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신문왕이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에게 수성(守城)의 보배로 얻은 대나무로 피리를 만든 만파식적(萬波息笛)있으며, 강력한 왕권의 상징으로 천존고(天尊庫)에 소장되었다. 고려 충렬왕이 원나라에 가서 세조를 알현하고, 세조가 망한 송나라의 보기(寶器)인 봉병(鳳甁)과 옥적(玉笛) 등 90가지와 채백(綵帛)을 하사하였다고 전하지만, 이후 옥적은 알 길이 없다. 훗날 조선 숙종 18년(1692)에 경주의 동경관(東京館)에서 옥적이 발견되었고, 만파식적으로 추정하지만, 신빙성이 약하다. 많은 문인의 기록에 옥적이 언급되지만, 이는 설화와 기록의 혼동 그리고 역사의 상징화에 따라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옥유당(玉蕤堂) 한치윤(韓致奫,1765~1814)의 『해동역사』「악제(樂制)와 악기(樂器)」에 의하면, 조선에 옥적이 있는데, 길이가 1장 9촌이며, 소리가 맑고 밝다. 해동의 용이 바친 것이다. -소엄겸(蘇彦謙)의 『조선지(朝鮮志)』: 살펴보건대, 옥적은 신라 때의 적(笛)으로 지금 경주부에 있다.   세속에 “북쪽으로 조령(鳥嶺)을 넘어가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남쪽을 유람할 때 그것을 보니, 길이가 과연 1장 9촌이었으며, 위는 말라 죽었고 아래는 살아 있었으며, 대나무의 색깔 그대로였다. 임진년 병란 때 왜놈들이 이를 부쉈는데, 쇠로 부서진 부분을 때웠다. 훼손을 당한 뒤로는 그 소리가 맑거나 밝지 않다”고 하였다. 이는 이전의 기록을 토대로 단순 경주의 옥적 길이와 대나무 등 형태에 대해 기술하였다. 해장(海藏) 신석우(申錫愚,1805~1865)의 동경방고기(東京訪古記)에 “밤이 되자 황옥적(黃玉篴)․청옥적(靑玉篴)을 보고는 불어볼 것을 부탁하였는데, 청옥적은 더욱 청량(淸亮)하여 가늘고 긴 알운(戛雲)의 울림이 있었다”고 전한다. 수종재(守宗齋) 송달수(宋達洙,1808~1858)의 남유일기(南遊日記)에 “정형과 함께 옥적을 부는 두 사람을 거느리고 봉황대에 올랐다. … 옥적은 푸르고 누른 것이 각기 하나씩이고, 옥을 다듬은 것이 대나무 형태 같고 매우 기이하였다. 그 소리가 맑고 깨끗하여 대나무보다 나았지만, 곡조에 맞추어 노래하는 것은 마치 대나무만 못하였다”라며 대나무가 아닌 옥으로 만든 피리를 언급한다. 강와(剛窩) 임필대(任必大,1709~1773)의 유동도록(遊東都錄)에 “향사당(鄕射堂)에 들어가서 옥적을 가져오게 해 살펴보니, 짙은 푸른빛이 아롱지고, 소리는 매우 청량하였는데, 동해의 용이 바친 것이라 하였다. 고려왕이 명하여 가져가 조령을 넘는데, 소리가 나지 않아서 옛 부(府)로 돌려주었다고 하니, 물건의 신기함이 이에 지극하다”라며 짙푸른 빛의 옥적을 언급하였다. 당주(鐺洲) 박종(朴琮,1735~1793)의 동경유록(東京遊錄)을 보면 구체적인 설명이 등장한다. “옥적은 길이가 1척 9촌이고, 푸른 옥으로 만들었으니, 곧 신라의 옛 유물이다. 민간에서는 동해의 용이 바친 것이라 한다. 11월 18일 밤에 금학헌(琴鶴軒)에 앉았다가 나아가게 하여 들으니 그 소리가 청량하게 울려 퍼지는데 흡사 나라 잃은 한이 서린 듯하였다. 쌀쌀한 날씨 고요한 밤에 관아의 촛불은 꺼지지 않는데, 소리는 더욱 아득히 퍼지니 사람으로 하여금 옛일 회상하는 마음을 견딜 수 없게 하였다. 이 유물이 신라왕의 풍류와 전성기의 음악을 몇 번이나 거쳤는지는 모르겠으나, 오랜 세월의 변화에도 부서지지 않고 남아서 오늘날 우리들의 귀에 다시 들려오니, 이 어찌 슬퍼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피리는 조령을 넘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하니 또한 기이하다”라며 푸른 옥으로 만들었음을 강조하였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계림옥적변(鷄林玉笛辨)에서 “경주에 옥적 하나가 있는데 신라의 옛 물건이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불면 소리가 나지 않고, 오직 경주의 공인(工人)만이 소리를 낼 수 있다. 하지만 소리를 잘 내는 공인이 하나가 있으면 다른 공인은 소리를 내지 못하였고, 그 사람이 죽은 뒤에야 그를 대신하여 소리를 낼 자가 나왔다고 한다. 나라에서 일찍이 이 옥적을 거두어 이것을 잘 불 수 있는 사람에게 주고 길에서 불게 하였는데, 그 소리가 크고 맑았다. 하지만 조령의 북쪽에 이르러 옥적이 갑자기 소리가 나지 않았고, 이미 서울에 이르러 많은 상금(賞金)을 걸고 소리를 내게 하였으나, 소리는 끝내 나지 않았다. 이것을 가지고 다시 조령의 남쪽으로 가서 불게 하자, 그 소리가 전과 같이 나왔다고 한다. 이것은 이른바 영험하고 기이하여 따질 길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거짓이라 생각한다. 그 옥적을 보면, 퉁퉁하고 구멍이 좁게 뚫려 소리내기 어려운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소리 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갑작스레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며, 경주의 사람은 아이 때부터 익히고 늙어서 전수하여 그 기예를 독차지하게 된 것이다”라며 옥적이 갖는 기이한 내력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하였다. 즉 다산은 옥적의 소리를 듣기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불기 어려운 옥적의 구조 때문이며, 귀한 옥적을 혼자만 독차지하려는 욕심 등을 지적하였다. 게다가 영험하고 기이한 옥적의 소문을 무작정 믿고 소리가 나는 이치를 궁구하지 않는 점도 지적하였으니, 역시 학자다운 논리이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