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 안의 궁궐 유적을 발굴하다. ‘作新宫室 儉而不陋 華而不侈(신작궁실 검이불루 화이불치)’ 『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편 기사이다.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는 의미이다.
이번 월성 발굴에서 밝혀지고 있는 신라 궁실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출토 유물도 검박한 편이다. 따라서 ‘儉而不陋, 華而不侈’는 백제뿐만 아니라 신라의 궁궐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월성 전체를 발굴하면서 궁성을 이루는 주요 건물들이 모여 있는 중앙 건물지인 C지구를 주목하게 되었다. 이 지구에서 정사각형 담장으로 둘러싸인 통일신라 후기 건물지 17개 동이 확인되었고, 공무수행 기록 등이 담긴 목간, 벼루, 각종 토기와 토우 등 다양한 유물도 출토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다수의 벼루는 이곳이 관청이었음을 추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유물이고, 터번을 쓴 토우는 서역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했던 흔적이라 주목을 하게 되었다.
월성에 대한 여러 기록 중에는 문헌 외에도 목간(木簡)과 기와나 토기에 새겨진 여러 문자 자료가 있다. 목간은 지금의 종이와 같은 용도로 사용하였는데, 길쭉한 나무 위에 간단한 글을 써서 정보를 전달하거나 남기기 위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토양이 산성이 강한 탓도 있지만 유기질인 나무이기에 남아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특히 이번 발굴 과정에서 수습된 목간은 주로 행정문서용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문제, 윗사람의 명령 지시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2016년~17년에 출토된 목간 중에 ‘병오년(丙午年)’이라는 완전한 간지(干支) 목간이 처음 발견되었다. 병오년은 526년(법흥왕 13), 또는 586년(진평왕 8)으로 추정하고 있다. 병오년 목간에는 ‘지방민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일벌(一伐)이라는 관직을 가진 자가 이들을 통제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즉 6세기 무렵 지방민을 동원할 정도의 대규모 정비 사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목간에는 ‘전중대등(典中大等)’이라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관직명이 등장하였고 중국 주(周) 무왕(武王)의 동생인 ‘주공(周公)’의 이름도 보인다. 신라는 6세기 이전에는 신라 고유한 말로 이름을 지었으나 6세기 후반 즈음에는 중국의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따라 짓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목간 외에도 기와나 토기에 찍거나 새긴 문자 자료가 있다.
확인되는 문자 자료는 ‘의봉사년개토(儀鳳四年皆土), 한(漢), 한지(漢只), 정도(井桃), 습부정정(習部井井), 정(井), 주(朱), 본(本), 동궁(東宮; 태자, 또는 태자가 사는 곳), 전인(典人; 신라의 하위 행정기관)과 도부(嶋夫; 토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새긴 사람 이름으로 추정)’ 등이 있다. 이들은 어떤 특정 시점을 지칭하거나 신라 6부 및 궁궐과 연관된 자료로 추정된다. 토기나 기와에 새겨진 문자는 한문에 익숙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구분한다.
또, 신라 사람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출토 유물로는 토우나 토용, 석인상 등이 있다. 월성 해자에서도 사람과 동물을 작게 본떠 만든 토우가 나왔다. 사람은 두 팔을 벌린 모습, 말을 탄 모습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터번을 쓴 소그드 사람(중앙아시아의 이란계 민족)으로 추정되는 토우도 있어 신라와 서역과의 교류를 엿볼 수 있다. 동물 토우는 말, 염소, 돼지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현재 발굴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앞으로 당시 신라 사람들의 궁중을 비롯한 백성들의 생활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월성의 발굴과정과 그 성과를 알아보고자 한다면 먼저 월성 발굴현장에 있는 ‘월성이랑’을 찾고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https://nrich.go.kr/gyeongju/)에서 발간한 안내 책자 ‘찬란했던 신라 왕궁 세상에 나오다, 월성’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또 최근에 교촌마을 건너편에 개관한 숭문대를 찾으면 월성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