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성대는 최초 여왕의 위상과 성조(聖祖) 탄생을 형상화?
첨성대는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천문관측대로 일반에 알려져 왔다. 첨성대란 말 자체가 ‘별을 바라보는(瞻星) 대(臺)’라는 것으로 일본인 학자 와다유지(和田雄治)는 첨성대 위에 목조 건물이 있었고 그 안에 혼천의가 설치돼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첨성대 꼭대기 공간이 너무 좁아 천문을 관측하기에 불편하다는 반론이 제기되면서 천문대 설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첨성대의 기능과 외형에 대해 최근까지 여러 주장이 제기돼 왔다.
4계절과 24절기를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 세운 규표(圭表)라는 설, 수학적 원리와 천문현상을 상징한 것이라는 설,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수미산의 모양을 본떠 만든 제단이란 설, 우물을 형상화했다는 설 등으로 다양하다.
이후 이러한 설을 반박하면서 첨성대가 선덕여왕의 상징물이라고 분석한 새로운 학설이 제기됐다. 정연식 서울여대 명예교수는 이와 같은 내용을 담은 ‘선덕여왕의 성조(聖祖)의 탄생, 첨성대’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이 논문에서 첨성대가 천문대나 규표, 제단이 아니라 선덕여왕의 즉위를 기념하고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상징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선 기존에 제기된 우물설이 일리가 있다고 하면서도 우물은 일반적으로 풍요, 생명, 다산, 신성을 의미하지만, 첨성대에서 우물의 더 큰 의미는 성스러운 시조의 탄생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신라의 우물 가운데 일부는 단순한 우물이 아니라 성스러운 조상의 탄생을 상징하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다고 하며, 첨성대 우물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성조황고(聖祖皇姑) 선덕여왕의 성스러운 조상의 탄생이라고 주장했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의 탄생설화에 우물이 나오듯이 첨성대는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의 탄생을 의미하는 우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선덕여왕은 김씨이므로 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이 아니라는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 박혁거세는 혈연 개념에 입각한 단순한 성씨 집단의 시조가 아니라 신라 전체의 관념적, 신화적 시조신이었으며, 선덕여왕의 성스러운 조상은 박혁거세만이 아니라 석가모니도 있는데 석가모니가 더 중요하다면서 “동륜태자 계열의 혈족 집단은 진평왕 때부터 자신들이 석가족의 후예라는 뜻으로 성골임을 자처했다. 여왕은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자신이 성골, 즉 석가족의 후예라는 것을 강조해야 했다.”고 했다.
즉 선덕여왕은 정치적인 시조와 종교적인 시조 둘을 가졌고 첨성대는 박혁거세의 탄생과 석가모니의 탄생을 동시에 표현하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은 신라 왕실이 성스러운 석가모니의 혈통을 이어 받았으며 자신의 이름을 석가모니의 아버지 ‘라자 슈도다나’를 뜻으로 번역한 정반왕, 왕비는 석가모니의 어머니 이름을 따서 마야라고 했다고 하였다.
이어 싯다르타가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났다는 이야기에 주목해 첨성대의 불룩한 아랫부분은 마야부인의 엉덩이이고 가운데 남쪽으로 난 창구는 싯다르타가 태어난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라고 주장했다. 즉 첨성대는 박혁거세가 태어난 우물과 석가모니를 낳은 마야부인의 몸을 결합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또한 그는 신라사에서 유일하게 선덕여왕의 즉위와 함께 성조황고(聖祖皇姑), 즉 성스러운 조상의 피를 이어받은 여자 황제라는 뜻의 존호가 올려졌다고 하면서 신라역사상 처음으로 여자가 왕위에 올랐다는 것에 대한 귀족 세력의 반감과 민심의 이반을 막고 왕권을 안정시키려고 왕을 종교적으로 신성화하는 작업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작업의 첫 번째는 여왕에게 성조황고란 존호를 올리는 것이고 그다음으로는 즉위 이듬해인 633년에 첨성대를 건립한 것이었다면서 첨성대를 왕궁이 있는 월성과 선덕여왕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지인 계림 근처의 탁 트인 평지에 9m 높이로 우뚝 세워놓은 것은 여왕이 박혁거세와 석가모니의 혈통을 이어받은 성스러운 존재임을 모든 백성과 신하들에게 알리고자 했던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이어서 그는 첨성대는 선덕여왕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여왕의 표상이다. 그래서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첨성대가 선덕여왕 때 세운 것이라고만 밝혔던 것이라면서 첨성대는 상설 천문대가 아니며 신라인은 정치적, 종교적인 의미에서 하늘의 뜻을 묻고자 첨성대에 올랐을 것이라고 했다. 2016년과 2017년 두 차례의 강진 이후 첨성대의 중심축이 2㎝ 북쪽으로 더 기울고 상부에 있는 정자석이 조금 이동하는 피해를 본 것으로 파악되었다. 다만 기울기가 심해지기는 했으나 붕괴를 걱정할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 문화재청과 학자들의 판단이다. 첨성대가 강진에도 굳건하게 서 있는 이유는 하부가 상부보다 직경이 더 길고 12단까지는 안쪽에 자갈과 흙이 채워져 있어 무게중심이 낮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