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진주에서 출발하여 그리운 내 고향 광명을 찾았다. 건천 IC에서 빠져나와 금척 고분군을 지나는 데 외가가 그 안쪽마을에 있었다. 외할머니가 장롱 깊숙이 숨겨둔 500원짜리 지폐를 용돈으로 주시던 게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 돈으로 평생 잊지 못할 책을 샀으니 내 인생의 seed money가 된 셈이다.
시골 농부이신 부친은 어릴 적 책 사달라 조르는 나에게 “어릴 땐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책(大說)을 읽어야 한다. 소설은 어른이 되어 읽는 책”이라는 일종의 가이드 라인을 주시는 바람에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는 없었다. 시골 고향에서 책을 사려면 버스를 타고 20리길 경주를 가야만 하는데 차를 타는 문제부터 차비를 해결해야 하는 문제, 무엇보다 책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상태에서 양서를 접하기는 정말 하늘의 별따기였다.
할머니가 주신 돈으로 책을 사기로 결심한 나는 엄마가 성내로 가실 때 버스를 타야겠다 생각하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마침 엄마가 제사상 차릴 장을 보느라 성내로 가게 되셨다. 집에서 아랫마을 버스정류장까지 1.5km는 족히 되는 거리를 무거운 쌀자루를 이신 엄마가 눈치채지 못하시도록 첩보원을 방불케 하듯 따라나섰다. 엄마가 차에 올라타실 때 용케 차에 올라탔더니 엄마가 알아보고 깜짝 놀라셨다. 하지만 이미 차는 출발했고 어머니는 나를 돌려보내기를 포기했다.
다음 작전은 서점 가기, 엄마가 성건시장에서 쌀을 팔고 난 다음 장을 본격적으로 보시기 전에 짬을 내 중앙통의 경북서점에 들렀다. 서점 점원으로부터 500원에 고를 수 있는 책이 두 권이라는 말을 들으신 엄마는 ‘최단 시간에 책을 고를 것’이라는 작전명령을 내리셨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나는 내 눈높이의 책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이름의 책을 두 권을 골랐다. 그 두 권이 ‘장발장’과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였다. 장발장은 왠지 앞으로 읽어도 장발장, 뒤로 읽어도 장발장 왠지 재밌어 보였고 지킬박사는 제목이 길어서 매력 있었다.
빅토르 위고(1802~1885)의 ‘레미제라블’ 주인공 장발장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로 당시 어린이들에게는 ‘장발장’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25세 청년 장발장은 7명의 조카를 위해 빵을 훔치다 적발되어 주거침입과 절도죄로 5년 선고를 받았고, 탈옥미수 4회에 14년을 추가로 감옥살이하면서 모두 19년을 복역했다. 그 긴 세월 침대에서 자본 경험이 없고 퇴소 후에도 전과자로 낙인찍힌 노란색 통행증을 소지한 관계로 여관에도 들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한 주교가 따듯한 음식과 숙소를 제공해 주었기에 난생 처음 느껴보지 못한 인간애를 느낀다. 하지만 값나가는 성당의 은식기가 탐이나 몰래 주교의 방에 있는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다 헌병에게 적발되어 미리엘 주교에게 끌려왔다.
여기에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식기를 본 주교는 자신이 장발장에게 준 것이라 말하고 은촛대 두 개를 장발장의 손에 들려주며 말했다.
“장 발장, 나의 형제여. 당신은 이미 악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오. 선한 사람입니다. 당신의 영혼에 대해 내가 값을 치렀어요. 나는 당신의 영혼을 어두운 생각과 절망에서 구출하여 하느님께 바치려 합니다”
이후 장발장은 남을 용서하는데 일생을 바친다. 자신을 평생 따라다니며 괴롭히던 자벨 경감과 전과자에 대한 냉담한 시선을 바꾼 장발장은 끝없는 사랑을 실천한다. 그 모습은 어린 나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20세기 지성 에리히 프롬(1900~1980)은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을 통해 현대인의 소외를 치유할 5가지 사랑에 대해 설파했다. 21세기 무한 경쟁시대에 노출된 현대인들에게 원만한 인간관계 형성은 끝없는 숙제로 남아 있다.
얼마 전 직장에서 필자는 동료 직원과의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로감으로 일찍 직장을 그만두고 싶어했다. 그때 생각나는 책이 어릴 때 읽은 장발장(원제목은 레미제라블)이었다. “나부터 그를 용서하자. 그리고 나의 의(義)-내가 의롭고 선하다는 생각-를 스스로 내려 놓자”고 다짐했다. 돌이켜 보면, 외할머니가 그 500원 거액을 용돈으로 주시지 않았다면 시장 보러 나선 어머니의 뒷꽁무니를 따라 그 버스에 오르지 못했다면 그리고 시간이 넉넉하여 서점에서 책을 골랐다면 장발장이라는 좋은 책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한 권의 책’ 장발장은 내 인생에 있어 목적하는 항구로 인도하는 등대와 같은 책이다. 독서의 계절 가을밤이 깊어 간다. 오늘밤 책 한 권 잡고 독서삼매경에 빠져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