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교 아래에 유교(楡橋)가 있었고 귀교(鬼橋)도 부근에 있었을 것이다   1986년 2월 월정교지 발굴조사 과정에서 월정교 하류 19m 떨어진 지점에서 뜻밖의 목교 교각 부재가 발견되었다. 이 발견이 있기 전까지는 원효 스님의 일화가 전해오고 있는 문천교와 월정교가 같은 다리가 아닐까 했었다. 그해 3월 목교 유구에 대한 조사결과 교각은 너비 7m 내외, 길이 63m 이상이며 목교 특성상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 목교의 축조 시기는 통일신라 이전으로 추정되었다. 『삼국유사』 ‘원효불기’조에 이런 글이 있다. 스님이 일찍이 어느 날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 ‘그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리겠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라는 의미이다.    당시 사람들이 아무도 이 노래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 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이 스님은 필경 귀부인을 얻어서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이때 요석궁에 과부 공주가 있었는데 왕이 관리에게 명하여 원효를 찾아 요석궁으로 데려가라 했다. 관리가 명령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니, 그는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이 다리 이름을 유교라 한다)를 지나다가 만났다. 유교(楡橋)라면 느릅나무로 만든 다리 즉 목교(木橋)이다. 이때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 관리가 원효를 궁에 데리고 가서 옷을 말리고 그곳에 쉬게 했다. 공주는 과연 태기가 있더니 설총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지혜롭고 민첩하여 경서와 역사에 널리 통달하니 신라 10현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후 원효는 이미 계(戒)를 잃어 총을 낳은 후로는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하였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원효와 요석공주가 만난 시기는 무열왕 때이며, 원효의 나이는 37세에서 43세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삼국유사』 「기이」편 ‘도화녀 비형랑’조의 기록에 의하면 문천 즉 남천 유역 어디엔가 귀교(鬼橋)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 다리는 신원사 북쪽에 놓았다고 전해지는 다리이다. 진지왕이 죽은 후에 낳은 아들인 비형이 귀신들을 시켜 신원사 북쪽 도랑에 다리를 놓았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신원사의 창건 시기나 폐사 시기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없으나 다만 신원사는 귀교를 놓을 때 이미 존재하였으므로 신라 제25대 진지왕대 이전에 이미 있었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고적’조에 의하면 이 다리는 경주 월남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월남은 월성의 남쪽이라는 의미이니 남천 유역 어디 쯤이었을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문천교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다리를 건너면 바로 오릉이고 조금 더 가면 포석정, 삼릉에 이르게 된다. 신원사 북쪽 도랑에 놓았다는 귀교는 『삼국유사』 「기이」편 ‘도화녀 비형랑’조의 기록에 의하면 비형이 진평왕의 명으로 하루만에 완성한 다리이다. 필자는 대학을 다닐 때와 교직에 들어서면서 2년 동안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이곳 경주에서 살아오면서 늘 경주 사람임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경주의 문화 유산에 대해서 자랑을 해 왔다. 그동안 연재해 오던 ‘경주이야기’를 마친다. 처음 연재를 시작한 2016년 3월 10일부터 오늘까지 9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처음 2년간은 매주, 그리고 그 이후로는 격주로 연재를 해왔다. 너무 오랜 기간 연재를 해 오다 보니 어쩌면 독자 여러분들도 식상하지 않았는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남산 일대와 오릉을 비롯한 몇몇 유적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아 있지만 이제 ‘경주이야기’를 마칠 때가 된 것 같다. 그동안 경주에 대해 잘 모르면서 너무 아는 체 하지는 않았는지, 신라 사람들이 남긴 흔적을 제대로 전하고 있는지 늘 걱정이었다. 이제 그 부담에서 벗어나 단지 경주신문 독자의 한 사람으로 남고자 한다. 그동안 ‘경주이야기’ 독자 여러분께 머리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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