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천에 있었다는 일정교와 효불효교는 같은 다리일까?   문천 즉 남천과 그 주위에는 월정교 이외에도 춘양교, 효불효교, 유교, 귀교 등 많은 다리가 있었다. 월정교와 춘양교 두 교량은 이름만으로도 그것이 설치된 지역이 하나는 동쪽, 다른 하나는 서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춘양(春陽)이란 글자 그대로는 봄볕이라는 의미로 봄은 음양오행설에 의하면 동쪽에 배당된다. 따라서 춘양교가는 월정교의 동쪽에 있었던 교량이다. 현 국립경주박물과 서편에 이 교각의 기초석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의 문헌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르러서는 일정교(日精橋)라는 새로운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었다. 즉 “일정교는 춘양교라고도 한다(日精橋, 一云 春陽橋)”고 하는 대목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 많은 신라사 연구자가 월정교에 상대되는 교량 명칭은 적어도 신라시대에는 춘양교가 맞고 일정교라는 명칭은 후대에 생겼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월정교와 더불어 춘양교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하였고, 그 결과 두 다리의 하부 기본구조가 흡사하고 규모도 비슷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월정교와 춘양교의 하상 바닥층에서 많은 수의 수막새·암막새를 비롯한 평기와, 불에 탄 목재, 연함(椽檻: 서까래 끝 평교대 위에 암키와가 놓일 만하게 톱니같이 만들어서 기왓골을 받는 나무) 등이 출토되어서 월정교와 마찬가지로 춘양교도 기와를 덮은 목조건물을 갖춘 구조였음이 판명되었으며, 양쪽의 교대(橋臺)와 날개벽 그리고 양쪽 교대 사이의 강바닥에 주형(舟形)교각 3개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하였다. 다리의 규모는 길이 55m, 높이 5m, 다리 상판의 너비 12m 정도로 월정교에 비해 그 규모가 작았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와 『한국구비문학대계』 「경주 월성」편에 효불효교에 관해 2편이 채록되어 있는데 각 편의 내용이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다리의 위치에 대해서 경주부 동쪽 6리에 있다고 하여 일정교를 효불효교로 보고 있으며, 전해오는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옛날 경주 땅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아들 칠 형제가 있었다. 찬바람이 문풍지를 울게 하는 엄동설한인데도 곤하게 잠드셨으리라고 생각했던 어머니가 매일같이 아이들이 깊은 잠에 빠진 밤중에 슬그머니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서는 새벽닭이 울 무렵에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큰아들이 그 뒤를 몰래 따라가 보았다. 어머니는 물가에서 주위를 한 번 살핀 다음 치마를 무릎까지 둥둥 걷어 올리고는 차디찬 냇물을 건너서 외딴집에 혼자 살고있는 홀아비를 찾아가 밤을 지내고 새벽이면 집으로 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큰아들이 형제들을 불러 놓고 의논한 끝에 다음 날 아침 일곱 형제가 어머니가 찬물에 발을 담그지 않고 건널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 드렸다.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고부터는 자식들의 효심에 감동하여 크게 부끄러워하며 그 뒤로는 밤중에 밖을 나가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이 다리는 어머니에게는 효가 되지만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는 불효가 된다고 하여 그 이름을 효불효교라 하며, 이 다리를 일곱 아들이 놓았다고 해서 칠성교라 하기도 하고, 일곱 개의 돌을 놓아 만든 다리이기 때문에 칠교라고도 하였다. 『동여비고(東輿備攷)』라는 문헌이 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동국여지승람』을 이해하는 데 참고되는 지도라는 의미로 보이는데, 제작 시기는 17세기 후반으로 보인다. 이 지도에서는 효불효교가 일정교의 남쪽에 별도의 다리로 표기되어 있다. 일정교의 안쪽으로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자리에 남궁이 있었을 것이고 바깥쪽으로는 인용사지로 추정하고 있는 사찰이 있어서 민가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효불효교는 일정교와는 다른 위치에 있었던 다리로 볼 수 밖에 없다. 효불효교에 대한 동여비고의 기록이 어쩌면 사실에 부합할지도 모른다. 현 일정교에서 좀 더 남쪽으로 가면 인왕동 음지마을이 있다. 현재는 마을 이름이 해돋이 마을로 바꾸었는데 이 마을에서 남천 건너편은 양지마을이다. 이 두 마을 사이의 남천에 효불효교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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