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435~1493)과 경주의 인연은 단종과 수양대군의 피비린내 나는 계유정란(癸酉靖亂)과 얽혀있다. 『율곡전서』권14, 「김시습전」을 보면, “김시습은 나면서부터 천품이 남달리 특이하여 생후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을 알았고, 최치운(崔致雲,1390~1440)이 보고서 기이하게 여겨 ‘시습(時習)’이라 하였다. 말은 더디었지만 정신은 영민하였고, 글을 볼 때 입으로는 읽지 못했으나 그 뜻은 모두 알았다. … 명공(名公) 허조(許稠,1369~1439) 등이 자주 찾아와서 보았다. … 경태(景泰) 연간에 영릉(英陵,세종대왕)과 현릉(顯陵,문종대왕)께서 차례로 훙거(薨去)하고 노산(魯山,단종)이 3년 만에 왕위를 손양(遜讓)하게 되었는데, 이때 시습의 나이 21세였다. 삼각산에서 글을 읽다가 서울에서 온 사람으로부터 단종(端宗) 손위(遜位)의 소식을 듣고 즉시 문을 닫아걸고 3일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다가 방성통곡한 다음에 읽고 쓰던 서책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광기를 일으켜 뒷간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불문(佛門)에 의탁하고 승명(僧名)을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그의 호는 여러 번 바뀌어 청한자(淸寒子)ㆍ동봉(東峰)ㆍ벽산청은(碧山淸隱)ㆍ췌세옹(贅世翁)ㆍ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그의 생김은 못생기고 키는 작았으나, 뛰어나게 호걸스럽고 재질이 영특하였으며 대범하고 솔직하여 위의(威儀)가 없으며, 강직하여 남의 허물을 용납하지 못했다. 시세에 분개한 나머지 울분과 불평을 참지 못하였고, 세상을 따라 어울려 살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드디어 육신에 구애받지 않고 세속 밖을 방랑하여 우리나라의 산천에 그의 발자취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명승(名勝)을 만나면 곧 거기에 자리 잡았고, 고도(故都)를 찾아가면 반드시 발을 구르며 슬픈 노래를 불러 여러 날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다. … 드디어 안씨(安氏)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을 이루었다. 벼슬을 하라고 권하는 이가 많았으나, 시습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의연하게 세속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가기를 예전대로 하였다.”며 그의 곧은 일생을 축약해 설명하지만, 율곡 이이는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양보[손양(遜讓)]한 것으로 묘사하였다. 실상은 단종이 왕좌에 오른 이듬해 계유년(1453) 10월 10일 수양대군이 김종서·황보인 등을 무참히 살해하며 단종에게 위협을 가하였고, 마침내 1455년 6월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가 왕좌에 오른다. 이에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등 사육신과 단종의 외숙인 권자신(權自愼) 그리고 정찬손(鄭昌孫,1402~1487)의 사위 김질(金礩,1422~1478) 등이 단종 복위를 모의하였는데, 김질이 일이 여의치 않자 이 사실을 장인어른인 정창손에게 폭로하였고, 다시 정창손은 한명회를 거쳐 세조에게 고변하면서, 일이 탄로나 모두가 죽임을 당하였다. 당시 세조의 세력에 동조한 정창손은 부원군을 거쳐 대사성·대제학을 겸직하고 영의정에 올랐고, 김질은 세조의 신임을 받아 좌익공신 3등에 추봉 및 판군기감사에 승진되고, 이후 승정원 승지를 거쳐 병조참판·평안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우의정에 오르는 등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한편 김시습은 21세의 피 끓는 나이에 세조의 잔학함을 목격하였다. 이후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해 동학사에서 장례를 치르고, 1465년(세조11) 봄에 경주부 금오산(현 용장사)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하며,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다. 세조를 피해 경주로 내려온 김시습은 탕유(宕遊)를 하며 고뇌에 찬 세월을 보내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창손의 형인 정흥손이 경주부윤(재임1463.07~1466.02)으로 있었다. 정흥손은 부친 정흠지(鄭欽之,1378~1439)의 6남(정갑손·인손·흥손·창손·희림·육손) 가운데 3남으로 태어났으며,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당시 김시습이 경주에 머문 7년의 기간 동안 정흥손(鄭興孫)-최선복(崔善復)-이염의(李念義)-전동생(田秱生) 등 훈구파 경주부윤이 주를 이뤘고, 정흥손은 재임당시 동경관 중수를 맡았고, 영의정 신숙주와 대사성 김영유가 재인(梓人:도목수) 서휴(徐休)를 보내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으며, 사가 서거정이 「경주부객관중신기(慶州府客館重新記)」기문을 지었다. 당시 서거정은 세조의 신임을 받은 인물로, 김시습과는 단종복위 감정이 엇갈려 서로가 좋지 않은 관계였다. 반면에 이염의(재임1467.4~1469.2)의 경우 세조가 즉위하면서 파직 당하였고, 이후 세조의 정권말기에 태비(太妃)와의 인연으로 관직이 회복되어, 경주부를 다스리다가 다시 예종년간에 서울로 복직되어 갔다. 게다가 이염의·남효온·김시습·이집 등은 교유가 깊었으며, 단종에 대한 충성과 곧은 기풍과 절개로 유명하였다. 경주는 문화콘텐츠가 신라에 집중되고 관련 문화재 또한 어마하다. 이제라도 경주의 조선문화와 인물로 매월당 김시습을 재조명하고, 경주남산과 매월당을 연결짓는 문화코드가 개발되기를 고대해 본다. 경주를 찾은 김시습을 기억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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