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구대학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넘어가는 그 와중에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게 된 것은 어쩌면 우연을 넘어선 것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그 죄과를 씻기 위한 방법으로 삼성 차원에서는 한국비료공장을 정부에 기증하고 이병철 회장 개인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구대학을 헌납하
그렇다면 청구대학은 어떤 대학일까? 이 글을 들어가기 앞서 이번 원고의 내용은 최염 선생의 회고를 기반으로 당시 신문기사와 청구대학에 대해 기록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나무위키’ 등 자료 및 한겨레 신문, 오마이뉴스 등에 실린 최해청 선생의 아들 최찬식 선생의 인터
광복절이 열흘 지난 1964년 8월 25일, 대구대학이 정식으로 설립인가가 난 1947년 9월 이후 만 17년 만에 대구대학은 삼성 이병철 회장이 재단이사장에 취임하며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처음 이병철 회장은 학교에 대해 상당히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학교
이병철 회장은 대학을 인수한 후 재단이사장에 취임하는 한편 모든 절차를 차곡차곡 밟아나갔다. 재단 이사에는 이병철 회장 자신과 둘째 아들인 이창희 씨를 비롯해 자신의 측근들로 구성된 일단의 사람들이 포진됐다. 물론 문파 선생의 요구대로 선생 역시 이사로 참여했고 그 역
“대구대학을 인수해서 인재를 키우자!” 최염 선생이 회고하는 신현확 씨 관련 사실에 따르면 당시 이런 제안을 하자 이병철 회장이 두 가지 의문을 신현확 씨에게 표했다고 한다. 먼저 요즘 세상에 학교를 그냥 내줄 그런 분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고, 다음으로는 대학을 그
화창하기 이를 데 없는 날씨였다. 멀리 남산 꼭대기에 서 있는 금오정이 훨씬 크게 보였고 집 뒤 가산(假山)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적당히 시원했다. 그날 특별한 손님이 오기로 한 최부자댁은 작은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문파 선생은 오랜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고 혹시라도
대구대학은 이후 안정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비록 명색은 단과대학이긴 했지만 서울의 어느 대학보다 좋은 대우로 우수한 교수진을 초빙해서 강의하고 있었고 우수한 학생들도 많았다. 대구·경북 일원에서는 가장 많은 학과를 보유하고 있었고 학생 수도 가장 많았다. 한편
아버지 최식 선생에 대한 최염 선생의 조심스런 회고를 들으며 떠올린 것은 일제강점기를 산 뛰어난 문인들의 일화였다. 이 시대의 문인들은 주색잡기가 다반사였고 기괴하고 파격적인 언행들이 도처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고 한량노릇이 다 정당화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망국의
흔히 문파선생이 대구대학만 설립한 것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다. 사실을 알고 보면 대구대학 이외에 또 하나의 대학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계림학숙이다. 전문학교 과정으로 만든 계림학숙은 6·25 전란 시기에 만들어진 학교다. 대구대학이 문파선생을 비롯한 대구 경북
흔히 대학을 일컬어 상아탑(象牙塔)이라고 한다. 상아는 알다시피 코끼리 어금니다. 코끼리 어금니는 매우 귀해 보석처럼 취급한다. 코끼리는 생명이 다하면 본능적으로 자신들만의 무덤을 찾아 길을 떠나는데 그렇게 죽은 코끼리의 무덤에 가면 상아로 탑이 세워져 있다는 전설이
대구대학의 두 번째 위기는 6·25전쟁 중에 문교부가 시행한 국립종합대학안(국대편입안)이었다. ‘국대편입안’이란 각 도마다 종합대학을 신설하거나 지방에 있는 단과대학을 합쳐 국가가 운영하는 종합대학으로 육성한다는 문교부의 계획안이었다. 그 무렵 대구에는 대구대학과 청
대구에 제대로 된 대학이 생겼다는 소식, 더군다나 그 대학을 설립한 사람이 경주최부자라는 소식이 삽시간에 대구·경북 전역에 퍼져 나가자 신입생이 쉽게 모집되었다. 많은 독지가들의 기부로 학교 재정도 양호했다. 이대로 가면 대구대학은 별 탈 없이 문파선생이 꿈꾼 ‘국가를
여하간 대학을 세우겠다고 결심한 문파 선생은 그 결심을 곧바로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마침 이 무렵 경북에서 종합대학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들은 상당수 일제강점기 일본에 부역했던 대지주들이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죄과를 씻으려는 목적으로 대학설립을 계획, 이를
영남대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연혁을 살펴보면 가장 먼저 대구대학 설립인가가 나온다. 1947년 9월 22일자다. 다음으로 청구대학설립인가가 나온다. 1950년 4월 10일이다. 그리고 나서 1967년 12월 22일, 대구대학 설립인가로부터 정확하게 20년 3개월이 지
“아이고 참봉어른 그기 정말입니꺼?” 큰 사랑채 방문이 활짝 열린 가운데 문파 선생과 동네 소작인 한 명이 마주 앉아 실랑이하고 있었다. 소작인은 누대에 걸쳐 최부자댁 전답을 붙여 온 사람으로 최염 선생 말씀으로는 ‘우리 집안을 먹여 살려온 일등공신’이라는 사람이었다
“해방이 되고 한참 뒤, 반민특위라 카는 게 맹글어져서 친일파들을 무조건 잡아가기 시작했어요. 그때 작은 할아버지께서 제일 먼저 대구 반민특위로 잡해 가셨어요!” 반민특위와 관련해 최염 선생이 가장 기억되는 일로 작은 할아버지 최윤 선생이 반민특위에 체포된 사실을 꺼
“짐은 세계의 대세와 ~ ~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후략)” 19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를 통해 일본 히로이토(裕仁) 일왕(日王)의 항복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일왕의 목소리는 여느 방송 때와
이쯤 되자 문파 선생도 단안을 내렸다. 선생은 아픈 몸을 이끌고 사랑채로 나왔다. 아리가는 선생이 몰라볼 정도로 수척한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아니, 최선생, 편찮으시다는 말씀만 듣고 속을 태우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이렇게 몸을 상하시다니요…” 아리가는 진
아리가는 조선의 문화에 관심이 많은데다 매우 실용적인 인물이라 전통적인 양반가이자 부잣집인 최부자댁에 상당한 호기심과 호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여행을 좋아하고 고건축에 대한 취미를 가진 터라 경주를 좋아해 자주 최부자댁을 찾은 인물이었다. 이에 더해
앞에서 이야기했다시피 문파 선생은 ㈜백산무역을 경영하는 것을 핑계로 최부자댁 모든 부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승화시키며 아름답게 마감했다. ㈜백산무역이 파산하고 최부자댁이 압류상태에 놓이자 문파 선생은 모든 것을 깨끗이 단념하고 부자의 명성은 물론 그때까지의 호의호식을 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