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경주시종합자원봉사센터는 지난 3월부터 경주시 탄소중립 실천을 위한 ‘탄소중립 실천 선포 릴레이’를 진행하고 있다. 상반기 릴레이에 참여한 기관은 경주시청을 비롯해 5곳, 단체는 선덕봉사회, 봉우리봉사단, 하나회, 은비둘기, 녹색어머니회, 서라벌대학교 한뜻동아리, 바르게살기운동 성건동위원회를 시작으로 36개 단체가 동참했다. 참여한 기관과 단체는 각각 일회용품 사용 줄이기, 육우 줄이기, 물티슈대신 행주나 걸레사용하기, 텀블러 사용하기 등 생활 속에서 쉽게 실천 가능한 주제를 선정하여 릴레이에 동참했다. 또한, 릴레이에 참여한 기관과 단체에는 탄소중립 실천을 위한 키트도 제공되고 있다. 참여방법은 경주시 지역 내 기관과 단체면 참여가 가능하며 탄소중립 실천 주제를 한 가지 선정하고 자원봉사센터 기획홍보팀(070-7730-8529)로 일정을 문의하면 된다.
지자체 최초로 국제구호단체와 손잡고 개도국에 선진농업 전파 및 농번기 일손을 돕는 ‘경주시 외국인 농업연수생 제도’가 순항 중이다. 경주시는 지난 12일 국제구호단체 사단법인 나눔재단 월드채널과 농업연수 프로그램 추진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국제구호단체 나눔재단 월드채널은 캄보디아에서 빈민 무상학교 운영, 보건의료 및 생필품 지원, 자립기술교육 등 다양한 구호활동 중인 국제구호 NGO 단체다. 2009년 사단법인 설립인가를 받은 비영리단체다. 이날 시청 대외협력실에서 열린 협약식에는 주낙영 시장과 김동명 나눔재단 월드채널 이사장 등이 참석했다. 협약에 따라 경주시는 농업연수 및 농업기술 전수를 위한 인적교류 등을 추진하며, 캄보디아 농업연수생은 다음 달 말부터 순차적으로 국내에 입국할 예정이다. 이들은 나눔재단 월드채널이 캄보디아 짬뽕짬주 현지에서 운영하고 있는 빈민학교 학부모로, 신분이 확실한 만큼 연수 기간 중 무단이탈 가능성이 적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경주시 농업연수 프로그램’은 캄보디아 농민이 경주시 농가에 머물면서 2개월 정도 현장실습에 참여하는 것이다. 수요조사를 통해 농업연수 참여의사를 밝힌 농가와 농업법인을 대상으로 진행될 예정이며, 농가에서 연수생들에게 직접 숙소와 식사를 제공하고, 소정의 체류비를 지급하게 된다. 시는 연말까지 농업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한 후 농가 만족도 등의 평가를 통해 그 결과에 따라 규모를 확대할 방침이다. 또 코로나 장기화로 인해 농촌 일손이 필요한 지역농가에 도움을 주기 위해 농업연수 프로그램이 종료된 이후에는 외국인 계절근로자 프로그램과 연계도 고려하고 있다. 외국인 계절근로자 프로그램은 농번기 고질적 일손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외국인을 단기간 합법적으로 고용하는 제도다. 주낙영 시장은 “이번 농업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양국 간 상호협력 관계가 지속적으로 확대돼 외국인 농업 연수 및 계절근로자를 도입하는 모범적인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외동3일반산업단지 조성 부지 가운데 1/3을 차지하는 시유지 매각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진보당 경주시 지역위, 경주환경운동연합, 경주겨레하나 등은 지난 11일 경주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시민의 공동재산인 시유지를 헐값에 매각하려는 경주시와 경주시의회를 강력히 규탄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시민을 위한 개발 활용도가 매우 높은 요지 임야를 특혜 소지가 있는 개발업체에 매각하기보다는 외동읍 주민들의 복리 증진 위해 활용해야 한다”면서 “매각을 강행한다면 시민의 공동재산을 헐값에 팔아넘긴 것을 알릴 것이다. 시와 시의회의 현명한 판단으로 오점을 남기지 않길 바란다”고 주장했다. 이들 단체가 매각에 반대 의견을 내세운 것은 지난 8대 시의회에서 매각 부결시킨 것을 9대 시의회가 출범하자마자 통과시키려한다는 우려 때문이다. 지난 8대 경주시의회는 외동읍 냉천리 산 6-12, 산 7-9 임야 3만6903㎡의 경주시 소유 임야를 외동3일반산업단지 개발사업자에 8억3358만원(평당 7만4740원)에 헐값 매각한다며 부결시켰다. 당시 시의회는 산업단지에 편입된 시유지를 매각할 의무가 없고 행정수요에 대비해 시유지를 비축할 필요가 있다며 매각을 반대했다. 그러면서 시행사들이 산업단지 땅을 평당 10만원 매입했는데 경주시는 시유지를 더 낮게 매각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시민단체는 산업단지 조성에 특혜 의혹도 제기했다. 이들은 “전체 면적 중 1/3이 시유지가 포함돼 산단 조성을 개인 업체가 허가를 받아내는 것이 가능한지 의문스럽다”면서 “인허가 과정에서 검은 이권이 개입될 가능성이 매우 높으므로 매각 승인이나 인허가 과정에 비리가 없는 지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시의회가 시유지 매각을 반대했고 시민단체도 매각을 반대하고 있지만 경주시는 공개입찰은 배제한 채 수의 매각 방침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 관계자는 “시에서 보상을 많이 받으려 공개입찰을 하는 것은 법에 저촉되고 기업 유치에도 적절치 않다”고 밝혔다. 시유지인 아기봉산 매각이 열려지자 외동 지역 주민도 매각 반대 목소리에 동참하고 있다. 외동 체육회 관계자는 “아기봉산은 외동생활체육공원 부지로 거론되는 등 활용 가치가 높은 곳으로 지역 주민들도 매각에 황당해하고 있다”면서 “등산로 등으로 지역주민의 애용한 곳을 개인 이익을 위해 매각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국내 고분 중 금관이 최초로 발견된 금관총이 현재적인 재해석을 통해 복원·정비를 마무리하고 지난 16일 공개됐다. 금관총은 일제강점기인 1921년 발굴된 후 94년이 지난 2015년 재발굴됐다. 재발굴 당시 금관총에 대한 전시활용 계획이 본격 논의됐고, 지난 2018년 복원·정비를 시작한지 4년여 만에 돔으로 덮인 첨단 유적 전시관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첫 발굴된 시점으로 보면 101년 만의 재현이다. 경주시는 지상 1층, 면적 575.90㎡ 규모의 신라고분 형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금관총이 16일부터 시범전시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금관총 내부는 고분 정비 사상 최초로 돌무지덧널무덤의 주요 축조구조물인 목조가구(나무를 이용해 기둥을 세우고 가로를 연결해 만든 바둑판 모양의 틀)를 실물 크기로 재현해 눈길을 끌고 있다. 이는 국립중앙박물관이 2015년 금관총 재발굴 당시 무덤의 돌무지를 쌓기 전 목조가구 시설의 흔적을 확인했던 성과를 이번에 되살린 것이다. 당시 바둑판 모양의 대형 나무 구조물(목조가구)들을 틀처럼 만들어서 무덤 중심부 덧널 주위를 촘촘히 둘러쌌던 흔적인 나무 구조물 기둥의 구멍들을 확인했다. 이는 돌무지를 쌓기 위해 이들 구멍에 목조가구를 세우고 그 사이에 정연하게 강돌을 채워 넣은 것으로 추정했다. 목조가구는 높이 4m가 넘는 실물로 재현했다. 돌무지(積石) 유구 바닥에 규칙적으로 배열된 나무기둥 자국과 외곽 경사면의 가로세로 나무기둥 접합 흔적 등을 그대로 살렸다. 소나무 원목을 쓴 구조물은 높이 4.7m, 평균 굵기는 20㎝에 달한다.
동해남부선과 중앙선 폐선으로 남겨진 역사와 폐철도 개발의 그림이 완성됐다. 폐역은 지역 거점 플랫폼과 생활권 중심 플랫폼을 개발하고 폐선로는 국가철도공단 개발사업 민간 제안 공모에 따라 계획이 변경된다. 이 계획은 지난 19일 비공개로 진행된 역사 및 폐철도 개발 최종보고회에서 제시됐다. 최종보고회에서 공개된 개발 계획은 지난 6월 읍면동별로 열린 폐역 및 폐철도 활용방안 주민설명회 내용과 유사했다. 우선 경주역과 서경주역, 불국사역, 입실역, 안강역, 부조역은 지역 거점 플랫폼으로 개발한다는 계획이다. 경주역은 복합 플랫폼 상업 업무 복합개발을 통해 역사, 생태, 행정, 상업 업무공간으로 재탄생한다. 기존 경주역사는 황오동삼층석탑으로 이전되고 건물터는 화랑로와 연결하는 도로가 개설된다. 경주시는 경주역 부지를 새로운 랜드마크 타워 조성 등 경주의 중심 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또한 공공개발 형태로 행정과 공원이 어우러진 공간을 조성한다는 계획도 제시하고 있다. 서경주역은 복합상업시설과 공동주택, 공공청사, 공원조성 등의 개발구상을 통해 뉴타운으로 개발한다는 방침이며 불국사역은 공원조성과 불국사역 보존해 주민편의시설 등 역사문화공원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입실역은 공동주택 사업과 상업 기능을 배치해 생활권 중심 상업 지구를 계획하고 있으며 안강역은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을 펼칠 계획이다. 그리고 동방역과 모화역, 건천역, 아화역은 생활권 중심 플랫폼으로 개발한다. 동방역은 그린웨이가 연계되는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되고 모화역은 커뮤니티 공원으로 지역주민과 근로자를 위한 근린 센트럴파크 조성될 예정이다. 건천역은 역사문화자원을 활용한 역사전시관 조성과 그린웨이 연계를 통한 휴식 공간, 아화역은 지역 최초 철도역이라는 점을 부각해 보전 활용할 계획이다. -폐선 활용은 민간 공모 17곳에 달하는 역사 부지 활용은 경주시 의중이 반영되고 있지만 폐철로 활용은 민간 공모에 따라 유동적이다. 동해남부선 53.2km와 중앙선 27.1km 등 총연장 80.3km에 달하는 폐철도 활용은 우선 국가철도공단 개발사업 민간 제안 공모를 반영할 방침이다. 국가철도공단이 지난달 동해남부선과 중앙선 폐선 부지 경주시 구간 개별사업 추진을 위한 민간 제안 공모를 진행하고 있다. 오는 10월까지 제안서를 받아 내년부터 폐철도 일부 구간에 대해 민간 개발이 진행될 예정이다. 공모는 구간별로 추진되며 동해남부선 수소트램 국가정책건의 등 친환경 수단 도입도 검토하고 있다. 수소트램은 울산, 경주, 포항 84.5km를 해오름동맹 합동건의 통한 국가시범사업 추진 계획한다는 계획이다. 이미 경주에서 효문역 구간 트램 사업 협의를 마친 상태로 울산시는 도시철도사업 구축계획(수소 트램)을 국토부 승인까지 받은 상황이다. 만약 민간공모 사업이 추진되지 않는다면 시는 철도 유휴부지 활용사업을 통한 그린웨이 조성을 추진할 계획이다. 기존 철로는 와인터널, 레일바이크, 레일 정원 등 민간개발 추진도 고려되고 있다. -폐철도 활용은 꼭 필요한 사업, 설문조사 결과 85% 응답 동해남부선과 중앙선 폐선으로 남겨진 역사와 폐철도 개발을 시민들은 경주시 발전 위해 꼭 필요하다고 밝혔다. 지난 4월 18일부터 5월 20일까지 경주시민 3151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중 85%가 폐철도 활용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시민들은 동해남부선(모화, 입실, 불국사, 경주, 안강, 나원, 부조역) 폐선 활용방안에 대해 관광자원으로 활용(24%) 의견이 가장 높았으며 뒤를 이어 공원 및 휴식공간 20%, 공공행정기능 11%, 교통시설 8% 등으로 조사됐다. 역사 부지는 공원 및 휴식공간 활용 16%로 가장 많았으며 뒤를 이어 관광자원, 교통시설 순으로 등으로 조사됐다. 중앙선(서경주, 율동, 건천, 아화역) 선로는 공원 및 휴식 공간으로 활용이 20%로 가장 높았고 관광자원 17%, 교통시설 11%, 공공행정기능 7% 순으로 응답했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시민들은 경주역 부지에 행정복합타운조성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설문조사에서 행정복합타운 조성에 찬성이 63%로 조사됐으며 반대는 16%, 모름 19% 등으로 찬성 의견이 높았다. 그리고 동천~황성 구간 폐철도 부지는 도시 숲 조성사업과 연계한 산책로 등 그린웨이 조성을 바라고 있었다. 경주시 관계자는 “국가철도공단 공모 이후 폐철도부지 개발계획 협의를 진행하고 오는 12월경 폐철도부지 개발 용역 최종보고회를 진행하는 등의 절차를 밟을 계획이다”면서 “폐철로 활용은 시민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 계획하겠다”고 밝혔다.
“꾸미와 고양이, 주변에 부유하는 동그라미에 자연의 에너지를 담았습니다. 우리가 비록 자연 속에 있지 않더라도 우리는 자연의 영향을 늘 받고 있으며, 그 안에 공존한다는 것을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습니다”<작품 song of nature 91x73, 장지에 채색, 2022> 장지바탕에 수간안료로 여러 번 반복해 채색을 쌓아 완성하는 그녀의 작품은 몽환적이면서도 따뜻하다.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처럼 친근하고 포근한 그녀의 작품을 마주하면 마치 부드러운 위로를 받는 것 같다. 꿈과 희망을 전하는 캐릭터 꾸미를 등장시켜 세상에 따뜻한 손을 내미는 이소명 작가의 개인전 ‘Song of nature’가 경주예술의전당 갤러리달에서 23일부터 9월 4일까지 열린다. 알천미술관 전시공간프로젝트 ‘공유’로 마련된 이번 전시에서 이소명 작가는 Song of nature 시리즈 작품들을 선보이며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전통의 계승과 현대화의 과제에 천착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는 그녀는 동양화와 서양화를 그린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화가’의 꿈을 키워왔다. 유화나 아크릴에 비해 깊고 은은한 멋이 매력적인 전통 한국화 재료인 수간안료와 장지를 선호하는 작가. “고등학생 때 맑은 느낌이 좋아 수채화로 입시를 치르는 서양화를 갈망했으나 아버지 권유로 한국화를 선택하게 됐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세계 어디에 나가도 한국밖에 없는 그림인 한국화를 선택한 것은 무척 잘한 일인 것 같습니다” 늘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기 위해 고민하는 작가는 그동안 자신의 자아를 상징하는 ‘꾸미’에서 ‘일상’, ‘자연’으로 시야를 넓히며 작품마다 새로운 스토리로 관람객을 찾았다. 현재 작가는 단순한 자연이 아닌 우리와 공존하는 세상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표현기법에 있어서도 늘 다양하게 시도 중이다. 슬럼프도 성장하는 길의 과정이라며 덤덤히 받아들이는 그녀는 그동안의 작업의 변화가 의도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했다. 산책을 하면서 자연스레 자란 야생화들을 보며 모티브를 얻는다는 작가는 늘 새로운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낯선 변화에 적응하며 계속해서 성장을 꿈꾼다. 젖먹이 아이와 같은 미지에 대한 끝없는 탐구심으로 늙어도 늙지 않는 작가로 남고 싶다는 그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자연과 공존하는 세상을 함께 호흡하고 환기하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 이소명 작가는 경북대에서 한국화를 전공했으며, 항저우 중국미술학원에서 산수화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사)한국미술협회 회원으로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6번의 개인전과 부스개인전 4회, 160여회의 초대 및 단체전,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도서 ‘삶이 지금 어딜 가느냐고 불러세웠다’(수오서재, 2018), 월간도서 ‘행복이 가득한집’(2018.10), KTcs사보 ‘HEARTNER’(2016.1)에 표지 등의 작품을 수록했으며, 대표작품 소장처로는 Jack C Richards Decorative Arts Gallery(New Zealand), 한국전력, 서부산세무서 등이 있다.
경주시립극단이 시민 참여 연극교실인 ‘객석에서 무대로’의 참여자를 모집한다. ‘객석에서 무대로’는 연극이란 주제를 수업으로 구성해 연극의 기초부터 무대 실연까지 연극의 전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 운영은 9월 20일부터 12월 10일까지 경주예술의전당 실습실에서 무료로 수업이 진행된다. 모집인원은 선착순 20명이다. 연극을 생활예술로 체험하고자 하는 20세 이상 성인이면 누구나 다음달 14일까지 신청 가능하다. 프로그램은 연극의 기본 이해와 신체 훈련, 발성을 경험해보는 ‘들어서기’, 직접 희곡을 읽고 작품과 인물을 해석하고 등장인물로 연기를 해보는 ‘올라서기’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과정으로 작품을 직접 무대에서 실연하는 ‘펼쳐보기’ 3단계 프로그램으로 구성돼 있으며, 전 과정을 경주시립극단 단원들과 함께한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경주시청 홈페이지 또는 경주시립예술단 블로그에서 확인 가능하다. 시민연극교실 관계자는 “관람에만 익숙했던 연극이라는 분야를 직접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연극이라는 예술분야가 시민들의 일상 속에 잔잔하게 스며들길 바란다”고 전했다.
경주시종합자원봉사센터는 ‘2022 하반기 자원봉사 재능대학’ 수강생을 모집한다. ‘자원봉사 재능대학’은 지난 2013년부터 현재까지 진행해오는 프로그램이다. 자원봉사자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분야의 재능 교육을 통해 보다 폭넓은 자원봉사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지역사회를 위한 재능 나눔을 실천할 재능봉사자를 육성하고 있다. 이번 프로그램은 △제과제빵 △수지침 △바리스타 △정리수납 등 총 4개 강좌, 65명의 수강생을 모집한다. 정리수납 강좌는 자격증 취득이 가능하다. 교육일정은 오는 9월부터 11월까지 매주 1회씩, 총 10회 운영된다. 다만, 코로나19 감염예방을 위한 수강인원 축소, 교육장 입장 전 열 체크 등 생활 방역 체계를 준수하며 교육을 진행할 예정이다. 모집기간은 이달 26일까지며, 만 18세 이상 경주시민이면 누구나 신청 가능하다. 수강신청은 경주시종합자원봉사센터 홈페이지에서 신청서를 다운받아 작성 후 방문접수 및 이메일(gyeongju1365@hanmail.net) 통해 신청 할 수 있다. 기타 프로그램에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경주시종합자원봉사센터로 문의하면 된다.
행복은 언제나 가깝게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억지로 구하려고 무리하다 보면 오히려 행복은 멀리 도망가고 불행과 불운이 닥쳐든다. 최근 서점가를 뜨겁게 달구는 화제의 소설 ‘불편한 편의점(김호연 작 / 나무 옆 의자)’은 얼핏 편의점 알바생들을 위한 작품쯤으로 짐작되기 쉽다. 편의점을 배경으로 했고 작품 전체가 편의점의 일상을 다룬 것은 분명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편의점은 단순한 도구일 뿐 실상은 팍팍하고 무정한 가족들을 분해해서 옮겨 놓은 삶의 축소판이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성공을 위해 질주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돈이면 돈, 출세면 출세, 오로지 자기 일에만 매달린 채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만 덩그러니 놓인 채 가족들은 자신과 전혀 딴 세상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가 하면 심지어 그렇게 질주하는 자신들을 원망하고 경멸한다. 그들이 그것을 눈치챘을 때쯤 이미 돌이키기 힘든 자신에 대한 의문과 위태로운 외로움에 빠져 조금씩 자신을 죽여간다. 어떤 면에서 이 책은 공상과학소설이라고 할 만하다. 이곳에 등장하는 편의점은 ‘날조된 파라다이스’다. 책 속 편의점은 언제 문 닫을지 모를 절망적인 상태다. 낙후된 서울역 근처의 낙후된 어느 동네, 위치마저 좋지 않아 사양길에 접어든 데다 근처 재개발된 지역의 시설 좋은 편의점들의 과도한 경쟁에 제대로 대응조차 못 할 상태의 시한부급 편의점이다. 그러다 보니 물건도 제한적이고 시설도 형편없어 심지어 편의점 전자레인지까지 고장 날 정도의 제목 그대로 ‘불편한 편의점’이다. 당연히 고객들도 별로 없다. 그런 현실에 비해 성품 좋은 편의점 점주 사장님이 등장하고 모든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현명하고 듬직한 알바 아저씨가 이 편의점을 지킨다. 이 편의점을 공상과학소설로 표현한 것은 일상의 편의점들이 가지고 있는 팍팍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이다. 책 속에도 분명히 묘사되어 있듯 대부분 편의점들은 점주들이 알바들의 주휴수당을 아끼기 위해 주5일 근무를 교묘히 회피하는가 하면, 알바들은 의무감보다는 시간 때우고 자리를 지키는 것에 급급하다. 많은 알바들이 유통기한이 넘은 도시락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듯 인터넷에 소개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편의점은 알바 모두가 주5일제이고 유통기한 지난 것은 미련 없이 버린다. 점주 사장님은 알바들에게 기한 내 도시락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알바들이 성공해 더 나은 삶으로 진출하는 것을 응원하고 돕는다. 반면 이 편의점에 일하는 알바들은 어쩌면 훨씬 실존에 가깝다. 주인공 알바의 전임자인 퉁퉁하고 인심 좋은 아저씨는 일찌감치 직장에서 떨궈 나와 마지막으로 편의점에 기대 살고 있다. 지방대를 나와 취업에 실패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20대 후반의 여성은 불만에 가득 차 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후 삶의 의미를 아들의 성공에만 기대고 사는 50대 아주머니는 아들마저 이상한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악만 남았다. 그들이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편의점인 만큼 모두 절박하고 불편하고 어두운 삶을 살고 있다. 그것은 마치 헬조선을 곱씹으며 취업난에 허덕이는 요즘의 젊은이들과 위에서 치이고 아래에서 들이 받쳐 꼼짝 못하는 어중간한 50대 중년 남성들, 파괴된 가정을 이끌고 홀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대한민국 50대 여성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옮겨 놓은 듯싶다. 이들과 맞닥뜨리며 이야기의 여러 축으로 등장하는 고객들 역시 불안하고 힘든 삶에 찌들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한 번 손에 잡으면 다 읽을 때까지 뗄 수 없게 만드는 가장 큰 힘은 바로 이런 공상이 현실과 교묘하게 맞붙어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쾌감을 진득하게 주어서일 것이다. 불편한 편의점에 루저라고 할 만한 편의점 알바들, 그들만큼이나 하찮아 보일 수 있는 단골 고객들이 작은 계기, 고된 현실 속에서 잊고 살았거나 감춰져 있던 근원적 깨달음을 통해 자신들을 가두고 있던 고치를 뚫고 나비로 비상하는 모습은 매우 현실적이고 감동적이다. 행복은 결코 멀리 있지 않고 자신 속에 단단히 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이 단순한 사실을 편의점 군상들의 실례들을 통해 가르쳐주는 ‘불편한 편의점’은 편의점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의 인생 책인 동시에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슴으로 읽을 만하다.
만엽집 <15번가>는 한반도어로 읽히고 있다. <15번가>는 왜국의 제명 천황 장례식 때 그녀의 아들이 어머니의 일생을 회고하며 눈물로 지은 향가였다. <15번가>를 해독하면 다음과 같다. 渡 津 물을 건너가는 나루 海 乃 豊旗 雲 尒 바다 에 에끼 구름 이 (끼어 있구나). 伊 理 比 沙之 그대는 다스림에 나와 나란하삿지. 今 夜 乃 오늘 밤 에 月 夜 淸 明己 曾 달이 밤 깊도록 맑아 (길을) 밝히겠지 한자로 써놓고 한반도어로 읽고 있다. 누가 보아도 명백히 한반도어로 읽어야 하는 작품이다. 다음의 구절들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海乃 바다에 雲尒 구름이 比 沙之 나란하삿지(나란하다+사지) 夜乃 밤에 明己曾 밝히겠찌(밝다+기+찌다) <15번가>가 고대 한반도어로 읽히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선 작자 중대형 황자가 한반도어를 구사하였을 수 있다. 이는 일본 천황가가 백제 왕족과 혈족 관계를 갖고 있다는 일각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정황증거가 될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 고대 한반도어로 된 향가를 누군가가 암송하면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뜻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치 현대 한국의 사찰에서 천수경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깨끗하구나, 깨끗하구나, 아주 깨끗하구나, 묘하게 깨끗하구나, 모든 것이 원만하게 성취되리라)’를 낭송하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뜻을 모르고 있듯이. 고대 한반도어로 표기되어 있기에 한국어를 모르는 일본인들은 만엽집을 해독하는데 있어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만엽집이 고대 한국어로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일본인들은 지난 천 년간 만엽집 해독에 주력했으나 아직도 완독해낼 수 없었다. 이 점은 앞으로도 일본인들을 크게 좌절시킬 핵심 포인트이다. 만엽집이 고대 한국어로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은 만엽집을 우리의 고문학으로 볼 수도 있는 여지를 남긴다. 근대 이래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프레임으로 우리의 역사와 한일 관계사를 일방적으로 재단해 왔다. 그러나 이제 거꾸로 우리의 프레임으로 일본의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만엽집을 자기 민족의 정체성이자 마음의 고향으로 일컬어 왔다. 더 나아가 만엽집을 국서라고까지 추앙해 왔다. 그러한 만엽집이 한민족의 언어로 표기되어 있었다. 이제 우리는 민족의 언어로 만엽집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인문학적 영토를 넓힐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 인문학 연구자들의 책임이 막중해진다. 필자가 본 칼럼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향가의 세계다. 그곳에 가보니 충격적 사실들이 가을 들판의 가창오리떼처럼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가장 놀라운 사실 중 하나가 만엽집이 한반도어로 만들어져 있다는 점이다. 원주민과 앵무새가 콜럼버스가 신세계를 다녀왔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 것처럼 <15번가>가 향가의 세계를 다녀왔다는 증거물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여러분들을 천년 망각과 전설의 세계로 초청한다.
영국의 수 많은 왕들 가운데 후세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가장 인상깊게 남겨둔 왕들 중 한 명은 바로 헨리 8세이다. 그 이유는 그가 생전에 많은 이야기들을 후세사람들에게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그 많은 이야기들 중에는 사랑 이야기, 정치 이야기, 종교 이야기, 음식 이야기 등등 아주 다양하다. 헨리 8세는 말년에 엄청나게 비대해서 혼자 힘으로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뚱보였다. 그 이유는 과식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도 많았고 그 병마로 인해서 고생 또한 엄청나게 많이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젊은 시절의 헨리 8세는 정말 건장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몸을 잘 관리한 젊은이었다. 젊은 시절 그는 운동을 좋아했고 사냥 또한 그의 대단한 취미 중 하나였다. 어느날 가까운 측근들과 함께 런던 서쪽의 레딩이라는 곳으로 사냥을 간 헨리 8세는 길을 잃고 말았다. 이러저리 헤매던 헨리 8세 일행은 간신히 이곳에 있는 수도원을 발견하게 되었다. 수도원 원장은 젊은 국왕 일행이 수도원에 도착했으니 반갑게 맞이한 것은 당연지사이다. 한창 나이의 젊은 국왕인 헨리 8세는 사냥터에서 에너지도 소진했고, 길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던 차라 배가 무척 고팠다. 식사를 요청한 젊은 국왕에게 수도원 원장을 맛있는 소고기를 대접했는데, 그 소고기가 바로 등심이었다. 알다시피 등심은 소고기 부위가 정말 맛이 있고 양도 그리 많지 않다. 우리 말에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도 있듯이, 배가 고플 때 먹었던 이 등심이 헨리 8세에게는 대단하게 맛있었다. 식사를 마친 헨리 8세는 수도원 원장에게 물었다. “짐이 먹은 이 고기가 도대체 무엇이오?” 그러자 수도원장이 “전하께서 드신 그 고기는 바로 등심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헨리 8세는 그 자리에서 국왕의 어도로 그 등심에게 바로 작위를 내렸다. “지금부터 이 등심을 ‘Sir Loin – 등심 경’이라 칭하노라”라고 하면서. 오늘날 고급 레스토랑에서 아주 비싸게 팔리고 있는 ‘Sir Loin Steak’는 이런 행운을 타고 태어났으며, 척박하다 알려진 영국의 음식문화라 세간에 알려진 이 영국음식 가운데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음식이 되었다. 헨리 8세 이후 제임스 1세 또한 영국 중부 렝카셔에서 대신들과 맛있게 연회를 마친 후, 맛있게 먹은 이 ‘등심 경’에게 다시 한 번 작위를 수여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 두 번째 작위는 선대의 왕이 남긴 이 재미난 이야기를 다신 한 번 재현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요즘으로 치면 ‘탁월한 마케팅의 기회’가 되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사실 육식을 좋아 하는 서유럽 사람들에게 상류 사회, 그것도 왕이 직접 작위까지 수여했다는 이 역사적 스토리는 금상첨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나 또한 개인적으로 고기를 잘 먹지만 레스토랑에서 이 최고의 등심 ‘Sir Loin Steak’를 먹을 때마다 이 섬나라 영국의 왕들이 부럽기도 했다. 특히 유머와 위트를 잘 구사하는 ‘사교적 문화’에 대해서 나름의 고민과 분석을 해 보는 것이 또한 나의 취미이자 직업본능이기 때문에, 이 스테이크를 대할 때마다 생각이 좀 많다. 사실 잘 살펴보면 모든 음식에는 다 한 자락 정도의 이야기는 분명히 있다. 그 이유는 음식이 바로 사람들이 먹는 ‘문화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세상사에 이야기 없는 인간사가 대체 어디 있을까 말이다. 당연히 ‘긴 역사는 더 많은 이야기가 응당 있어야 한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적 근거를 우리는 쉽게 인지할 수 있다. 고향 땅 경주는 ‘천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유구한 역사적 현장이다. 더욱이 경주는 그 천년 역사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수도’가 아닌가. 왕들이 살았고 귀족들이 즐비하게 살았던 긴 역사는 더 많은 이야기가 응당 있어야 한다. 고향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 당연한 논리적 근거를 무시하게 될 때 우리 모두는 마음속 애향심에 대한 ‘관계성의 직무유기’를 범하는 셈이다. 본지에서 꾸준히 고향땅 경주에 관련하여 음식에 관련된 나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의도적으로 빼지 않으려고 노력한 부분이 바로 ‘역사 도시, 문화 도시, 관광 도시, 브랜드 경주’ 등과 같은 ‘경주의 정체성’이었다. 관심을 가지고 찾아본다면 ‘음식문화 경주’의 정체성을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필자 또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꾸준히 고민하면서 숙제처럼 마음에 담고 있다. 밖에서 보면 더 정확히 보인다. 우리 모두 한 마음이 될 때 해결할 숙제는 더 쉬워지지 않을까.
신림동 서울대학 근처에 있는 막걸리집에 친구들이 모였다. 그때 어느 하나가 슬픈 목소리로 상사병을 호소하였다. 술 한 잔 마신 김에 모두 호기를 부리며 그 여성의 집에 찾아가자고 하여 우르르 나섰다. 그 여성 이름의 발음에 빗대어 우리는 ‘조총련’이라고 불렀다. 조총련 학생의 집 앞에서 우리는 소란을 벌였다. 그때 그 여성의 아버지가 나와 엄히 훈계하는 사이에 조총련 학생도 나와 분하다고 눈물을 흘리다,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어머 박진 씨가 여기 웬일이에요?” 진이는 대학재학 중 그룹사운드를 이끌었는데, 이대나 다른 대학 축제가 되면 원정을 자주 갔다. 그러면서 둘은 알게 된 모양이다. 갑자기 코메디처럼 분위기가 반전되었는데, 어쨌든 참 시시하고 초라했고 별 볼 일 없던 청춘의 한 때가 남긴 잔상이다. 그런데 진이는 열심히 공부해서 재학 중 외무고시에 합격하였으나, 상사가 장발을 자꾸 지적하자 때려치우고 나와버렸다고 한다. 그만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 뒤 영국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교수생활을 하다가 김영삼 정부의 의전비서관으로 발탁되어 돌아왔다. 내가 말한 이야기로도 박진이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잘 알겠으나, 그가 가진 많은 장점 중 하나는 영어가 유창하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이냐 하면, 방한한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훌륭한 영어구사라고 칭찬했을 정도다. 내 소견으로는, 클린턴의 구사언어는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서 최고라고 본다. 그런 클린턴이 박진을 칭찬한 것이다. 박 장관은 얼마 전 아세안 관련 외교장관회의에 참석하고 왔다. 보도를 통해 듣는 그의 말은 믿음직스럽게 대단히 논리적이고 치밀했다. 그리고 그는 이 자리에서 중국의 까다로운 왕이 외교장관과 일본의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외교장관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런데 사진에 나타난 3인의 표정으로 보기에는, 그가 주역이고 중, 일의 외교장관은 들러리처럼 만들고 있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중국과 일본에서는 자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외국인보다 영어를 잘하는 외국인을 좀 더 존중하며 받들어준다. 박 장관의 유려하고 거침없는 영어구사에 아마 중, 일 외교장관은 부러움의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말의 신빙성을 강하게 하기 위해 부득이 내 경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과거 한국헌법학회장 재직시 중·일을 포함한 아시아 헌법학자들의 리더가 되어 ‘아시아헌법포럼’을 창설하였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중국과 일본의 대학에서 영어로 강연한 것이었다고 본다. 어느 쪽이건 강연 후 나에 대한 태도가 확 달라졌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난 문재인 정부는 외교안보라인이 대단히 허약하였다. 한국의 대통령이 중국에 가서 혼밥을 하고, 중국 주재대사를 중국어 한 마디 못하는 사람으로 보내는 것 따위에서 그 단면을 잘 엿볼 수 있다. 요즘 드러났으나, 흉악범이라는 추정으로 귀순 북한주민을 북송하여 사형당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무능이 빚어낸 참사였다. 그때의 외교라인 구성의 면면과 지금 박진 외교부를 비교해보라. 어쩌면 비교의 대상이 될 수도 없을 정도이다. 월초에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방한했을 때 윤석열 대통령이 면담을 하지 않았다고 하여 비난하는 견해가 있다. 국제정세를 보는 안목이 부족한 소치이다. 우리 측으로 봐서 미국은 가장 높은 단계의 가치동맹국이고, 세계의 험한 파고를 넘어가는데 미국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한반도는 미국, 일본과 같은 해양세력과 중국의 대륙세력이 맞부딪히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는 점을 어느 때건 잊을 수 없다. 정부의 조직체계상 아마 박 장관이 조언했을 것이다. 이 조언을 수용한 윤 대통령과 박 장관의 조합이 참으로 든든하다. 그런데 2025년 한국에서 열릴 APEC 정상회의에 우리 경주도 뜻을 내고 있다. 지금 인천, 제주, 부산이 우리와 경합하고 있다. 개최지로 결정되는 경우 경주의 미래를 확실히 구축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가 될 것으로 본다. 그래서 경주시나 경북도에서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 결정의 주무부처가 바로 외교부다. 박진 장관은 부디 지역균형발전의 차원에서 경주를 낙점해주길 기대한다. 그리고 그때 오시는 분들에게 확실한 한국의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경주가 제일 낫지 않을까 한다. 합리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박 장관의 뚜렷한 면모가 이번에 확실히 드러나길 기다린다.
공고번호 : 경북-경주시-2022-00775 황성동 스타벅스 근처에서 8월 3일 구조 활발하고 애교가 많으며 사람을 매우 좋아함. 믹스 / 여아 / 3개월 / 2kg / 1차 접종 완료 / 중성화x 입양문의 054)760-2883 ※반려동물이 실시간 입양됐을 수 있으니 확인 전화바랍니다.
사실 이육사는 옥룡암으로 내려오기 전 가혹할 만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폐결핵으로 6개월간 성모병원 입원 후 퇴원하였으며, 부친의 죽음과 큰형 이원기의 죽음이 연이어 있었다. 그리고 의열단 혁명동지 윤세주의 전사(戰死)가 있었다. 가까운 이들의 죽음이 연속으로 이어졌다. 그는 이곳 옥룡암에서 병약한 시인으로서 한적함을 즐겼을지 모르나, 한편으로는 독립운동가로서는 뜨거운 가슴은 멀리 대륙의 독립운동하는 동지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몸이 좋아지면 달려가리라 그렇게 마음을 세우고 있었으리라. 그의 생애에서 옥룡암의 시간들은 몸을 추스르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다음을 기다리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육사의 수필 ’계절의 표정’ 가운데 마지막 부문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벗들이 나를 달랬다. 전지 요양을 하란 것이다. 솔깃한 말이라 시골로 떠나기로 결정을 했지만 막상 떠나려고 하니 갈 곳이 어디냐? 한 번 더 생각해 보지 않 수 없었다. 조건을 들면 공기란 건 문제 밖이다. 어느 시골이 공기 나쁜 데야 있을라구. 얼마를 있어도 싫증이 안 날데라야 한다러면 경주로 간다고 해서 떠난 것은 박물관을 한 달쯤 봐도 금관, 옥적(玉笛), 봉덕종(奉德種), 사사자(砂獅子)를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날 까닭은 원체없다. 그뿐인가, 어디 일초 일목(日草一木)과 일토 일석(一土一石)을 버릴 배 없지마는 임해전(臨海殿) 지초(支礎)돌만 남은 옛 궁터에서 가을 석양에 머리칼을 날리며 동남으로 첨성대를 굽어보면 아테네의 원주(圓柱)보다도, 로마의 원형 극장보다도 동양적인 그 주란 화각(朱欄畵閣)에 금대 옥패(金帶玉佩)의 쟁쟁한 옛날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거기서 나의 정신에 끼쳐 온 자랑이 시작되지 않았느냐? 그곳에서 고열로 인해 죽는다고 하자. 그래서 내 자랑 속에서 죽는 것이 무엇이 부끄러운 일이냐? 이렇게 단단히 먹고 간 마음이지만, 내가 나의 아테네를 버리고 서울로 다시 온 이유는 시골 계신 의사 선생이 약이 없다고 서울을 짐짓 가란 것이다. 서울을 오니 할수없어 이곳을 떼를 쓰고 올밖에 없었다. -수필 ‘계절의 표정’ 일부 아테네 로마보다 더 좋은 경주를 두고 약 때문에 서울로 올라올 수밖에 없는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폐허 같은 고도 경주의 모습을 그는 망국의 마음을 읽었으리라. 무너진 유적을 둘러보며 떠올렸던 쟁쟁하게 울려오는 옛 소리는 아마도 선인들의 외침이거나 민족부흥의 종소리였을 것이다. 그의 마음 한가운데 자리한 것은 독립과 민족성 고취였을 것이다. 그 옛날 화랑들의 기개가 그리웠을 것이다. 일제 식민통치가 그래서 그는 이곳에서도 몸을 추스르며 벗을 그리워하며, 쉽게 시가 써지지 않는 고심을 하며 한편으로는 멀리 중국 대륙의 의열단 동지들이 생각하며 그리웠을 것이다. 이렇듯 경주 남산 옥룡암은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곳이다. 이육사는 이곳에서 3개월 정도 머물다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서 신석초와 나들이하면서 중국으로 가야만 할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1943년 초봄에 북경으로 갔다가 그해 4월 귀국했다 6월에 체포되어 다시 북경으로 압송되어 감옥에서 40세로 생을 마감했다. 옥룡암은 외지의 문인들이 경주에 오면 많이 찾는 곳이다. 올해만 해도 몇 차례 안내자를 자청해서 동행한 적 있다. 시인, 작가들이 이곳을 찾는 까닭은 무엇일까? 절 구경도 구경이지만, 이육사의 시 정신과 문학적 향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절은 자꾸만 쇠퇴해져 가는 느낌이다. 태풍에 상처 난 흔적들은 개보수하면 되겠지만, 스토리텔링이 가득한 옥룡암을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발굴하고활용하지 못함이 아쉽다. 이곳에다가 민족시인 이육사의 시 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문학적 창작공간으로 꾸며 보는 것도 좋겠다. 더군다나 옥룡암은 한때 지역의 인재들이 고시 공부를 하던 명소로 유명하다. 지금도 공부방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기에 잘 활용하여 문학 레지던스(입주작가 창작촌) 공간으로 변화를 모색해보면 어떨까? 아니면 시비(詩碑)를 세워 육사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것도 뜻 깊은 일일 것이다. 이곳에서 육사 백일장, 과 육사시 시낭송대회 등 어떤 형태로든 뜻을 기리고 추모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작은 암자에 사람들이 붐빌 것이다.
“창업을 고민한다면 청년창업지원 프로그램 적극적으로 활용하길 바랍니다. 다양한 지원프로그램이 있어서 첫 창업이라면 꼭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꽃별새 스튜디오 서수민 대표의 말이다. 서 대표는 ‘마크라메’라는 아이템을 가지고 지난 2018년 ‘꽃별새 스튜디오’로 창업을 했다. 마크라메는 서양식 매듭공예로, 뜨개질과는 달리 다른 도구없이 오로지 손을 이용해 끈으로 매듭을 엮어 작품을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디자인을 전공했던 서 대표는 전공을 살려 디자인과 관련된 직장으로 취업을 했다. 취업을 했지만 생각보다 직장 생활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던 서 대표는 취미로 시작했던 마크라메로 창업을 결심하게 된 것. “전공을 살려서 디자인 회사, 건축사무소, 한복집 등 다양하게 취업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복잡한 서울과 회사생활은 저와 맞지 않았고, 매일 퇴근길 어머니와 통화하며 힘들다고 푸념하기 일수였습니다. 그러던 중 직장 생활을 관두고 외할머니댁이 있는 경주로 내려오게 됐습니다” “당시에 취미로 하던 마크라메를 가지고 창업지원을 받아서 창업을 해보란 권유를 받게 되면서 창업을 결심했습니다. 창업을 결심하면서 관련 자격증도 취득하고, 창업지원사업에 대해서 알아보며 정말 정신없이 준비하게됐습니다” 창업지원사업과 자격증 취득 등 약 1년의 창업을 준비하는 시간을 가지고 2018년 창업하게 된 서 대표. 당시에는 마크라메라는 공예가 익숙하지 않았던 터라 자리를 잡기까지 많이 힘들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힘들었습니다. 얼핏 뜨개질이랑 비슷해 보여서 쉽게 들어왔다가 공방에 전시해놓은 작품을 훼손하는 사람들부터 시작해 처음으로 하는 제 사업이다 보니 익숙치 않은 상황에 대처하기도 힘들었습니다. 단순 판매부터 강의 프로그램 기획까지 혼자해야 하다보니 많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디자인을 전공했던 경험을 살려 여성스러운 디자인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지금은 지역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창업을 선택하고 자리를 잡기까지 힘들었지만, 그래도 창업을 선택한 것에 후회는 없다는 서 대표는 창업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창업을 두려워말고 정부지원사업을 최대한 활용해라고 강조했다. “저도 처음에는 창업에 대해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청년들을 위한 정부지원사업에 대해 알아보던 중 다양한 지원사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세금신고부터 업체명을 만드는 법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이용했기에 큰 부담없이 창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직장 생활과는 달라서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지만, 시간의 활용도나 직장생활의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도전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양주에 위치한 대가농원은 3차산업을 중심으로 한 농가주도형 6차산업화를 이루어 냈다. 농작물판매가 아닌 대가농원이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살려 체험농장으로 고부가가치를 실현한 것이다. 대가농원은 수도권에 위치해 있으며 서울과 30분 거리, 상수원보호구역인 다산유적지내에 위치하고 있어 제한이 많지만 그만큼 청정한 환경을 유지하고 있다. 대가농원은 이성준, 장복순 씨 부부가 운영하고 있으며, 이들 부부는 1983년 3만여평 땅을 임대해 농사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농사로 수익을 올리기가 쉽지는 않았다. 유통단계를 거치면 소득이 적어 수확한 농작물을 직접 팔아보기도 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때문에 키우는 작물을 다양화 해보기도 했지만 수익이 쉽게 나지 않았다고 한다. “농사만을 해서 수익을 내기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편도 저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농작물을 이것 저것 바꿔서 키워봤지만 판매만으로는 수익이 좀처럼 오르지 않았죠”, “그러던 중에 다산유적지를 찾은 방문객이 저희 농가를 둘러보고는 농가체험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한 말에 귀 기울였죠. 그때 체험학습농장을 시작하게 된 것이 지금까지 오게 됐습니다” #체험농장에 특화 체험학습농장을 시작하면서 대가농원은 본격적으로 농작물 판매가 아닌 체험학습에 집중하게 된다. 직접 재배한 농산물 딸기를 100% 체험사업에 활용함으로써 기존 대비 3배 이상 고부가가치를 실현했다. 체험학습농장을 시작하면서 체험프로그램, 운영방식 등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했던 부부는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다’는 생각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특히 체험프로그램의 경우 방문객들의 의견을 100% 활용해 운영했던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강조했다. “처음 시작할 당시에는 남편과 둘이서 프로그램을 만들었죠, 시작할 프로그램은 있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 이후에 생겨난 모든 체험프로그램은 방문객들의 의견을 100% 반영했어요. 따로 설문조사를 한 것도 아니고, 방문객들이 흘려 이야기한 작은 의견을 그대로 학습프로그램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사실 대가농원을 방문해주신 분들이 만든거나 다름 없습니다” 이렇듯 농작물을 재배해 판매하는 것보다 체험사업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많다 보니 대가농원은 재배하는 농산물의 100%를 체험사업에 활용하고 있다. 체험사업을 시작한 2002년부터 대가농원은 지속적으로 성장했으며, 수도권 인근에서는 체험농장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친환경 유기농 농작물 재배 대가농원에서 생산하는 대표 농작물은 딸기로, 농약을 사용하지 않은 유기농 재배를 고집하고 있다. 특히 최근까지 한강에서 토종물고기의 생태계 보호를 위해 잡아들이고 있는 외래어종 베스를 수매해 유기농비료로 활용함으로써 생태계보호와 진정한 친환경농업을 실현하고 있다. “현재는 베스를 매입하는 업체들이 생겨서 하고 있지 않지만, 처치 곤란한 베스를 저희가 받아 이를 비료로 만들어 인근 농가에 무료로 나눔을 했습니다. 베스로 만든 비료가 냄새는 많이 나지만 특정 작물에 쓰임이 좋아 나눔을 받은 농가들도 만족했습니다” “체험학습농장이기 때문에 유기농을 고집하는 것도 있지만 건강한 작물을 만들기 위한 신념이기도 합니다. 이런 신념을 끝까지 가지고 유지할 수 있었기에 지금의 대가농원이 있는 것입니다” #년간 체험객 2만명 방문 대가농원은 100% 체험위주로 운영되는 농장이다. 농장주 부부가 10여년간 노력한 끝에 지금은 수도권의 대표적인 체험농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가농원에는 2012년 이후 매년 약 2만명 이상의 방문객을 기록하고 있다. 방문객 수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 매출 또한 4억원 가량을 기록하는 등 성공적인 체험농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체험농장으로 바뀌고 나서 해마다 꾸준히 방문객이 늘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현재는 방문객이 조금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방문객이 많을 때는 하루 200명 이상이 올 때도 있습니다. 이제는 체력이 달려서 하루 방문객에 제한을 두는 것을 계획 중에 있습니다” 대가농원은 농장체험 프로그램에 이어, 다산 유적지를 활용해 교육프로그램도 진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유적지와 인접한 지리적 이점을 교육적으로 활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각종 규제와 체험사업의 어려움을 극복 체험사업을 시작한 뒤 체험객들을 위한 휴식공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대가농원이 위치한 남양주시 조안면은 상수원보호구역인 동시에 다산유적지가 있어 문화재보호법 등 각종 규제로 건물하나 짓기 힘든 실정이었다. 농장주 부부의 살림집을 지으면서 휴게공간을 확보했고, 치유농장 지원사업을 통해 교육장 새롭게 지어 확장했다. “앞으로는 체험이 아니라 치유의 영역으로 농업의 트렌드가 바뀔거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해외에서는 농업을 치유의 목적으로 활용하는 곳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치유쪽으로 초점이 맞춰질 거라고 예상합니다”, “이번에 새로 확장하게 된 휴게공간 역시 치유농업 지원사업을 이용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앞으로는 농가도 정부의 정책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귀농·귀촌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대가농원 장복순 대표는 귀농·귀촌을 계획하고 있는 이들에게 ‘최소한 5년은 고생해야 할 각오를 해야한다’, ‘정부의 정책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의 대가농원이 있기까지는 아무래도 바뀌는 농업 정책에 맞추어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업도 농사만 지어서는 살아남기가 힘듭니다. 변화의 시기에 잘 맞춰서 나가야 농업으로 성공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귀농·귀촌을 계획하고 있는 청년들에게 ‘농업을 쉽게 생각하면 안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최소한 5년은 고생해야 합니다. 뭐든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대가농원도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가공제품을 개발하는 등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농업을 쉽게 생각하고 귀농을 하려한다면 저는 말리고 싶습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부동산 가격 폭등, 미국 주식 활황, 비트코인 폭등 등 여기저기서 높은 수익이 났다는 것이 날마다 뉴스에 나왔다. 그러더니 요즘엔 모두가 폭락 관련 뉴스다. 거기에 인플레이션이 등장하더니 스테크 인플레이션(물가상승+경기침체)이란 단어도 심심찮게 나온다. 이런 타이밍에는 저축도 재테크도 모두 하기 싫어진다. 한 마디로 힘 빠지는 시기이다. 그런데 이 시기는 꼭 필요한 시간이기도 하다. 재테크 능력을 키우는 아주 유용한 시간이었음을 아줌마는 경험으로 안다. 오늘은 경험으로 깨우친 아줌마 재테크 요령, 기초 3단계를 풀어놓는다. 첫째, 악착같이 종잣돈을 만든다. 쓰고 남은 돈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의 생활비만을 남기고 남은 건 모조리 모아야 한다. 적어도 쓸데없는 지출이 없는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 주변에서 재테크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이 투자 수익률을 자꾸 묻는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높은 수익은 절약이다. 무엇에 투자하든 자본이 있어야 그에 비례해서 수익이 발생하는데, 절약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최고의 투자 방법이다. 그로 인해 종잣돈의 볼륨이 커지고 이것은 시간에 의해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만든다. 쉽게 말해서 20년 동안 일정 규모의 종잣돈을 모은 횟수는 몇억 자산의 개수를 의미한다. 투자 기간을 30년으로 확대하면 종잣돈을 모은 횟수는 더 엄청난 차이를 의미하게 된다. 그러니 악착같이 모아라! 재테크를 하려면 경제를 알아야 한다. 둘째, 금리라도 알고 재테크를 시작하자. 요즘 뉴스에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금리 인상이다. 그런데 나와 더불어 재테크 좀 하는 친구들은 이미 금리 상승을 뉴스보다 일찍 예측했고 그에 맞춰서 투자 비중을 움직였다. 금리 관련 도서를 한두 권 읽고 관련 유튜버 동영상을 보면 기초는 알게 된다. 책을 안 읽고 유튜브 방송만을 보면 결과만 알게 되고 그렇게 되는 원인과 과정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다. 그러면 매번 상황에 따른 금리 변동과 투자환경에 대한 결론을 제대로 내리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금리 상승기와 하락기가 있었다. 기본적인 원인과 결론은 규칙적이지만 변칙적으로 움직이는 경우도 있는데 그 변칙은 원인과 과정을 통해 판단할 수 있다. 일반인들이 뉴스를 보고 따라 하면 이미 늦은 것이다. 그래서 굳뉴스에 팔고 배드뉴스에 사라는 주식 격언도 있는 것이다. 한국 금리를 알려면 미국 금리를 알아야 하고 그러면 FOMC 회의나 연준위, 점도표 등 뉴스에서 일상으로 나오지만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내용을 알게 된다. 한국 금리와 미국 금리를 예측하는 유튜브 동영상도 있던데, 사실 예측이라는 말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다. FOMC 회의록, 위원들의 발언 등으로 누구나 다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나의 현 상황을 알아본다. 언제까지 수입 활동을 할 수 있는가? 또는 할 것인가? 수입과 지출을 낱낱이 살펴 새는 구멍을 확인하고 더불어 자산과 부채를 체크한다. 부채가 있는 경우 종잣돈을 모아서 부채를 먼저 갚아야 하는지 아니면 그보다 나은 수익으로 이어질 투자할 곳이 있는지, 내가 그걸 운용할 능력이 있는지 체크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채가 없다면 종잣돈 모으는데 집중하고 종잣돈을 가지고 투자할 곳을 지금부터 알아보는 것이다. 물론 이에 앞서 금리와 경제 공부가 먼저다. 종잣돈을 모으고 그때 공부하는 것은 늦다. 그러니 종잣돈을 모으면서 이 시기에 공부에 집중하는 것을 추천한다. 아줌마는 불후한 노년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위의 3단계를 거치며 종잣돈을 모았고 투자 관련 책과 경제 관련 도서를 파헤쳤다. 결과론적으로 다양한 분야에 투자했고 자산이 많이 불었다. 금수저가 아니더라도 자산을 늘릴 기회가 세상에 널려있다. 미리 포기하지 마라!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기회들이 널려있으니 그 기회를 볼 수 있는 선구안을 키우자!
신라 신문왕이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에게 수성(守城)의 보배로 얻은 대나무로 피리를 만든 만파식적(萬波息笛)있으며, 강력한 왕권의 상징으로 천존고(天尊庫)에 소장되었다. 고려 충렬왕이 원나라에 가서 세조를 알현하고, 세조가 망한 송나라의 보기(寶器)인 봉병(鳳甁)과 옥적(玉笛) 등 90가지와 채백(綵帛)을 하사하였다고 전하지만, 이후 옥적은 알 길이 없다. 훗날 조선 숙종 18년(1692)에 경주의 동경관(東京館)에서 옥적이 발견되었고, 만파식적으로 추정하지만, 신빙성이 약하다. 많은 문인의 기록에 옥적이 언급되지만, 이는 설화와 기록의 혼동 그리고 역사의 상징화에 따라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옥유당(玉蕤堂) 한치윤(韓致奫,1765~1814)의 『해동역사』「악제(樂制)와 악기(樂器)」에 의하면, 조선에 옥적이 있는데, 길이가 1장 9촌이며, 소리가 맑고 밝다. 해동의 용이 바친 것이다. -소엄겸(蘇彦謙)의 『조선지(朝鮮志)』: 살펴보건대, 옥적은 신라 때의 적(笛)으로 지금 경주부에 있다. 세속에 “북쪽으로 조령(鳥嶺)을 넘어가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남쪽을 유람할 때 그것을 보니, 길이가 과연 1장 9촌이었으며, 위는 말라 죽었고 아래는 살아 있었으며, 대나무의 색깔 그대로였다. 임진년 병란 때 왜놈들이 이를 부쉈는데, 쇠로 부서진 부분을 때웠다. 훼손을 당한 뒤로는 그 소리가 맑거나 밝지 않다”고 하였다. 이는 이전의 기록을 토대로 단순 경주의 옥적 길이와 대나무 등 형태에 대해 기술하였다. 해장(海藏) 신석우(申錫愚,1805~1865)의 동경방고기(東京訪古記)에 “밤이 되자 황옥적(黃玉篴)․청옥적(靑玉篴)을 보고는 불어볼 것을 부탁하였는데, 청옥적은 더욱 청량(淸亮)하여 가늘고 긴 알운(戛雲)의 울림이 있었다”고 전한다. 수종재(守宗齋) 송달수(宋達洙,1808~1858)의 남유일기(南遊日記)에 “정형과 함께 옥적을 부는 두 사람을 거느리고 봉황대에 올랐다. … 옥적은 푸르고 누른 것이 각기 하나씩이고, 옥을 다듬은 것이 대나무 형태 같고 매우 기이하였다. 그 소리가 맑고 깨끗하여 대나무보다 나았지만, 곡조에 맞추어 노래하는 것은 마치 대나무만 못하였다”라며 대나무가 아닌 옥으로 만든 피리를 언급한다. 강와(剛窩) 임필대(任必大,1709~1773)의 유동도록(遊東都錄)에 “향사당(鄕射堂)에 들어가서 옥적을 가져오게 해 살펴보니, 짙은 푸른빛이 아롱지고, 소리는 매우 청량하였는데, 동해의 용이 바친 것이라 하였다. 고려왕이 명하여 가져가 조령을 넘는데, 소리가 나지 않아서 옛 부(府)로 돌려주었다고 하니, 물건의 신기함이 이에 지극하다”라며 짙푸른 빛의 옥적을 언급하였다. 당주(鐺洲) 박종(朴琮,1735~1793)의 동경유록(東京遊錄)을 보면 구체적인 설명이 등장한다. “옥적은 길이가 1척 9촌이고, 푸른 옥으로 만들었으니, 곧 신라의 옛 유물이다. 민간에서는 동해의 용이 바친 것이라 한다. 11월 18일 밤에 금학헌(琴鶴軒)에 앉았다가 나아가게 하여 들으니 그 소리가 청량하게 울려 퍼지는데 흡사 나라 잃은 한이 서린 듯하였다. 쌀쌀한 날씨 고요한 밤에 관아의 촛불은 꺼지지 않는데, 소리는 더욱 아득히 퍼지니 사람으로 하여금 옛일 회상하는 마음을 견딜 수 없게 하였다. 이 유물이 신라왕의 풍류와 전성기의 음악을 몇 번이나 거쳤는지는 모르겠으나, 오랜 세월의 변화에도 부서지지 않고 남아서 오늘날 우리들의 귀에 다시 들려오니, 이 어찌 슬퍼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피리는 조령을 넘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하니 또한 기이하다”라며 푸른 옥으로 만들었음을 강조하였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계림옥적변(鷄林玉笛辨)에서 “경주에 옥적 하나가 있는데 신라의 옛 물건이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불면 소리가 나지 않고, 오직 경주의 공인(工人)만이 소리를 낼 수 있다. 하지만 소리를 잘 내는 공인이 하나가 있으면 다른 공인은 소리를 내지 못하였고, 그 사람이 죽은 뒤에야 그를 대신하여 소리를 낼 자가 나왔다고 한다. 나라에서 일찍이 이 옥적을 거두어 이것을 잘 불 수 있는 사람에게 주고 길에서 불게 하였는데, 그 소리가 크고 맑았다. 하지만 조령의 북쪽에 이르러 옥적이 갑자기 소리가 나지 않았고, 이미 서울에 이르러 많은 상금(賞金)을 걸고 소리를 내게 하였으나, 소리는 끝내 나지 않았다. 이것을 가지고 다시 조령의 남쪽으로 가서 불게 하자, 그 소리가 전과 같이 나왔다고 한다. 이것은 이른바 영험하고 기이하여 따질 길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거짓이라 생각한다. 그 옥적을 보면, 퉁퉁하고 구멍이 좁게 뚫려 소리내기 어려운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소리 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갑작스레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며, 경주의 사람은 아이 때부터 익히고 늙어서 전수하여 그 기예를 독차지하게 된 것이다”라며 옥적이 갖는 기이한 내력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하였다. 즉 다산은 옥적의 소리를 듣기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불기 어려운 옥적의 구조 때문이며, 귀한 옥적을 혼자만 독차지하려는 욕심 등을 지적하였다. 게다가 영험하고 기이한 옥적의 소문을 무작정 믿고 소리가 나는 이치를 궁구하지 않는 점도 지적하였으니, 역시 학자다운 논리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자유가 확장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부르조아지(bourgeoisie)는 새로운 사회의 동력이 되었다. 예술가들은 문학으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그들의 감정을 분출시켰다. 절대왕정시대에는 어림도 없던 일이었다. 감정이 꿈틀거리는 그림, 실연의 아픔을 노래한 표제음악, 이런 것들은 이전 시대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낭만주의의 특징이다. 19세기는 낭만시대다. 바로크의 시작은 이탈리아였지만, 마지막은 독일이었다(비록 당시에는 국가의 개념이 미약했지만). 후기 바로크를 대표하는 음악가인 바흐나 헨델을 보면 알 수 있다. 클래식 음악의 형식을 마련한 고전파의 대표음악가 역시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독일계다. 베토벤은 고전파를 완성시키면서, 한편으론 낭만주의로 가는 길을 터놓았다. 독일 낭만파의 시조는 오페라 ‘마탄의 사수’를 작곡한 베버(C.M. von Weber/1786-1826)로 알려져 있다. 이어서 슈베르트(1797-1828)가 예술가곡으로 독일낭만주의의 맥을 이었다. 이후 독일 낭만주의는 두 갈래의 길을 걷게 된다. 하나는 멘델스존(L.F.Mendelssohn/1809-1847)으로 대표되는 보수파(신고전파)이고, 다른 하나는 리스트(F.Lisz/1811-1886)와 바그너(R.Wagner/1813-1883)로 대표되는 진보파이다. 전자는 베토벤의 절대음악을 계승하고, 후자는 베토벤의 표제음악을 계승한다. 이들의 싸움은 극렬했다. 하지만 멘델스존의 요절로 균형이 급격히 기울어진다. 이후 브람스(J.Brahms/1833-1897)가 보수파의 바통을 이어받아 기대주로 부상한다. 그리고 바그너가 죽을 때까지 살벌한 논쟁을 이어간다. 마이어베어(G.Meyerbeer/1791-1864)는 독일인이다. 이탈리아에서 오페라를 공부하고, 파리에서 일명 ‘그랜드오페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탈리아 낭만파 오페라의 선구자 로시니(G.A.Rossini/1792-1868)도 마지막 오페라이자 초대형 작품인 기욤 텔(Guillaume Tell)을 파리에서 론칭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프랑스인 베를리오즈는 로마대상을 수상하고, 실연의 아픔을 담은 환상교향곡으로 프랑스 낭만주의의 선구자가 된다. 그는 오페라 ‘벤베누트 첼리니’를 만들어 마이어베어나 로시니 급의 오페라 작곡가가 되고 싶었지만, 흥행에는 실패한다. 당시 이탈리아는 벨칸토 오페라의 전성기였다. 로시니의 제자인 도니체티(G.Donizetti/1797-1848)와 벨리니(V.Bellini/1801-35)의 경쟁 속에, 이탈리아는 오페라 강국의 지위를 굳건히 했다. 도니체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와 벨리니의 ‘청교도’는 일명 광란의 오페라로, 낭만주의의 특징인 ‘광기’를 구현한 다분히 낭만적인 오페라다. 한편, 이탈리아에서 기악곡으로 유명한 작곡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클래식 음악의 주도권이 북쪽 독일권으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책을 다 쓰고 나면 또 하나 고민되는 것이 있다. 바로 추천서다. 이것을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책의 무게감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게감이란 것은 헛되게 폼이나 잡자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책이 가치 있는지를 그에 걸맞은 사람에게 진실감 있게 인증받자는 것이다. 추천서는 결혼식 주례사와도 비슷하다. 요즘 결혼식은 형식적인 주례를 과감히 생략하고 축제처럼 꾸미는가 하면 신랑신부를 가장 잘 아는 양가 어른들이 주례 대신 당부하고 인사하는 순서들로 채워지곤 하는데 확실히 보기 좋은 모습이다. 2000년대 이전, 과거 주례사는 주로 신랑 쪽 아버지가 친분 있는 지역 정치인이나 영향력 있는 사업가들에게 부탁하는 경우가 많았다. 혹은 신랑이 나온 학교 교수나 고교 은사님에게 부탁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신랑과 관련 있는 교수·선생님이라면 정겨움이나 친근함이라도 있지, 정치인이나 사업가라면 어색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고 그 틈에서 진심 어린 주례사가 될 턱도 없다. 추천서도 이런 것이다. 기본적으로 책을 쓴 저자 및 책 내용과 관련 있는 인사가 책을 제대로 읽고 추천서를 써야 한다. 만약 그 관련자가 사회적인 유명세나 권위가 있으면 더욱 좋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추천인이 유명하거나 권력이 많다고 추천서를 쓰게 하면 추천서에 진실성이 떨어지고 빈축만 살 뿐이다. 다시 나의 첫 책 ‘니, 꼬치 있나?’를 들먹이면 이 책의 추천서는 만화가 이현세 화백님이 써주셨다. 이현세 화백, 아니 현세 형님은 나의 경주고 선배님으로 동창회를 통해 이미 자주 만나 뵈었다. 이 책을 낼 때는 10년 넘게 집도 가까이 있어서 수시로 형님의 단골 술집에서 만나 담소도 나누었다. 더구나 형님은 온갖 만화작품에 경주 이야기를 녹여 내셔서 누구보다 경주 홍보에 열심인 분이셨다. 100% 경주 이야기인 내 책이 나왔을 때 책 전부를 읽고 흔쾌히 추천서를 써주셨다. 또 한 분, 나와 경주 고등학교 동기생인 YTN 김용섭 기자가 추천서를 써주었다. 친구와는 가족 간에도 잘 알던 막역한 사이였고 동기회 인터넷 카페에 올린 내 글을 거의 다 읽었으니 추천서가 술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친구는 특별히 자신이 근무하는 YTN에 일부러 내 책을 소개하는 보도도 내주었다. 이를테면 ‘니, 꼬치 있나?’는 진심과 권위와 홍보까지 환상의 조합을 이룬 추천서를 받은 셈이다. 그에 비해 ‘The 큰 바보 경주최부자’는 추천인을 일부러 전부 뺐다. 당시 최염 회장님이 정치계의 유력 인사들을 몇 분 거론하시며 추천서를 받자고 하셨지만 조심스럽게 그럴 일이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경주최부자 정신이 부침 심한 정치인들 추천서로 인해 혹여라도 정치적인 색깔을 띠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고 현시대 어떤 정치인도 12대 경주 최부자를 제대로 알고 추천서를 써줄 것 같지 않아서였다. 반면 이 책에 반드시 추천서를 받고 싶었던 분들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인물들이고 경주최부자와도 인연이 있었던 분들인데 공교롭게도 그분들의 공통점이 세상 어느 책에도 추천서를 써본 적 없다는 것이었다. 뒤에 몇몇 문화계 인사들과 학계 인사들을 떠올렸지만 경주최부자 정신은 경주최부자 자체로 숭고하다는 판단에서 추천서 없이 책을 내자고 결론지었다. 자서전은 아무래도 정치인들이 가장 많이 쓰다 보니 그들이 어떤 추천인을 선택하는지도 관심이 갈 것이다. 참고로 내가 출간한 대부분 정치인들의 자서전은 오히려 정치계 인사들의 추천서를 받지 않고 출간했다. 책을 낸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치에 영향을 줄 만한 상위의 정치인들을 추천했지만 역시 ‘진실성’ 면에서 끝까지 주장하지 않았다. 지역구 유력 인사라는 이유로 끝내 정치인들을 추천서로 넣자고 한 어느 광역의회 의원은 아예 정치인들로 일괄 추천서를 받은 경우였는데 이것은 다분히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대신 내 입장에서 저자들의 초등학교 선생님과 고교 은사님 같은 분들의 추천서를 즐겨 받았다. 이분들 대부분은 실제로 자서전에 등장하는 분들이어서 저자들의 성장과정에 매우 깊은 영향을 주신 분들이다. 그만큼 진실된 추천서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정치인의 책에서 추천서를 대놓고 많이 받은 경우도 있었다. 어느 지방도시 시장의 책에서는 무려 100명 가까운 분들의 추천서를 받아 주변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 시장에게 그렇게 많은 추천서를 주문한 이유는 그가 그만큼 많은 분들과 진심으로 교감을 나누고 있다고 판단해서였다. 100명이나 추천서를 받다 보니 거기에는 전직 국무총리에 모당 대표를 지낸 인물도 있었고 어느 모로 보나 막강한 정치력을 가진 정치인들도 다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 일체 가나다순에 의해 배열했다. 그러다 보니 동네 할머니 밑에 전직 국무총리가 들어가고 고명한 스님과 유명한 목사님이 부녀회 회원과 체육회 아저씨 밑에 들어가는 ‘대단히 멋진’ 상황이 자연스럽게 나열됐다. 그래도 대표할 만한 추천서 한 분은 따로 올려야지 싶어 원고 하나를 골랐는데 그것은 그 시장에게 항의해 단식을 감행했던 할머니가 직접 손으로 쓴 편지였다. 그 할머니가 단식할 때 그 시장 역시 할머니 옆에서 굶으면서 사흘 동안 대화를 나눈 끝에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냈고 그 일로 할머니는 그 시장의 열렬한 지원자가 됐던 것이다. 편지에는 바로 그 사연이 마치 일부러 부탁이라도 한 듯 정성스럽게 쓰여있었다. 드라마...,! 그 편지는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은 것이어서 그 추천서를 메인 추천서로 올리겠다고 주장했을 때 그 시장은 물론 누구도 반대의견을 내지 않았다. 뒤에 출판 기념회를 하면서 보니 그때 추천서를 보내주신 분들이 모두 자랑스럽게 자신의 추천서를 찾아 읽으며 책에 참여한 것을 뜻깊게 생각했다. 편지 쓴 할머니도 오셨는데 마치 내가 그 정치인이라도 된 듯 반가웠다. 추천인이 결정되고 나면 경우에 따라 추천인이 저자에게 추천서를 대신 써서 보내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대필했던 어느 정치인도 그랬다. 그런데 그 추천서 당사자가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유명한 시인이었다. 정치인과 어릴 때 한 동네에 산, 정치인의 누나와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그런데 어렸을 때 헤어진 이후 자주 만나지 못해 감정을 어떻게 끌어올려야 할지 모르겠고 마침 몸도 불편해 정신을 집중해서 무얼 쓸 만한 사정이 못 된다며 필요한 내용을 써서 거꾸로 보내보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 정치인의 책을 대신 썼으니 당연히 추천서도 대신 쓸 수밖에... 급히 그 시인과 정치인의 관계, 정치인과의 어렸을 적 에피소드, 그 뒤의 인연 등을 상세히 조사한 후 그 시인이 쓴 여러 편의 수필까지 읽어본 다음 추천서를 써서 보내드렸다. 시인의 수필을 읽은 것은 그 시인의 글쓰기 패턴과 습성 등을 최대한 고려해서 쓰기 위함이었다. 며칠 후 그 시인이 놀라운 답장을 보내왔다. 누가 이렇게 자기 마음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썼느냐는 것이다. 사실관계에 대한 두어 줄의 수정만 거친 후 그 원고가 그대로 추천서로 올라갔다. 글 쓰는 작업할 때 이런 경우가 종종 생기는데 프로 작가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이상에서 보듯 추천서의 제일 관건은 책의 진정성이고 책을 소개하는 중요한 단초다. 위의 다른 예에서 보듯 정치인들에게는 또 다른 전략적 선택일 수 있다. 어느 쪽이 되었건 추천서는 저자 대신 책을 소개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자 몇 안 되는 마케팅 도구이다. 책을 쓰신 분들은 자신의 책을 열렬히 알려줄 특별한 지인이 있는지 찾아보자. 친할수록 좋고 유명할수록 좋고 책을 알릴 힘이 있으면 더더욱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