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최씨 백사(白沙) 최동언(崔東彥,1594~1672)의 가계는 7대조 최예(崔汭) 그리고 증조부 최삼택(崔三宅), 고조부 운암(耘菴) 최봉천(崔奉天)으로 이어진다. 조부 최경천(崔擎天)은 아들이 없어 재종인 최신보(崔臣輔)의 넷째 아들 남포현감을 지낸 육의당(六宜堂) 최계종(崔繼宗)을 후사로 삼았으니 최동언의 부친이다. 육의당은 외동읍 제내리에 있다. 부친 최계종과 최진립이 의병을 창의해 적과 싸울 때 식솔들은 부의 동쪽 황룡산 골짜기로 피신하였고, 이때 모친이 공을 임신해 있었다. 8월 신묘일에 이슬내린 풀과 가시덩굴 사이에서 해산하였으나,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고 하니, 기이한 출생의 이야기는 인구에 회자되며, 훗날 81세 천수를 누렸다. 1613년 사마시에 급제, 1633년에 목릉참봉에 제수되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까지 인조를 따라 호위하였고, 이후 귀후서 별제(歸厚署別提), 장례원 사평(掌隸院司評)에 제수되어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올랐고, 1639년에 구례현감에 올랐다. 일찍이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1569~1634)는 「봉산욕행록」에서 1617년 8월 28일에 양산 수령과 함께 최동언이 한강 정구를 뵈었다고 기록한다. 그런데 묘갈명과 행장에는 임진년(1592) 생으로, 「봉산욕행록」에는 갑오년(1594) 생으로 차이가 난다. 또한 말년에 부친의 별장 육의당을 증축하여 남쪽을 퇴수헌(退修軒), 북쪽을 긍구재(肯構齋)라 명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전원생활을 즐겼다. 구례현감을 물러날 때 늠전(廩田:조선시대 지방 관아의 경비 조달을 위해 지급된 토지)으로 남은 돈은 아전에게 물려주었는데, 아전이 이를 사양하자 그 돈으로 땅을 매입해 서악서원(西岳書院)에 납부하여 향례를 도왔다고 전한다. 이에 대해 정헌(定軒) 이종상(李種祥,1799∼1870)은 「행장」에서 “일찍이 학교에 뜻이 있었다. 본 고을의 서악서원은 구암(龜巖) 이정(李楨)이 다스릴 때 창건한 곳으로, 그 규모와 절목은 퇴계 선생께 왕복하여 강론해 결정하였다. 전쟁의 화재 이후에 서원은 허물어졌고 공부하는 규정도 없어졌다. 공은 그것을 개탄히 여겨 몸소 일을 맡아 증축하여 무너진 것을 일으키고, 보수하여 공부하는 규모를 회복하여 고을의 많은 선비로 하여금 흥기한 이유를 알게 하였다. 또 상소를 통해 사액을 요청하여 서원의 격식을 중하게 하였고, 스스로 예가 바른 곳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일찍이 [현감] 급여의 쓰고 남은 천 궤미를 사익으로 쓰지 않았고, 고을의 주리(主吏)가 돌아간 이후에 수년 동안 아전이 받던 돈 상당수를 다시 들였는데, 공은 이를 사양하였으나 사양할 수가 없어 서악서원으로 보내 춘추제향의 제수를 도왔고, 전토를 샀으니, 지금도 여전히 부의 남쪽 잉보(仍甫:잉파)에 있다. 현자를 모신 서원에 힘을 쓰는 것이 이와 같고, 물들지 않는 청렴결백한 지조 역시 대강은 알 수 있다”라고, 인물의 됨됨이를 높이 평가하였다. 서악서원은 1600년에 부윤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이 옛터에 초사(草舍)를 짓고 위판을 다시 봉안하고, 1602년에 사당을 중건하였으나 완전히 복구하지 못하였다. 1610년에 부윤 서촌(西村) 최기(崔沂)가 강당과 재사(齋舍)와 전사청과 장서실을 중건하였다. 1623년에 부윤 치계(癡溪) 여우길(呂祐吉,1567~1632)이 고을의 유림들과 진사 최동언 등이 상소하여 서악서원 사액을 받기에 이른다.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1723~1801)가 묘갈명을, 활산(活山) 남용만(南龍萬,1709~1784)이 그의 묘지명을 지었다. 통정대부 행 구례현감 최 공 묘지명 - 활산 남용만 5세손 최달겸(崔達兼)이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으며 용모와 자태가 사람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문사(文詞)에 능하여 관례를 올리자마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니, 이때부터 빛나는 명성이 자자하였다. 지방으로 나가 구례현감이 되었고, 구례현에 치적의 공효가 있었다. 관직에서 물러나 치술봉 아래 호수 가에 집을 지었는데, … 그윽하고 뛰어난 경치를 자기의 즐거움으로 여겨 다시는 벼슬길로 나아가지 않고 그 안에서 고기 잡고 나무를 베며 시를 짓고 읊조렸다. … 공은 천성이 순박하고 독실하여 어려서부터 독실하게 효도하고 공경하였으며, 한강 정구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직접 예교(禮敎)를 받았다. … 경주부 남쪽 전천동(箭川洞) 손방(巽方)을 바라보는 언덕에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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