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사마소(司馬所)는 조선시대 과거시험에 합격한 지방 선비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거나 정치를 토론하던 곳으로 유생들의 사설 집합소였으며, 생원·진사시를 연방(蓮榜)이라 하기에 사마소를 연계소(蓮桂所)라 달리 부르기도 하였다. 애초에 훈구파의 유향소(留鄕所)에 반발해 사림파의 생원․진사들이 따로 사마소를 설치하는 등 정치적 성향과 그에 따른 폐단도 상당하였다. 다만 지방의 유생들이 강학하고 지역 간 소식을 전하는 등 사마소의 순기능이 우선되었으니, 경주의 사마소는 우수한 인재들이 모이는 학문적 공간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화계(花溪) 류의건(柳宜健,1687~1760)은 경주 내남면 화곡에 머물며 벼슬을 멀리하고 선비의 본분에 힘쓴 인물로 1735년 49세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경주의 사마소가 언제 처음 건립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훗날 여러 차례 중건하였는데, 「연계안서(蓮桂案序)」를 보면 임인년(1722)에 중건 논의를 한 것으로 보여진다. 게다가 유생들에게 ‘도의(道義)를 숭상하고, 충효(忠孝)에 힘쓰라(道義相尙 忠孝自勉)’며 선비의 본분에 힘쓸 것을 당부하였다. 영귀정기(詠歸亭記)에 의하면, “문천(汶川)가에 오래전 영귀정(詠歸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과거에 합격한 유생들이 편하게 쉬는 공간으로, 어느 때에 지어졌고 언제 헐리었는지 모르고, 그 땅이 비었는지가 백여년이 된다. 임인년(1722) 중건을 논의하여 먼저 정자의 북쪽 작은 땅에 작은 공관(公館)을 세우고, 때때로 그곳에서 쉬었다. 하지만 정자는 여러 해 진척이 없다가, 경신년(1740) 봄에 이르러 비로소 경영을 시작하여, 다음 해(1741) 초여름에 공사를 마쳤으니, 영조임금께서 재위에 오른지 17년 되는 해이다. 상사(上舍) 이덕록(李德祿)․손경걸(孫景杰)이 실제로 일을 주관하여 완공하였고, 이에 문천 가에 다시 정자가 세워져 오늘날 여러 유생들이 편하게 쉬는 마땅한 곳이 되었다.”며 사마소의 내력을 기록하였다. 본래 교동 48번에서 현재의 장소로 이건된 사마소는 문정(汶亭)·문양정(汶陽亭)·병촉헌(炳燭軒)·풍영정(風詠亭)· 영귀정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고, 사마소의 편액은 1762년 경주부윤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1724~1802)가 썼다. 과거시험은 인재를 등용하는 중요한 단계로 지역의 인재를 뽑아 적재적소에서 민생의 안정과 나라의 정사를 도모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하지만 과거시험을 통해야만 벼슬에 나아갈 수 있는 어려운 현실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기에 선비들은 입신양명과 효행의 입장에서 노력하고 또 노력하였다. 그래서 누군가는 과거시험에 드는 소모적인 힘을 부모봉양에 헌신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가는 처사적 삶을 살았고, 누군가는 과거시험에 합격해 부모와 가문을 빛내는 급제의 길을 찾아 과거시험에 매진하였으니, 예나 지금이나 출세의 힘겨움은 동일하다고 생각된다. 경주의 선비를 연구하기에 앞서 그 인물의 성향과 학문적 수준 그리고 정치적 성향 등을 파악한다면 제대로된 인물을 조명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바로 화계 류의건이 늦은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한 이유가 사마소 출입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연계안서(蓮桂案序_ - 화계 류의건 우리 경주는 평소 선비가 많기로 일컬어지는데 고려 이전은 막론하고 조선 이래로 대과․소과에 급제한 사람은 한두 사람을 헤아리기도 어렵다. 게다가 세월이 거듭 변하여 징험할 문헌이 없고, 그 사람이 혹은 죽거나 끊어질 지경이 되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예전에 사마소(司馬所)가 있었는데, 당시에 반드시 장부[적기(籍記)]의 문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상고할 수 없다. 임인년(1722) 중건하려는 논의가 있었고, 일을 착수한 지 여러 해가 지났다. 올여름에 이르러 비로소 공사를 마쳤고, 마침내 연계소(蓮桂所)라 하고, 하나의 연계안(蓮桂案)을 두고 여러 유생의 성명을 나열해 적었다. 그리고 임인년에 함께 논의한 인원을 시작으로 문과(文科) 약간 명과 사마(司馬) 약간 명이었다. 아! 과거시험만이 어찌 선비의 귀한 바이겠는가? 하나의 이름을 얻고 잃음이 선비의 도리에 크게 연관됨이 있지 않겠지만, 국가가 이미 과거시험으로 선비를 취하고, 선비 가운데 임금을 섬기고 도를 행하려는 자는 과거시험을 버리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 이름난 선비들 역시 이러한 과정을 벗어날 수 없었으니 과거시험 역시 어찌 공이 적다고 하겠는가? 만약 이 연계안을 참고하는 자가 사마와 문과, 문과에 이어 조정에 들어가서 벼슬하더라도 도의(道義)를 숭상하고, 충효(忠孝)에 힘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후세에까지 오래도록 훈명(勳名)을 드리운다면 후대의 사람들이 장차 그 이름을 차례로 보고 아무개가 이러하였고, 저러하였고 칭송할 것이니, 어찌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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