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은 지금까지 방치되고 있었다.이어령의 수상집 『지성에서 영성으로』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워싱턴 포스터’에서 사람들이 정말 음악을 알아듣는 귀가 있나를 시험한 적이 있다.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Joshua Bell)에게 거리의 악사처럼 허름한 옷을 입고 400만달러짜리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시시한 깽깽이처럼 들고 연주를 해 보라고 했다.
자기네가 지식인입네 하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다니는 워싱턴 데팡스 지하철역에서. 조슈아 벨은 연주회 입장권이 수천 달러나 하는 스타니까 사람들이 사인해 달라고 마구 덤비면 어떡하나 걱정하기까지 했다. 아침 7시에서 8시 반까지 출근시간에 바이올린을 연주했는데 조슈아 벨을 알아보기는커녕 그 아름다운 음악을 귀담아 듣는 사람조차 없었다. 다들 휴대전화로 통화하느라 정신이 없고 바삐 출근하느라 걸음을 멈추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구두닦이만이 그 음악을 알아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도 조슈아 벨인지는 모르고 저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구나 하고 느꼈다고 한다.
월성을 찾는 사람들이 텅 비어있는 이곳을 마주하며 찬란한 신라 천 년의 진수를 느끼지 못하고 그냥 휭 들러보고 가버리지는 않을는지…… 그래도 혹 신라 천년의 꿈을 되새기는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으리라. 구두닦이처럼.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상고기 도성은 금성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아직 금성이 어느 곳에 있었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기원전 37년(박혁거세 21) 경성인 금성을 축조했고, 101년(파사왕 22)에 월성을 축조해서 거처를 옮겼다고 하였다. 그런데 139년(일성왕 5)에 금성에 정사당을 설치했고, 393년(내물왕 38)에 왜병이 금성을 포위하자 왕이 성문을 굳게 닫고 지켰으며, 415년(실성왕 14)에는 금성의 남문에서 관사례(觀射禮)를 거행했다고 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월성을 축조한 파사왕 이후에도 금성이 왕성으로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
그 뒤 475년(자비왕 18)에 명활성으로 이거했다가 488년(소지왕 10)에 월성으로 이거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즉 상고기에는 명활성으로 이거한 475~488년을 제외하면 금성과 월성이 왕이 거주한 기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금성이 개별 성곽이었다는 기록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488년 이후는 주로 월성이 왕성의 기능을 수행했다고 파악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나타나는 월성은 현재의 월성으로 비정되는데, 이곳에서는 관련된 유적이나 유물도 다수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금성과 관련된 유적은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학계에서는 금성을 월성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거나 왕도의 대명사로 파악하여 금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내용으로 미루어 금성에 관한 내용이 후대에 윤색되었을지는 모르나 금성 자체의 존재를 부정하기도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월성은 현재 4개 지구로 나누어 발굴을 진행하고 있는데 그중 B지구 ‘월성이랑’ 사무실 서쪽으로는 지면이 장방형으로 주위보다 높다. 이곳에서 과거 수년 전 관광객을 대상으로 국궁체험장, 승마장으로 활용한 적이 있다. 월성에 이런 유흥시설을 허가했다니 납득이 되지 않는다. 다행히 얼마 후에 이런 시설은 철거되었다.
월성에 대해서 2007년 지하레이더(GPR)탐사 결과 최소 20개 동 이상의 건물지가 확인되고 이후 일부 발굴 조사 결과 중앙부인 C지구에서만 17개 동 이상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월성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2014년 12월 개토제를 지내면서 시작해서 원래는 2025년으로 기한이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기한에 제한을 두지 않고 계속 발굴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월성에서 발굴된 것은 대부분 기와편으로 40여만장에 이른다. 이중 C지구에서 출토된 기와에 새겨진 ‘전인(典人)’이라는 글자와 토기에 새겨진 ‘도부(嶋夫)’라는 글자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이라 주목되고 있다. 전인은 기와와 그릇을 담당하는 와기전 소속의 담당자를 가리키고, 도부는 토기를 만든 사람으로 추정하고 있다.
C지구의 남쪽에 있던 숭신전은 8간 석주만 남기고 1980년에 현재 탈해왕릉 앞으로 옮기고 현재 그 주위로는 우물과 비석 받침이 남아 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숭신전을 옮기기 전 주위에 민가가 있었고 부근은 밭으로 경작이 되고 있었던 것 같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제3대 유리 이사금 때 얼음 창고를 만들었으며, 『삼국사기』에는 지증왕 11년(505)에는 얼음 창고를 만들고, 이 일을 맡아보는 관청은 빙고전(氷庫典)이라 하였다. 그러나 신라 때 축조된 빙고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다.
C지구의 북쪽 성벽 아래에 있는 석빙고는 조선 영조 14년(1738년)에 축조되었다. 흔히들 이 석빙고가 월성에 있어 신라 때의 석빙고로 잘못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