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급 승진□ 경제정책과 이정환□ 복지정책과 최미리□ 식품안전과 최인숙□ 보건행정과 서 강□ 도시재생과 최 진□ 토지정보과 최정수□ 농업기술과 김정필□ 농업진흥과 이성미
국민건강보험공단 경주지사는 지난 20일 노인장기요양보험의 안정적 운영과 발전에 기여한 장기요양기관 우수종사자에 대해 이사장상 등 표창장을 수여하고 간담회를 실시했다.2022년 장기요양기관 우수종사자 중 이사장상은 천우전문요양원 신현미 시설장, 지역본부장상은 민제의집 최원미 시설장, 천사주야간보호센터 최..
석굴암 본존불상을 회화로 표현하면서 시작된 ‘금빛, 담다’ 조각상에서 회화로의 전환은 출초의 조형성뿐만 아니라 채색의 구현도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작품에 금을 담은 것. 신라시대는 ‘황금문화’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금은 신라를 대표한다. ‘석굴암본존여래도’의 육신부에 편금을 부착해 표현하는 ‘편금채색기법’을 고려불화의 특수 기법인 배채로 적용함으로서 불화의 예경적 조형성과 신라의 시대성을 담고 싶었다. 비단채색기법과 편금채색기법은 누구나 알고 있고 할 수 있는 전통기법이지만 오히려 그곳에서 우리 회화의 정통성과 현대성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불교라는 종교성을 떠나 우리의 우수한 전통회화가 더 발전되고 이어나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전해지길 바란다.
제11호 태풍 ‘힌남노’의 피해가 예상보다 더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이어 올라온 제15호 태풍 ‘난마돌’이 지난 19일 지역에 큰 피해 없이 빠져나갔지만, 앞서 6일 경주를 엄습한 힌남노로 입은 피해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규모가 커지고 있다. 경주시는 지난 18일 국가재난관리정보시스템(NDMS)에 공공시설 피해금액 입력을 마무리했다. 사유시설 피해액 입력은 오는 23일까지 마무리할 예정이다. 이에 따르면 태풍 힌남노로 공공시설 피해는 모두 796건, 피해금액은 1147억원으로 집계됐다. 본격적인 집계를 시작한 지난 8일 298억원에 비해 4배 가까이 늘어난 규모다. 복구비용으로는 모두 2874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파악됐다. 또 이번 태풍으로 1명이 숨지고 주택 11동이 전파됐으며, 9동 반파, 798동은 침수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150가구 388명의 이재민과 일시 대피자가 발생했고, 39가구 67명은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번 태풍으로 소하천이 범람하거나 유실돼 큰 피해가 발생했고, 노후된 저수지는 위험 경고를 보냈다. 소하천과 저수지 등의 항구적 복구대책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는 신호다. 지난 15일 주낙영 시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현재 30년 기준(강우량 95㎜)으로 설정된 소하천의 방재성능목표를 50~80년으로 강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또 소하천의 통수단면 확보를 위해 현재 환경부가 갖고 있는 하천 준설 권한을 광역지자체로 이관하는 방안도 검토하겠다고 한다. 노후 저수지에 대한 전반적인 보완도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을 요청한다는 방침이다. 경주지역 380여개 저수지 중 90% 이상이 40년 이상된 노후 저수지인데다, 안전등급 D등급 이상의 위험 저수지도 14%에 달하기 때문이다. 경주에서는 과거부터 강한 태풍의 영향으로 지역 곳곳의 소하천이 범람했고, 지난 2013년 안강 산대저수지, 2014년 북군저수지 붕괴 등으로 많은 피해를 경험한 바 있다. 하지만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에 대한 항구적인 대책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지구 온난화의 전형적인 현상으로 태풍은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강도로 발생하고 있고, 피해 규모도 커지고 있다. 이번 태풍을 기점으로 자연재해 취약지구에 대한 정밀한 조사와 영구적인 보완대책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 지자체의 힘만으로는 어렵다. 국민들이 더 이상 피해를 입지 않도록 정부가 서둘러야 한다.
경주시가 소형모듈원자로(SMR) 국가산업단지 유치에 나선다는 소식이다. 시는 사업비 2억5000만원을 들여 ‘경주 SMR 국가산업단지 타당성 조사 연구’ 용역 업체를 선정하기 위해 입찰공고 했다. 시는 이 용역을 내년 3월까지 완료한다는 계획이다. SMR이 머지않은 시간에 전력시장을 주도할 게임체인저가 될 것이란 전망 속에서 경주시가 SMR 국가산단 유치에 본격 나선 것이다. 원전 시장은 현재 다양한 수요처에 공급 가능하고 제작비용이 저렴한 소형모듈원전으로 급변하고 있다. SMR은 세계 20여 국가에서 71종이 개발 중에 있다. 전 세계가 글로벌 원전시장의 새로운 먹거리인 SMR시장 선점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시는 지난해 7월 착공한 문무대왕과학연구소를 중심으로 SMR 연구개발 인프라, 원자력 산업생태계 구축 등을 통해 SMR 국가산단을 조성한다는 전략이다. 오는 2025년 준공 예정인 문무대왕과학연구소의 연구와 개발이 로드맵대로 진행되면 2030년 SMR 상용화에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SMR 국가산단이 조성되면 경주가 미래 원전산업의 전진기지가 될 기회를 잡게 된다. SMR 국가산업단지 조성은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에 포함된 사업이다. 정부는 원전수출과 함께 차세대 SMR 독자노형 개발 등 미래 원전기술 확보를 위한 대규모 R&D사업에 투자해 원전 최강국의 지위를 복원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여기에 전초 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문무대왕과학연구소가 건설 중이어서 SMR 국가산단의 경주 유치 가능성도 높다. 그런 만큼 경주시가 미래 에너지산업을 선도할 수 있도록 치밀한 계획 수립은 필수다. 또 안전성과 주민수용성 등도 충분히 반영돼야 할 것이다. 경주가 글로벌 원전시장의 새로운 먹거리인 SMR 산업을 선도하고, 세계적인 거점 도시로 도약하는 것은 지금부터의 노력에 달렸다.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진주에서 출발하여 그리운 내 고향 광명을 찾았다. 건천 IC에서 빠져나와 금척 고분군을 지나는 데 외가가 그 안쪽마을에 있었다. 외할머니가 장롱 깊숙이 숨겨둔 500원짜리 지폐를 용돈으로 주시던 게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 돈으로 평생 잊지 못할 책을 샀으니 내 인생의 seed money가 된 셈이다. 시골 농부이신 부친은 어릴 적 책 사달라 조르는 나에게 “어릴 땐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책(大說)을 읽어야 한다. 소설은 어른이 되어 읽는 책”이라는 일종의 가이드 라인을 주시는 바람에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는 없었다. 시골 고향에서 책을 사려면 버스를 타고 20리길 경주를 가야만 하는데 차를 타는 문제부터 차비를 해결해야 하는 문제, 무엇보다 책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상태에서 양서를 접하기는 정말 하늘의 별따기였다. 할머니가 주신 돈으로 책을 사기로 결심한 나는 엄마가 성내로 가실 때 버스를 타야겠다 생각하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마침 엄마가 제사상 차릴 장을 보느라 성내로 가게 되셨다. 집에서 아랫마을 버스정류장까지 1.5km는 족히 되는 거리를 무거운 쌀자루를 이신 엄마가 눈치채지 못하시도록 첩보원을 방불케 하듯 따라나섰다. 엄마가 차에 올라타실 때 용케 차에 올라탔더니 엄마가 알아보고 깜짝 놀라셨다. 하지만 이미 차는 출발했고 어머니는 나를 돌려보내기를 포기했다. 다음 작전은 서점 가기, 엄마가 성건시장에서 쌀을 팔고 난 다음 장을 본격적으로 보시기 전에 짬을 내 중앙통의 경북서점에 들렀다. 서점 점원으로부터 500원에 고를 수 있는 책이 두 권이라는 말을 들으신 엄마는 ‘최단 시간에 책을 고를 것’이라는 작전명령을 내리셨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나는 내 눈높이의 책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이름의 책을 두 권을 골랐다. 그 두 권이 ‘장발장’과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였다. 장발장은 왠지 앞으로 읽어도 장발장, 뒤로 읽어도 장발장 왠지 재밌어 보였고 지킬박사는 제목이 길어서 매력 있었다. 빅토르 위고(1802~1885)의 ‘레미제라블’ 주인공 장발장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로 당시 어린이들에게는 ‘장발장’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25세 청년 장발장은 7명의 조카를 위해 빵을 훔치다 적발되어 주거침입과 절도죄로 5년 선고를 받았고, 탈옥미수 4회에 14년을 추가로 감옥살이하면서 모두 19년을 복역했다. 그 긴 세월 침대에서 자본 경험이 없고 퇴소 후에도 전과자로 낙인찍힌 노란색 통행증을 소지한 관계로 여관에도 들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한 주교가 따듯한 음식과 숙소를 제공해 주었기에 난생 처음 느껴보지 못한 인간애를 느낀다. 하지만 값나가는 성당의 은식기가 탐이나 몰래 주교의 방에 있는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다 헌병에게 적발되어 미리엘 주교에게 끌려왔다. 여기에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식기를 본 주교는 자신이 장발장에게 준 것이라 말하고 은촛대 두 개를 장발장의 손에 들려주며 말했다. “장 발장, 나의 형제여. 당신은 이미 악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오. 선한 사람입니다. 당신의 영혼에 대해 내가 값을 치렀어요. 나는 당신의 영혼을 어두운 생각과 절망에서 구출하여 하느님께 바치려 합니다” 이후 장발장은 남을 용서하는데 일생을 바친다. 자신을 평생 따라다니며 괴롭히던 자벨 경감과 전과자에 대한 냉담한 시선을 바꾼 장발장은 끝없는 사랑을 실천한다. 그 모습은 어린 나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20세기 지성 에리히 프롬(1900~1980)은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을 통해 현대인의 소외를 치유할 5가지 사랑에 대해 설파했다. 21세기 무한 경쟁시대에 노출된 현대인들에게 원만한 인간관계 형성은 끝없는 숙제로 남아 있다. 얼마 전 직장에서 필자는 동료 직원과의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로감으로 일찍 직장을 그만두고 싶어했다. 그때 생각나는 책이 어릴 때 읽은 장발장(원제목은 레미제라블)이었다. “나부터 그를 용서하자. 그리고 나의 의(義)-내가 의롭고 선하다는 생각-를 스스로 내려 놓자”고 다짐했다. 돌이켜 보면, 외할머니가 그 500원 거액을 용돈으로 주시지 않았다면 시장 보러 나선 어머니의 뒷꽁무니를 따라 그 버스에 오르지 못했다면 그리고 시간이 넉넉하여 서점에서 책을 골랐다면 장발장이라는 좋은 책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한 권의 책’ 장발장은 내 인생에 있어 목적하는 항구로 인도하는 등대와 같은 책이다. 독서의 계절 가을밤이 깊어 간다. 오늘밤 책 한 권 잡고 독서삼매경에 빠져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드디어 국내 전력 사용량 1위 기업인 삼성전자가 국내에서도 재생에너지 사용을 확대하겠다고 공언했다. 덕분에 재생에너지 관련 업계가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기업의 재생에너지 사용 100% 선언이 왜 중요하게 된 것일까? 그들끼리의 리그이기 때문에 우리는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가? 태풍 힌남노는 포항과 경주지역에 특히 큰 피해를 줬다. 뉴스에 나오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닌 나와 내 가족과 친척에 이어 가까운 이웃의 친척까지 피해를 본 소식을 전해 받으면 힌남노의 피해는 우리가 모두 당했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피해의 규모와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 아직도 자원봉사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곳이 많다. 그 놀라움과 당혹감을 추스르기도 전에 다시 14호 태풍 난마돌이 위력을 앞세우고 급하게 달려왔다. 다행이라고 말을 해야 할지, 우리나라에는 많은 비를 뿌리지 않았고 강한 바람만 영향을 조금 받아 일상생활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웃 나라 일본은 규슈지방의 소식을 시작으로 일본 전역을 관통하는 난마돌의 위력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000mm의 폭우에 강풍의 위력까지 합세해서 규슈 남부에만 35만3480가구가 정전사태에 이르렀고 900만명에 피난 지시가 내렸다고 한다. 같은 기간 대만에는 규모 6.4와 6.8의 강진이 연이어 일어났고, 일본과 멕시코에도 7.6의 강진이 일어났다. 전 세계가 유례없는 가뭄에 강바닥이나 호수 바닥의 오랜 고대 유적지가 발견되고 있다는 심상찮은 소식에 이은 태풍과 지진 소식은 기후 위기가 아닌 기후재앙이라는 용어로 바꾸어야 한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짧은 시간에 엄청나게 퍼붓는 비의 양은 어떤 대비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암담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기후 위기라고 말로는 걱정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화석에너지의 남용과 무분별한 자원 사용으로 인한 환경파괴 등을 기업에만 책임을 전가할 것이 아니라 소비자인 우리에게 초점을 맞출 때가 되었다. 즉 현명한 ESG 소비자로서 나의 생활을 점검하고 더불어 기업을 능동적으로 감시해야 하는 때가 되었다. ‘지구가 목적이고 사업은 수단’이라는 ESG 경영의 대표적인 기업인 파타고니아 창업주 이본 쉬나드는 지구가 목적이라고 하는 그의 말은 거짓됨이 없이 그와 그의 가족들의 소유한 회사지분 100%(30억 달러, 약 4조1800억원)을 기후변화 대처를 위한 비영리재단에 기부했다고 한다. 그는 자기의 책에서 “기업이 하기 힘든 일 중 하나는 가장 성공적인 제품의 환경적 영향을 조사하고, 환경에 악영향을 주는 경우 제품을 바꾸거나 그것을 진열대에서 치우는 것이다.”고 하였다. 실제로 그는 파타고니아 면제품의 환경영향평가를 통해 면화 재배 농가의 엄청난 농약 살포에 충격을 받아 100% 유기농 면화로 전환하였다. 사실 영리가 우선인 기업은 환경과 경제의 대치되는 척도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린 워싱처럼 ESG 워싱을 할 확률이 높다. 이본 쉬나드처럼 자사의 성공적인 제품의 환경영향평가를 거짓 없이 공표할 용기 있는 회사가 몇이나 될까? 이런 기업을 감시할 시민단체가 필요하다. 실제로 ESG 경영은 소비자들이 더이상 환경에 악영향을 주는 제품을 구매하지 않겠다는 윤리적 경영을 요구하고, 심지어 불매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투자자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촉발된 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수해로 인해 내 집안에 물이 찼다는 가정을 하고 강하게 운동을 해나가야 한다. 과거와는 다르게 온라인으로 소통하는 시대에는 내 주변에서 관심을 멀어지게 한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시선을 빼앗고, 생각을 빼앗는 것들이 너무도 많이 존재하므로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내 이웃이 당면한 문제들이 나의 관심에서 금방 소외된다. 그러나 안방까지 차오르거나, 불어난 하천에 휩쓸려간 집이나 논밭들이 바로 내 문제라고 인식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제품의 환경적 영향을 조사하고, 환경에 악영향을 주는 경우 제품을 바꾸거나 그것을 진열대에서 치우는 것’을 기업이 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요구하는 깨어있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 사회, 경제, 환경적인 측면에서 단순한 소비자의 갑질과 지적이 아닌 기업과 내가 상생하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이번에 크게 피해를 주고 지나간 태풍 힌남노와 우리나라는 살짝 비켜 가서 다행이지만 일본 전역을 물바다로 만든 태풍 난마돌을 통해 빠른 각성이 필요하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본래 사마소(司馬所)는 조선시대 과거시험에 합격한 지방 선비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거나 정치를 토론하던 곳으로 유생들의 사설 집합소였으며, 생원·진사시를 연방(蓮榜)이라 하기에 사마소를 연계소(蓮桂所)라 달리 부르기도 하였다. 애초에 훈구파의 유향소(留鄕所)에 반발해 사림파의 생원․진사들이 따로 사마소를 설치하는 등 정치적 성향과 그에 따른 폐단도 상당하였다. 다만 지방의 유생들이 강학하고 지역 간 소식을 전하는 등 사마소의 순기능이 우선되었으니, 경주의 사마소는 우수한 인재들이 모이는 학문적 공간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화계(花溪) 류의건(柳宜健,1687~1760)은 경주 내남면 화곡에 머물며 벼슬을 멀리하고 선비의 본분에 힘쓴 인물로 1735년 49세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경주의 사마소가 언제 처음 건립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훗날 여러 차례 중건하였는데, 「연계안서(蓮桂案序)」를 보면 임인년(1722)에 중건 논의를 한 것으로 보여진다. 게다가 유생들에게 ‘도의(道義)를 숭상하고, 충효(忠孝)에 힘쓰라(道義相尙 忠孝自勉)’며 선비의 본분에 힘쓸 것을 당부하였다. 영귀정기(詠歸亭記)에 의하면, “문천(汶川)가에 오래전 영귀정(詠歸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과거에 합격한 유생들이 편하게 쉬는 공간으로, 어느 때에 지어졌고 언제 헐리었는지 모르고, 그 땅이 비었는지가 백여년이 된다. 임인년(1722) 중건을 논의하여 먼저 정자의 북쪽 작은 땅에 작은 공관(公館)을 세우고, 때때로 그곳에서 쉬었다. 하지만 정자는 여러 해 진척이 없다가, 경신년(1740) 봄에 이르러 비로소 경영을 시작하여, 다음 해(1741) 초여름에 공사를 마쳤으니, 영조임금께서 재위에 오른지 17년 되는 해이다. 상사(上舍) 이덕록(李德祿)․손경걸(孫景杰)이 실제로 일을 주관하여 완공하였고, 이에 문천 가에 다시 정자가 세워져 오늘날 여러 유생들이 편하게 쉬는 마땅한 곳이 되었다.”며 사마소의 내력을 기록하였다. 본래 교동 48번에서 현재의 장소로 이건된 사마소는 문정(汶亭)·문양정(汶陽亭)·병촉헌(炳燭軒)·풍영정(風詠亭)· 영귀정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고, 사마소의 편액은 1762년 경주부윤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1724~1802)가 썼다. 과거시험은 인재를 등용하는 중요한 단계로 지역의 인재를 뽑아 적재적소에서 민생의 안정과 나라의 정사를 도모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하지만 과거시험을 통해야만 벼슬에 나아갈 수 있는 어려운 현실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기에 선비들은 입신양명과 효행의 입장에서 노력하고 또 노력하였다. 그래서 누군가는 과거시험에 드는 소모적인 힘을 부모봉양에 헌신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가는 처사적 삶을 살았고, 누군가는 과거시험에 합격해 부모와 가문을 빛내는 급제의 길을 찾아 과거시험에 매진하였으니, 예나 지금이나 출세의 힘겨움은 동일하다고 생각된다. 경주의 선비를 연구하기에 앞서 그 인물의 성향과 학문적 수준 그리고 정치적 성향 등을 파악한다면 제대로된 인물을 조명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바로 화계 류의건이 늦은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한 이유가 사마소 출입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연계안서(蓮桂案序_ - 화계 류의건 우리 경주는 평소 선비가 많기로 일컬어지는데 고려 이전은 막론하고 조선 이래로 대과․소과에 급제한 사람은 한두 사람을 헤아리기도 어렵다. 게다가 세월이 거듭 변하여 징험할 문헌이 없고, 그 사람이 혹은 죽거나 끊어질 지경이 되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예전에 사마소(司馬所)가 있었는데, 당시에 반드시 장부[적기(籍記)]의 문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상고할 수 없다. 임인년(1722) 중건하려는 논의가 있었고, 일을 착수한 지 여러 해가 지났다. 올여름에 이르러 비로소 공사를 마쳤고, 마침내 연계소(蓮桂所)라 하고, 하나의 연계안(蓮桂案)을 두고 여러 유생의 성명을 나열해 적었다. 그리고 임인년에 함께 논의한 인원을 시작으로 문과(文科) 약간 명과 사마(司馬) 약간 명이었다. 아! 과거시험만이 어찌 선비의 귀한 바이겠는가? 하나의 이름을 얻고 잃음이 선비의 도리에 크게 연관됨이 있지 않겠지만, 국가가 이미 과거시험으로 선비를 취하고, 선비 가운데 임금을 섬기고 도를 행하려는 자는 과거시험을 버리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 이름난 선비들 역시 이러한 과정을 벗어날 수 없었으니 과거시험 역시 어찌 공이 적다고 하겠는가? 만약 이 연계안을 참고하는 자가 사마와 문과, 문과에 이어 조정에 들어가서 벼슬하더라도 도의(道義)를 숭상하고, 충효(忠孝)에 힘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후세에까지 오래도록 훈명(勳名)을 드리운다면 후대의 사람들이 장차 그 이름을 차례로 보고 아무개가 이러하였고, 저러하였고 칭송할 것이니, 어찌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모내기를 한 게 엊그제 같은데 녹음이 짙어지더니 어느덧 황금물결을 맞이하기 위해 연두빛을 띄기 시작했다. 창밖 논의 색깔을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기에 아줌마는 또 ‘논멍’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두 번의 태풍을 무사히 견디고 이겨낸 논의 벼들처럼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라길 바라며… 어릴 때 어른이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특권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나 이제 기성세대, 중년, 아줌마 소리가 익숙한 나이가 되었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고사하고 내가 진짜 어른일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무엇 하나 완벽하게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하나씩 알아간다는 것이 이제 내가 철이 드는 것인가 싶을 정도다. 우리 아이들은 어떨까? 학교를 들어갈 나이가 되어 신년 새해 소원에 “받아쓰기 100점 받게 해주세요”라고 적고, 새로운 환경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이겨낸 아이들. 코로나로 인해 모든 일상이 마스크와 동행하고 아이들은 서로 얼굴을 반 가린 지 삼 년째다. 경주 시내 아이들을 전문 상담하는 곳은, 대기가 한두 달이 기본이다. 아이나 어른이나 모두가 생소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보통 부모는 아이들에게 완벽한 존재이며 세상의 전부로 시작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커가면서 부모의 빈틈을 하나씩 알아간다. 그래서 나는, 아줌마는 일찍 인정하고 고백했다. “엄마는 물건 잘 못 찾아. 네 물건은 네가 찾아. 중요한 거면 보물창고에 잘 넣어두고” “엄마도 모르겠는데, 같이 검색해볼까?” “종이접기나 블록 조립은 아빠가 잘하는데”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서부터 엄마의 고백이 하나둘 늘어났다. 아이들은 그걸 또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세 아이가 서로 잘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도 일찍 인정했다. 잘하는 것을 해주고 부족한 것은 서로가 메꿔주는 식이다. 첫째는 일찍 일어나서 이불을 개면 아침잠이 많은 둘째는 식사 후 식탁을 깔끔히 닦고 막내는 베개를 정리하는 식이다. 엄마의 빈틈 고백이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고 도와주는 형식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엄마가 되어 아이가 크는 동안에 엄마도 성장한다는 말을 이때 처음 실감했다. 이십 대에 남들에게 빈틈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센 척하고, 악바리처럼 모든 일에 매달렸었다. 그리고 같이 작업하는 선후배들 앞에서 언제나 당당했다. 결과론적으로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작업을 한다는 것이 많이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매번 긴장해야 하고 완벽해야 한다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서른이 되면서 자연스레 주변정리를 했다. 삼십 대 중후반이 되어 편안해진 삶을 살게 된 것이 바로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함에서 시작되었음을,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고 십 년이 지나서야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 아이들 앞에서 엄마는 언제나 불완전한 존재임을 자청했다. 아이들에게도 ‘모르는 것은 창피한 것이 아니다, 모르는 데 아는 척 하는 게 창피한 일이다’라며 마치 주문처럼 자주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그래도 쭈뼛쭈뼛했던 아이들이 주문에 익숙해지자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그것이 특히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잘하는 사람이 특히 가족이라면, 어린 나이에 쉽지 않았을 텐데 인정하고 나니 아이들은 한 뼘 더 자란 것 같았다.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더 많은 것을 배워간다. 이래서 어른들이 아이를 키워봐야 진짜 어른이 된다고 했구나 싶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많이 부족한 엄마다. ‘아이들의 사춘기를 갱년기로 무마시키겠지’하는 배짱으로 세 아이에게 “갱년기와 사춘기랑 붙으면 누가 이기는지 검색해봐라. 그리고 덤벼!” 하고 말하는 이상한 엄마이기도 하다. 빈틈 많은 엄마지만 세 아이를 무척 사랑하는 엄마다.
멘델스존하면 바로 떠오르는 작품은 연극 ‘한여름 밤의 꿈’의 부수음악으로 쓰인 결혼행진곡(축혼행진곡/1842년)이 아닐까? 지금도 전 세계의 결혼식장에서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음악이니 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멘델스존과 맹렬히 대립각을 세웠던 바그너의 결혼행진곡(오페라 로엔그린의 ‘혼례의 합창’/1850년)도 지금껏 식장에서 연주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자는 퇴장할 때, 후자는 (신부가) 입장할 때 쓴다. 영국의 빅토리아 공주가 1858년 자신의 결혼식을 위해 두 곡을 직접 선택한 이래 결혼관습이 되었다. 사실 축복의 날에 듣는 이 행진곡들에 반유대주의가 개입되어 있는 건 매우 유감스런 일이다. 바그너는 유대인을 싫어했고, 그래서 유대인 혈통의 멘델스존을 혐오했다. 20세기 들어 나치의 총수 히틀러(A.Hitler/1889-1945)는 같은 입장에 있는 바그너의 음악을 찬양했다. 반면, 유대인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은 금지곡이었고, 하이네(H.Heine/1797-1856)의 아름다운 시에 곡을 붙인 ‘노래의 날개 위에’(1834년)마저도 들을 수 없었다. 또한 게반트하우스 앞에 세워진 멘델스존의 동상은 철거를 면치 못했다. 멘델스존 가(家)와 나치와의 악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938년 나치는 멘델스존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창립한 멘델스존 은행을 도이체 방크(Deutsche Bank)에 강제로 흡수해버린다. 나치는 유대인 및 포로 대학살(holocaust)에 ‘치클론B’라 불리는 독가스를 사용했다. 그런데 ‘치클론B’의 제조사는 멘델스존의 둘째 아들인 파울이 1867년에 만든 아그파 필름을 계승한 회사였다. 한편, 아그파 필름에는 나치의 끔찍스런 전쟁영상이 담겼다. 멘델스존 일가가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그들의 사후에 일어난 것이다. 멘델스존의 작품은 그의 경제적 환경만큼이나 밝고 아름답다. 20여 년 동안 무려 49곡(6곡×8권+별도의 1곡)이나 작곡한 무언가(無言歌)가 그러하다. 무언가는 가사 없는 노래(Lieder ohne Worte)다. 슈베르트의 예술가곡에 해당하는데, 다만 가사가 없다고 보면 된다. 원래 피아노를 위한 곡으로 작곡되었지만 지금은 바이올린 등 다양한 악기의 독주곡으로 편곡되어 연주되고 있다. 5권의 6번째 곡 ‘봄노래’가 특히 유명하다. 우리나라엔선 통화대기음으로 많이 쓰이고 있어 친근하다. 한편, 멘델스존이 스코틀랜드 헤브라이즈 군도를 여행하다가 감명 받아 쓴 ‘핑갈의 동굴(Die Fingalshöhle) 서곡’은 음악의 풍경화라 불린다. 이러한 단악장의 연주회용 관현악곡은 훗날 리스트가 주창한 교향시의 원형이 된다. 멘델스존은 교향곡을 5곡 썼다. 이중에서 3번 스코틀랜드, 4번 이탈리아가 자주 무대에 오른다. 애절한 멜로디로 시작하는 바이올린 협주곡(1844년)은 멘델스존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이다.
경주에서 찍은 ‘경주’라는 이름의 영화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경주 시민들이 의외로 드물다. 주인공이 박해일, 신민아라는 당시나 지금이나 인기로는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을 배우가 나온 영화인데도 그렇다. 2014년에 개봉되어 비록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경주사람들은 알 만한 영화인데 이 영화를 보았다거나 제목이라도 들은 사람을 보기 힘들다. 그럴 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다. 도대체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영화 줄거리를 보면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영화를 꼼꼼하게 관찰하지 않고는 이 영화가 제시하는 암시나 복선 같은 것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만큼 일반의 시선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렵고 재미없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이 영화가 제15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대상을 받았을 만큼 평단에서 좋은 평을 받았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 관객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했다는 면에서는 실패작이다. 그래서 더욱 ‘경주’라는 제목이 아쉽다. 그러나 이 영화를 자세히 뜯어보면 이 영화만큼 경주의 내면을 제대로 펼쳐낸 영화가 없다. 그렇다고 무슨 다큐멘터리 찍듯 경주의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찍은 영화라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 이 영화는 경주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심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독자들을 위해 간략하나마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북경대 교수 최현(박해일 분)은 선배 창희의 장례식에서 창희와 오래전 경주의 어느 찻집에서 함께 본 춘화를 떠올리고 경주로 향한다. 찻집 주인 공윤희(신민아 분)를 만나 오래전 본 춘화에 대해 묻는다. 윤희는 최현을 변태 취급하면서도 묘하게 마음이 끌린다. 경주에 온 최현은 오래전 사귄 여정을 경주로 불렀지만 여정은 남편의 전화를 받고 급히 서울로 돌아간다. 다시 찻집을 찾은 최현은 윤희로부터 찻집을 인수한 5년 전 공연히 말이 많아 한지로 도배해 감추어버렸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우연히 윤희와 동행한 술집에서 북한학전공하는 박교수를 만나 뜻밖의 유명세를 치른다. 그러다 자신을 윤희네 찻집으로 안내한 형사 영민이 합류해 보문호에 빠져 자살한 모녀의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 모녀는 최현이 대구와 보문에서 하루에 두 번이나 우현히 만난 모녀임이 확인된다. 취해버린 박교수의 막말로 판이 깨지고 낯선 이들과 노래방까지 거친 최현은 무엇에 홀린 듯 윤희의 집으로 함께 간다. 그것을 눈치 챈 윤희를 짝사랑하는 영민이 윤희 집으로 쳐들어오지만 여권으로 신분을 재확인하고는 허망하게 물러난다. 최현에게 거실에서 자라 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윤희는 방문을 슬며시 열어둔다. 최현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녘 불화로 인해 중국을 떠나오면서 싸운 아내로부터 온 음성메시지를 확인하고 조용히 윤희의 집을 나선다. 어느 국수 가게에서 국수를 먹는데 여정으로부터 자기 남편이 자신을 쫓아 경주로 갔으니 피하라는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자리를 옮긴다. 마침 여정이 경주 왔을 때 우연히 들른 점집 할아버지를 찾아갔으나 할아버지는 없고 대신 점집을 지키는 여인으로부터 그 할아버지가 5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는다. 무엇을 끌리듯 발길을 잡던 최현은 우연히 오토바이 충돌사고로 사람들이 널브러진 현장을 지난다. 이어 마른 하천을 지나 잡목이 우거진 야산을 넘어선 최현은 강을 발견한다. 장면이 바뀌어 춘화 앞에 앉은 최현과 창희, 최현의 친구 앞으로 윤희가 다가와 차를 따르는데 풍경소리가 들려오며 영화가 끝난다. 영화의 줄거리를 이처럼 상세히 적은 것은 이 줄거리에 경주의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경주의 유적들이 거의 나오지 않는 대신 경주의 능들이 꾸준히 나온다. 특히 대릉원과 노동동, 노서동 고분군이 주요 배경으로 나오는데 바로 이 무덤들이 이 영화의 모티브이자 경주의 내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교묘한 장치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단순하지만 각각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이 영화를 연출한 중국교민3세 장률 감독이 얼마나 경주를 열심히 탐구하고 찍었는지 모르겠지만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정말 탁월하게 경주의 특징과 경주사람들의 내면을 간파했다. 그리고 여기까지. 이 영화를 보실 분들에게 과연 어떤 부분이 경주를 잘 묘사했는지를 숙제로 남겨 드린다. 하나씩 퍼즐을 맞추다 보면 놀라울 만큼 큰 재미가 숨어 있음을 알게 된다. 유튜브에서 무료 상영 중이니 영화 찾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다.
천무천황이 사망한지 한 달 무렵 대진(大津)황자가 모반하였다. 노야황후는 모반사건이 제보되자 조사도 없이 다음 날로 교수형에 처했다. 대진황자의 아내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맨발로 뛰어나가 황자와 같이 죽었다. 모두가 흐느껴 울었다. 모반을 일으킨 황자는 노야황후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대진황자가 처형된 후 그의 죽음을 애닯아 하는 눈물가 6편이 그의 누이 대래(大來)황녀에 의해 만들어진다. <만엽집 105번가> 吾勢祜 乎/倭邊遣 登佐/夜深 而 鷄鳴/露 尓 吾 立所 霑 之 “내 권세와 복록의 근본이여. / 나라의 변두리로 보내졌구나. / 밤이 깊어 닭이 우는데 / 이슬을 맞으며 나는 서서 젖고 있지” 황자는 깊은 밤 목이 졸려 죽은 것으로 보인다. ‘야심이계명(夜深而鷄鳴)’이라는 구절은 황자가 깊은 밤에 닭 잡는 것같이 목 졸려 죽었다는 것을 은유하고 있다. <만엽집 106번가> 二人行 杼/去 過 難寸 秋山 乎 如/何君 之 獨越 武 “둘이 갔어야지. / 나도 가기에 어렵지 않은 가을 산이 아닌가. / 어찌 그대는 홀로 넘어갔는가” <만엽집 163번가> 神風 乃 伊勢 能 國 尓母 有益乎奈/何 可来計武/君 毛不有尓 “신풍 같은 너의 군세는 응당 나라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 어찌하여 그대가 모반을 계획했겠는가. / 그대는 가고 없네” <만엽집 164번가> 欲見 吾 爲/君 毛 不有 尒 奈/何 可來 計 武/馬疲 尒 “원한다, 너의 마음을 드러내 보이기를, 나에게. / 그대는 가고 없나니. / 어찌 모반의 계획을 세웠겠는가. / 말도 지치는 머나먼 저승길 그대 떠나갔구나” 황녀는 동생의 모반을 믿지 않고 있다. 동생에게 모반을 꾀하지 않았음을 드러내 보이라고 탄식하고 있다. <만엽집165번가> 宇 都曽 見 乃/人 尓有 吾 哉 従/明日 者 二上山 乎/弟 世登 吾 将 見 “동생의 무덤이 있는 곳이 멀리 들판에서 보인다. / 사람이 있어 나를 따른다. / 아침 해가 떠오를 때 이상산에 올랐다. / 동생이 나에게 나타난다” <만엽집 166번가> 礒 之於尓 生 流 馬 酔 木 乎/手折目 杼/令視 倍 吉/君 之 在常 不言 尓 “바위에서 물이 나와 흐르니 말이 가던 걸음 멈추고 마셔댄다. / 따르는 사람이 손으로 나무를 꺾고 눈을 두리번거리며 동생의 무덤을 찾는다. / 보라고 안내한다. / 그대는 평소처럼 말이 없다” 말이 물 마시는 소리가 무덤가의 정적과 비교되어 더욱 크게 느껴진다. 무덤의 황자는 평소처럼 과묵하다. 대래황녀의 작품은 만엽집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절창이다. 한 글자 한 글자가 푸른 바다에 남겨진 진주와도 같다. 대래황녀를 만엽향가 최고의 가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화랑마을 야외방탈출 모바일 미션게임 용화향도(이하 방탈출게임)’의 시범운영이 지난 18일을 마지막으로 성황리에 종료됐다. <사진> 시에 따르면 10월 정식 유료운영에 앞서 이달 5일부터 18일까지 게임 홍보와 프로그램 점검을 위해 방탈출게임을 무료 시범운영 했다. 시범기간 동안 일반 이용객은 총 282팀, 834명으로 하루 평균 65명이 이용했으며, 체험을 마친 이용객들은 98% 이상 지인에게 추천하겠다고 답변해 높은 관심과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화랑마을은 체험을 마친 이용객들의 이용후기에서 “친구에게 공유하겠다”, “너무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냥 화랑마을을 둘러보고 싶다면 야외방탈출 꼭 해보세요”, “시즌2는 언제?” 등을 보고 대체로 만족스러웠다고 평가했다. 화랑마을 관계자는 “남은 기간은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이용객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모바일 프로그램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우리 조상들은 오랜 기간 동안 개와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개에 대한 구전 설화가 지역 곳곳이 무대가 되어 이야기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우리 조상들에게 개는 가장 정감이 갔던 동물이며, 슬픔과 기쁨을 항상 함께했던 대상이며, 잔잔한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소재였다. 그런 평범함이 이야기로 21세기인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설화가 되었다. 경주개 동경이는 우리나라 토종개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토종개이다. 오래된 역사만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많다. 경주개 동경이에 대한 구전 설화는 강남대학교 홍순석 교수의 저서인 『한국인과 개』(민속원, 78쪽, 2017)에 수록된 동경견의 설화(삼탄집 권4, 해동잡록 3)와 경주대학교 최재영 교수가 서술한 『경주의 신화전설집성』(慶州의 神話傳說集成, 264쪽, 2008)에 증보문헌비고(권제12, 수이 獸異조)에 수록된 충견 의구총 동경이 이야기 등을 전하고 있다. 조선 성종시대 문신인 삼탄(三灘) 이승소(李承召: 1422~1484)의 삼탄집 권4에 수록된 경주개 동경이의 설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연풍(延豐) 길가 언덕 끊어진 곳 산록(山麓)에 쌍분(雙墳)이 있어 마치 높이 솟은 돈대[路堠] 같았다. 그곳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동경(東京 경주)의 한 아전이 그 집의 개와 함께 책상자[笈]를 지고 도보로 서울에 과거보러 가다가 도중에서 병이 들어 이곳에 와서 죽으니, 그 개가 집에 돌아가 나들며 비명을 지르는 것이 마치 애절함을 호소하는 형상이었다. 그 아들이 개가 혼자 돌아온 것이 의심스럽고 이상하여 곧 개를 따라 나섰다. 개가 빨리 달려 길을 인도하여 그 아버지가 죽은 곳에 도착하자 숨이 막혀 죽어버렸다. 그 아들이 자기 힘으로 귀장(歸葬)하지 못하고 아버지 시체를 기슭 위에 가매장하고 개도 그 옆에 묻었다”한다. 이삼탄(李三灘)이 이곳을 지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뉘라서 길에서 죽어 언덕에 버려진 것을 가련히 여기랴 誰憐道死委山阿 개만이 돌아가 주인 집에 알렸네 犬獨還歸報主家 그 아들과 같이 달려와서는 숨막혀 죽으니 與子偕來仍暍死 언덕 위에 쌍총은 대대로 전하여 자랑하네 隴頭雙塚世傳誇 犬:東京狗. 李裕元 『林下筆記』, 「文獻指掌編」「東京狗」 『경주의 신화전설집성』(문경현, 최재영, 264-265p)에 기록된 충견 동경견이 설화는 다음과 같다. “동경견(東京견)은 꼬리가 없는 개요. 됭경견, 됭견, 댕견이라고 불리어온 경주 특산의 토종개다. 이 개는 충직하고 용맹 영리함으로 유명하다” 동경의 의구총(塚)이야기는 경주(동경)에서 전국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충청북도 연풍면(지금의 괴산군 영풍면 연(원)풍리) 길가 산기슭에 두 무덤이 있었다. 지방 사람들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동경(경주)에 사는 아전 집에 기르던 동경견을 데리고 개나리(괴나리) 봇짐을 싸서 과거를 보러 한양에 가다 문경 새재를 넘어 이곳에 이르러 병이 나서 죽고 말았다. 따라온 개는 주인을 일으키려고 가진 애를 쓰다가 효과가 없고 죽은 것을 알자 주인을 지키다 두고선 새재를 넘어 동경 집으로 향하여 달려갔다. 개가 집에 당도하자 짖고 울부짖으며 가자는 시늉을 하여 그 아들이 이상하게 여겨 따라나서 갔더니 이곳에 이르러 주인의 죽은 시체를 가리키며 짖다 울다가 기진맥진하여 주인 옆에 쓰러져 죽었다. 아들이 아비의 시신을 찾았으나 고향 동경으로 옮길 수 없어 그 자리에 장사지내 무덤을 만들고 그 옆에 충견 의구(義狗) 무덤을 만들어 안장했다. 그래서 두 무덤 쌍분이 있게 되었고 이 동경견의 충견 의구총은 세상에 유명하게 되었다.”『증보문헌비고』권제12, 수이(異)조의 이야기이다. 최석규 경주개 동경이 혈통보존연구원장 경주신문 독자위원 이 기사는 지역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지속가능발전기본법 시행령이 공포된 후 대한민국 지자체가 지속가능발전 업무영역 설정과 업무분장에 대한 내부 검토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지자체가 ‘지자체 SDGs 시스템’ 구축에 대해서는 이해도가 높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지역 SDGs(지속가능발전목표) 이행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지자체와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지속가능발전협의회 등이 지속가능발전 업무영역과 업무분장을 시도해야 한다. 업무영역은 지속가능발전 업무를 맡은 담당자(행정)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예시를 나타내는 것이다. 지속가능발전 업무를 중심으로 업무 영역을 크게 구분하면 지속가능발전 이행체계 구축과 SDGs 작성, 이행평가의 두 부문으로 나눌 수 있다. 지속가능발전 이행체계 구축에서는 지속가능발전 추진 로드맵 작성(SDGs 작성, 이행, 모니터링 과정 전반에 대한 구상), 지속가능발전 전담부서설치(지속가능발전 추진 업무에 대한 주무부서의 지정), 지속가능발전 기본조례 제정과 구현(제도기반 구축), 지속가능발전위원회·협의회 설치(조직 기반 구축)에 대한 것이다. SDGs 기본 계획 작성 업무는 먼저, 지속가능발전현황 진단으로 시작된다. 이는 지역의 조건과 상황에 대한 진단과 주민의 참여와 지역사회의 제한적인 자원 여건에 맞는 행동의 우선순위를 정하기 위한 기초 자료를 확보하는 것이다. 둘째, 지속가능발전 비전, 목표, 이행계획 수립은 지역사회의 중점 방향과 자원 배분의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것이며, 이를 위한 정책과 프로그램의 개발을 유도하는 것이다(비전과 목적). 그리고 정해진 기간 내에 성취할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며, 채택된 행동의 적절성과 행동계획의 실행에 따른 성과를 평가할 기준이 되는 것이다(목표). 한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각 부서별 사업과 추진 일정, 재정·기한·인적 자원을 배분하기 위한 과업을 포함한 구체적인 전략과 과제가 설정되어야 한다. 나아가 지역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진단하고 모니터링 할 수 있는 지표 개발도 준비 또는 진행되어야 한다. 지표계발은 지자체 부서별 성과지표의 지침이자 중장기적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주민의 이해와 요구를 구체적으로 수치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지역주민과 소통할 수 있고 지역사회의 특성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지표 개발이 필요하다. SDGs 기본계획 작성에서 중요한 것은 지역의 조건과 상황에 대한 진단과 주민의 참여이다. 현황진단은 지역사회의 제한적인 자원 여건에 맞는 행동의 우선순위를 정하기 위한 기초 자료를 확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비전과 목적을 세우는 것은 지역사회의 중점 방향과 자원 배분의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정책과 프로그램의 개발을 유도하는 것도 이행계획수립에서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다. SDGs 작성, 이행평가는 기본계획 작성과 진단과 피드백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기본계획 작성 업무부분은 지속가능발전 현황진단, 지속가능발전 비전·목표·이행계획수립, 지속가능발전지표개발을 들 수 있고, 진단과 피드백 부분은 지속가능발전지표 진단과 모니터링, 지속가능성보고서 작성, 지속가능발전이행계획 수정·보완, 주요조례와 계획의 지속가능성 검토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지역사회의 지속가능성 수준을 파악할 수 있으며, 지역사회의 역량을 모아야 할 영역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대표지표들의 경우 지역주민이 함께 모니터링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지속가능발전지표의 진단과 모니터링 결과, 전략과 과제의 이행상황을 담는 지속가능성 보고서가 작성된다. 지지체는 지속가능보고서를 통해 지역사회의 변화를 진단하고, 전략과 과제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SDGs 진단과 피드백 업무는 지역사회의 지속가능성 수준을 파악할 수 있으며, 지역사회의 역량을 모아야 할 영역을 발견하는 것이며, 지속가능발전 지표의 진단과 모니터링 결과와 전략과 과제의 이행과정을 담아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지속가능발전 이행계획을 수정하고 보완하며, 특정한 사업은 전환하고 새롭게 발굴하는 업무라 할 수 있다. SDGs의 작성-이행-모니터링 단계별 각 행정기관의 역할은 인식전환, 조직구성, 제도형성, 지역 SDGs 작성, SDGs 이행, SDGs 평가 전 과정을 포함한다.
-론다의 투우장 7/11 세비야에서 우리는 이곳 ‘론다’로 왔어요. 론다는 스페인 남부지역에 있는 인구 30여 만 정도의 작은 도시로 펑퍼짐한 높은 절벽 위에 세워진 작은 도시입니다. 신구 시가지 가운데로 ‘타호 협곡’이 생겨나 있고, 그 위로 ‘누에보 다리’가 연결되어있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절벽 도시와 흰색 집들, 누에보 다리, 헤밍웨이가 산책하고 집필하던 길 등으로 많은 관광객의 필수코스로 이름나 있는 곳입니다. 또한, 여기가 스페인 투우의 발상지요, 가장 오래된 투우장이 있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헤밍웨이가 피카소와 함께 이 투우장의 경기를 즐겨보며 지냈다지요. 이 투우장은 1785년 준공된 스페인 최초의 투우장입니다. 지름이 66미터, 원형으로 생겼어요. 이곳은 원래 ‘왕림기사양성소’로 기사들의 훈련을 목적으로, 가상의 적을 황소로 삼아, 소들과의 싸움터였다고 해요. 여기에 있는 투우박물관에 가니, 투우장의 역사와 관련 자료를 볼 수 있었습니다. 관람 장소는 승마연습장, 마구간, 투우소 대기소, 투우경기장, 투우사 동상 등이 있습니다. 이곳은 6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투우장으로, 현대투우의 개척자인 ‘프란시스코 로메로’가, 붉은색 보자기로 소를 흥분시키는 전투적인 투우를 여기서 선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손자인 스페인의 전설적인 투우사 ‘페드로 로메로’가 6000여마리의 황소를 부상시키지 않고, 쓰러트린 역사적인 현장(투우장)이기도 합니다. 처음 투우는 17C경 왕실의 오락으로 시작되면서 그 후 국민이 즐기는 구경거리로 되었답니다. 소들은 경기가 열리기 전 어둡고 좁은 공간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에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경기당일 철문이 열리고, 쏟아지는 빛과 함성에 극도로 흥분되어, 투우사가 흔드는 붉은 천으로 돌진, 그들이 죽음으로써, 투우장을 벗어 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동물 애호 환경 추세에 따라 사라지는 경기로 무슨 축제일이나 특별한 날에 개장한다고 합니다. -투우장 주변 풍경 헤밍웨이가 론다에 있으면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했고, 그 후 이 영화도 여기서 일부 촬영을 했어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기 가장 좋은 곳’으로 이 도시를 꼽았다고 하지요. 누에보 다리, 전망대, 무어왕의 집, 주변 공원, 헤밍웨이의 산책길 등 이곳 관광명소를 십 수분이면 걸어가서 볼 수 있는 근접 거리에 있으며, 론다 도시만 해도 짧은 시간에 걸어서 거의 다 볼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또한, 투우장 주변에는 오페라 하우스가 있고, 투우장에서 걸어와 전망대에 서면, 절벽 앞 멀리 아늑한 시골길이며, 오렌지, 올리브 단지와 농촌 마을의 푸른색 비유(view)가 관람객의 가슴을 시원하게 합니다. -‘무어왕’의 집을 지나며 전망대에서 나와, 헤밍웨이 산책길을 지나서, 5분 정도 누에보 다리를 건너면, 길가 좌측 첫 번째 내리막길 끝 집이 무어왕의 집입니다. 14c경 나스르 왕국시대에 지어진 집이라고 해요. 현재 개인 사유 저택으로 항상 관람이 가능한 집은 아닙니다. 협곡으로 내려가면서 눈으로 훔쳐볼 수밖에 없는, 3층 집으로 내부가 365계단으로 되어있으며, 옛날 한때는 무기고와 지하 감옥으로 활용되었다고 가이드가 설명합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leejongi2@naver.com 이 기사는 지역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14년(문무왕 14년, 674) … 2월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었으며 진기한 날짐승과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에 등장하는 기록이다. 이 기사의 ‘연못’이 바로 월지다. 679년(문무왕 19년) 안압지에 동궁을 지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두 곳 모두 문무왕 재위 시절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궁과 월지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기록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효소왕 6년 9월, 697) △동궁아를 설치하고 상대사 1인, 차대사 1인을 두었다(경덕왕 11년 8월, 752) △동복 아우 수종을 부군으로 삼고 월지궁에 들였다(헌덕왕 14년 1월, 822) △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연이 무르익자 왕이 거문고를 타고 좌우에서 노래를 부르며 매우 즐겁게 놀고 파하였다(헌강왕 7년 3월, 881년) △고려 태조가 기병 50여명을 거느리고 수도 근방에 이르러 만나기를 요청하였다. 왕이 백관과 더불어 교외로 나와 맞이하고 궁으로 들어와 마주 대하며 정성을 다하여 극진히 예우하고 임해전에 모셔 연회를 베풀었다(경순왕 5년 2월, 931) 등의 기록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동궁과 월지는 나라의 경사를 축하하며 외국의 사신들을 영접하는 연회장이자 태자의 공간이었다. ◆문무왕에게 왕권 강화는 ‘숙명’ 동궁을 지은 679년은 당나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한 뒤였지만, 월지를 조성한 674년은 아직 나당 전쟁이 끝나기 전이었다. 이 1년 동안 대규모 전투는 없었다 하더라도, 이듬해 신라의 당에 대한 항쟁이 절정에 이르렀던 것으로 미뤄보면 하루하루가 급박한 형세를 이루고 전쟁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문무왕은 왜 하필 이 시기에 월지를 조성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 의문은 674년 이전인 고구려 멸망을 즈음해 ‘왕권 강화’에 골몰하던 문무왕의 명으로 인공 연못을 조성하기 시작했고, 나당 전쟁 중이던 674년 완성됐다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생긴다. 5년 뒤 조성된 동궁 또한 월지 건설 단계에서부터 함께 지어질 것으로 계획됐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문무왕에게 ‘왕권 강화’는 숙명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숙명은 아버지 김춘추(무열왕)의 즉위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654년 진덕여왕이 죽자 귀족회의에서는 상대등 알천을 왕으로 추대했으나, 비담의 난 이후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춘추·김유신 연합세력에 의해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다. 이는 당시 신라에서 획기적 사건이었다. 그는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였고, 성골 출신인 기존 왕과는 달리 진골 출신으로 왕위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무열왕은 자신의 즉위를 둘러싸고 야기된 진골귀족들의 불만을 회유하면서 정치적 안정을 도모해야만 했다. 무열왕이 백제를 멸한 이듬해인 661년 사망한 이후 즉위한 문무왕 또한 아버지 대와 같은 고민이 있었다. 안으로는 왕권을 계승·발전시켜야 했고, 밖으로는 고구려와 당에 대한 어떤 입장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게 당면 과제였다. 문무왕은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찍부터 외교적·군사적으로 상당히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 결과 668년 고구려를 멸하며 삼국 간의 전쟁을 종식시켰고, 676년엔 백제·고구려 평정을 위해 일시적 동맹을 맺었던 당의 세력도 축출했다. 또 자신의 세력 기반인 무열왕계와 김유신계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권력의 외연을 넓혀갔다. ◆월지·동궁 조성 통해 왕실 권위 기틀 다져 이런 상황 속에서 문무왕은 왕실 권위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월지와 동궁을 조성한 것이다. 특히 문무왕에게 있어서 동궁을 짓는 것은 왕위계승을 위한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29대 무열왕에서 36대 혜공왕까지를 중대(中代)로 구분했다. 이 시기 왕위계승 원칙은 재위 중인 왕의 장자를 태자로 삼아 왕위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성골왕 시기 왕위계승이 왕과 그 형제의 가족이라는 확대가족에서 이뤄진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 문무왕은 신라 역사상 태자로 책봉돼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무열왕은 즉위 2년째 법민(문무왕)을 태자로 책봉했다. 문무왕도 즉위 5년이 되던 해에 신문왕을 태자로 책봉한다. 다만 32대 효소왕과 34대 효성왕은 아들이 없어 각각 동생에게 왕위를 전했으나 장자상속이라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다. 태자 책봉은 왕위계승 문제로 빚어질지 모를 우려를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가 컸다. 왕이 갖춰야 할 자질과 능력을 미리 함양시키려는 뜻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태자궁인 동궁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신라의 동궁은 태자의 거처뿐만 아니라 태자의 교육기관 역할도 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한편에선 문헌 속 임해전에서 펼쳐진 많은 횟수의 주연(酒宴)을 예로 들며 태자 교육기관 내에 연회를 베풀던 임해전이 위치한다는 것에 의문을 표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외국의 사신 접대나 연회가 펼쳐지는 전각이 있는 곳에 태자의 교육기관이 있는 것이 어색하다는 것이다. 동궁의 위치에 대해서도 의견은 엇갈린다. 월지 서편 건물지와 동편 영역을 포함한 곳을 동궁으로 보기도 하고, 월지의 동편을 동궁, 월지 서편을 월지궁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밖에도 국립경주박물관 남측을 동궁으로 보는 견해가 기존에 있었고, 최근엔 월지 서편이 동궁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렇듯 연구자마다 다양한 학설을 제시하고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다만 월지 주변에서 확인되는 동궁 관련 유물, 문헌에서 확인되는 동궁관(東宮官) 기구(機構)속에 월지 관련 관청명 등으로 볼 때 월지 주변에 동궁이 있었던 것은 큰 이견이 없는 분위기다.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어찌됐건 동궁을 따로 세운 것은 왕위계승 준비를 위한 예비 조치로 이해할 수 있다. 문무왕이 순조롭게 왕위를 이어가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말했다. 김운 역사여행가
경주시가족센터는 이달 13일부터 11월말까지 ‘2022년 찾아가는 다문화이해교육 사업’을 실시한다. <사진> 다문화이해교육 사업은 올해 다문화 이해교육 강사 양성과정을 이수한 결혼이주여성 10명이 주체적으로 다문화 공존에 대한 인식 변화와 포용력을 키워 더불어 사는 사회분위기 제고를 위해 시행하고 있다. 시는 지금까지 다문화 이해교육을 어린이집·유치원·초등학교에 한해 시행했지만, 앞으로는 모든 시민이 교육 받을 수 있게 대상범위를 경로당까지 확대할 방침이다. 이번 교육은 대한노인회 경주시지회와 연계해 지역 어르신들이 많이 모이는 경로당 20개소를 선정해 지역사회 다양한 구성원에게 다문화를 알리고 체험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 어르신들이 문화의 다양성을 쉽게 이해하도록 전통놀이 및 문화를 체험해보고 음악과 소품을 이용해 작은 축제 체험 활동도 진행한다. 특히 지난 13일 사정경로당에서 실시한 교육은 베트남의 문화 소개와 전통놀이, 체험활동, 노래, 춤 등의 내용으로 진행됐다. 박정우 센터장은 “교육을 받은 어르신들이 문화의 다양성과 타인을 존중하고 서로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다문화를 이해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며 “앞으로 경주시는 다문화 인식개선과 사회통합을 위해 지속적으로 다방면의 교육을 실시할 것”이라고 전했다.
대한노인회 경주시지회는 경주시 지원으로 지난 7월 25일부터 9월 5일까지 한궁보드를 경로당에 보급했다. <사진> 올해 경로당에 보급되는 한궁보드는 노인복지기금 공모사업에 선정돼 22대를 보급했다. 또 현재까지 경로당에 300대가 보급되고 있으며, 타 기관 사업으로 보급된 곳도 30여개소에 이른다. 실내에서 손쉽게 이용이 가능한 한궁은 희망하는 경로당에 보급한다. 경로당 한궁보급은 한궁 심판 및 지도자 자격을 취득한 행복선생님이 직접 교육 및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사계절 경로당을 이용하는 어르신들에게 건전한 여가생활을 제공하고 신체 좌우 평형성 증진과 팔의 유연성 및 근력을 키워주고 집중력 향상에도 도움이 돼 경로당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매년 경주시노인회장배 한궁대회가 진행되고 있으며, 최고 우승팀은 경상북도 대회의 출전권도 획득하게 된다. 코로나19로 2년 동안 개최하지 못한 한궁대회도 오는 10월 진행될 예정이다. 구승회 회장은 “재미와 건강을 한꺼번에 찾을 수 있는 생활스포츠 한궁으로 무료함도 달래고 즐거운 경로당 생활이 되길 바란다”며 “앞으로도 행복하고 건강한 경로당이 되도록 좋은 프로그램 개발과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전했다.
경주시 치매안심센터는 치매환자 가족을 대상으로 힐링 프로그램인 ‘기억을 지켜주는 His cooking’을 운영한다. 이달 15일부터 내달 6일까지 매주 목요일 주민건강지원센터 영양교육실에서 치매환자의 가족 중 남성 보호자 10여명을 대상으로 진행한다. <사진> 이번 프로그램은 보호자로 하여금 잠시라도 돌봄의 부담에서 벗어나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는데 목적이 있다. 특히 치매환자를 돌보는 가족이 남편인 경우 식사를 준비하는 부담감을 감소시키고, 균형 있는 한 끼 식사를 준비할 수 있도록 기획했다. 위덕대 외식산업학부 이지현 교수가 수업을 진행하며, 메뉴는 치매에 좋은 재료를 이용해 구성했다. 경주시는 추후 레시피 북을 제작해 지속적으로 가정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제공할 방침이다. 최재순 보건소장은 “이번 힐링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치매환자와 가족들이 실생활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의 기회를 더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