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마을은 조선시대 가장 큰 집성촌으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다. 그 중에는 양민공 손소선생과 선생의 외손자인 회재 이언적선생이 국 불천위(國 不遷位, 나라에 큰 공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은 분의 신주를 사당에 두고 대대손손 제사를 지내도록 왕이 허락한 신위)로 선정되었다.  게다가 회재의 외삼촌 우재 손중돈선생도 유림 불천위로 선정되자 두 문중의 자부심은 지금도 대단하다. 그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여 양동마을은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고 교육열도 대단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마을에는 서당이 따로 없었다. 서당은 지방사회에 근거를 둔 사족과 백성이 주체가 되어 면, 동, 리에 설립한 초중등과정의 사설교육기관으로 국민을 교화하는 것이 목적이다. 18세기 후반이 되자 마을에 서당이 건립되었다. 먼저 서당의 유래를 살펴보고 마을 내에 있는 안락정, 강학당, 경산서당을 살펴보자. 서당이 언제 세워졌는지 분명한 기록은 없지만 고구려에서 서당의 시초로 볼 수 경당이 있다. 중국의 사료에는 ‘고구려인들은 책을 사랑하여 관직에 나아간 이들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마을에 큰 집을 지어 혼인전의 자제들이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에서는 설총이 유교경전을 이두로 풀어서 가르친 것을 그 시초로 보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바로 서당이었다. 12세기 초, 송나라의 서긍(徐兢)이 사신으로 와 잠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일을 마치고 귀국한 서긍은 《선화봉사고려도경》 40권을 편찬하여 고려의 실정을 중국에 알렸다. 그 내용 중에는 〈일반백성이 사는 거리에는 경관과 서사가 마주 보고 있고 백성의 자제들이 함께 모여 스승에게 글을 배우고 자라면 마음 맞는 벗들은 사찰을 찾아 함께 공부한다. 심지어 코 흘리게 아이들도 글을 배운다.〉는 내용이 보인다. 조선시대에 이르자 양반들은 지방의 기반구축에 심혈을 기울이며 서당이 생긴 것으로 보고 있다. 서당은 16세기 무렵 사림파의 등장과 맥을 같이 한다. 서당을 설립코자 한 이들은 향촌사회에 영향력을 지녔던 명문사족출신으로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소과에 급제한 진사와 생원들도 많았다. 18세기가 되자 동족마을이 서당설립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했다. 서당운영을 위하여 화수회(花樹會), 학전(學田)을 조직하고 곳간 등을 지었다. 이에 종손을 중심으로 한 문중이 공동으로 관리했다. 평민들도 질세라 18세기 후반에는 작은 규모나마 서당을 세우고 서당계를 운영하면서 아이들을 위한 교육도 가능해졌다. 마지막으로 서당에서는 어떻게 공부를 했을까? 보통 7,8세에 입학하여 15,16세에 졸업한다. 교육은 강(講)으로 배운 글을 소리 내어 읽고 그 뜻을 묻고 답하는 식으로 진행하였다. 이런 방법은 기계적인 기억, 암기만으로는 불가능한 1:1의 능력별 수업이 가능하고 교사와의 인격적 교류가 가능한 이상적인 교육방법이다. 교재로는 ‘천자문’. ‘유합’(類合:기본한자를 수량, 방위등 종류에 따라 구별하여 새김과 독음을 붙여 만든 조선시대 한자입문서), ‘동몽선습’(童蒙先習)이 사용되었다. 특히 계절에 알맞은 수업을 함으로써 수업효과가 극대화되었던 것도 빼 놓을 수 없다.  예를 들면 봄가을에는 역사책이나 옛글을 읽게 하고, 여름에는 시(詩)나 율(律)과 같은 흥미위주의 글을, 겨울에는 경사(經史:경전과 역사)같은 어려운 분야의 책을 접하게 했다. 주로 유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만큼 놀이학습을 통한 협동과 우정을 위한 배려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양동마을에서는 1780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글방(서당)인 안락정(손씨)을 시작으로 양좌서당(이씨), 강학당(이씨)이 세워졌다. 1835년에는 이씨 문중에서 마을 인근에 있는 안계리에 서당을 지었는데 1970년에 안계댐을 건설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며 ‘경산서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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