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 프랑스혁명은 자유가 확장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부르조아지(bourgeoisie)는 새로운 사회의 동력이 되었다. 예술가들은 문학으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그들의 감정을 분출시켰다. 절대왕정시대에는 어림도 없던 일이었다. 감정이 꿈틀거리는 그림, 실연의 아픔을 노래한 표제음악, 이런 것들은 이전 시대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낭만주의의 특징이다. 19세기는 낭만시대다. 바로크의 시작은 이탈리아였지만, 마지막은 독일이었다(비록 당시에는 국가의 개념이 미약했지만). 후기 바로크를 대표하는 음악가인 바흐나 헨델을 보면 알 수 있다. 클래식 음악의 형식을 마련한 고전파의 대표음악가 역시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독일계다. 베토벤은 고전파를 완성시키면서, 한편으론 낭만주의로 가는 길을 터놓았다. 독일 낭만파의 시조는 오페라 ‘마탄의 사수’를 작곡한 베버(C.M. von Weber/1786-1826)로 알려져 있다. 이어서 슈베르트(1797-1828)가 예술가곡으로 독일낭만주의의 맥을 이었다. 이후 독일 낭만주의는 두 갈래의 길을 걷게 된다. 하나는 멘델스존(L.F.Mendelssohn/1809-1847)으로 대표되는 보수파(신고전파)이고, 다른 하나는 리스트(F.Lisz/1811-1886)와 바그너(R.Wagner/1813-1883)로 대표되는 진보파이다. 전자는 베토벤의 절대음악을 계승하고, 후자는 베토벤의 표제음악을 계승한다. 이들의 싸움은 극렬했다. 하지만 멘델스존의 요절로 균형이 급격히 기울어진다. 이후 브람스(J.Brahms/1833-1897)가 보수파의 바통을 이어받아 기대주로 부상한다. 그리고 바그너가 죽을 때까지 살벌한 논쟁을 이어간다. 마이어베어(G.Meyerbeer/1791-1864)는 독일인이다. 이탈리아에서 오페라를 공부하고, 파리에서 일명 ‘그랜드오페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탈리아 낭만파 오페라의 선구자 로시니(G.A.Rossini/1792-1868)도 마지막 오페라이자 초대형 작품인 기욤 텔(Guillaume Tell)을 파리에서 론칭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프랑스인 베를리오즈는 로마대상을 수상하고, 실연의 아픔을 담은 환상교향곡으로 프랑스 낭만주의의 선구자가 된다. 그는 오페라 ‘벤베누트 첼리니’를 만들어 마이어베어나 로시니 급의 오페라 작곡가가 되고 싶었지만, 흥행에는 실패한다. 당시 이탈리아는 벨칸토 오페라의 전성기였다. 로시니의 제자인 도니체티(G.Donizetti/1797-1848)와 벨리니(V.Bellini/1801-35)의 경쟁 속에, 이탈리아는 오페라 강국의 지위를 굳건히 했다. 도니체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와 벨리니의 ‘청교도’는 일명 광란의 오페라로, 낭만주의의 특징인 ‘광기’를 구현한 다분히 낭만적인 오페라다. 한편, 이탈리아에서 기악곡으로 유명한 작곡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클래식 음악의 주도권이 북쪽 독일권으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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