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아끼는 둑방길이었습니다. 지인 몇에게만 알려주고 속닥거리며 은밀하게 걸었던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일명 ‘숲머리둑방길’입니다. 신라 대표 산성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명활산성에서 숲머리 남촌마을의 진평왕릉까지의 약 2km 구간길 입니다. 진평왕릉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명활산성까지 오롯이 걸을 수 있는 길이지요.
봄이면 2㎞ 호젓한 오솔길을 따라 찔레꽃이 별처럼 환하게 농로 주변을 밝혔구요. 500여 그루 붉은 겹벚꽃은 가지가 휘도록 자지러지게 피어 도심의 벚꽃이 허무하게 낙화한 뒤의 허전함을 가득 채워주었었죠. 오솔길 옆 수로에는 맑은 물이 흘렀습니다.
가을엔 보문 드넓은 황금들판을 내려다보면서 걷노라면 이윽고 숲머리 마을의 기와들이 줄지어 이어지는 조화가 한 눈에 펼쳐집니다. 길가에는 보라색, 노란색의 자잘한 들국화들이며 이름모를 야생초들이 발길에 채이곤 했구요. 보석같이 숨겨두고 즐겼던 이 길을 경주시는 지난 10월 보문 숲머리 마을 주민들과 새로운 둘레길 명소로 부각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환경정비를 실시했었습니다.
수풀과 잡목으로 우거져 있는 다소 거친 들길이었거든요. 최근 명활산성 북문지 정비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주민들의 산책로 정비 요청이 잇따른 것에 대한 정비였는데 누구나 걷고 싶은 둘레길 명소로 거듭나는 과정이었겠죠. 경주에서 또 하나의 숨겨진 둘레길 명소가 탄생하는 것이지만 썩 달갑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 길을 올 가을만해도 여러번 산책했었습니다. 다시는 야생적 기운의 자연스러운 풍광을 볼 수 없겠다는 생각에서였죠. 사진을 찍고 주변을 천천히 감상하면서 걸으니 1시간 30분 정도가 걸리더군요. 먹이가 풍부한 탓이었는지 야생오리떼들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인기척 때문에 ‘푸드덕’ 놀라 날아가곤 했습니다. 산책하는 우리도 놀래긴 마찬가지였구요.
이리저리 자연스러웠던 들꽃들까지 정비가 돼버려서 많이 아쉬웠지만 아직은 정취가 남아있었습니다만,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예산을 확보해 친환경 소재인 야자수 매트와 황토를 이용한 산책로 바닥 개선작업을 진행하고 야간 조명과 목교, 로프 등 안전구조물을 정비해 시민들이 보다 편리하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조성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편리’ ‘안전’이라는 명목으로 획일화된 조경과 편의시설을 이곳에도 할 모양인데 걱정이 앞섭니다. 가보시면 알겠지만 그리 위험하거나 불편한 길이 아니랍니다.
다소 거친 길이면 어떻습니까? 왜 도식적인 모습으로 똑같이 단장을 하려 할까요? 내년 봄, 단장이 되고 많이 알려져 사람들의 발길이 잦으면 한가롭게 이곳을 찾던 천둥 오리떼를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어쩌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길이란 이미 야생성을 잃어버린,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길을 만들어버린다는 것이겠습니다. 그저 오솔길을 걷는 중간중간 약간씩 쉴 수 있는 친환경적인 디자인과 재질의 작은 벤취 몇 개면 충분할 것일텐데요. 이 길의 유래와 주변 진평왕릉과 명활산성의 유적에 대한 간단한 안내판 설치 정도면 좋을 것 같다는 것은 비단, 저만의 생각일까요?그림=김호연 화백글=선애경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