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대학을 인수해서 인재를 키우자!”최염 선생이 회고하는 신현확 씨 관련 사실에 따르면 당시 이런 제안을 하자 이병철 회장이 두 가지 의문을 신현확 씨에게 표했다고 한다. 먼저 요즘 세상에 학교를 그냥 내줄 그런 분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고, 다음으로는 대학을 그냥 인수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제 아래 문파 선생께 어떤 대가를 해 드려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문파 선생을 도와 이사로 참여하던 신현확 씨는 선생에 대해 아는 바를 상세히 이야기하고 그래서 더욱 대구대학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문파 선생을 만나 볼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이쯤 되자 신현확 씨의 제안은 다시 이병철 회장의 관심을 끌었다. 이병철 회장도 전설 같은 경주최부자댁 이야기와 문파 선생에 대한 명성은 익히 들은 바 있고 대구대학에 대한 여러 가지 긍정적인 평가도 자주 들었던 바라 신현확 씨에게 이 계획의 전권을 위임하기에 이른다. 이병철 회장의 위임을 받은 신현확 씨는 가장 먼저 최염 선생을 찾아와 이병철 회장과의 이야기를 전하며 할아버지 문파 선생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최염 선생은 대구대학에서 실무 이사를 맡아 할아버지 대신 대구대학의 살림을 보살피고 있었고, 문파 선생은 모든 직을 내려놓고 경주에서 최염 선생이 전해드리는 정황 정도만 듣고 있을 때였다. 최염 선생은 곧 할아버지께 말씀드려 신혁확 씨를 만나게 해드렸다. 신현확 씨로부터 그간의 전말을 모두 전해 들으신 문파 선생은 이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병철 회장이 돈은 충분히 있으니 굳이 학교까지 이용해가 돈 벌라꼬는 안할 끼라.” 문파 선생의 이런 추측에 신현확 씨는 당연하다며 확신했다. 문파 선생은 당시 이사장이던 최현연 교수와 상의한 다음 이병철 회장을 만나 보겠다고 수락했다. 신현확 씨는 이병철 회장에게 문파 선생의 뜻을 전하고 발 빠르게 움직여 나갔다. “고려대학교는 인촌이 세운 게 아니네, 자네가 학교를 잘 키우면 대구대학에 자네 이름이 남을 걸세!” 사랑채, 문파 선생을 향해 이병철 회장이 깍듯이 큰절로 인사를 드렸다. 문파 선생은 자리에 고쳐 앉는 이병철 회장에게 대뜸 물었다. “자네, 혹시 고려대학을 누가 세웠는지 알고 있나?” 이병철 회장이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가볍게 대답했다. “인촌 김성수 선생이시지요.”   대부분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이 대답했다. 문파 선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고려대학은 대한제국에서 재무대신을 지내던 이용익 대감이 처음 세웠고 나중에 천도교 3대 교주가 됐던 의암 손병희 선생이 그걸 인수했지러. 의암이 3.1운동을 계획하면서 옥고를 치룰 거를 미리 내다봤는데 이때 내보고 보성학교를 맡아달라 캤어… 내가 그때 백산무역회사를 세워 독립자금 만드는 게 급해 거절을 했지러. 그래서 내가 직접 추천하고 설득한 분이 인촌인 기라.” 문파 선생의 말에 이병철 회장은 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 ‘아, 그런 내막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하면서 몸을 굽혀 보였다. “그때, 학교를 인수하던 의암이나 인촌은 다른 생각은 아무 꺼도 안 하고 딱 하나씩만 생각 했다꼬. 그게 뭘 거 같은가?” 문파 선생이 선문답처럼 묻자 이병철 회장이 대답하기보다는 선생의 다음 말씀을 듣겠다는 듯 낮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딱 하나 빠이 없었디라, 학교를 지대로 운영해 나라를 구할 인재를 키우는 거랐지러.” 짧은 침묵이 흘렀다. 문파 선생은 이병철 회장에게서 잠시도 시선을 떼지 않았고 이 회장 역시 문파 선생의 눈을 촌각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정적을 깬 것은 역시 문파 선생이었다. “대구대학을 인수하겠다고 했는데 인수해서 우얄 작정인가? 이 물음에 대해서만큼은 이병철 회장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한수 이남에서 제일 좋은 대학을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다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이병철 회장이 침묵을 깨고 문파 선생께 여쭈었다. “선생님의 높은 뜻은 늘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학교를 제게 넘기시면 어떻게 보답을 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마땅히 대가를 지불해 드려야 할 텐데 어떻게 해드리면 좋겠습니까?” 순간 문파 선생의 얼굴에 추상같은 기운이 서렸다. 표정이 냉랭히 바뀌자 이병철 회장이 당혹한 얼굴로 얼버무렸다. “아니면..., 무슨 계약서라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선생은 엉거주춤 반쯤 엎드린 이병철 회장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일갈! “이보시게, 자네는 학교가 사고파는 물건이라 생각하는가?” 뜻밖의 되물음에 이병철 회장의 얼굴에 당혹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을 모두 보게. 자네가 있고 내가 있고 자네 아들과 내 손자와 여기 신사장...,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다 증인들일세.” 이병철 회장이 주변을 한 번 둘러보자 선생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게 계약서나 써야 할 정도라면 나는 학교를 자네에게 맡길 수 없네. 방금도 의암이나 인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시피 나 역시도 아무 꺼도 바라는 게 없네. 자네가 이 학교를 맡으면 학교를 학교답게만 운영하면 대는 기라. 그러면 방금 자네가 고려대학교 설립자를 인촌이라꼬 말했듯이 자네가 죽고 나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자네를 대구대학 설립자로 알 것이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재차 물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공을 들여오신 학교를 그냥 가져갈 수도 없지 않습니까?” 문파 선생은 길게 숨을 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염아, 니는 삼성에 덕볼 생각 하지 마라. 양복 한 벌도 얻어 입지 마라!” “다시 한번 말하지마는 아무 꺼도 바라는 게 없네. 다만 학교가 내가 원하는 대로 잘 돌아가는지는 봐야 할 거니까 재단이사진을 구성하믄 내인테 이사 한 자리는 맡겨 주게나.” 할아버지는 그런 다음 옆자리에 모시고 배석한 최염 선생을 돌아보며 엄중히 다짐을 두었다. “염아, 니도 단디 들어라. 니는 인자부터 삼성이나 여기 이 회장인테 양복 한 벌이라도 얻어 입어서는 안 댄다. 알겠나?” “돌이켜 보면 믿기 힘든 일이었지요. 경상북도 일원에서는 가장 큰 대학교 아닙니까? 전 재산을 다 넣어서 세운 대학이고요. 그걸 그냥 내주시면서 나를 향해 덕볼 생각은커녕, 양복 한 벌도 얻어 입지 말라고 하셨으니 다른 사람들이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마나 최염 선생은 그저 ‘네’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평생 할아버지를 모시고 다녔지만 그날만큼 엄정하게 선생을 다그치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처음이었다는 것이 최염 선생의 회고였다. 그 모습을 보던 이병철 회장이 문파 선생에게 ‘그렇다면…’하고 말을 이었다. “여기 손자분도 정식으로 학교의 이사로 참가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그러나 문파 선생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한 집안에서 이사가 둘씩이나 있어서 머할라꼬. 대신에 이렇게 해주게. 내가 나이가 많아가 일을 제대로 몬 볼 수 있으이까네, 여어 내 손지를 시켜서 학교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을라 카네. 그라이 나를 이사로 앉혀 놓고 일은 내 손자가 할 수 있도록 사람들인테 잘 알려 놓으라꼬.” 삼성의 재단 인수인계는 차근차근 이루어졌다. 문파 선생의 말대로 이병철 회장은 재단 이사진을 구성할 때 이사 자리 하나를 문파 선생께 배정한 이외에 개인적으로건 삼성의 기업 차원에서건 문파 선생께 일절 아무것도 보상하지 않은 채 재단 인수작업을 마쳤다. 그러는 동안에도 문파 선생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대학 인수인계에 관해서는 단 한마디의 간섭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문파 선생은 대대로 이어온 경주최부자 전 재산을 들여 설립하고 이끌어 온 대구대학을 아무런 대가 없이 이병철 회장에게 넘겼다. 경주최부자댁을 기록하는 작가로서 나는 아직도 이 대목을 떠올리면 모골이 송연해지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엄청난 일을 하신 문파 선생이 이해되지 않는다. 아무리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주장하고 공공의 이익을 우선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왔어도 나 같으면 도저히 문파 선생처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어마어마한 결단은 세계사에서도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대구대학에 기증된 최부자댁 재산은 문파 선생 자신은 물론 당시의 경주최부자댁 식솔들의 것도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당장 대구대학과 결별하면 경주최부자댁은 문자 그대로 쭉정이 부자로 전락하는 것은 물론 일체의 기득권도 전부 없어진다. 그런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런 큰 결단을 내린 문파 선생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아니 그냥 사람이 아니고 신인(神人)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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