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경주캠퍼스 파라미타칼리지 지현배 교수가 마르퀴즈 후즈 후(Marquis Who's Who) 2018 알버트 넬슨 마르퀴즈 평생 공로상(The 2018 Albert Nelson Marquis Lifetime Achievement Award)을 수상했다. 이번 수상은 ‘온·오프라인 연계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한국어교육 분야 콘텐츠 개발 및 글로벌 네트워크 운영’의 성과를 인정받아 수상하게 됐다. 지현배 교수는 “‘온라인 기반 글쓰기 피드백 표준시스템 개발’등 코드 연구자로서 인문 코드 기반의 한국어 교육체계를 설계하고 있다. 대학 글쓰기 교육 연구와 피드백 시스템 운영을 위한 교수자 커뮤니티 대표로 활동 하는 등의 공로를 인정받은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지 교수는 이러한 인문 코드 기반의 한국어 교육체계 설계는 세계인이 함께 쓰는 글로벌 한국어의 가능성을 높였다는 평가와 함께 현재에도 한국어 교육의 토대 연구와 콘텐츠 개발 및 IT기반 한국어 교육 시스템에 관한 연구를 계속 수행하고 있다. 지 교수는 ICT기반 글쓰기 교육 시스템 연구와 글쓰기 교재 개발, 교수자용 글쓰기 피드백 매뉴얼 개발 등에 대한 성과를 인정받아 2017년 마르퀴즈 후즈 후(Marquis Who's Who) 인명사전에 등재된 바 있다. 현재 한국교양교육학회 편집위원장, 한국문화융합학회 부회장, 한국언어문화교류센터 대표, 한국교양기초교육원 컨설팅 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편 마르퀴즈 후즈 후(Marquis Who's Who)는 미국인명연구소(ABI), 국제인명센터(IBC)와 함께 세계 3대 인명사전 발간 기관이다. 1899년부터 과학, 공학, 문화 등 각 분야에서 우수한 업적을 이룬 인물을 등재하며 각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거둔 이들에게 평생 공로상을 시상한다.
용황초(교장 성화용)는 지난 5일 청솔관에서 영재학급 수료식을 가졌다. 수료식에는 2018학년도 용황초 영재학급을 수료하는 융합기초과정 5학년 12명, 융합심화과정 6학년 10명과 학부모, 영재지도강사 등 40여 명이 참석해 교육과정을 마무리하고 축하했다. 수료식은 영재학급 주요 교육활동 보고, 수료증 수여와 학교장의 격려사 등 순으로 진행됐다. 성화용 교장은 “영재교육을 성실하고 꾸준하게 참여해 영재학급 수료의 결실을 맺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이 경험이 미래 사회 리더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월성초(교장 남승섭)는 2학기 들어 황사발생과 더불어 건조하고 인체에 유해한 미세먼지가 경주지역에 유입되면서 매우 나쁨 상황이 연일 지속됨에 따라 지난 4일 실내‧외에서 학생들에게 미세먼지 대응 특별 교육을 실시했다. 월성초는 평소에도 각 학년별로 미세먼지 상황별 행동요령을 안내하는 유인물 배부, 교실 내 미세먼지 알림판 설치, 학교 중앙현관 앞 미세먼지 상황 표지판 등을 설치해 학생 교육에 앞장서고 있다. 또한 오전 등교시간‧점심시간 등 수시로 미세 먼지 발생 상황이 변동할 때에는 즉시 각 교실에 안내해 미세먼지 나쁨 이상인 경우 담임교사가 실내 수업 및 쉬는 시간 외부 활동 금지를 하고 있다. 보건실에서는 보건용 마스크 착용·손 씻기 등 학생들의 개인위생 지키기 교육을 실시해 미세먼지로 인한 호흡기 질환을 예방하고 있다.
한국원자력환경공단(이사장 차성수)은 6일 월성지역본부 코라디움에서 방폐물사업의 동반성장·사회적가치 창출 및 확대를 위한 2018년도 품질동행 워크숍을 개최했다. 방폐물사업의 품질역량 제고 및 개선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이날 워크숍에는 협력업체 및 공단 임직원 등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원자력시설에 대한 최신 품질보증 규제현황, 품질인의 자세 및 ISO9001과 KEPIC-QAP 적용 방안에 대한 전문가 특강에 이어 방폐물 처분시설을 견학하는 시간을 가졌다. 차성수 이사장은 “협력업체들과 품질역량 제고 노력을 꾸준히 추진하고 동반성장하는 환경을 조성해 방폐장 안전성이 향상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경주를 비롯한 경북동해안지역 제조업과 비제조업들은 향후 경기를 다르게 느끼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은행 포항본부는 경주를 비롯한 포항, 영덕, 울진지역 240개 법인기업(금속, 자동차, 기타제조업 및 건설, 도소매, 기타비제조업)을 대상으로 지난달 5일부터 23일 동안 기업경기실사지수(BSI)를 조사됐다. 조사에 따르면 제조업의 경우 기업경기실사지수가 상승했지만 비제조업은 하락한 것으로 분석됐다. 11월 경북동해안지역 BSI에 따르면 제조업은 전월대비 7p 상승한 60으로 조사됐다. 반면 비제조업의 경우 11월 BSI는 67로 전월대비 3p 하락했다. 제조업 부분별 실적을 살펴보면 자금사정과 내수판매, 원자재구입가격 등은 전월보다 상승한 반면 수출과 신규수주, 인력사정 등은 하락한 것으로 조사됐다. 비제조업 부분별 실적은 매출과 채산성, 인력사정은 상승한 반면 자금사정은 하락했다. 업황 전망 BSI도 마찬가지다. 제조업의 경우 12월 업황 전망BSI는 58로 전월과 같은 것으로 조사됐지만 비제조업 업황 전망BSI는 56로 전월보다 19p나 하락해 비제조업은 향후 경기를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다. 부분별 전망을 살펴보면 제조업의 경우 내수판매와 원자재구입가격, 제품재고수준 등은 상승했지만 생산과 수출, 인력사정은 하락할 것으로 전망했고 비제조업은 매출과 채산성은 상승한 반면 자금사정과 인력시장은 하락할 것으로 예상했다. 한편, 경북동해안지역 제조업과 비제조업은 내수부진과 인력난, 인건비 상승, 불확실한 경제 상황 등을 공통으로 경영 어려움으로 지적했다.
“‘삶을 이기다’ ‘삶을 견디다’ ‘살을 헤치다’ 등 삶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필요이상으로 전투적이나 회의적입니다. 성공한 삶이 곧 행복이며 그에 이르기까지 고달픈 현실을 당연히 감내해야 할 과정이라 여기며 살기 때문이죠” “잠시 멈추고 일상을 들여다 보면 소나무 숲의 바람 소리며, 춤추는 가을 노을이며, 바람 타는 풀꽃이며, 나를 닮은 토우며, 저마다 자신의 모습으로 춤을 추고 있어요.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삶도 추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박수미 작가의 초대개인전 ‘삶을 추다’展이 오는 15일까지 갤러리 란(대표 김정란)에서 펼쳐진다. <사진> 고달픈 일상의 연속에서 작고 투박한 신라토우의 행복한 몸짓을 보며 삶의 행복을 느끼게 됐다는 박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토우와 일상의 풍경과 바람을 모티브로 삶을 추고 있는 작품 20여 점을 선보였다. 주로 한지에 채색을 하고 자른 뒤 꼬아서 붙이는 작업을 하는 박 작가는 “한지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뿐더러 가장 인간 친화적이면서 부드러워요. 또 여리지만 찢고 자르고 붙이는 등 새로운 시도를 받아들이는 포용력 넓은 재료죠”라며 재료 채택의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올해 한수원 전시 지원 사업에 선정돼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쳐온 박 작가는 서울 갤러리 도스(10/24~10/30)에서 전시를 시작으로 대구 갤러리 경(초대전, 11/1~11/30), 경주 갤러리 란(초대전, 12/1~12/15) 등 순회전시를 통해 연이어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지원 사업을 통해 작품에 깊이 있게 몰두할 수 있었고 새롭고 다양한 작품을 남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는 작가는 “신라 토우와 삼릉 등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경주이야기를 하게 됐어요. 서울, 대구 전시를 하면서 타 지역에서 바라본 경주는 훨씬 강렬하고 세련된 모습이라는 것도 발견하게 됐죠” 설치작품을 선보이기 위해 형형색색의 토우들을 만들면서 작가는 행복했던 지난 추억을 소환하기도, 앞으로의 바람을 담기도 하며 즐거웠다고 말한다. 그리고 토우의 긍정 이미지를 조금 더 연구해 내후년 쯤 새로운 작품을 선보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박수미 작가는 1971년 경주 출신으로 대구대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미술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경북창작미술협회, 한일작가회 회원으로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다.
우리는 건강하게 오래살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다. 이런 꿈은 그냥 주어지는 축복이 아니라 사는 동안 자신의 노력을 통해 성취하여야 하는 노력의 결실이다. 이러한 행동들을 건강한 생활습관이라고 하며 대표적으로 금연, 절주, 건강한 식습관 및 신체활동이 있다. 이들 중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절주이다. -절주를 실천하기 어려운 사회 절주가 어려운 이유는, 그게 무엇인지가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번에 마시는 주량을 두 병에서 한 병으로 줄이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절대 기준(4잔) 이하로만 마시면 되는 것인가? 만약 이런 기준이 있다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다 적용될 수 있는 황금률인가? 아니면 사람마다 다른 것인가? 마시는 술의 종류에 따라서는 어떤가? 선호하는 술의 종류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절주가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우리 사회에서는 마셔야 할 주량과 심지어 선호하는 주종조차도 본인이 결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회식에서 음주를 할 경우, 마셔야 할 술은 대체로 이미 정해져 있다. 소주나 맥주 아니면 이것을 섞은 술. 마셔야 할 주량은? 그것도 마시는 사람이 정하기 어렵다. 음주 회식 빈도도 다른 사람이 정한다. 결국 내가 마시는 술의 종류와 양과 빈도를 내가 아닌 남이 다 결정해 주는 셈이니 절주를 실천하기 어렵다. 절주를 잘 실천하지 못하니 우리는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된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절주를 하지 못해서(해롭게 음주해서) 잃게 되는 건강수명 기간은 11.1개월이나 된다는 것이 연구결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주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가장 최근의 과학적 근거와 전문가 의견들을 총 정리해서 이에 대한 답을 만든 국가가 있다. 영국이다. 영국의 국민 절주지침, 정확하게는 저위험 음주지침(low risk drinking guidelines)을 보면 이렇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씩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일주일에 14잔(소주 두 병에 해당)을 넘지 않도록 마시되 적어도 2일은 금주하여야 한다. 즉, 일주일에 5일 이하로 술을 마시되 총 마실 수 있는 양은 소주 2병이 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하루에 마실 수 있는 양보다는 일주일에 마셔야 할 총량을 정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지침을 준수하면서 마실 경우 음주가 가져다 줄 수 있는 위험을 최소로 낮출 수 있으며 이는 남녀간에도 차이가 없기 때문에 이 지침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한 지침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사실 알코올은 1급 발암물질이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정기적으로 마실 경우에는 암 발생과 아무 관련이 없는 주량은 없다. 지침이 정한 범위 내로 마신다면 암에 걸릴 위험을 최소로 적게 하는 것일 뿐이고 음주로 인한 암 발생을 없애려면 안 마셔야 한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정기적으로 마실 경우에는 조기 사망과 만성적인 질병이나 결과를 경험할 수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마시는 음주를 10년 넘게 할 경우 생길 수 있는 질병들로서 암, 뇌졸중, 심장질환, 간질환이 있고 신경계나 뇌에도 폐해를 입을 수 있다. 물론 폭음을 하는 사람들이나 금주를 하면 금단증상을 가질 정도의 사람들은 치료를 받아야 하며 술을 줄이고 싶은 의지가 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면 의사와 상의해서 상담을 받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시지 않을 권리 술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람마다 다 다르고 상황에 따라서 다 달라진다. 같은 양의 술을 마셔도 음주로 초래될 수 있는 결과는 마신 사람에 따라 다 다르며 동일한 사람이라도 어느 시기에 누구와 어떤 속도로 마시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이렇기 때문에 위험이 없거나 안전한 주량은 얼마라는 것을 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일주일 동안에 마셔야 할 총량을 고려한 범위 내에서 한 번에 마시는 양을 제한하여야 하며 천천히 물이나 음식(안주)과 함께 마셔야 한다. 술자리에서 명심하여야 할 또 다른 것은 음주 후에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미리 예상하고 대비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음주운전을 하지 않으려면 대리운전을 생각하여 미리 준비를 하여야 하며, 회사의 회식 상황이라면 음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말실수를 염두에 두어야 하고 자기통제를 잃은 적이 있었거나 혼자 남겨져서 위험에 처한 적이 있었다면 그러지 않도록 대비하여야 한다. 특히 잘 넘어지는 사람이거나 신체나 정신적으로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음주할 경우 문제가 악화될 소지가 있는 사람, 약을 복용하고 있는 사람, 임신을 했거나 예정인 사람, 자동차를 포함한 기계를 조작할 예정인 사람일 경우에는 음주를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비록 영국이 마련한 지침이지만 과학적으로 치밀한 근거에 기반하여 만든 것이라 우리 사회의 절주 지침으로도 적절해 보인다. 이런 지침을 잘 지키려면 음주자 자신이 이 지침을 잘 숙지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음주자가 음주 의사결정의 주체가 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어야 한다. 절주 실천을 쉽게 하려면 권하는 술을 거절할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이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음주는 이 지침 범위 내에서만 마신다’거나 술을 거절할 권리를 주장하여도 문화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어야 한다. 밥을 다 똑같은 양으로 먹자고 주장하지 않듯이 주량을 강요하지 말고 마시지 않을 권리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 밥을 강요하듯 술을 강요하는 인간관계는 바로 갑질을 하는 것이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한국건강관리협회 건강소식 발췌
‘열정’의 DIVA 가수 혜은이의 경주 리사이틀 공연을 앞두고 지역 팬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폭발적인 가창력과 미모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원조 국민여동생이자 한류스타 혜은이가 오는 15일 경주예술의전당 화랑홀을 찾는다. 이날 오후 4시와 7시 30분, 두 차례에 걸쳐 ‘혜은이 리사이틀’ 공연이 펼쳐질 예정. 이번 공연은 가수 혜은이가 데뷔이후 오랜 시간을 함께 해 준 팬들에게 ‘찾아가는 콘서트’라는 컨셉으로 보답의 무대를 선보인다는 취지다.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팬들에게 그동안 받은 사랑에 대해 일일이 보답하려고 애쓰고 있어요. 이제 나이도 있고, 아무래도 무대에 설 기회가 앞으로는 점점 줄겠죠. 그래서 할 수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무대에 설 계획이에요. 제 노래가 여러분의 고단한 삶에 작은 위로와 휴식이 될 수 있도록 언제나 노력하겠습니다” 그동안 여러 일로 세간의 관심을 받으며 힘든 시기도 보내 왔던 그녀지만 노래에 대한 열정으로 꾸준히 팬들을 감동시켜왔다. 여전히 노래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혜은이는 이번 공연에서 ‘제3한강교’ ‘당신은 모르실거야’ ‘진짜 진짜 좋아해’ ‘감수광’ ‘당신만을 사랑해’ ‘새벽비’ ‘후회’ ‘눈물샘’ ‘질투’ ‘독백’ ‘작은숙녀’ ‘옛 사랑의 돌담길’ ‘비가’ ‘열정’ 등 히트곡과 팝 메들리를 선사하며 지난날의 추억과 위로와 휴식의 시간을 선물 할 예정이다. 혜은이는 지난 1975년 데뷔 이후 뛰어난 노래실력과 깜찍한 외모, 다재다능한 모습으로 가요계 뿐만 아니라 드라마 영화 광고 예능 등 다양한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70, 80년대 수많은 노래를 히트 시키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보급 대표 가수로 자리 매김했다. 데뷔곡 ‘당신은 모르실거야’를 시작으로 14집 앨범의 ‘작은숙녀’까지 독집앨범 타이틀곡이 모두 1위를 차지하는 대기록을 갖고 있으며, 총 17개의 1위곡과 30여 곡의 Top 10 진입곡을 보유하고 있다. 이후 뮤지컬과 라디오 DJ등 활동 영역을 넓히며 중견가수로서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경주에는 지정되지 않은 문화재 가운데서도 보존할 만한 분명한 가치가 있는 비지정문화재들이 산재해 있다. 이들 중 등급이 낮은 문화재자료로 지정·분류돼 보존되기도 하지만 아무런 안내 표식도 없이 잊혀지고 있는 경우도 많다. 지난 10일, 이들 중 경주북부권 안강지역의 불상 및 불상 관련 석물들을 찾아보았다. 경주의 비지정 문화재에도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인 보존과 관리를 주장하는 김환대(경주문화유적답사회 회장, 경주문화연구원) 원장과 함께 경주 안계리 석조 석가여래좌상, 경주 안강리 석조여래좌상, 안강읍 근계리 입불상, 경주 근계리 파좌불상 등을 둘러보았다. -경주 안계리 석조 석가여래좌상... 문화재자료 제92호, 석굴암 석굴의 본존여래좌상과 매우 유사한 양식적 경향 보여 「한국의 사지 현황조사보고서(문화재청,(재)불교문화재연구소), 대구광역시, 경상북도편, 2015년(上)」에서는 ‘안계리사지는 안계리 사골마을에 있다. 강동면 안계리 산 8-3번지 일원의 안계리사지의 사찰 명칭 및 연혁은 알 수 없으나 주변에서 ‘안계사(安溪寺)’명 와편이 확인되면서 안계사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지만 안계사의 사명은 문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사지는 2002~2003년 2차에 걸쳐 발굴조사됐다. 발굴결과 석조여래좌상의 대좌와 이를 봉안했던 1동의 건물지가 확인됐다. 그러나 이 건물의 초창 시기는 조선전기며 이 불상은 조선전기에 이곳으로 이전 안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99년 안계사(安溪寺)명 와편은 단 두 점만 발견됐고 이마저도 고려시대 유물로 판명돼 불상의 조성시기 및 고려시대 이전 안계사의 존재는 파악되지 않았다. 단지 금동불, 귀면와 등 다량의 유물과 석탑재, 장대석 등 다수의 석조 유물이 산재돼있어 이 일원을 사지로 판단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현재 불상 및 치석재는 담장을 둘러 보호하고 있었으며 마을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담장내 유물은 석조여래좌상과 방형석재, 석탑재 5매, 석등재 2매, 치석재 8매 등이다. 이들 부재는 석탑재, 혹은 건축부재일 것으로 추정한다. 석가여래좌상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2호로 총 높이 271.5㎝며 화강암으로 만든 좌불상이다. 불상의 높이는 150㎝, 어깨 폭 84㎝, 무릎 폭은 120㎝. 김환대 원장은 “2002년 발굴조사 이전에는 방형의 석재 위에 상대석과 함께 적재된 상태였으며 머리 위에는 석등 옥개석과 상륜 부재가 마치 보개(불상이나 보살상의 머리 위를 가리는 덮개)처럼 올려져 있었습니다. 현재는 석등의 상대석 일부와 중대석을 신부재로 보강한 대좌 위에 불상을 안치했고 머리 위에 올려져있던 석등 옥개석 및 상륜부, 방형석재는 담장 옆 석조 유물 주변으로 옮겨졌습니다”라며 이 불상의 변형 전후를 설명했다. 불상은 머리 위부분에 균열이 있으며 이목구비가 상당부분 훼손돼 있었다. 손의 일부와 가슴, 무릎 일부 등 군데군데가 파손돼 있었다. 현황조사보고서에서는 ‘그러나 전체적인 형태는 온전하게 유지되고 있는 편이며 세부 조각 부분도 파손이 적어 뛰어난 작품성을 논하기에는 손색이 없다. 불상의 머리는 나발(불상의 신체 중 소라 모양으로 된 여래상의 머리카락)이며 얼굴은 방형에 가깝다. 입은 일(一)자로 다물고 있다. 대좌는 원래 상중하대로 구성된 삼단팔각연화대좌다. 이 불상은 편단우견(偏袒右肩, 불상이나 승려가 가사를 입은 모습 중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옷 모양새)의 착의법, 촉지인을 취한 팔과 동체부 사이에 생기는 공간을 완전히 이해하고 조성한 점, 나발의 표현, 신체 비례 등 8세기 중엽에 조성된 석굴암 석굴의 본존여래좌상과 매우 유사한 양식적 경향을 보인다. 이 좌상은 석굴암본존상보다는 상반신이 다소 왜소하며 크기도 약간 작다. 따라서 이 불상은 석굴암 불상을 직모한 작품으로 8세기 중엽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고 밝히고 있다. 방형석재는 기존에 불상대좌로 사용됐던 것이다. 정면에는 마주 보고 있는 2구의 공양보살을 새겼으며 양 측면에는 사자상이, 뒷면에는 마애 삼층 석탑과 신장상으로 보이는 인물상 1구를 새겼다. -문화재청과 경주시청, 경주 안계리 석조 석가여래좌상 지금의 현황과 틀리게 설명해 ‘오류’ 시급히 바로 잡아야 한편, 경주시청 홈페이지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현재 머리 부분에 석등(石燈)의 지붕돌을 얹어두고 있으며 탑의 부재를 괴어 대좌(臺座)로 이용하고 있다’며 석조여래좌상 발굴 전의 상황을 아직도 그대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지금의 불상현황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나마 경주시청 홈페이지의 사진은 현재의 현장 모습인데 불상의 설명문은 아직도 문화재청의 오류를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는 불상의 사진도 발굴전의 모습 그대로다. 문화재청과 시청 홈페이지의 이러한 오류는 시급히 바로 잡아야 한다. 한편, 아직도 불에 탄 흔적이 남아있어 보이는 이 불상은 2004년, 참배객들의 실수로 화재가 발생해 불에 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불상의 굴곡진 변화과정을 지켜봐왔던 김 원장은 “화재로 불상이 그을리고 오른쪽 팔과 다리부분에 금이 가는 등 큰 피해를 입어서 보존처리된 적이 있습니다. 이 불상은 불상을 연구하는데 있어 훌륭한 자료로 참고할만큼 상태가 양호한 편입니다. 다른 지역이었다면 문화재자료보다는 등급을 승격시켰을 겁니다. 특히 석굴암 불상을 연상시킬 정도의 뒷모습이 압권이지요. 경주 외곽에 ‘석가’라고 명시한 불상이 있는 예는 없습니다”라며 경주 외곽에 위치해있어 찾는 이들은 드물지만 지속적인 관심과 보존노력을 기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경주 안강리 석조여래좌상, 통일신라 불상으로 광배와 불신을 통돌로 조각했을 것으로 추정 이 불상은 안강읍 안강리에 있는 안강청소년문화의집(구안강문화회관) 야외정원에 있는 불상이다. 「경주지역 북부지역지표조사보고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1997」에 의하면, ‘이 불상은 하곡리 석불좌상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 조암사지에 있던 것으로 하곡리 하강초등학교로 옮겨졌다가 안강읍사무소를 거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 불상은 원래 광배와 불신을 한 장 돌로 조각돼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머리 윗부분은 사라져버리고 남은 것도 그나마 세 조각으로 깨어져있다. 어깨를 드러내는 편단우견의 대의를 걸치고 있다. 오른손은 무릎위에 올리고 왼손은 가슴까지 들어 올렸다. 왜소한 체구, 도식화된 옷주름 등으로 미뤄 통일신라 9세기 후반에 조성된 석불로 여겨진다. 불신은 높이 69㎝, 어깨폭 44㎝, 무릎 폭 84㎝이다’라고 밝혔다. 이 불상은 그나마도 마모가 심하고 불신의 조각 상태도 거친듯 보였다. 결가부좌한 이 불상의 온전한 모습과 얼굴은 상상에 맡길 수밖에. 김환대 원장은 “경주에서 몇 안되는 통돌 불상입니다. 이렇게 방치돼있어 도난의 우려도 있습니다. 이 불상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없고 아무런 안내가 없어 안타까운 상황”이라고 했다. -경주 안강읍 ‘근계리입불상’...문화재자료 제98호, 두부와 광배 상부가 결실돼 보수했지만 불신과 비례 맞지 않는 모습으로 복원돼 안강읍 근계리 산 131-2번지 일원은 사역내에서 발견된 것으로 전하는 석조여래입상을 근거로 사지임을 알 수 있는 곳이다. 이 불상은 1977년 ‘용화사 용화전입불상’이라는 명칭에서 1997년 ‘안강읍 근계리 석불입상’으로 보고됐다가 2008년 ‘근계리입불상’으로 보고됐다. 「한국의 사지 현황조사보고서」에서는 ‘이 불상은 안강읍 근계리 안마골마을 북쪽의 용운사 미륵전에 봉안돼있다. 문화재자료 제98호. 광배와 불상이 1석으로 조성돼 있으며 대좌는 남아있지 않다. 전체 높이는 242㎝다. 두부와 광배 상부가 결실돼 보수했는데 두부의 경우 불신과 비례가 맞지 않는 모습으로 복원돼 있다. 법의는 통견(양 어깨를 모두 덮은 가사)이며 복부에는 띠 매듭이 드러나 있다. 불상의 가슴, 허벅지 부분이 팽창되듯 표현돼있어 양감이 느껴지며 허리의 굴곡이 분명하다. 이 불상은 약간 과장된 듯한 볼륨감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 중당(中唐) 이후 불상 양식과 유사한 감각이며 이에 제작 시기는 9세기 전반 무렵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광배는 연판형에 가깝고 상부는 파손된 것을 시멘트로 보수했다. 광배 전면에는 문양이 전혀 새겨져있지 않았으나 뒷면에는 얕게 양각한 삼층탑이 새겨져 있다. 1층 탑신에는 여래좌상 1구가 새겨져 있으며 연화좌 위에 앉아있다. 탑은 간략하게 새겨져 있으나 체감률, 여래좌상의 형태 등으로 보아 앞면의 불상과 동시에 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라고 보고됐다. 한편, 이 불상의 하단 부분이 절에서 마련한 제단에 가려져 그나마 온전한 부분을 볼 수 없어서 사라진 머리부분과 함께 안타까움을 더했다. -경주 근계리 파좌불상, 경주지역에 남아있는 불상의 방형대좌중 규모가 가장 큰 것 「한국의 사지 현황조사보고서」에서는 ‘현재 안강읍 근계리 안마골마을 북서쪽의 용화사 경내에 있는 석조여래좌상 조각의 존재로 경주시 안강읍 근계리 665-1번지 일원이 사지로 인식되고 있다. 1977년 ‘문화유적총람’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조여래좌상이 용화사 경내에 있다’고 했으며 1997년 자료부터는 불상이 개금(改金, 불상에 금칠을 다시 함)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다고 해 현황이 변한 것으로 보인다. 현 용화사 사역 내에는 비교적 많은 양의 유물이 산포돼 있다. 토기조각과 청자조각 등 흩어져있는 유물은 대체로 통일신라~조선전기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현재 용화사 용화전내에는 대좌를 갖추고 있는 석조여래좌상 1구가 있으며 용화전 앞 화단에는 석조여래좌사의 팔뚝 부분으로 추정되는 파편 1점이 있다. 용화전 내 봉안돼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현재 개금돼있어 원래 모습을 알 수 없다. 한편, 대좌는 수미단 아래 가려져 있으며 채색하지 않은 상태로 보존돼 있다. 대좌는 사각의 방형이며 상중하대석을 갖추고 있으나 중대석 중 두 개 면은 파손되어 표면의 조각 부분이 일부가 빠져 없어진 상태다. 하대석 일부와 상대석 모서리 대부분도 파손돼 있다. 중대석의 현재 남아있는 각 면에는 무릎을 꿇은 상태로 서로 마주보며 공양물을 바치고 있는 공양보살상이 한 쌍씩 새겨져 있다. 방형대좌의 훼손 정도가 심하고 균열이 가중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어 훼손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해 보인다’고 보고하고 있다. 김 원장은 “특히 이 대좌는 경주지역에 남아있는 불상의 방형대좌중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그 예가 드문 편”이라고 설명했다.
양동마을은 조선시대 가장 큰 집성촌으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다. 그 중에는 양민공 손소선생과 선생의 외손자인 회재 이언적선생이 국 불천위(國 不遷位, 나라에 큰 공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은 분의 신주를 사당에 두고 대대손손 제사를 지내도록 왕이 허락한 신위)로 선정되었다. 게다가 회재의 외삼촌 우재 손중돈선생도 유림 불천위로 선정되자 두 문중의 자부심은 지금도 대단하다. 그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여 양동마을은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고 교육열도 대단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마을에는 서당이 따로 없었다. 서당은 지방사회에 근거를 둔 사족과 백성이 주체가 되어 면, 동, 리에 설립한 초중등과정의 사설교육기관으로 국민을 교화하는 것이 목적이다. 18세기 후반이 되자 마을에 서당이 건립되었다. 먼저 서당의 유래를 살펴보고 마을 내에 있는 안락정, 강학당, 경산서당을 살펴보자. 서당이 언제 세워졌는지 분명한 기록은 없지만 고구려에서 서당의 시초로 볼 수 경당이 있다. 중국의 사료에는 ‘고구려인들은 책을 사랑하여 관직에 나아간 이들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마을에 큰 집을 지어 혼인전의 자제들이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에서는 설총이 유교경전을 이두로 풀어서 가르친 것을 그 시초로 보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바로 서당이었다. 12세기 초, 송나라의 서긍(徐兢)이 사신으로 와 잠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일을 마치고 귀국한 서긍은 《선화봉사고려도경》 40권을 편찬하여 고려의 실정을 중국에 알렸다. 그 내용 중에는 〈일반백성이 사는 거리에는 경관과 서사가 마주 보고 있고 백성의 자제들이 함께 모여 스승에게 글을 배우고 자라면 마음 맞는 벗들은 사찰을 찾아 함께 공부한다. 심지어 코 흘리게 아이들도 글을 배운다.〉는 내용이 보인다. 조선시대에 이르자 양반들은 지방의 기반구축에 심혈을 기울이며 서당이 생긴 것으로 보고 있다. 서당은 16세기 무렵 사림파의 등장과 맥을 같이 한다. 서당을 설립코자 한 이들은 향촌사회에 영향력을 지녔던 명문사족출신으로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소과에 급제한 진사와 생원들도 많았다. 18세기가 되자 동족마을이 서당설립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했다. 서당운영을 위하여 화수회(花樹會), 학전(學田)을 조직하고 곳간 등을 지었다. 이에 종손을 중심으로 한 문중이 공동으로 관리했다. 평민들도 질세라 18세기 후반에는 작은 규모나마 서당을 세우고 서당계를 운영하면서 아이들을 위한 교육도 가능해졌다. 마지막으로 서당에서는 어떻게 공부를 했을까? 보통 7,8세에 입학하여 15,16세에 졸업한다. 교육은 강(講)으로 배운 글을 소리 내어 읽고 그 뜻을 묻고 답하는 식으로 진행하였다. 이런 방법은 기계적인 기억, 암기만으로는 불가능한 1:1의 능력별 수업이 가능하고 교사와의 인격적 교류가 가능한 이상적인 교육방법이다. 교재로는 ‘천자문’. ‘유합’(類合:기본한자를 수량, 방위등 종류에 따라 구별하여 새김과 독음을 붙여 만든 조선시대 한자입문서), ‘동몽선습’(童蒙先習)이 사용되었다. 특히 계절에 알맞은 수업을 함으로써 수업효과가 극대화되었던 것도 빼 놓을 수 없다. 예를 들면 봄가을에는 역사책이나 옛글을 읽게 하고, 여름에는 시(詩)나 율(律)과 같은 흥미위주의 글을, 겨울에는 경사(經史:경전과 역사)같은 어려운 분야의 책을 접하게 했다. 주로 유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만큼 놀이학습을 통한 협동과 우정을 위한 배려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양동마을에서는 1780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글방(서당)인 안락정(손씨)을 시작으로 양좌서당(이씨), 강학당(이씨)이 세워졌다. 1835년에는 이씨 문중에서 마을 인근에 있는 안계리에 서당을 지었는데 1970년에 안계댐을 건설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며 ‘경산서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매우 아끼는 둑방길이었습니다. 지인 몇에게만 알려주고 속닥거리며 은밀하게 걸었던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일명 ‘숲머리둑방길’입니다. 신라 대표 산성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명활산성에서 숲머리 남촌마을의 진평왕릉까지의 약 2km 구간길 입니다. 진평왕릉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명활산성까지 오롯이 걸을 수 있는 길이지요. 봄이면 2㎞ 호젓한 오솔길을 따라 찔레꽃이 별처럼 환하게 농로 주변을 밝혔구요. 500여 그루 붉은 겹벚꽃은 가지가 휘도록 자지러지게 피어 도심의 벚꽃이 허무하게 낙화한 뒤의 허전함을 가득 채워주었었죠. 오솔길 옆 수로에는 맑은 물이 흘렀습니다. 가을엔 보문 드넓은 황금들판을 내려다보면서 걷노라면 이윽고 숲머리 마을의 기와들이 줄지어 이어지는 조화가 한 눈에 펼쳐집니다. 길가에는 보라색, 노란색의 자잘한 들국화들이며 이름모를 야생초들이 발길에 채이곤 했구요. 보석같이 숨겨두고 즐겼던 이 길을 경주시는 지난 10월 보문 숲머리 마을 주민들과 새로운 둘레길 명소로 부각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환경정비를 실시했었습니다. 수풀과 잡목으로 우거져 있는 다소 거친 들길이었거든요. 최근 명활산성 북문지 정비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주민들의 산책로 정비 요청이 잇따른 것에 대한 정비였는데 누구나 걷고 싶은 둘레길 명소로 거듭나는 과정이었겠죠. 경주에서 또 하나의 숨겨진 둘레길 명소가 탄생하는 것이지만 썩 달갑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 길을 올 가을만해도 여러번 산책했었습니다. 다시는 야생적 기운의 자연스러운 풍광을 볼 수 없겠다는 생각에서였죠. 사진을 찍고 주변을 천천히 감상하면서 걸으니 1시간 30분 정도가 걸리더군요. 먹이가 풍부한 탓이었는지 야생오리떼들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인기척 때문에 ‘푸드덕’ 놀라 날아가곤 했습니다. 산책하는 우리도 놀래긴 마찬가지였구요. 이리저리 자연스러웠던 들꽃들까지 정비가 돼버려서 많이 아쉬웠지만 아직은 정취가 남아있었습니다만,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예산을 확보해 친환경 소재인 야자수 매트와 황토를 이용한 산책로 바닥 개선작업을 진행하고 야간 조명과 목교, 로프 등 안전구조물을 정비해 시민들이 보다 편리하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조성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편리’ ‘안전’이라는 명목으로 획일화된 조경과 편의시설을 이곳에도 할 모양인데 걱정이 앞섭니다. 가보시면 알겠지만 그리 위험하거나 불편한 길이 아니랍니다. 다소 거친 길이면 어떻습니까? 왜 도식적인 모습으로 똑같이 단장을 하려 할까요? 내년 봄, 단장이 되고 많이 알려져 사람들의 발길이 잦으면 한가롭게 이곳을 찾던 천둥 오리떼를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어쩌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길이란 이미 야생성을 잃어버린,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길을 만들어버린다는 것이겠습니다. 그저 오솔길을 걷는 중간중간 약간씩 쉴 수 있는 친환경적인 디자인과 재질의 작은 벤취 몇 개면 충분할 것일텐데요. 이 길의 유래와 주변 진평왕릉과 명활산성의 유적에 대한 간단한 안내판 설치 정도면 좋을 것 같다는 것은 비단, 저만의 생각일까요? 그림=김호연 화백 글=선애경 문화전문기자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435~1493)과 경주의 인연은 단종과 수양대군의 피비린내 나는 계유정란(癸酉靖亂)과 얽혀있다. 『율곡전서』권14, 「김시습전」을 보면, “김시습은 나면서부터 천품이 남달리 특이하여 생후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을 알았고, 최치운(崔致雲,1390~1440)이 보고서 기이하게 여겨 ‘시습(時習)’이라 하였다. 말은 더디었지만 정신은 영민하였고, 글을 볼 때 입으로는 읽지 못했으나 그 뜻은 모두 알았다. … 명공(名公) 허조(許稠,1369~1439) 등이 자주 찾아와서 보았다. … 경태(景泰) 연간에 영릉(英陵,세종대왕)과 현릉(顯陵,문종대왕)께서 차례로 훙거(薨去)하고 노산(魯山,단종)이 3년 만에 왕위를 손양(遜讓)하게 되었는데, 이때 시습의 나이 21세였다. 삼각산에서 글을 읽다가 서울에서 온 사람으로부터 단종(端宗) 손위(遜位)의 소식을 듣고 즉시 문을 닫아걸고 3일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다가 방성통곡한 다음에 읽고 쓰던 서책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광기를 일으켜 뒷간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불문(佛門)에 의탁하고 승명(僧名)을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그의 호는 여러 번 바뀌어 청한자(淸寒子)ㆍ동봉(東峰)ㆍ벽산청은(碧山淸隱)ㆍ췌세옹(贅世翁)ㆍ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그의 생김은 못생기고 키는 작았으나, 뛰어나게 호걸스럽고 재질이 영특하였으며 대범하고 솔직하여 위의(威儀)가 없으며, 강직하여 남의 허물을 용납하지 못했다. 시세에 분개한 나머지 울분과 불평을 참지 못하였고, 세상을 따라 어울려 살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드디어 육신에 구애받지 않고 세속 밖을 방랑하여 우리나라의 산천에 그의 발자취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명승(名勝)을 만나면 곧 거기에 자리 잡았고, 고도(故都)를 찾아가면 반드시 발을 구르며 슬픈 노래를 불러 여러 날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다. … 드디어 안씨(安氏)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을 이루었다. 벼슬을 하라고 권하는 이가 많았으나, 시습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의연하게 세속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가기를 예전대로 하였다.”며 그의 곧은 일생을 축약해 설명하지만, 율곡 이이는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양보[손양(遜讓)]한 것으로 묘사하였다. 실상은 단종이 왕좌에 오른 이듬해 계유년(1453) 10월 10일 수양대군이 김종서·황보인 등을 무참히 살해하며 단종에게 위협을 가하였고, 마침내 1455년 6월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가 왕좌에 오른다. 이에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등 사육신과 단종의 외숙인 권자신(權自愼) 그리고 정찬손(鄭昌孫,1402~1487)의 사위 김질(金礩,1422~1478) 등이 단종 복위를 모의하였는데, 김질이 일이 여의치 않자 이 사실을 장인어른인 정창손에게 폭로하였고, 다시 정창손은 한명회를 거쳐 세조에게 고변하면서, 일이 탄로나 모두가 죽임을 당하였다. 당시 세조의 세력에 동조한 정창손은 부원군을 거쳐 대사성·대제학을 겸직하고 영의정에 올랐고, 김질은 세조의 신임을 받아 좌익공신 3등에 추봉 및 판군기감사에 승진되고, 이후 승정원 승지를 거쳐 병조참판·평안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우의정에 오르는 등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한편 김시습은 21세의 피 끓는 나이에 세조의 잔학함을 목격하였다. 이후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해 동학사에서 장례를 치르고, 1465년(세조11) 봄에 경주부 금오산(현 용장사)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하며,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다. 세조를 피해 경주로 내려온 김시습은 탕유(宕遊)를 하며 고뇌에 찬 세월을 보내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창손의 형인 정흥손이 경주부윤(재임1463.07~1466.02)으로 있었다. 정흥손은 부친 정흠지(鄭欽之,1378~1439)의 6남(정갑손·인손·흥손·창손·희림·육손) 가운데 3남으로 태어났으며,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당시 김시습이 경주에 머문 7년의 기간 동안 정흥손(鄭興孫)-최선복(崔善復)-이염의(李念義)-전동생(田秱生) 등 훈구파 경주부윤이 주를 이뤘고, 정흥손은 재임당시 동경관 중수를 맡았고, 영의정 신숙주와 대사성 김영유가 재인(梓人:도목수) 서휴(徐休)를 보내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으며, 사가 서거정이 「경주부객관중신기(慶州府客館重新記)」기문을 지었다. 당시 서거정은 세조의 신임을 받은 인물로, 김시습과는 단종복위 감정이 엇갈려 서로가 좋지 않은 관계였다. 반면에 이염의(재임1467.4~1469.2)의 경우 세조가 즉위하면서 파직 당하였고, 이후 세조의 정권말기에 태비(太妃)와의 인연으로 관직이 회복되어, 경주부를 다스리다가 다시 예종년간에 서울로 복직되어 갔다. 게다가 이염의·남효온·김시습·이집 등은 교유가 깊었으며, 단종에 대한 충성과 곧은 기풍과 절개로 유명하였다. 경주는 문화콘텐츠가 신라에 집중되고 관련 문화재 또한 어마하다. 이제라도 경주의 조선문화와 인물로 매월당 김시습을 재조명하고, 경주남산과 매월당을 연결짓는 문화코드가 개발되기를 고대해 본다. 경주를 찾은 김시습을 기억하는 것처럼.
요즘에는 오케스트라가 당연히 ‘악단’을 의미하지만 원래는 장소적 개념이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원형극장에는 무대 앞에 악단이 앉는 공간이 따로 있었는데, 이를 ‘오케스트라’라고 불렀던 것이다. 달리 말해 당시에는 악단이 오케스트라라고 불리는 ‘장소’에서 음악극 연주를 했다. 세월이 흘러 16세기 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오페라가 태동했다. 그리고 17세기에는 오페라극장 건립 붐이 일기 시작했다. 이 극장들은 구조상 고대 원형극장의 연장선에 있다. 즉 동심원을 이루고 있던 객석이 서너 개 층의 귀족용 박스 석으로 진화하고, 1층 공간은 평민들의 차지가 되었다. 악단은 고대 원형극장처럼 여전히 무대 앞에 위치했다. 하지만 그들을 부르는 이름은 장소 명칭에 따라 ‘오케스트라’가 되었고, 한동안 오페라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했다. 오케스트라가 오늘날처럼 피트(pit)라는 구덩이에 들어간 건 대략 19세기부터라고 한다. 모차르트(1756-1791) 시대만 하더라도 오페라 악단의 규모는 30명 정도였다. 그래서 악단의 연주소리가 가수의 노래소리를 방해하진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낭만주의 오페라에서 오케스트라의 규모는 비약적으로 커지게 된다. 그냥 두면 가수의 노래가 악단의 연주음에 묻히게 될 정도였다. 결국 오케스트라는 성악을 살리기 위해 무대 앞에 구덩이를 만들어 들어가야만 했다. 구덩이에 빠진 오케스트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다행히 오페라의 반주 역할에만 안주하진 않았다. 성악 없는 기악곡, 특히 교향곡이 사랑을 받으면서 오케스트라는 독자적인 지위를 얻게 되고, 곧 피트를 빠져나와 콘서트홀 무대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았다. 이리하여 오케스트라만의 독자적인 연주회는 오늘날 일반적인 형태가 된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빈 필하모닉(Wiener Philharmoniker)이다. 1842년 빈 궁정 오페라극장(오늘날의 빈 슈타츠오퍼)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독자적인 연주를 위해 따로 만든 단체가 바로 빈 필하모닉이다. 단원들이 투잡(two job)을 하는 셈이다. 요즘도 밤에는 ‘피트’에서 오페라를 연주하고, 낮에는 (피트에서 나와) ‘홀’에서 자신들만의 연주회를 갖는다. 물론 처음부터 오페라극장의 피트에서 출발하지 않은 오케스트라도 있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그렇고, 심포니(교향곡)라는 이름이 붙은 오케스트라가 대략 그렇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도 오페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즘 세계적인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이들의 피트 연주를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젠 오케스트라가 구덩이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이것이 오케스트라의 위상과는 큰 관련이 없다.
자하문(紫霞門) 동서로 좌경루와 범종루가 있다. 요즈음 아침 안개가 무척 잦다. 예전에는 자욱한 아침 안개 속을 걸으면 꼭 신선을 만날 것만 같았었다. 또 비오는 날 안개 속으로는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 보일 듯하였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이와 같은 안개 속에서 신선과 용을 잃어버렸다. 안개가 미세 먼지이고 때로는 이보다 더 나쁜 초미세먼지란다. 그런데 불국사에는 아직도 성스러운 자주 빛깔의 안개가 서린다는 곳이 있다. 청운교·백운교를 오르면 부처님 세계의 관문에 해당하는 자하문에 이르게 된다. 자하(紫霞)란 ‘자주 빛깔의 안개’란 뜻으로 ‘부처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색 광명이 안개처럼 서려 있다’는 뜻으로 이 문을 지나면 ‘대 진리의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소나기가 쏟아진 후 날이 개이면 자하문 서쪽 석단 틈의 수구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물이 물보라를 일으키면 이를 보는 각도에 따라 무지개 즉 자하를 볼 수도 있다. 자하문 안에는 해와 달의 모양이 있는 것도 눈길을 끈다. 세속의 무지와 속박을 떠나 출세간(出世間)의 대 진리의 도량이 눈앞에 펼쳐진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자하문 서쪽 회랑 끝에 있는 범영루는 그 아래 있었던 구품연지에 누각이 투영되어 이런 이름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불국사고금창기』에는 수미범종각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어 수미산 위 도리천에서 범종이 울려 퍼지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다고 할 수 있으며, 자하문부터는 천계, 즉 하늘나라인 만큼 구름 위에 떠 있는 누각을 표현한 것이다. 이 범영루는 불국사 창건과 더불어 지어진 건물로 생각되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다가 1973년 불국사를 복원하면서 옛 모습대로 다시 세웠다. 지금 이 안에는 거북 등위에 올려져있는 법고(法鼓)가 놓여 있다. 일반적으로 사찰에서 법고는 범종각에 범종, 목어, 운판과 함께 두는데 불국사에서는 이곳 범영루에 법고를, 동쪽의 좌경루에는 목어와 운판, 그리고 범종각에 범종을 나누어 두었다. 이 범영루는 1973년 복원 불사 때 회랑과 맞지 않아 헐어버리고 다시 지은 것으로 수미산 모양의 팔각정상에 누(樓)를 짓고 백팔번뇌를 안은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에서 108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범영루의 석주는 항아리 모양을 하고 있는데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이런 석주의 모양에 대해 수미산을 상징한다는 해석과 구름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있다. 이곳 범영루에는 원래 승천교(升天橋)라는 다리도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자하문을 중심으로 축대의 동편에는 단순한 형태의 좌경루가 있다. 좌경루는 경전을 보존하던 곳인데 지금은 목어와 운판이 걸려 있다. 좌경루는 불국사에서 유일하게 현판이 없는 건물로 『불국사고금창기』에는 좌경루가 3칸이라는 기록이 전하고 그동안 건물터만 남아있던 것을 1973년 범영루와 함께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좌경루 아래 석주는 발굴조사 시 출토된 석재 부재를 복원한 것으로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하는 팔각기둥 중앙에 연꽃을 새긴 단순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석주는 석굴암 석실 금당의 팔각기둥과 흡사하다. 좌경루는 자연석으로 쌓은 하층기단 위에 연꽃 주춧돌을 놓고 연꽃으로 장식된 팔각기둥을 상층 기단 높이로 두 개를 세워 그 돌기둥 위에 처마의 추녀를 나타내어 범영루의 복잡한 형식에 반하여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였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범영루와 좌경루가 좌우대칭이 아니라고 하여 불국사를 평가절하하기도 하지만 이는 불국사의 좌우대칭구조가 ‘비대칭 속의 대칭’으로 되어있다는 사실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팔각형의 단순한 모양을 하고 있는 좌경루 안쪽으로는 회랑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지만 화려하고 섬세한 다보탑이 자리하고 있고, 복잡한 모양을 하고 있는 범영루 안으로는 단순하고 간결한 석가탑이 자리하고 있다. 눈에 띄게 좌우를 같게 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회랑으로 슬쩍 가려두고 아름다움을 배가시키는 불국사의 미적 감각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만큼 뛰어난 것이다. *중생이 고통의 원인인 탐(貪)·진(瞋)·치(痴)를 없애고 해탈하여 깨달음의 경지인 열반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실천수행해야 하는 8가지 교리로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념, 정정진, 정정을 말한다.
경주교육지원청은 5일 경주글로벌예절체험관에서 지역 초등교사 19명을 대상으로 ‘2018 글로벌예절체험교육 연수’를 실시했다. 글로벌예절체험관은 체험중심의 예절교육의 강화 및 전통 예절과 글로벌 예절이 통합된 선진 예절교육으로 글로벌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연간 운영되고 있다. 연수회에 참석한 교사들은 글로벌예절체험관 운영에 대한 안내를 시작으로 한복입고 절하는 법, 다도예절, 서당교육 체험과 네티켓, 다문화예절 등으로 나눠 분임별 코스 순환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연수에 참가한 박 교사는 “학생들을 지도할 때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예절을 알 수 있게 돼 학급경영에 도움이 되는 기회가 됐다”고 소감을 말했다.
(재)경주시장학회(이사장 주낙영 경주시장)는 6일 알천홀에서 장학생, 학부모, 교사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2018년도 경주사랑장학금 장학증서 수여식’을 가졌다. 2018년도 경주사랑 장학금은 대학생 253명에게 1인당 200만원씩, 고등학생 160명에게는 1인당 100만원씩, 중학생 80명에게 1인당 50만원씩 총 493명에게 7억600만 원의 장학금이 수여됐다. 경주시장학회는 138억원의 기본재산 이자수입과 후원금으로 2011년부터 매년 지역의 학업성적 우수자와 체육, 과학, 문화, 예술 등 다방면에서 우수한 기량을 보인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지역 동량을 생각하는 시민, 기업체, 기관사회 단체 등 각계각층의 활발한 후원으로 올해까지 7년간 총 2111명에게 28여억 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한편 경주시장학회는 장학기금 200억 원을 목표로 현재까지 시 출연금과 시민, 기업체, 기관사회단체 등의 후원금으로 총 170여억 원의 장학기금을 조성했으며 지역의 우수한 인재 발굴에 지원함으로써 경주시민으로서의 자긍심을 높이고 학업성취를 장려 하는 등 지역 인재 육성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재능과 소질이 있는 인재들의 학업을 장려하고 지원함으로써 학생들이 꿈을 이루고, 미래 경주 발전과 나라를 위해 큰 동량으로 성장하길 바란다”며 “경주사랑 장학금은 시민의 따뜻한 마음이 모여 지역 사회의 신뢰와 믿음을 높이는 뜻 깊은 일로 각계 각층에서 지역인재 지원과 양성을 위해 힘을 모아달라”고 당부했다.
주낙영 경주시장이 민선7기 시민과의 소통 약속 이행을 위해 연일 다양한 현장을 누비며 소통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주 시장은 5일 산재한 문화유적과 아름다운 꽃이 어우러져 경주의 새로운 힐링명소로 부상한 일명 샛골이라 불리는 서악마을 주민들과 서악서원에서 현장 좌담회를 가졌다. 서악마을은 2011년부터 신라문화원(원장 진병길) 문화재돌봄사업단에서 서악동 3층 석탑 주변에 조성한 2만7천여 송이의 구절초 단지가 인근의 무열왕릉, 서악서원 등 문화유산과 어울어져 고도의 색다른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힐링관광 명소로 떠올르고 있다. 특히 지난해부터 KT&G 후원으로 민과 관, 기업과 주민들이 함께 아름다운 마을로 가꿔가고 있어 그 의미를 더하고 있으며 마을가꾸기 우수사례로 타 시도에서 벤치마킹을 많이 오고 있다. 이날 좌담회는 새롭게 변화하는 마을의 현 주소를 파악하고 마을 찾는 방문객으로 인한 애로사항과 지역현안에 대해 자유롭게 대화하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주민들은 구절초와 고택 체험이 전국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방문객 편의를 위한 간이화장실과 공영주차장 확충, 방범 CCTV 설치 등 생활 현장의 불편사항을 전달했다. 이에 주 시장은 “주민들의 건의사항에 충분히 공감한다”며 “마을 앞 빈번한 교통사고 예방을 위해서도 경찰서와 협의하여 대책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또 “'잘 살고 행복한 마을은 주민 스스로가 만들고 가꾸어야됨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는 박정환 노인회장의 말씀에 백번 공감한다"면서 “샛골마을이 전국에서 민간이 주도해 가꾼 최고의 살기 좋은 마을로 거듭나는데 시에서도 행정적인 지원방안을 적극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용강동통장협의회(회장 윤일홍)는 5일 지역의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경주시종합사회복지관에 전자렌지를 기부해 미담이 되고 있다. 평소 용강동 행정추진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지역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나눔과 봉사에 앞장서고 있는 통장협의회는 지역 환경정화활동에도 솔선수범하는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실천해오고 있다. 윤일홍 통장협의회장은 “약소하지만 회원들이 한 뜻을 모아 마련했고 경주시종합사회복지관에서 하는 다양한 자원봉사활동에도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황오동 소재 큰마디병원(원장 이길호)은 6일 어려운 이웃을 위해 쌀 40포(120만원 상당)를 황오동행정복지센터에 전달했다. 2009년 황오동에 개원한 큰마디 병원은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이 추운 겨울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도록 매년 쌀을 기탁하고 있다. 특히 보건복지부와 대한노인회가 선정한 저소득 인공관절 수술비용 지원 병원으로 선정돼 의료사각지대에 놓인 저소득층에게 무료 수술비 지원 사업을 하는 등 지역사회의 복지수준을 높이는데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길호 병원장은 “매년 어려운 이웃들을 돕기 위해 노력하지만 아직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어려운 분들이 계신 것 같다”며 “황오동의 복지사각지대를 없애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재)경주문화재단은 ‘2019년 경주문화재단 시각예술분야 지역예술인 지원사업’ 신청접수를 오는 14일 오후 6시까지 받는다. 이번 지원사업은 ‘경주작가릴레이전’과 한수원과 함께하는 지역예술인 지원사업인 ‘전시지원금’, ‘창작지원금’으로 구분된다. ‘경주작가릴레이전’은 올해 6년차 경주예술의전당 대표 브랜드 사업으로 개인전을 위한 전시 전반인 미술평론, 전시자문, 홍보 등을 지원한다. 2019년부터는 선발인원을 5명으로 축소해 집중 지원할 예정이다. 또한 모집분야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한수원과 함께하는 지역예술인 지원사업인 ‘전시지원금’은 전시를 위한 직접경비(대관료, 홍보물 제작료 등)를 지원한다. 개인과 팀 구분 없이 선정되며, 지원금은 500만원∼1500만원까지 심의를 통해 결정된다. 또 ‘창작지원금’은 창작활동을 위한 경비(재료 및 도서 구입, 답사비용 등)를 지원한다. 선정인원은 10명으로 동일하게 300만원이 지원된다. 지역예술인 지원사업 공모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경주예술의전당 홈페이지(www.gjartcenter.kr)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공모와 관한 문의는 054-749-7723으로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