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궁 복원에 문제가 있다.
동궁과 월지 터에 전각 3개 동을 우선 복원하였는데 일부에서 복원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전각의 구조는 대체로 원형의 모습을 최대한 반영하여 복원한 것 같지만 이곳에서 출토된 화려한 금속 장식물들을 전혀 활용하지 않은 점 등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시대 귀족들의 주택인 금입택이 있었다고 한다. 금입택이란 ‘금을 입힌 저택’이란 의미이다. 9세기 중엽 헌강왕 때 신라의 수도를 묘사하면서 금입택이 36채가 있었다고 하면서 그 저택의 명칭을 들고 있는데 실제로는 36채가 아닌 39채가 기록되어 있다.
신라시대의 궁궐 건물은 금속 장식물로 사치를 부리는 것을 경계했던 조선 시대와는 달랐을 것이다. 귀족들의 주택이 금입택이었다면 궁궐은 훨씬 더 화려했을 것이다. 즉 서까래나 난간 끝에 일일이 금동으로 된 장식 마개 등을 달고, 햇빛이 비치는 날이면 건물이 황금빛으로 번쩍거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이런 끼우는 금동 장식 유물들이 월지에서 다수 출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원된 3개 동의 건물에는 이런 장식 유물들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다. 또, 현재 월지에 복원된 3동의 건물이 섬세하게 조각된 장식 기와를 활용한 점은 이해가 되지만, 마무리가 좀 어설프다는 지적이 있다.
단청도 논란이 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고려 말에서 조선 시대에 유행한 상록(上 綠) 하단(下丹) 단청을 입혔기 때문이다. 발굴된 단청 항아리에 녹색 안료가 있었으므로 상록 하단 단청이 삼국시대에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은 단청이 보편화된 것은 고려 말부터다. 신라시대에 어떤 단청을 칠했는지에 대한 확실한 자료가 없어서 이 부분은 결론이 안 나오지만, 신라는 기둥을 붉게 하고 금색 단청을 칠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는데, 현재 칠해져 있는 상록 하단 단청은 신라시대의 것이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기록이라든가 당시의 건물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원형을 추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현재 계속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월지 북동쪽에서는 여러 대형 건물과 수세식 화장실을 비롯한 유물들이 대규모로 출토되고 있어서 동궁의 중심지가 월지 호수 서쪽이 아닌 북쪽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또 월지 북동쪽은 바로 황룡사 터와 쭉 이어진다. 동궁이 월지 북동쪽까지 뻗어 있었다면 자연스레 황룡사와 동궁, 월성의 궁궐 건물들이 서로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흥선대원군이 무리해서 크게 중건한 경복궁보다도 더 넓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현재까지 동궁의 발굴을 통해서 밝혀진 규모가 신라의 전성기에 비해 지나치게 작다는 것은 이번 월지 북동쪽 발굴 조사를 통해서 확인되었다. 그런데 동궁과 월지 복원 사업이 유네스코(UNESCO)의 반대로 중단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는 동궁과 월지의 복원이 ‘세계유산 협약 이행을 위한 운영지침’(86조)에 어긋난다며 복원에 대한 반대 의견을 경주시와 문화재청에 각각 통보했다. 이 때문에 동궁과 월지 복원이 사실상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유네스코의 중단 권고는 황룡사와 월성의 복원계획에도 차질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동궁과 월지의 야경이 경주의 대표적인 야간 관광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주말에는 입장객이 너무 많아 주차하기가 곤란하고 월지 주위 산책로도 상당히 붐빈다.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현재는 운영 시간이 22:00까지이고, 입장 마감 시간은 21:30이다. 외국인들도 상상 이상으로 많이 찾는다.
월지 야경을 본 후에는 가까이 있는 월정교, 첨성대와 대릉원의 야경도 볼만하다. 미국 정치학자인 조세프 나이(Joseph Nye)는 21세기는 군사력이나 경제력과 같은 하드 파워가 아니라 문화와 문화정책, 국가적 가치관 등 소프트 파워를 가진 문화국가가 강국으로 부각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최근 한류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다. 월지와 동궁을 비롯한 신라의 유적 유물을 적극 홍보하여 문화강국으로의 모습을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