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천은 서라벌에서 중요한 하천이었다   서라벌의 옛터인 경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동으로 토함산과 명활산, 동대봉산, 함월산. 남으로는 금오산, 고위산, 마석산. 서쪽으로는 송화산, 선도산, 벽도산. 북으로는 금강산, 금학산, 약산이 에워싸고 있다. 동쪽을 제외하고 남·북·서쪽으로는 각각 남천, 북천, 서천이 둘러싸고 있다. 이 중 남천은 토함산 서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불국동, 평동, 남산동, 탑정동 등을 거쳐 사정동에서 서천 즉 형산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이다. 이 남천의 상류를 사등이천(史等伊川)이라 하였다. 사등이천은 남천의 상류인 외동읍 신계리에서 부르던 이름이며, 순우리말 이름인 사드릿거랑 또는 사드랫거랑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남천은 서라벌을 관통하는 하천으로 신라의 궁성인 월성의 해자 역할도 겸하고 있어 특히 당시 신라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하천이었다. 『삼국유사』 「기이」편 ‘신라시조 혁거세’조에 의하면 월성에서 남천을 건너 남산의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 터)에는 신라 초기 궁궐이 있었다. 그리고 남천 유역에는 많은 유적이 있다. 특히 서천과의 합류 지점에는 전불칠처가람인 담암사, 신원사, 영흥사 등 중요한 사찰이 있었으며, 시조왕 등의 능으로 알려져 있는 오릉도 이 하천 유역에 있다. 그뿐만 아니라 월성에서 남천을 건너면 금오산 등을 비롯한 많은 불교 유적과 포석정에 이를 수 있다. 일정교와 월정교는 물론 전설의 효불효교도 이 하천에 있었다. 그 외에도 ‘도화녀와 비형랑’ 전설에 나오는 비형이 귀신들과 놀던 곳도 이 하천 유역이었으며, 그들이 하룻밤 사이에 놓았다는 귀교도 이 부근 어디엔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곳은 신라인의 ‘전설의 고향’ 쯤 되는 신비한 땅이었다. 그리고 원효스님이 일부러 다리에서 떨어져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게 되는 유교도 이 하천에 있었다. 이 남천을 예전에는 문천이라고 했다. 신라 삼기팔괴 중 ‘문천도사(蚊川倒沙)’의 옛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내(川)이다. 모래가 너무나 부드러워 물은 아래로 흐르지만 모래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남천을 한자로 ‘蚊川’, 또는 ‘汶川’으로 표기를 하는데 이 중 특히 ‘蚊川’이 주목된다. ‘蚊’은 모기라는 의미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전성기 서라벌의 호수가 17만8936호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인구는 약 90만 명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한 생활하수 등 폐수도 엄청 많이 배출되었을 것이고 하천의 오염도 당연하였을 것이다. 오염된 남천에 모기떼가 득실거려 모기내 즉 문천(蚊川)이라 한 것은 아닐까? 『삼국유사』 「흥법」편 ‘아도기라’ 조에 ‘금교는 서천교로서 우리 속명에는 솔다리[松橋]이다.’라고 하여 유일하게 서천의 다리로 언급하고 있다. 북천 즉 알천에는 다리가 없었기에 37대 선덕왕이 붕어한 후 김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했는데 폭우로 알천의 물이 불어 건너올 수 없었다. 이에 김경신이 대신 왕이 되었다고 하니 알천 즉 북천에는 다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문천에는 특히 다리가 많이 놓였다. 효불효교(孝不孝橋), 일정교, 월정교, 유교(兪橋), 대교(大橋), 남정교(南亭橋), 귀교(鬼橋) 등 기록에서 확인되는 다리의 수만 해도 상당하다. 임진왜란 당시에 경주와 인근 고을의 의병들이 경주 문천에서 회맹하여 경주성 탈환을 시도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국방의 주요 기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얼굴을 보려고 거울을 보고, 영혼을 보려고 미술작품을 봅니다” 조지 버나드 쇼의 이 말을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 ‘우리는 얼굴을 보려고 거울을 보고 옛 사람들의 영혼을 보려고 유적을 찾는다’ 신라인의 영혼을 더듬는다는 생각으로 남천 하류 유역을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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