪽에 있는 네모난 초석 중 중앙에 있는 가로 세로 1.3m짜리 돌덩이가 우물이 있던 자리라고 생각했다. 발굴 결과 이례적인 팔각 건물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다. 더구나 팔각 건물터에선 ‘義鳳四年’(의봉 4년, 679년)이라고 새겨진 기와가 발견돼 문무왕의 삼국통일 직후 증축이 이뤄진 사실도 확인됐다. 팔각형 건물의 용도에 대해선 많은 의견이 있었으나, 출토된 기와 상당수가 월성과 안압지, 황룡사 터 등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고, 당삼채나 유약이 발린 도기 등이 출토된 것으로 미뤄 제사와 관련된 건물로 추정됐다. 또, 유적에서 수습된 ‘生’(생)자가 새겨진 기와 역시 시조의 탄생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됐다. 사실 나정은 조선시대부터 진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초기 기록을 불신한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 역시 나정을 역사가 아닌 허구로 여겼다. 그러나 신라시대 팔각 건물터가 발굴되면서 나정은 역사적 실재라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특히 초기 철기시대 ‘제의용 환호’(環濠, 마을이나 제단을 둘러싼 도랑)가 발견돼 눈길을 끌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기록된 박혁거세의 건국 연대(기원전 57년)와 비슷한 시점에 나정이 신성시됐음을 보여주는 근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우물이 있던 자리라고 전해지던 중앙의 화강암 초석 자리는 우물 유적이 아니라 팔각형 건물 중앙부에 나무 기둥을 세우기 위한 초석 자리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대신 이 초석 자리에서 남쪽으로 4~5m가량 떨어진 곳에서 새로운 구덩이 터가 발견됐다. 발굴단은 이 구덩이 터에 대해 강돌을 밑에 설치한 것 등을 근거로, 처음엔 실제 우물이었으나 후대에 매립된 것으로 판단하고 발굴보고서를 작성했다. ◆나정, 우물이 아닐 수도 학계에선 팔각 건물이 국가 제의시설이라는 발굴단의 의견에 대해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분위기다. 반면, 발굴단이 우물터로 지목한 유구에 대해선 건물 기둥의 흔적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도 많다. 이를 근거로 일각에선 지금의 나정을 신라시대의 나정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발굴단이 우물터라고 주장한 구덩이 유적이 기둥 주초 시설이므로, 이곳이 신라시대의 나정이 될 수는 없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은 얼마나 타당할까. 이들을 포함해 대다수 사람들은 나정(蘿井)이 ‘우물’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어느 대목에도 나정이 우물이란 언급은 없다. 박혁거세가 천상(天上)에서 백마(白馬)가 나정이란 곳으로 운반해온 자주색 알(紫卵)에서 태어났다는 내용이 전부다. 나정을 우물로 인식한 것은 조선시대 이후 일이다. 이를테면 조선 현종 10년(1669년)에 편찬한 경주지역 지리지인 ‘동경잡기’(東京雜記) 권2 고적(古蹟)조에서 나정을 소개하면서 ‘알영정’(閼英井), ‘금성정’(金城井) 등 우물이라는 게 명백한 곳과 함께 언급하는 식이다. 우물을 뜻하는 ‘井’(정)이란 글자가 들어간다고 해서 이곳이 우물이라는 근거는 될 수 없다. 같은 논리대로라면 전북 정읍(井邑)은 우물 속에 들어앉은 도시가 된다. ‘정’이란 글자는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된 땅을 지칭하기도 한다. 저잣거리를 시정(市井)이라 하는 까닭은 그곳에 우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거리가 ‘十’자 모양으로 서로 교차하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의 주(周)나라에서 시행했다고 하는 토지 구획제도인 ‘정전제’(井田制)도 마찬가지다. 나정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를 처음으로 씻긴 곳이 동천(東泉)이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 또한 나정이 우물이 아니라는 또 다른 증거다. 나정이 우물이라면, 우물에서 태어난 아이를 다른 곳(동천)에 데려가 씻길 이유가 있었을까. 김운 역사여행가
우물에 나타난 신룡이 낳은 여자 아이 (井現神龍誕女兒) 늙은 할멈이 거두어 길러 왕비가 되어 (老嫗收養作王妃) 하늘이 내린 어진 덕 규중의 법도를 세우니 (天生賢德成閨範) 두 성인이 한마음으로 지극한 정치 펼쳤네 (二聖同心致至治) 조선 중기 학자 성여신(成汝信, 1546~1632)의 시문집인 ‘부사집’(浮査集) 권1에 실린 ‘알영정’(閼英井)이란 시다. 성여신은 남명 조식의 제자로, 임진왜란 이후 문란하고 투박해진 풍속을 바로잡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글씨와 문장에 뛰어났고 산수유람을 즐겼다고 한다. 역사서를 즐겨 읽어 역사에도 남다른 안목을 지녔던 그는 중년에 경주를 유람한 뒤 이곳의 유적을 소재로 27수의 절구를 남겼다. 그의 작품은 역사를 거울 삼아 현실을 구제하려는 경세사상(經世思想)이 반영된, 17세기 전반 선비들의 역사 인식을 살펴볼 수 있는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시는 그 중 하나다. ◆알영의 탄생 설화 깃든 우물 오릉의 숭덕전(崇德殿) 뒤편에는 담장으로 둘러싸인 비를 세워 놓은 건물이 있고, 건물의 뒤쪽에 알영정이라고 전하는 우물이 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부인인 알영의 탄생 설화가 깃든 곳이다. 아리영정(娥利英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렀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삼국유사’ 기록에 따르면 알영정의 위치는 사량리(沙梁里)에,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 기록엔 경주부의 남쪽 5리에 있다고 한다. 18세기 초 박씨 왕들의 무덤이 정해지면서 오릉 내에 있던 우물이 자연스럽게 구전(口傳)되다가 1930년대에 알영정으로 지정되면서 비석과 비각을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측 설명이다. 우물은 길이 200㎝, 너비 50㎝ 내외의 석재 3매로 덮여 있어 전체 규모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주변엔 옮겨온 것으로 추정되는 팔각형 석재와 주춧돌 등이 남아 있다. 남쪽엔 1931년 세운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碑, 신라 시조의 왕비가 태어난 곳에 세운 비)’가 있고, 그 뒷면엔 비석을 세운 내력이 기록돼 있다. ◆용의 옆구리에서 태어난 성인(聖人)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알영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다소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아래는 ‘삼국사기’ 기록이다. 5년(기원전 53년) 봄 정월에 용이 알영정에 나타났다. 용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는데, 노구(老軀)가 보고서 기이하게 여겨 거두어 길렀다.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성장하면서 덕행과 용모가 빼어나니, 시조가 그 소식을 듣고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행실이 어질고 내조를 잘하여 이때 사람들이 그들을 두 성인(聖人)이라고 일컬었다. ‘삼국유사’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다음은 ‘삼국유사’가 전하는 박혁거세와 알영의 탄생 이야기다. 양산(楊山) 아래 나정 옆에서 이상한 기운이 땅에 일고 무릎을 꿇은 흰 말이 있었다. 그곳으로 찾아가 살펴보니 보랏빛 큰 알이 하나 있었다. 말은 사람들을 보자 길게 소리쳐 울다가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알을 깨뜨려 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생김새가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들 놀라 아이를 동천에서 목욕을 시키니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절로 춤을 추고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밝게 빛났다. 이에 그 아이를 혁거세 왕이라 이름하고…(중략)…이날 사량리(沙梁里)에 있는 알영정에 닭을 닮은 용이 나타나서 왼쪽 옆구리로 어린 여자 아이를 낳았다. 얼굴과 모습이 매우 고우나 입술이 마치 닭의 부리와 같았다. 이에 월성 북쪽 냇물에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떨어졌다…(중략)…두 성인(聖人)은 13세가 되자 오봉 원년 갑자(기원전 57년)년에 남자는 왕이 되어 이내 그 여자를 왕후로 삼았다. 두 기록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박혁거세와 알영의 나이다. ‘삼국사기’에서 알영이 태어난 때는 박혁거세가 즉위한 지 5년이 지난 때었다. 박혁거세가 13세에 즉위했다고 하니, 혁거세와 알영의 나이는 18살이나 차이가 난다. 반면, ‘삼국유사’는 박혁거세가 알을 깨고 나온 직후, 같은 날 바로 알영이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으로 보자면 혁거세와 알영은 동갑내기이고, 이들은 13세가 되던 해 결혼한다. ◆건국 신화의 또 다른 주인공 ‘삼국유사’엔 ‘삼국사기’에선 보이지 않던 다음과 같은 기록도 등장한다. 알영의 입술이 마치 닭의 부리 같았으므로, 월성 북천(北川)에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부리가 떨어졌다는 내용이다. 이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을 신성한 존재로 부각하기 위한 작업의 결과로 보인다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설명한다. 고대기 양대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시조인 혁거세뿐만 아니라 시조비인 알영의 독자적인 탄생담이 실려 있다는 점, 두 역사서 모두 혁거세와 알영을 ‘두 성인’(聖人)으로 기록한 점 등도 이 같은 견해를 뒷받침한다. 건국신화에서 시조왕의 왕비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다룬 이유는 신라의 건국과정에서 중요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독자적인 탄생담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알영 역시 신라 형성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 유력 집단의 시조 전승으로 보인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다만, 구체적인 해석에 있어선 의견이 갈린다. 일부 학자들은 알영의 탄생 설화에서 계룡(鷄龍)이 등장하고 후대 김씨의 시조인 알지의 탄생담에서도 닭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알영을 닭 토템을 가진 김씨 부족과 연관된 것으로 판단한다. 반면, 알영 설화는 용 토템에 가까우며 닭 토템을 가진 김씨 세력과 연결하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그밖에 신라 건국신화에서 알영의 독자적인 탄생담이 남아 있다는 점, 알영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 탄생지 알영정이 시조릉으로 전해지는 오릉 권역 내에 위치한 점 등으로 미뤄, 알영은 사로국 단계에서 건국시조로 숭상되었으며, 후대 혁거세를 상징으로 하는 세력이 신라를 장악하면서 혁거세를 시조왕으로 알영은 시조비로 하는 건국신화가 형성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김운 역사여행가
울창한 고목에 저녁안개 짙어지고 古木森森夕霧冥 혁거세의 묘소 흙 만두 모습이네 赫居遺墓土饅形 지금은 초동이 소를 타고 지나다니며 只今樵牧騎牛過 이끼를 죄다 밟고도 혼령께 빌지 않네 踏盡荒苔不乞靈 조선 중기의 문신 홍성민(洪聖民, 1536~1594)의 시문집 ‘졸옹집’(拙翁集)에 실린 ‘과혁거씨능전’(過赫居氏陵前)이란 시다. 시의 제목은 ‘혁거씨 왕릉 앞을 지나다’란 의미다. 홍성민은 경상감사로 재직하던 1580년과 1581년, 1591년 세 차례 경주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는 경주 일대를 둘러본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 기록인 ‘계림록’(雞林錄)엔 반월성과 계림, 첨성대, 봉황대, 금장대, 포석정, 백률사, 분황사, 김유신묘, 오릉, 이견대, 대왕암, 불국사 등을 둘러본 내용이 상세히 담겨 있다. 그의 시문집에도 경주와 관련된 시가 여러 편 등장하는데, 이 또한 경주 방문 시기에 지어졌거나, 이후 그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들이다. 그가 ‘혁거씨능’이라고 표현한 곳은 지금의 ‘오릉’(五陵)이다. 경주 시내 남쪽, 월성 인근에 있는 오릉은 모두 5기의 봉분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 건국 시조인 혁거세 거서간과 알영부인, 2대 왕인 남해 차차웅, 3대 유리 이사금, 5대 파사 이사금이 묻혀 있다고 전한다. 모두 초기 박씨 가문 왕들이다. ◆삼국사기‧삼국유사…서로 다른 유래 이야기 4명의 왕과 알영부인이 묻혔다는 근거는 ‘삼국사기’ 기록에 따른 것이다. ‘삼국사기’는 혁거세 거서간과 왕비 알영, 남해 차차웅, 유리 이사금, 파사 이사금 모두 ‘사릉’(蛇陵)에 장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릉은 오릉의 또 다른 이름이다. 사릉(蛇陵)은 장례를 치를 때 큰 뱀이 나타나서 붙은 이름이다. 반면 ‘삼국유사’는 박혁거세의 장례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되던 어느 날 왕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7일 뒤에 그 죽은 몸뚱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그러더니 왕후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한다. 나라 사람들은 이들을 합해서 장사 지내려 했으나 큰 뱀이 나타나더니 쫓아다니면서 이를 방해하므로 오체(五體)를 각각 장사 지내어 오릉을 만들고, 또한 능의 이름을 사릉이라고 했다. 담엄사 북릉(北陵)이 바로 이것이다. 그 후 태자 남해왕이 왕위를 계승했다. ‘삼국유사’의 설명대로라면 오릉은 혁거세왕의 단독 무덤이 되고, ‘삼국사기’ 기록으로 보자면 신라 초기 왕가의 능역이 되는 셈이니 완전히 배치되는 해석이다. 어찌됐던 이후 편찬된 각종 지리지는 오릉을 혁거세왕의 무덤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세상 사람들도 오릉을 혁거세왕의 무덤으로 인식한 듯하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만부(李萬敷, 1664~1732)가 쓴 ‘동도잡록’(東都雜錄)에 나오는 글이다. 혁거세의 묘는 또한 남쪽의 나무숲 속에 있다. 흙무더기를 살펴보면 사방과 중앙에 다섯 봉분을 만들었는데, 그 형상이 혹은 둥글거나 혹은 길고 혹은 비스듬히 하늘로 올라가 있다. 다음은 조선 영조 때 문신을 지낸 김상정(金相定, 1722~1788)이 1760년 경주의 고적을 둘러보고 쓴 ‘동경방고기’(東京訪古記) 기록이다. 건물 안에는 시조왕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었다. 뜰로 들어가서 비석을 보고는 협문(夾門)을 나와 수백 보를 가니 능(陵)이 있었는데 봉분의 형상이 아주 컸다. 그 수가 5개가 이어져서 마치 방위를 안고서 타원으로 두른 것 같았다. 크기는 같지 않았지만 따질 것은 못 되었다. 김상정이 이 글에서 언급한 ‘건물’은 오릉 남쪽에 있는 숭덕전(崇德殿)이다. 숭덕전은 세종 11년 때인 1429년 지어졌고, 경종 3년인 1723년 숭덕전으로 사액됐다. 영조 27년인 1751년 나라에서 명을 내려 시조왕 위패에 ‘왕’(王)자를 쓰게 하고 묘비를 세우도록 했다. 8년 뒤인 1759엔 우참찬 정익하가 지은 신도비가 세워졌다. 인근엔 알영이 태어났다고 전하는 알영정이 있다. ◆봉분 아래 잠든 신라 건국의 흔적 현재 오릉은 무덤 주인에 대한 논란의 과정을 거쳐 ‘삼국사기’ 기록처럼 혁거세 거서간과 알영왕후, 남해 차차웅, 유리 이사금, 파사 이사금의 무덤으로 규정하고 있다. 오릉은 중앙의 3호분을 중심으로 서쪽엔 1호분, 남쪽엔 2호분, 북쪽엔 4호분, 동쪽엔 5호분이 위치한다. 4기는 봉분이 둥근 원형분이고 1기는 표형분(표주박 모양의 무덤)이다. 내부구조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돌무지덧널무덤은 마립간 시대의 대표적 무덤 양식이다. 신라 건국 초기 무덤 양식은 널무덤이나 덧널무덤이다. 이런 이유로 오릉이 신라 초기의 왕릉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이와 관련해 연관지어 생각해볼만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눌지 마립간) 19년(435년) 2월에 역대 원릉을 수리하였다. 여름 4월에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다. 눌지 마립간은 신라 제19대 왕이자 김씨 왕조가 시작된 이후 세 번째 왕이다. 눌지왕 기준으로 선대 군주는 제13대 미추 이사금, 제17대 내물 이사금, 제18대 실성 이사금 3명이다. 이 기록에 대해 상당수 학자들은 “3기 밖에 없는 김씨 선대 왕릉만 수리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본다. 눌지 마립간이 왕권을 강화하면서 박씨 왕들의 무덤도 마립간 시대의 대표적 형태인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재정비해 오늘날까지 이른 것이 아닐까 하는 견해다. 김운 역사여행가
신라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20여 기의 고분이 모여 있는 대릉원. 이곳 무덤들은 미추왕릉을 제외하고는 모두 주인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곳엔 한국 고분 발굴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무덤 2기가 있다. 천마총(天馬塚)과 황남대총(皇南大塚)이다. 왕릉급인 두 무덤이 쏟아낸 유물은 유물의 방대함과 화려함으로 1970년대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한국 고분 발굴사의 획기적 ‘사건’ 천마총 발굴은 1973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라 진행됐다. 1971년 정부는 대통령의 지시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하고, 그 일환으로 가장 큰 고분인 황남대총(당시 98호분)을 발굴한 뒤 내부를 복원 공개하기로 했다. 그러나 발굴은 곧바로 시작되지 못했다.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발굴 경험이 없던 당시 고고학계로선 높이가 23m, 길이가 120m에 이르는 황남대총 발굴이 매우 부담스러웠다. 고민을 거듭하던 문화재관리국은 황남대총 발굴에 앞서, 바로 옆에 있는 155호분을 연습 삼아 먼저 파보기로 결정한다. 1973년 4월 6일 발굴이 시작됐다. 155호분은 98호분보다는 작았으나 지름이 47m, 높이가 12.7m의 크기여서 이 또한 발굴이 만만치 않았다. 3개월 후인 7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이 발굴 현장을 찾아 98호분 발굴에 조속히 착수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발굴의 무게중심이 98호분 쪽으로 쏠리는 듯했으나, 같은 달 15일 금제 관식 출토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155호분은 관심을 회복하게 된다. 무덤의 지위도 ‘왕릉급’으로 격상됐다. 하지만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8월 22일 부장품 궤짝에 쌓인 말갖춤을 들어올리자 그 아래에서 갈기를 휘날리며 하늘을 나는 모습의 천마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작나무 껍질 위에 찬연한 색조로 유려하게 그려진 그림 2장. 지금까지 전해지는 신라의 유일한 그림 유물 천마도(天馬圖)는 그렇게 세상에 나오게 된다. 98호분 발굴은 이듬해인 1974년 7월 7일이 돼서야 시작됐다. 남북으로 무덤 두 기가 붙어 있는 표주박 모양의 쌍분이었기에, 먼저 북쪽 봉분부터 파 들어갔다. 10월 28일 조사원들의 손길이 드디어 목관 내부를 향했다. 목관 전체를 뒤덮은 검은 흙을 제거하자 금관, 금과 유리를 섞어 만든 목걸이, 금팔찌와 금반지, 금허리띠가 가지런한 모습으로 드러났다. 종류나 수량 모두 천마총 등 여타 신라 고분을 압도했고, 무덤 주인공은 5세기 무렵 신라왕으로 확정되는 듯했다. 그러나 발굴이 끝나갈 무렵 새롭게 노출된 은제 허리띠 장식에서 ‘부인대(夫人帶)’란 글자가 확인되면서 무덤 주인공의 지위는 왕비로 바뀌게 된다. 발굴이 끝난 후엔 이 무덤 속 유물 가운데 해외에서 들여온 유물도 다수가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고구려산 금귀걸이, 서역산 보석 장식 금팔찌, 중국 남조(南朝)에서 들여온 청동다리미와 도자기, 동로마와 페르시아산 유리그릇 등이 그것이다. 황남대총은 한 번 무덤을 쓴 다음 다시 사람이나 물품을 추가로 묻을 수 없는 구조인 만큼, 무덤 속 유물들은 무덤 주인이 묻힐 때 함께 묻힌 것이었다. ◆유일하게 내부를 볼 수 있는 신라고분 천마총 천마총에선 금관을 비롯해 모두 1만1000여점이, 황남대총에선 5만8000여점의 유물이 각각 출토됐다. 이렇게 많은 유물이 쏟아졌지만, 이들 무덤의 주인은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관련당국은 대표적인 출토 유물의 이름을 무덤 이름에 활용하기로 했다. 1974년 155호분의 천마총 명명(命名)이 결정된 이후 예상치 않은 일도 벌어졌다. 1981년 경주 지역 김씨 문중에서 “155호분은 분명 신라 왕실의 무덤일 텐데, 왜 하필 말의 무덤이라 이름을 붙이느냐”며 국회에 청원을 낸 것이다. 천마총이라고 하면 천마의 무덤이라는 뜻으로 들린다는 의미였다. 이를 두고 문화재위원회가 재심까지 했지만 그들의 주장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98호분은 좋은 이름을 이미 다른 고분이 다 써버린 탓에 그냥 황남대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황남동의 대형 무덤이라는 뜻이다.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에만 붙인다. 총(塚)은 무덤의 주인공이 밝혀지지 않았을 때 붙이는 명칭이다. 천마총과 황남대총은 왕이나 왕비급의 무덤일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아니어서 아쉽게도 총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천마총은 신라 고분 가운데 내부에 들어가 볼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다. 당초엔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라 황남대총 내부를 공개할 계획이었으나, 결국엔 천마총 내부를 공개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천마총 내부는 무덤 내부 구조와 함께 출토 상황을 보여준다. 무덤의 한가운데를 동서로 절개한 단면을 보여주는데, 돌무지(積石)와 덧널(목곽·木槨), 널(목관·木棺)의 규모나 구조, 전체 크기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꾸민 무덤 내부가 발굴 당시 실제 모습과 다소 차이가 있다는 지적이 일었다. 이에 따라 내부 전시 공간을 발굴 당시 모습에 최대한 가깝게 개선해 2018년 다시 문을 열었다. ◆6만9천여 유물 대부분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천마총과 황남대총 유물은 거의 대부분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상설전시실인 신라역사관 내 신라 황금문화를 집중 조명한 제2전시실에서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 발굴한 유물을 만나볼 수 있다. 황남대총 코너에선 관 모양 나무 틀 속에 피장자가 착용했을 유물을 배치하고 유리를 얹었다. 금동관 부속품을 피장자의 머리 방향에 쓰러뜨리고 허리 부분에 금제허리띠를 풀어놓는 식이다. 그리고 주변 진열장엔 무덤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부장품을 쌓아놓듯 전시해, 당시 권력자의 힘이 어느 정도 막강했는지를 보여준다. 천마총 코너는 사진촬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공간이다. 캄캄한 방 한가운데 천마총에서 나온 금관과 금허리띠 등 단 2점만 전시하고 있는데, 금관이 성인 눈높이쯤에 있어 얼굴 구도를 금관에 맞춰 사진을 찍으면 마치 금관을 쓰고 있는 것처럼 찍힌다. 좀 더 그럴듯한 사진을 남기기 위해 여러 번 찍는 이들도 있고, 사진으로나마 금관을 써보려고 순서를 기다리기도 한다. 김운 역사여행가
위기일발의 외로운 성 적병을 맞아 一髮孤城受敵兵 막을 좋은 계책 없이 무너질 형국이었는데 禦無良策勢將傾 갑자기 신인이 나타나 전쟁을 도왔다니 忽有神人來助戰 지하에서 암암리 거든 줄 바야흐로 알겠네 始知陰騭自冥冥 조선 중기 학자 성여신(成汝信, 1546~1632)의 시문집인 ‘부사집’(浮査集) 권1에 실린 ‘미추왕릉’(味鄒王陵)이란 시다. 성여신은 남명 조식의 제자로, 임진왜란 이후 문란하고 투박해진 풍속을 바로잡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글씨와 문장에 뛰어났고 산수유람을 즐겼다고 한다. 역사서를 즐겨 읽어 역사에도 남다른 안목을 지녔던 그는 중년에 경주를 유람한 뒤 이곳의 유적을 소재로 27수의 절구를 남겼는데, 이 시는 그 중 하나다. ◆미추왕릉에서 비롯된 ‘대릉원’이란 이름 경주의 독특한 풍경 중 하나는 도심 한 가운데 거대한 수많은 고분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1000여년 전을 살았던 옛 사람들의 흔적과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기에, 시공간을 초월한 묘한 신비감마저 든다. 이들 고분은 노동동과 노서동, 황남동, 황오동, 인왕동에 이르는 평지에 150여 기가 집중적으로 모여 있다. 이곳은 그동안 노서리 고분군(사적 39호), 황남리 고분군(사적 제40호), 황오리 고분군(사적 41호), 인왕리 고분군(사적 42호) 등으로 각각 따로 관리돼왔으나, 2011년 문화재청이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해 사적 제512호 ‘경주 대릉원 일원’이란 이름으로 통합해 관리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대릉원’은 각 고분군 중에서도 가장 큰 무덤 규모를 자랑하는 황남동 고분군이다. 담장을 둘러 공원처럼 관리되고 있는 이곳엔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천마총(天馬塚)·황남대총(皇南大塚)을 비롯해 신라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20여기의 고분이 모여 있다. 400여년 전 성여신이 마주했을 미추왕릉도 이곳에 있다. 무덤은 반구형의 봉토분으로 경주 시내에 소재한 고분 중에서는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구조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으로 추정된다. 대릉원 남쪽 담장 너머엔 미추왕과 문무왕(文武王), 경순왕(敬順王)의 위패를 모신 숭혜전(崇惠殿)이 있다. 원래 경순왕을 모신 곳으로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1794년(정조 18)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었는데, 미추왕의 위패를 모신 것은 1887년(고종 24)의 일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 문무왕의 위패를 봉안했다고 한다. 대릉원 일원의 수많은 고분 가운데 미추왕릉을 제외하고는 관련 기록이 부족해 대부분 왕릉으로 비정받지 못했다. 우리 역사상 가장 큰 규모 무덤으로 1970년대 발굴조사를 통해 5만점이 넘는 유물이 나온 황남대총조차 무덤 주인공이 누구인지 밝힐 수 있는 근거가 아직까지 나오고 있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신라가 멸망한 뒤 아무런 기록도 없이 세월이 한참 지난 시점에서, 어느 고분이 누구의 무덤인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경주에 있는 고분 대다수가 인공으로 만든 언덕으로 치부됐다. 반면, 미추왕릉 만큼은 왕의 무덤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듯하다. 다음은 관련 기록이다. 미추왕릉, 경주부(府)의 남쪽 황남리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년 간행) 권21- 미추왕릉은 인공으로 만든 산의 사이에 있고, 그 크기는 인공으로 만든 산과 다름이 없다. 읍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나무 베는 것을 금하고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김수흥(金壽興, 1626∼1690) ‘남정록’(南征錄)- 미추왕릉에 이르렀다. 이 능은 죽엽릉(竹葉陵)이라고 하는데, 높이와 넓이를 시조의 왕릉과 비교해보면 또 배가 된다. -김상정(金相定, 1722~1788) ‘동경방고기’(東京訪古記)- 이런 이유로 ‘대릉원’이란 이름도 미추왕릉에서 비롯됐다. ‘삼국사기’에 ‘미추왕을 대릉(大陵)에 장사지냈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현대에 와서 붙여진 이름이다. ◆죽엽군(竹葉軍)과 김유신의 혼백 이야기 무덤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은 신라 제13대 왕이다.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의 7대손으로, 김씨 가운데 최초로 왕위에 올랐다. 262년 왕위에 올라 284년 승하할 때까지 23년간 재위했다. 여러 차례 백제의 공격을 물리쳤으며, 농업을 장려하는 등 내치에 힘썼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미추왕의 무덤과 관련된 두 가지 이야기를 전한다. 제14대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 때 이서국(伊西國) 사람들이 수도 금성을 공격해 왔는데,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귀에 대나무 잎을 꽂은 군사들(죽엽군)이 나타나 함께 싸워 적을 물리쳤다. 싸움이 끝난 뒤 미추왕릉 앞에 대나무 잎이 잔뜩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선왕(미추왕)이 몰래 도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때문에 미추왕의 무덤을 죽현릉(竹現陵)으로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세월이 한참 지난 뒤인 제36대 혜공왕(惠恭王, 재위 765∼780) 때가 배경이다. 779년 4월 김유신의 무덤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준마를 타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장군(김유신)과 같았다. 그가 죽현릉으로 들어간 뒤 능 속에서 무엇인가 하소연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내용은 “신(김유신)이 평생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하였으며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이 변함없음에도, 경술년(770) 신의 자손이 죄 없이 죽임을 당하였으니, 신은 이제 먼 곳으로 옮겨 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해 힘쓰지 않을까 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미추왕은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찌할 것인가. 전과 같이 힘써 달라”며 세 번을 설득했으나 김유신은 끝내 듣지 않고 회오리바람이 되어 무덤으로 돌아갔다.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진 혜공왕은 대신을 보내 김유신의 무덤에 가서 사과하고 공의 명복을 빌게 했다. 또한 나라 사람들이 김유신의 노여움을 풀어준 미추왕의 덕을 기려 삼산(三山, 신라에서 크게 제사를 지내는 세 산)과 함께 제사를 지내고, 미추왕릉의 서열을 오릉의 위에 두고 대묘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미추왕의 영혼이 신라를 돕고,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의 영혼을 달래 나라를 수호했다는 이들 두 이야기를 두고, 김알지의 후손인 미추왕을 호국신(護國神)으로 높여 김씨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부각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박씨‧석씨와 달리 김씨의 시조인 알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했기에, 김알지 대신 죽엽군과 김유신의 혼백을 등장시켜 미추왕을 신격화한 것이라는 견해다. 김운 역사여행가
저녁놀을 뚫은 천만근의 종소리 (聲穿暮靄千萬重) 읍성 남문이 밤을 알리며 닫힌다 (認是城南報夜鍾) 휘영청 달 밝은 봉황대 아래 길은 (明月鳳凰臺下路) 바람결에 여음이 끊어질 듯 이어진다 (餘音嫋嫋遠隨風) 조선 후기 학자 유의건(柳宜健, 1687~1760)의 시문집인 ‘화계집’(花溪集)에 실린 ‘봉대모종’(鳳臺暮鐘)이란 시다. 제목은 ‘봉황대의 저녁 종소리’란 뜻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천만근의 종’은 ‘에밀레종’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국보 29호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이다. 봉덕사종(奉德寺鐘)으로도 불린다.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 마당 한쪽에 전시돼 있다. 신종의 주인공인 신라 33대 성덕왕(재위 702~737)은 8세기 초반 35년간 재위하면서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국가경제를 안정화해 통일신라 전성기의 문을 연 왕이다. 고려의 문종, 조선의 세종대왕과 곧잘 비교된다. 성덕대왕신종은 36대 혜공왕(재위 765~780) 때인 771년 음력 12월 14일 완성됐다. 신종 몸체에 새겨진 ‘성덕대왕신종지명’ 등의 기록에 따르면, 성덕왕의 아들인 35대 경덕왕(재위 742~765)은 위대한 아버지를 추모할 목적으로 봉덕사를 원찰(願刹)로 삼고 여기에 걸기 위한 큰 종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경덕왕은 종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종은 그의 아들 혜공왕 대에 이르러 완성된다. 혜공왕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종을 봉덕사에 봉안했다. 이런 이유로 성덕대왕신종은 ‘봉덕사종’으로도 불렸다. ◆4차례 보금자리 옮긴 비운의 역사 이런 사연 속에서 탄생한 성덕대왕신종은 우리나라 금속공예를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 명성과는 달리 이 종은 1200여년의 세월 동안 이곳저곳을 떠도는 기구한 운명을 겪었다. 당초 신종이 설치됐다고 전하는 봉덕사는 오래전 폐사돼 그 위치가 분명하지 않다. 기록에 따르면 경주 북천(北川) 남쪽의 남천리 쯤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절은 성덕왕이 증조부인 무열왕(武烈王)을 위해 706년 창건했다는 것과, 성덕왕의 아들이자 경덕왕 형인 34대 효성왕(재위 737~742)이 738년 아버지를 위해 세웠다는 2가지 창건 기록이 ‘삼국유사’에 담겨 있다. 신종은 봉덕사에 처음 설치된 이후 고려를 거쳐 조선 초까지 700여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조선 초 숭유억불 정책으로 수많은 범종이 사라지게 됐고, 성덕대왕신종도 위기를 맞게 된다. 세종 6년(1424) 실록에 따르면, 당시 성덕대왕신종도 녹여서 무기를 만들자는 여론이 비등했으나, 왕은 “경주 봉덕사의 큰 종은 헐지 말라”고 명한다. 문화 예술을 숭상했던 성군 덕에 화를 면한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봉덕사에 큰물이 져서 건물은 떠내려가고, 무거운 종만 절터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 후 혜공왕 대에 이르러 (厥後惠恭王) 동천 물가에 절을 지었는데 (營寺東川傍) 그 절집 오래가지 못했지만 (招提久莫量) 신종은 누대보다 더 웅대했네 (鐘大逾魯莊) (중략) 절간 무너져 자갈밭에 묻히자 (寺廢沒沙礫) 신종은 그만 가시덩굴에 버려졌다 (此物委榛荒) 주나라 석고(북 모양의 돌 비석)와 흡사하여 (恰似周石鼓) 아이들이 두드리고 소는 뿔을 가는구나 (兒撞牛礪角) 조선시대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경주에 머물며 지은 ‘봉덕사종’이란 시의 일부다. 그는 31세가 되던 1465년 봄 경주 금오산(지금의 남산) 용장사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살다 6년 뒤인 1471년 서울로 떠났다. 그가 경주에 머물고 있을 시기는, 신종이 이미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옮겨간 이후였다. 김시습은 경주에 와서 봉덕사종의 사연을 접한 뒤, 자갈밭에 방치됐던 안타까운 과거와 제자리를 찾게 된 이야기를 노래했던 것이다. 봉덕사 폐사 시점은 1424년 이후 30년 사이 쯤으로 추정된다. 실록에 따르면 세종 6년(1424) 때만 해도 봉덕사는 존재했고, ‘큰 종’(성덕대왕신종) 또한 종루에 잘 달려 있었다. 그러나 단종 2년(1454)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엔 “(봉덕사가) 지금은 없어졌다. 큰 종이 있는데 771년 신라 혜공왕이 만든 것”이란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근거로 봉덕사는 1424년과 1454년 사이에 수해를 입어 폐사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후 성덕대왕신종은 세조 5년인 1460년에 이르러 새로운 거처로 옮겨진다. 남천(南川) 끝자락쯤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영묘사(靈廟寺)가 새 보금자리였다. 하지만 신종의 고단한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영묘사로 온 지 40여년 뒤 영묘사마저 화재로 소실되면서 또다시 노천에 버려지는 신세가 된 것이었다. 이후 1506년(중종 원년)에 남문 밖 봉황대 고분 밑에 종각을 짓고 또 다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신종은 이곳에서 408년 동안 불심을 일깨우는 범종(梵鐘)이 아닌, 경주읍성의 개폐 시각을 알리는 행정용 관종(官鍾) 역할을 했다. 유의건이 들었던 ‘봉황대의 저녁 종소리’도 이곳에서 울려 퍼졌던 것이었다. 신종의 기구한 운명은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진다. 신종은 1915년 일제에 의해 또다시 봉황대 종각에서 경주박물관 전신인 경주고적보존회 진열관(현재 경주시 동부동 경주문화원 자리)으로 옮겨지게 된다. 이후 1975년 5월 인왕동에 국립경주박물관이 새로 지어지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아기공양설은 허황된 이야기 이 종의 별칭인 ‘에밀레종’이란 이름은 종을 칠 때마다 ‘에밀레~, 에밀레~’ 하는 아이 울음소리가 났다고 해서 붙여졌다. 여기엔 널리 알려진 ‘인신공양 전설’이 깃들어 있다. 나라의 명을 받은 봉덕사 스님들은 종을 만들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전국을 돌며 시주를 받았다. 한 스님이 어느 가난한 집에 이르렀을 때 이 집 여인은 젖먹이를 내보이며 “저희 집에서 시주할 거라곤 이 아이뿐”이라고 말했다. 결국 스님은 아이를 어찌 받겠냐며 포기하고 돌아왔다. 이후 스님들은 시주받은 재물로 종을 만들었으나 소리가 나지 않았다. 어느 날 스님의 꿈에 부처가 나타나 “모든 시주가 같거늘, 어찌 여인의 뜻을 거절했느냐”고 꾸짖었다. 승려는 그 길로 아이를 데려와 쇳물에 넣고 종을 만들자 그제야 소리가 울렸다. ‘에밀레~, 에밀레~’ 하는 종소리가 마치 희생된 어린아이가 엄마를 애처롭게 부르는 것처럼 들렸고, 이런 이유로 에밀레종으로 부르게 됐다는 이야기다. 이 설화는 역사적 기록이 없을뿐더러 과학적으로 입증되지도 않았다. 종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사람의 뼈를 구성하는 인 성분이 검출되지 않았다. 게다가 불교에서 범종 소리는 부처님 말씀이자 자비심의 상징으로, 이 전설은 범종 조성 취지와도 전혀 맞지 않는다. 다만 이 전설은 근대 이후 서양 선교사들의 기록에서 비로소 등장하며 일제강점기 자료에서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다. 이를 근거로 일부에선 조선 말 경주의 유림 세력들이 불교를 폄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퍼뜨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현존하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신라 종 성덕대왕신종은 높이가 3.66m, 밑지름이 2.27m, 무게는 18.9t에 이른다.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큰 범종이다. 종의 몸통 앞뒤로 새겨진 비천상과 종을 매달기 위해 만든 용머리 모양 ‘용뉴’(龍鈕) 등 신종의 화려한 문양과 조각 수법도 통일신라 불교조각 전성기의 수준을 대변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종의 가장 큰 매력은 ‘소리’다. 맑고 웅장한 소리를 지니고 있으며 무엇보다 국내 범종 가운데 가장 긴 여운을 지녔다. 이 같은 종소리의 비밀은 일정하지 않은 몸체의 두께에 숨어 있다. 두께가 다른 부위에서 나는 소리들이 서로 교란을 일으키는 ‘맥놀이’ 현상이 반복되면서 끊어질 듯하면서 끊이지 않고 길게 이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성덕대왕신종 종소리는 2004년부터 직접 들을 수가 없다. 타종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타종을 계속할 경우 종에 충격을 줘 자칫 심각한 훼손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대신 국립경주박물관이 지난해 문을 연 ‘성덕대왕신종 소리체험관’을 방문하면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다. 2020년 타음 조사 때 얻은 음원에 입체 음향 시스템을 입혀 온몸으로 소리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종소리의 여운과 함께 8세기 신라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김운 역사여행가
경주는 1천년 동안 신라의 수도로 번성하며, 수많은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됐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 영원한 국가는 없듯, 신라 또한 고려에 자리를 내주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세월이 흐른 뒤 고려와 조선을 살았던 사람들의 눈에 비친 경주의 모습은 어땠을까. 선조들의 옛 기록을 타임머신 삼아, 지금과는 또 다른 ‘천년고도’ 경주를 만난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