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는 지정되지 않은 문화재 가운데서도 보존할 만한 분명한 가치가 있는 비지정문화재들이 산재해 있다. 이들 중 등급이 낮은 문화재자료로 지정·분류돼 보존되기도 하지만 아무런 안내 표식도 없이 잊혀지고 있는 경우도 많다.
지난 10일, 이들 중 경주북부권 안강지역의 불상 및 불상 관련 석물들을 찾아보았다. 경주의 비지정 문화재에도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인 보존과 관리를 주장하는 김환대(경주문화유적답사회 회장, 경주문화연구원) 원장과 함께 경주 안계리 석조 석가여래좌상, 경주 안강리 석조여래좌상, 안강읍 근계리 입불상, 경주 근계리 파좌불상 등을 둘러보았다.
-경주 안계리 석조 석가여래좌상... 문화재자료 제92호, 석굴암 석굴의 본존여래좌상과 매우 유사한 양식적 경향 보여「한국의 사지 현황조사보고서(문화재청,(재)불교문화재연구소), 대구광역시, 경상북도편, 2015년(上)」에서는 ‘안계리사지는 안계리 사골마을에 있다. 강동면 안계리 산 8-3번지 일원의 안계리사지의 사찰 명칭 및 연혁은 알 수 없으나 주변에서 ‘안계사(安溪寺)’명 와편이 확인되면서 안계사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지만 안계사의 사명은 문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사지는 2002~2003년 2차에 걸쳐 발굴조사됐다. 발굴결과 석조여래좌상의 대좌와 이를 봉안했던 1동의 건물지가 확인됐다. 그러나 이 건물의 초창 시기는 조선전기며 이 불상은 조선전기에 이곳으로 이전 안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99년 안계사(安溪寺)명 와편은 단 두 점만 발견됐고 이마저도 고려시대 유물로 판명돼 불상의 조성시기 및 고려시대 이전 안계사의 존재는 파악되지 않았다. 단지 금동불, 귀면와 등 다량의 유물과 석탑재, 장대석 등 다수의 석조 유물이 산재돼있어 이 일원을 사지로 판단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현재 불상 및 치석재는 담장을 둘러 보호하고 있었으며 마을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담장내 유물은 석조여래좌상과 방형석재, 석탑재 5매, 석등재 2매, 치석재 8매 등이다. 이들 부재는 석탑재, 혹은 건축부재일 것으로 추정한다. 석가여래좌상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2호로 총 높이 271.5㎝며 화강암으로 만든 좌불상이다. 불상의 높이는 150㎝, 어깨 폭 84㎝, 무릎 폭은 120㎝.
김환대 원장은 “2002년 발굴조사 이전에는 방형의 석재 위에 상대석과 함께 적재된 상태였으며 머리 위에는 석등 옥개석과 상륜 부재가 마치 보개(불상이나 보살상의 머리 위를 가리는 덮개)처럼 올려져 있었습니다. 현재는 석등의 상대석 일부와 중대석을 신부재로 보강한 대좌 위에 불상을 안치했고 머리 위에 올려져있던 석등 옥개석 및 상륜부, 방형석재는 담장 옆 석조 유물 주변으로 옮겨졌습니다”라며 이 불상의 변형 전후를 설명했다.
불상은 머리 위부분에 균열이 있으며 이목구비가 상당부분 훼손돼 있었다. 손의 일부와 가슴, 무릎 일부 등 군데군데가 파손돼 있었다. 현황조사보고서에서는 ‘그러나 전체적인 형태는 온전하게 유지되고 있는 편이며 세부 조각 부분도 파손이 적어 뛰어난 작품성을 논하기에는 손색이 없다.
불상의 머리는 나발(불상의 신체 중 소라 모양으로 된 여래상의 머리카락)이며 얼굴은 방형에 가깝다. 입은 일(一)자로 다물고 있다. 대좌는 원래 상중하대로 구성된 삼단팔각연화대좌다. 이 불상은 편단우견(偏袒右肩, 불상이나 승려가 가사를 입은 모습 중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옷 모양새)의 착의법, 촉지인을 취한 팔과 동체부 사이에 생기는 공간을 완전히 이해하고 조성한 점, 나발의 표현, 신체 비례 등 8세기 중엽에 조성된 석굴암 석굴의 본존여래좌상과 매우 유사한 양식적 경향을 보인다.
이 좌상은 석굴암본존상보다는 상반신이 다소 왜소하며 크기도 약간 작다. 따라서 이 불상은 석굴암 불상을 직모한 작품으로 8세기 중엽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고 밝히고 있다. 방형석재는 기존에 불상대좌로 사용됐던 것이다. 정면에는 마주 보고 있는 2구의 공양보살을 새겼으며 양 측면에는 사자상이, 뒷면에는 마애 삼층 석탑과 신장상으로 보이는 인물상 1구를 새겼다.
-문화재청과 경주시청, 경주 안계리 석조 석가여래좌상 지금의 현황과 틀리게 설명해 ‘오류’ 시급히 바로 잡아야 한편, 경주시청 홈페이지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현재 머리 부분에 석등(石燈)의 지붕돌을 얹어두고 있으며 탑의 부재를 괴어 대좌(臺座)로 이용하고 있다’며 석조여래좌상 발굴 전의 상황을 아직도 그대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지금의 불상현황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나마 경주시청 홈페이지의 사진은 현재의 현장 모습인데 불상의 설명문은 아직도 문화재청의 오류를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는 불상의 사진도 발굴전의 모습 그대로다. 문화재청과 시청 홈페이지의 이러한 오류는 시급히 바로 잡아야 한다. 한편, 아직도 불에 탄 흔적이 남아있어 보이는 이 불상은 2004년, 참배객들의 실수로 화재가 발생해 불에 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불상의 굴곡진 변화과정을 지켜봐왔던 김 원장은 “화재로 불상이 그을리고 오른쪽 팔과 다리부분에 금이 가는 등 큰 피해를 입어서 보존처리된 적이 있습니다. 이 불상은 불상을 연구하는데 있어 훌륭한 자료로 참고할만큼 상태가 양호한 편입니다. 다른 지역이었다면 문화재자료보다는 등급을 승격시켰을 겁니다. 특히 석굴암 불상을 연상시킬 정도의 뒷모습이 압권이지요. 경주 외곽에 ‘석가’라고 명시한 불상이 있는 예는 없습니다”라며 경주 외곽에 위치해있어 찾는 이들은 드물지만 지속적인 관심과 보존노력을 기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경주 안강리 석조여래좌상, 통일신라 불상으로 광배와 불신을 통돌로 조각했을 것으로 추정 이 불상은 안강읍 안강리에 있는 안강청소년문화의집(구안강문화회관) 야외정원에 있는 불상이다. 「경주지역 북부지역지표조사보고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1997」에 의하면, ‘이 불상은 하곡리 석불좌상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 조암사지에 있던 것으로 하곡리 하강초등학교로 옮겨졌다가 안강읍사무소를 거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 불상은 원래 광배와 불신을 한 장 돌로 조각돼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머리 윗부분은 사라져버리고 남은 것도 그나마 세 조각으로 깨어져있다. 어깨를 드러내는 편단우견의 대의를 걸치고 있다. 오른손은 무릎위에 올리고 왼손은 가슴까지 들어 올렸다. 왜소한 체구, 도식화된 옷주름 등으로 미뤄 통일신라 9세기 후반에 조성된 석불로 여겨진다. 불신은 높이 69㎝, 어깨폭 44㎝, 무릎 폭 84㎝이다’라고 밝혔다. 이 불상은 그나마도 마모가 심하고 불신의 조각 상태도 거친듯 보였다. 결가부좌한 이 불상의 온전한 모습과 얼굴은 상상에 맡길 수밖에.
김환대 원장은 “경주에서 몇 안되는 통돌 불상입니다. 이렇게 방치돼있어 도난의 우려도 있습니다. 이 불상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없고 아무런 안내가 없어 안타까운 상황”이라고 했다.
-경주 안강읍 ‘근계리입불상’...문화재자료 제98호, 두부와 광배 상부가 결실돼 보수했지만 불신과 비례 맞지 않는 모습으로 복원돼 안강읍 근계리 산 131-2번지 일원은 사역내에서 발견된 것으로 전하는 석조여래입상을 근거로 사지임을 알 수 있는 곳이다. 이 불상은 1977년 ‘용화사 용화전입불상’이라는 명칭에서 1997년 ‘안강읍 근계리 석불입상’으로 보고됐다가 2008년 ‘근계리입불상’으로 보고됐다.
「한국의 사지 현황조사보고서」에서는 ‘이 불상은 안강읍 근계리 안마골마을 북쪽의 용운사 미륵전에 봉안돼있다. 문화재자료 제98호. 광배와 불상이 1석으로 조성돼 있으며 대좌는 남아있지 않다. 전체 높이는 242㎝다. 두부와 광배 상부가 결실돼 보수했는데 두부의 경우 불신과 비례가 맞지 않는 모습으로 복원돼 있다. 법의는 통견(양 어깨를 모두 덮은 가사)이며 복부에는 띠 매듭이 드러나 있다. 불상의 가슴, 허벅지 부분이 팽창되듯 표현돼있어 양감이 느껴지며 허리의 굴곡이 분명하다.
이 불상은 약간 과장된 듯한 볼륨감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 중당(中唐) 이후 불상 양식과 유사한 감각이며 이에 제작 시기는 9세기 전반 무렵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광배는 연판형에 가깝고 상부는 파손된 것을 시멘트로 보수했다. 광배 전면에는 문양이 전혀 새겨져있지 않았으나 뒷면에는 얕게 양각한 삼층탑이 새겨져 있다. 1층 탑신에는 여래좌상 1구가 새겨져 있으며 연화좌 위에 앉아있다. 탑은 간략하게 새겨져 있으나 체감률, 여래좌상의 형태 등으로 보아 앞면의 불상과 동시에 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라고 보고됐다.
한편, 이 불상의 하단 부분이 절에서 마련한 제단에 가려져 그나마 온전한 부분을 볼 수 없어서 사라진 머리부분과 함께 안타까움을 더했다.
-경주 근계리 파좌불상, 경주지역에 남아있는 불상의 방형대좌중 규모가 가장 큰 것「한국의 사지 현황조사보고서」에서는 ‘현재 안강읍 근계리 안마골마을 북서쪽의 용화사 경내에 있는 석조여래좌상 조각의 존재로 경주시 안강읍 근계리 665-1번지 일원이 사지로 인식되고 있다. 1977년 ‘문화유적총람’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조여래좌상이 용화사 경내에 있다’고 했으며 1997년 자료부터는 불상이 개금(改金, 불상에 금칠을 다시 함)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다고 해 현황이 변한 것으로 보인다.
현 용화사 사역 내에는 비교적 많은 양의 유물이 산포돼 있다. 토기조각과 청자조각 등 흩어져있는 유물은 대체로 통일신라~조선전기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현재 용화사 용화전내에는 대좌를 갖추고 있는 석조여래좌상 1구가 있으며 용화전 앞 화단에는 석조여래좌사의 팔뚝 부분으로 추정되는 파편 1점이 있다. 용화전 내 봉안돼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현재 개금돼있어 원래 모습을 알 수 없다. 한편, 대좌는 수미단 아래 가려져 있으며 채색하지 않은 상태로 보존돼 있다.
대좌는 사각의 방형이며 상중하대석을 갖추고 있으나 중대석 중 두 개 면은 파손되어 표면의 조각 부분이 일부가 빠져 없어진 상태다. 하대석 일부와 상대석 모서리 대부분도 파손돼 있다. 중대석의 현재 남아있는 각 면에는 무릎을 꿇은 상태로 서로 마주보며 공양물을 바치고 있는 공양보살상이 한 쌍씩 새겨져 있다. 방형대좌의 훼손 정도가 심하고 균열이 가중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어 훼손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해 보인다’고 보고하고 있다.
김 원장은 “특히 이 대좌는 경주지역에 남아있는 불상의 방형대좌중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그 예가 드문 편”이라고 설명했다.
사진일부= 김환대 원장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