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척하는 게 창피한 일이지, 모르는 건 창피한 일이 아니다.
아는 게 없으니 아는 사람한테 배우면 된다.
여기저기 기웃거려 봤지만, 우리 마을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 줄 기관은커녕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사람들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 생각을 더 크게 확장했다.
“마을 교육”.
마을 교사가 우리 마을을 이야기한다.
마을 교사가 될 생각은 없었지만, 마을 교육은 관심이 갔다. 우리 마을에 대해 알고 싶었다. 게다가 아줌마가 사는 곳은 안강·강동이다. 세계유산인 양동마을과 옥산서원이 있는 곳이 아닌가! 마을 교육이 무엇인지부터 알아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마을에 대해서 기초적인 공부가 되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먼저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 마을을 알리는 역할을 하는 마을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더 자세히 알려 주고 싶은 마음에 자료를 더 찾게 되고, 어떻게 하면 더 쉽고 재밌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뒤따랐다. 양동마을과 옥산서원은 이미 알던 곳이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고, 더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여름철 아이들의 물놀이장이었던 독락당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양동마을과 옥산서원, 독락당은 모두 한 인물로 연결된다.
<회재 이언적>
듣도 보도 못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우리 마을의 역사를 알려면 회재 이언적을 모르면 안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는 누구인가?
종묘와 문묘에 둘 다 배향된 인물이다.
뭐 대단한 일인가 싶은가?
아는 만큼 보인다.
몰라서 묻는 것이다.
종묘는 조선시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다. 그리고 배향공신이라고 왕이 살았을 때 가장 위대한 신하들의 위폐도 배향공신이라는 이름으로 모셔진다. 삼정승이라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되어도 종묘에 무조건 모셔지는 것이 아니다. 문묘는 또 어떤가? 문묘는 잘 모를 것이다. 성균관은 어떤가?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 지금도 성균관대학교로 그 이름이 이어지고 있다. 성균관 대학교 부지에 문묘가 있다. 문묘는 공자의 위패가 모셔진 곳으로, 위대한 학자들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다. 조선시대 종묘와 문묘에 위폐가 둘 다 모셔진 사람은 몇 명일까? 500년 조선 역사 중에 단 여섯 명이다. 회재 이언적은 그 여섯 명 중 최초로 두 곳에 다 위패가 모셔진 위인이다. 두 번째, 세 번째로 위패가 모셔진 사람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다. 조선시대 학문인 성리학, 특히 영남학파의 창시자인 퇴계 이황은 회재 이언적 선생님의 저서만을 읽고 회재 이언적을 자신의 스승이라고 칭했다.
훌륭한 신하이자 학자였던 회재 이언적은 양동마을 서백당에서 태어났고, 무첨당에서 자랐다. 서백당과 무첨당은 양동마을의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의 종택이다. 즉 서백당은 이언적의 외할아버지가 지은 외가댁이고, 무첨당은 이언적의 친가다. 참을 인을 백 번 쓰는(서백) 마음으로 살라는 외가와 부끄럽지 않은(무첨) 삶을 살라는 친가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회재 이언적이다. 생전에 이언적은 공식적으로 제자를 두지 않았다. 파벌을 만들 것을 지양했기 때문이다(그래서 후대 학자들에 비해 덜 알려진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과 그를 기리고 싶은 선비들은 옥산서원을 지었고, 그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은 후손들과 후대 선비들은 그가 지내던 곳을 일부러 찾아 옥산구곡을 지정했다.
아이들에게 우리 마을을 제대로 알려 주고 싶었던 엄마는, 마을 교사가 되어 우리 마을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 마을 구석구석에 있는 의미를 찾는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재밌어진다는 것을!
아줌마는 회재 이언적을 기리던 선비들의 마음과 더불어, 옥산구곡 길을 걸었다. 해설을 맡았던 아줌마는 온 가족을 대동해서 행사에 참여했다. 비가 오는 와중에 세 아이를 돌봐야 했던 남편의 얼굴에는 짜증이 일었다. 한 시간을 훌쩍 넘겨 해설을 마치자, 남편이 다가왔다. 너무 좋았다고, 이곳에서 나고 자랐지만, 전혀 몰랐다고. 지인들에게 옥산구곡 길을 걸으며 나보고 해설하면 좋겠단다.
긴장이 풀리고 행복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