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지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월지는 4, 50년 전까지 여름이면 이 못 가장자리에서 미역을 감는 개구쟁이들이 있었고, 겨울철이 되면 스케이트나 썰매를 즐기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간간히 낚시를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필자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마치고 학년 말 방학을 앞둔 2월의 어느 일요일 친구들과 썰매를 타러 이곳을 찾은 적이 있다. 날씨가 풀려 못 가운데에는 얼음이 거의 다 녹고 가장자리에는 고무 얼음(날씨가 풀려 두꺼운 얼음이 녹으면서 고무처럼 신축성이 있는 상태의 얼음)이 되어 있었다. 고무 얼음 위로 썰매를 탈 때는 빨리 지나야만 얼음이 깨지지 않고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 담력이 큰 아이들은 못 가운데 쪽으로 가서 타기도 했는데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한 아이가 깨진 얼음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모두 놀라 못 밖으로 나오는데 두 아이가 서둘러 구조를 하러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었다.
얼음 속에 빠진 아이의 형과 쌍둥이 동생이라고 했다. 비명을 듣고 달려온 몇몇 어른들은 가까이 다가가 구조해 줄 생각은 하지 않고 긴 나무 막대를 던져 주기만 한다. 그런데 구하려 가던 그 아이들이 서 있는 곳의 얼음마저 깨어져 세 사람이 모두 허우적거렸다. 두 아이는 어떻게 해서 빠져 나왔는데 결국 한 아이는 물속으로 몇 번 오르내리더니만 결국 보이지 않았다. 우리들은 순사(순경)가 오면 모두 잡아가니 빨리 자리를 피해야 한다며 흘끔흘끔 뒤를 돌아보면서 서둘러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 나온 적이 있다. 60여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그 장면이 생생하다.
일찍이 이곳 월지는 신라 삼기팔괴(三奇八怪)의 하나인 ‘압지부평(鴨池浮萍)’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못의 부평초는 뿌리가 땅에 닿지 않아 둥둥 떠다니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고 하여 ‘압지부평’이라 했다. 원래 부평초는 개구리밥을 의미하지만 경주지방에서는 마름을 이르는데 말밤[末栗]이라고도 한다. 이 말밤은 9월 초에 마름모꼴의 열매가 맺히는데 양 끝에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 조심해서 열매를 깨물어 하얀 속살을 먹기도 했다. 여름이면 이 말밤이 수면을 가득 덮었다. 아이들은 말밤이 없는 못 가장자리를 골라 물놀이를 하기도 했었다.
60년대 초반 어느 날 휴가를 나온 두 장병이 헤엄을 쳐서 못을 가로질러 가기로 했단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중 한 사람이 이 말밤에 몸이 감겨 끝내 익사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외에도 이 못에서 익사 사고가 가끔 있었다. 인근 지역에서는 이 못에 귀신이 있어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고들 했다. 못 속에서 소복을 차려입은 잘 생긴 젊은 여인이 유혹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은 처녀가 더 많았다. 청년이라면 여인의 유혹으로 익사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곤 하지만 처녀가 물귀신의 유혹으로 물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혹 처녀를 유혹한 귀신은 남자 귀신이 아니었을까?
당시 못 서쪽으로 주춧돌만 이리저리 흩어져 있고, 동북쪽에는 기둥의 반이 물속에 잠긴 정자가 하나 있었는데 임해전이라고 했다. 실제 이 건물은 신라 때의 임해전이 아니다. 1920년 경주 유림들에 의해 세워졌던 건물로 이 장소에 본래 없던 건물이다. 유림에서 정자로 활용했으면 ‘임해전(臨海殿)’이 아니고 ‘임해정(臨海亭)’이라 했어야 하는데….
여름방학 시즌에는 무전여행을 다니던 대학생들이 이곳 임해전에서 취식을 하고, 또 농번기에는 주위에 농토를 가진 농부들이 점심이나 새참을 먹던 장소가 되기도 했다. 그 후 이 건물을 헐어서 황성공원 안에 있는 김유신 장군 동상이 있는 독산 서쪽으로 옮겨졌다. 현재 궁도인(弓道人)들이 활터의 정자로 활용되고 있는 호림정(虎林亭)이 바로 월지에 있던 임해전이다.
『장자』 「추수편」에 ‘관규려측(管窺蠡測)’이라는 말이 있다. 대롱으로 보고 소라껍데기로 바닷물의 양을 잰다는 의미이다. 작은 소견이나 자기 견해를 겸손하게 말하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이다. 워낙 대단한 유적인 이곳 월지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려는 필자의 경험담이 대롱이고 소라껍데기일 것 같다. 장자의 질책이 귀에 따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