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여행객들이 남산의 삼릉·금오봉·고위봉 구간을 통해 노천 박물관이라 불리는 남산을 탐방한다. 특히 서남산 방향으로 포석정을 지나 삼릉에서 좌측으로 금오산을 향해 오르면 상선암과 마애불 그리고 바둑바위를 지나 정상에 이르는데, 바둑바위에 오르면 북쪽으로 경주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1767년 늦가을에 강와 임필대(1709~1773)는 남산의 수려한 경관을 찾아 동암(東庵)과 주변의 상선암 등 남산의 빼어난 경치에 감탄하였고, 1724년 3월에 오연 최수(崔琇,1657~?)는 경주부에서 최고 수려한 곳으로 남산을 꼽았다. 남산을 찾은 시인묵객은 두루 다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을 소중한 기행문으로 남겼다.
봉황이 와서 울었다는 봉생암(鳳生巖)과 검은 학이 와서 춤을 추었다는 옥보고의 전설이 서린 금송정(琴松亭) 옛터는 바둑바위가 있는 봉우리 전체를 아우르는 듯하다.
『산해경』에서 “어떤 새는 모양이 닭과 비슷한데, 오채색의 무늬가 있고, 봉황이라 부른다. 이 새의 머리 무늬는 덕(德), 날개 무늬는 의(義), 등 무늬는 예(禮), 가슴 무늬는 인(仁), 배 무늬는 신(信)을 의미한다. 이 새는 먹고 마시는 것이 스스로 자연의 법도에 맞고, 스스로 노래하고 스스로 춤을 추는데, 이새가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해진다.”라고 하였다.
봉황은 동아시아 전설에 나오는 상상 속의 새, 즉 봉(鳳)은 수컷, 황(凰)은 암컷을 뜻한다. 갑골 문자에서 봉황은 벼슬과 긴 꼬리 깃을 달고 있는 새 모양의 문자로 표현하며, 태평성대·청렴한 선비·화목한 짝 등의 상징적 의미를 담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봉생암은 남산에 있다. 신라의 정사와 교화가 순후하고 아름다워 봉황새가 이 바위에서 울었다고 하여 ‘봉생암’이라 이름짓고 나라 사람들이 노래를 지어 찬미하였다.”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은 『임하필기』「신라악」에서 “동경곡(東京曲)은 신라가 오랜 기간에 걸쳐 나라가 태평하고 정치의 교화가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신령스러운 상서가 나타나고 봉황새가 날아와서 울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이 노래를 지어서 찬미하여 부른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이른바 월정교(月精橋)니 백운도(白雲渡)니 하는 것은 모두 왕궁에서 가까운 곳들이다. 세상에 전하길 봉생암이 있는데, 이 음악은 신하와 아들 그리고 임금과 어버이, 신분이 낮고 젊은 자 그리고 높고 어른인 자, 아내와 남편에 이르기까지 두루 쓰였다고 한다.” 그리고 연재 윤행임(1762~1801)의 『해동외사』「금오산」에서 “금오산은 조선 계림의 남쪽 6리에 있고, 지금은 경주부로 신라의 천년고도이다. … 서출지의 남쪽엔 봉생암이 있는데, 신라 때 정치와 교화가 아름다워 봉황새가 날아와 울었다.” 그리고 오횡묵(吳宖默,1834~1906)의 여재촬요(輿載撮要)와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도 신라의 정사가 잘 다스려지고, 교화가 이뤄진 태평한 상황을 봉황이 도래한 것으로 빗대었다.
『장자』의 우화에서 봉황은 남쪽 바다에서 출발해서 북쪽 바다로 날아가는데, 오동나무가 아니면 쉬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단물이 나오는 샘이 아니면 마시지도 않는다. 이는 『시경』「대아편」에도 같은 설명이다.
게다가 혜자를 세속에 썩은 먹잇감을 즐기는 솔개에 빗대어 탐욕에 지배당하고 있는 부패한 관리로 묘사하고, 자신은 청렴한 선비라는 것을 봉황에 빗대었다.
봉황을 순우리말로 ‘아시’, ‘안시’, ‘아시새’라 불린다. 『산해경』「남산경」에 의하면 “단산(丹山)에 굴이 있는데, 이곳에 사는 새가 단혈조(丹穴鳥) 곧 봉황이다.” 그리고 『산당사고(山堂肆考)』에는 봉황에 대해 육상(六象), 칠덕(七德), 구포(九苞)의 특징이 있다고 서술한다. 또한 신라 때 소봉총 금관의 새장식에 봉황이 표현되었으니, 신라와 봉황의 인연은 특별히 깊다.
남산은 불교와 도교의 사상이 혼재한 공간으로 수많은 암자와 신선의 전설이 전한다. 봉황이 내려와 울었다는 봉생암은 신라의 태평을 상징하는 특별한 공간으로 인식되었고, 옥보고 검은 학과 봉황이 매개체 역할로 이어진다. 또한 경주 시가지에 우뚝한 봉황대가 있는데, 예로부터 전망대 기능을 하였지만, 분명 왕릉급에 해당되는 고분으로 보인다.
봉황이 내려앉은 남산의 봉생암 봉우리와 고분군이 가득한 평지에 솟은 봉황대는 신라의 태평성대를 이어가리란 신라인의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