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지 발굴조사 과정에서 이런 유물이 출토되었다. 지금까지 고고학의 연구 대상은 대부분이 묘지에서 출토된 유물이었다. 실생활에 사용하던 유물이 대규모로 발굴되기는 월지가 처음이었다. 월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총 3닝3000여 점이나 된다. 이 유물들은 당시 왕과 군신들이 이곳에서 연회를 할 때 못 안으로 빠뜨린 것과 935년에 신라가 멸망하여 동궁이 폐허가 된 후, 홍수 등 천재(天災)로 인하여 이 못 안으로 쓸려 들어간 것, 신라가 망한 후 누군가에 의해 동궁이 의도적으로 파괴되어 못 안으로 휩쓸려 들어간 것 등이 있을 것이다. 월지 서편의 건물이 있던 지역에서는 건축 부재와 불상 등이, 동쪽과 남쪽 호안에서는 목재, 토기류, 농기구 등이 뻘 층에서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유물로는 금동가위, 금동판불, 숟가락, 벼루, 주령구, 목간, 칠기류, 토기, 짐승 뼈, 다양한 기와, 전(塼) 등이다. 이전의 유물은 고분이나 절터에서 출토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출토품을 계기로 신라시대 궁중생활을 유추해 볼 수 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특히 출토유물 중에서 금동가위, 금동판불 등은 일본 정창원 소유 유물과 거의 같은 것으로, 이로 미루어 볼 때 일본 왕실의 보물창고인 쏘쇼인[正倉院] 소장 유물의 상당수가 신라시대의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당시 발굴된 유물은 국립경주박물관 월지관에 전시되고 있는데 단일 지역에서 발굴된 문화재로 박물관의 한 관을 조성한 것은 월지의 경우가 유일하다. 이곳 월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고분 출토품과는 달리 당시 왕실에서 실생활에 사용되었던 유물들이 대부분이다. 출토된 유물 중 금속공예품 중 식생활에 관계되는 그릇류로는 청동으로 만든 완(盌), 합(盒), 접시, 대접, 숟가락 등이 있으며,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도구나 장신구로는 금동가위, 거울, 동곳, 비녀, 반지 등이 있고, 생활 장식품으로는 금동제인 용두(龍頭), 귀면 문고리(鬼面門扉鐶), 봉황장식, 발걸이 장식, 연뇌형 장식(蓮蕾形裝飾), 옷걸이 장식 등이 있다. 못 서쪽 5개소의 건물터를 중심으로 한 연못 안의 갯벌 층에서는 많은 불상들이 출토되었다. 특히 못에 접한 서쪽 건물터 가운데 제일 큰 건물이 있던 곳 주변에서 금동 광배편, 광배 장식 수정과 다량의 화불들이 출토되었다. 이처럼 월지에서 많은 불상들이 출토된 것은 당시 신라에 호국불교가 성행하였던 점과 궁궐[東宮] 안에 내불당(內佛堂)이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출토된 주요 불상과 불구류를 살펴보면, 금동 아미타삼존 판불 2구, 금동 보살 판불 8구, 금동 여래 입상 6구, 금동제 부처님 귀, 다수의 금동 광배편, 광배 등에 입체적으로 장식되었던 수많은 화불, 보주, 비천 공양상 등이 있다. 월지 출토의 삼존불상 등 판불상 10점은 조각수법이 우수하고 상들의 표현이 사실적이며 입체감이 두드러진다. 양식적으로는 7세기 말 통일신라와 중국, 일본을 포함한 국제적인 조각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특히, 도상이나 양식면에서 일본 법륭사에 있는 판불들이나 법륭사 금당 서벽 아미타정토의 본존불상과도 비교된다. 둥글고 통통한 얼굴과 자연스러운 옷주름 처리에 보이는 조각의 사실적인 표현은 중국 당나라 전성기 불상 양식을 반영하면서도 7세기 후반 통일신라 불교 조각의 뛰어난 표현력을 잘 대변해준다. 이 10점의 상들은 하나의 삼존불상과 4보살상이 한 세트로 두 종류의 소형목제 불감과 같은 구조물에 부착되어 예배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조기법 및 기량이 뛰어난 10점의 월지 출토 판불상들은 7세기 말 통일신라 초기에 새로이 유입되는 국제적인 조각 양식을 반영하는 중요한 예들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으며, 당시 한·중·일 불교 조각의 양식 비교 및 전파 과정과 영향 관계를 파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이지성의 ‘꿈꾸는 다락방’에 ‘R=VD’라는 공식이 있다. 생생하게(Vivid) 꿈꾸면(Dream) 현실화(Realization)된다는 것이다. 당시 삼한일통을 완수한 신라인들이 이 공식을 이곳 동궁과 월지에 적용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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