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 속에 계림비, 그리고 향가비가 있다
경주는 예로부터 숲의 도시였다. 북천 변으로는 고성수, 오리수, 임정수가 있었으며, 서천 변에는 왕가수, 남정수, 천경림, 어대수, 고양수 등이 조성되어 있었다. 지금도 일부 숲은 남아 있으나 옛 모습 그대로는 아니다.
지금 제대로 된 옛 숲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은 왕릉을 비롯한 고분 일부, 그리고 이곳 계림과 황성공원이다. 고분 주위는 주로 소나무 숲이고 황성 숲은 침엽수와 낙엽수의 혼합림, 이곳 계림은 거의 활엽수림이다.
계림은 주로 왕버들, 느티나무, 팽나무 등 고목으로 조성된 숲인데 입구 쪽에는 수령이 약 1300년 정도로 추정되는 회화나무가 거의 고사목 상태로 서 있다. 1300년 전이라면 신라 때이다. 월성에 있었던 많은 일들을 보고 들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새삼 숙연해진다.
그런데 현재 알려진 이곳 계림은 옛 신라 때 조성된 숲이 아니고 사실은 경주 향교의 홍수 방지용 숲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 계림은 다른 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숲 안쪽으로 토담으로 둘러 쌓인 작은 건물이 보인다. 계림비각이다.
이 비각은 1803년에 세워졌으며, 6각 구조로 되어 있다. 비각 안에 있는 비석은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비문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남공철이 지었고, 경주부윤 최헌중이 글씨를 썼다. 아쉽게도 석질이 비신으로는 부적합하여 그 내용을 판독할 수 없다. 비각 뒤에는 우물터가 있는데 항시 맑고 깨끗한 물이 흘렀다고 하나 지금은 장대석으로 덮혀 있다.
우물은 흙으로 메워졌지만 테두리 돌이 있고 우물 뚜껑처럼 덮었던 것으로 전해오는 장대석도 흩어져있다. 지금은 옛 모습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전해오고 있는 나정, 알령부인이 탄생했다는 알령정, 그리고 석탈해와 관련된 토함산의 요내정 등 신라 3성의 시조는 모두 우물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계림비각 뒤쪽에 있는 이 우물에도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진 것은 아닐까?
그런데 학계 일부에서는 이곳 우물에 대한 기록이 없는 만큼 처음부터 이 우물이 없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우물 테두리가 있다는 것은 어느 시점에서 김알지의 탄생과 우물 설화를 한데 엮으려는 시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계림의 남쪽으로는 최근에 세운 향가비가 우뚝 서 있다.
향가(鄕歌)는 사뇌가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에 불리던 민간 노래로서 향찰로 기록되었다. 승려, 화랑을 포함한 다양한 작자 층에 의해 불교적 기원, 정치적 이념, 민요 또는 주술적 성격의 내용을 담고 있다.
수많은 향가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로, 도합 25수 뿐이다. 최근에는 『화랑세기』에 있는 풍랑가도 향가라는 주장도 있으나 학계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곳 계림 향가비는 1986년 건립되었는데 이 비의 전면에 충담스님이 지은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원문이 그대로 새겨져 있고, 후면은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의 업적을 기리는 ‘일연 현창 향가비(一然顯彰鄕歌碑)’이다. 해설은 문학박사 김동욱이, 설계와 조각은 이동호가, 글씨는 한영구가 썼다.
비문의 말미에 있는 찬기파랑가의 해독문을 옮겨본다. 흐느끼며 바라보매 나타난 달이 흰구름을 쫓아간 아래 여기 시퍼런 냇가에 기파랑의 모습이 있도다 일오 냇가 자갈밭에 낭이 지나시던 마음의 갓을 쫓고저 아아 잣나무 가지 높아 눈이 못 올 꼬깔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