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델스존하면 바로 떠오르는 작품은 연극 ‘한여름 밤의 꿈’의 부수음악으로 쓰인 결혼행진곡(축혼행진곡/1842년)이 아닐까? 지금도 전 세계의 결혼식장에서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음악이니 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멘델스존과 맹렬히 대립각을 세웠던 바그너의 결혼행진곡(오페라 로엔그린의 ‘혼례의 합창’/1850년)도 지금껏 식장에서 연주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자는 퇴장할 때, 후자는 (신부가) 입장할 때 쓴다. 영국의 빅토리아 공주가 1858년 자신의 결혼식을 위해 두 곡을 직접 선택한 이래 결혼관습이 되었다. 사실 축복의 날에 듣는 이 행진곡들에 반유대주의가 개입되어 있는 건 매우 유감스런 일이다. 바그너는 유대인을 싫어했고, 그래서 유대인 혈통의 멘델스존을 혐오했다. 20세기 들어 나치의 총수 히틀러(A.Hitler/1889-1945)는 같은 입장에 있는 바그너의 음악을 찬양했다. 반면, 유대인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은 금지곡이었고, 하이네(H.Heine/1797-1856)의 아름다운 시에 곡을 붙인 ‘노래의 날개 위에’(1834년)마저도 들을 수 없었다. 또한 게반트하우스 앞에 세워진 멘델스존의 동상은 철거를 면치 못했다. 멘델스존 가(家)와 나치와의 악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938년 나치는 멘델스존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창립한 멘델스존 은행을 도이체 방크(Deutsche Bank)에 강제로 흡수해버린다.   나치는 유대인 및 포로 대학살(holocaust)에 ‘치클론B’라 불리는 독가스를 사용했다. 그런데 ‘치클론B’의 제조사는 멘델스존의 둘째 아들인 파울이 1867년에 만든 아그파 필름을 계승한 회사였다. 한편, 아그파 필름에는 나치의 끔찍스런 전쟁영상이 담겼다. 멘델스존 일가가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그들의 사후에 일어난 것이다. 멘델스존의 작품은 그의 경제적 환경만큼이나 밝고 아름답다. 20여 년 동안 무려 49곡(6곡×8권+별도의 1곡)이나 작곡한 무언가(無言歌)가 그러하다. 무언가는 가사 없는 노래(Lieder ohne Worte)다. 슈베르트의 예술가곡에 해당하는데, 다만 가사가 없다고 보면 된다. 원래 피아노를 위한 곡으로 작곡되었지만 지금은 바이올린 등 다양한 악기의 독주곡으로 편곡되어 연주되고 있다. 5권의 6번째 곡 ‘봄노래’가 특히 유명하다. 우리나라엔선 통화대기음으로 많이 쓰이고 있어 친근하다. 한편, 멘델스존이 스코틀랜드 헤브라이즈 군도를 여행하다가 감명 받아 쓴 ‘핑갈의 동굴(Die Fingalshöhle) 서곡’은 음악의 풍경화라 불린다. 이러한 단악장의 연주회용 관현악곡은 훗날 리스트가 주창한 교향시의 원형이 된다. 멘델스존은 교향곡을 5곡 썼다. 이중에서 3번 스코틀랜드, 4번 이탈리아가 자주 무대에 오른다. 애절한 멜로디로 시작하는 바이올린 협주곡(1844년)은 멘델스존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이다. 1847년 친누나이자 여성 작곡가였던 파니의 죽음은 멘델스존에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멘델스존도 파니 사후 6개월 만에 뇌졸중으로 죽는다. 그의 나이 38세 때다. 모차르트보다 불과 3년 더 살았다. 천재는 하늘이 빨리 데려간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