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청구대학은 어떤 대학일까? 이 글을 들어가기 앞서 이번 원고의 내용은 최염 선생의 회고를 기반으로 당시 신문기사와 청구대학에 대해 기록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나무위키’ 등 자료 및 한겨레 신문, 오마이뉴스 등에 실린 최해청 선생의 아들 최찬식 선생의 인터뷰, 한국대학학회가 주최한 영남대학교 관련 ‘한국의 사학지배구조 형성과정 사례고찰 - 영남대는 누구의 것인가’ 등을 참고하였음을 밝혀 둔다. 청구대학은 독립운동가 출신인 최해청 선생이 근로자를 위한 야간대학을 만들기 위해 1948년 5월에 대학 설립준비 기성회를 발족하고 그해 9월 ‘대구문리과전문학원’으로 인가가 난 후, 1950년 4월 정식으로 청구대학으로 설립인가가 난 학교다. 설립자인 야청(也靑) 최해청(崔海淸1905~1977) 선생의 집안은 맹렬한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아버지인 일화(一和) 최현달(崔鉉達) 공은 대구지역의 독립정신을 이끈 양대산맥으로 불린다. 최현달 공은 경술국치의 비보를 받자 청도 군수직을 사직하고 목숨을 건 단식에 들어갔을 정도로 매서운 우국지사였다. 나중에 문파 선생이 이분의 기념사업회에 참여할 만큼 대구 지역에서는 유명한 독립지사였다. 그런 아버지의 대를 이은 최해청 선생도 해방이 될 때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만큼 강한 독립정신을 가진 청년이었다. 대구고보 시절에는 ‘소년혁진단’이란 단체에 들어가 일본인 교사를 몰아내는 등 항일운동을 하다 퇴학당하기도 했다. 최해청 선생은 또 일본 유학중인 1926년에 일본 내 조선 아나키스트 동맹인 ‘진우연맹’에 가입해 일본 정치인 암살, 일본 내 주요시설 파괴 등을 모의했다. 해방 후에는 일간지인 경북신문사를 창설했고 1947년에는 대구시보사 장인환 사장과 뜻을 합쳐 ‘독립운동국’을 열고 3주 동안 근로 청소년과 대중을 위한 학술강좌를 열었는데 이때의 주제가 ‘독립운동’이었다.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을 고취하기 위해서 우리 민족이 새로운 형태의 독립심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의 이 강연은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최 선생은 이에 고무되어 이 같은 강연을 장기적으로 지속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학교가 필요함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독지가들을 설득하고 자금을 모으는 등 학교건립을 계획한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1948년 9월 ‘대구문리과전문학원’을 설립했는데 이것이 바로 청구대학의 전신이다. 최해청 선생은 학교를 설립한 후 스스로 원장에 취임하여 학교발전의 전모를 현장에서 책임지게 된다. 이후 1950년 4월에 청구대학으로 개편한 뒤에는 ‘정종수’란 분을 재단이사장에 추대하고 자신은 학장으로 취임하여 참된 대학양성에 혼신을 다했다. 참고로 초기 청구대학은 대구대학과도 깊은 관계가 있는데 처음 학교를 세우고 강의할 곳이 없어서 한동안 대구 대학의 건물을 빌려 야간 강의를 했기 때문이다. 학교 형사사건 무마하느라 재단 관계자들이 박정희에 학교 바쳐, 이병철 회장 박정희와 경쟁구도 갈등 청구대학이 영남대학으로 합병되는 과정은 대구대학만큼이나 깊은 곡절이 있다. 여기에는 대구대학과 유사한 아픔이 있으니 청구대학 역시 설립자 최해청 선생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학교재단이 모종의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학교를 박정희에게 헌납했다는 사실이다.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청구대학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후 국가재건최고위원회의가 시행한 일방적인 ‘대학령’ 기준에 미치지 못해 2년제 대학으로 강등당하고 만다. 1950년부터 1961년까지 10년 넘게 4년제 대학으로 안정적인 운영을 해온 대학을 일방적 잣대를 들이댄 끝에 하루아침에 2년제 대학으로 전락시켜 버린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청구대학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어서 대학 창립 이후 청구대 토목과가 전국 최고의 토목공학도를 양성하는 대학으로 평가되고 있었고, 그해 졸업생 성적이 전국 4위에 오르는 등 대학의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건물 증설과 시설 보완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다시 4년제 대학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66년 12월에 학교 재정을 파탄에 몰고 간 사건이 터지게 된다. 설립자가 서울로 출장을 다니는 등 자주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 학교 경리직원이 자금을 횡령하여 재정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다. 마침 이 무렵 최해청 선생이 재단이사진을 개편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당시 재단이사장이던 전기수 씨가 갑자기 이사회를 열어 최해청 학장을 해임시켜 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다른 대학 학장들이 재단의 초빙으로 취임하던 것과 달리 청구대학은 설립자가 곧 학장이었기에 당시의 그 의결은 설립자의 의견을 무시한 결정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67년 6월에 새로 공사 중이던 학교 건물이 무너지면서 학교가 심각한 형사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무너졌던 건물은 원래 최해청 선생이 3층으로 지으려고 계획한 것인데 재단 관계자들이 같은 설계도면을 무시하고 6층짜리 건물을 짓는 바람에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된 것이었다. 이 문제로 당시 재단 관계자들이 상당수 연루되어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최해청 선생의 동생을 비롯한 일단의 재단이사들이 그 책임을 피하기 위해 이 문제의 해결을 청와대에 의뢰하게 된다. 마침 대선에서 질 경우 자신의 영구 안정책으로 대학설립을 도모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즉시 측근들로 꾸며진 7인의 관선이사를 청구대학에 파견, 이로써 청구대학을 갈취할 이사회의 정족수를 채우게 된다. 이렇게 참여한 이사들이 주축이 되어 치러진 다음 이사회는 당연한 수순인 듯 청구대를 박정희에게 헌납해 버린 것이다. 다만 대구대학과 달리 박정희 측의 인사들은 이렇게 인수받은 학교에 대해 나중에 얼마간의 보수를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얽힌 비사 하나. 당시 이 일을 추진한 사람은 청구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던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1903∼1982) 선생이다. 그는 시조 시인이자 사학자로 한 때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단골로 작품이 오를 만큼 유명했고, 특히 충무공 연구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사를 썼는가 하면 ‘유신만이 살 길’이라는 정치선동적 글을 쓰는 등 박정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박정희 정권이 추진하는 정신문화사업에 간여하며 독재정권의 미화에 앞장선 인물이기도 하다. 청구대학 후손, 최염 선생께 함께 학교 되찾자 제안, 최염 선생은 ‘대구대학은 우리 할아버지 것 아니다’ 거절 ! 이 당시 청구대학의 재단이사장은 전기수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서문시장에서 장사해서 많은 돈을 번 사람인데 원래 교육기관의 내용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 전기수 씨와 최해청 선생의 동생인 최해태 씨, 그리고 바로 이 이은상 선생이 합작하여 학교를 청와대에 넘겼다.   그러나 전기수 씨는 학교를 청와대에 넘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원인도 모르게 죽어버렸다. 주변 사람들의 추측에 따르면 그는 학교를 청와대에 넘겨주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기로 약속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막상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수시로 청와대 정문에 가서 ‘약속을 지키라’며 난동을 부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뒤에 전기수씨의 아들이 최염 선생에게 찾아와 영남대학을 도로 찾자고 제안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염 선생은 ‘박정희 후예들이 대학을 맡아 전횡을 일삼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 대학을 도로 찾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욕심이 없다’는 말로 그 제안을 사양했다고 회고했다.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아와, 최해청 선생은 이 이사회의 결정이 설립자인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음을 밝히려고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고자 했으나 박정희는 끝내 최 선생을 만나 주지 않았다. 당시 이 일을 책임지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의 측근이 중앙정보부장 출신의 이후락인데 그 역시 최해청 선생과의 만남을 철저히 외면하고 차단해버렸다. 최해청 선생은 대구지역의 유지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서 박정희 소장이 군사정권을 장악하고 집권야욕을 가지고 있을 때는 최해청 선생에게 고개를 숙이는 척하면서 자문을 구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막상 학교를 헌납받을 욕심이 생기자 과거의 교분을 무시해버린 것이다. 학교가 박정희에게 넘어간 후 최해청 선생은 시민들의 서명을 받아 청와대에 ‘학교 반환진정서’를 내려고 했지만 중앙정보부 관계자들이 나서서 오히려 최 선생을 협박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뒤에 ‘한겨레 신문’은 사설을 통해 최해청 선생과 청구대학과의 관계, 그리고 영남대로의 합병과정을 보도하면서 ‘장물’이라는 표현을 썼다. 설립자의 피땀으로 이룩한 대학을 도둑질 하듯 설립자 몰래 박정희에게 바쳐 버렸으니 박정희는 ‘장물’을 헌상받은 꼴이고 그 내막을 밝히고자 했던 최해청 선생의 이야기를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으니 그 자신 장물아비가 된 셈이라는 논지였다. 이런 곡절 끝에 청구대학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에 대해 자세한 내막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뒤에 최해청 선생의 아들인 최찬식 씨가 최염 선생을 찾아와 함께 힘을 모아 잃어버린 대학을 찾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염 선생은 그 제안에 동의할 수 없었다. 최찬식 씨는 청구대학이 부친의 것이었다고 믿는 반면 최염 선생은 대구대학이 할아버지의 것이 아닌, 대구와 경북의 많은 독지가들의 소유라고 믿어서였다. 문파 선생은 학교를 위해 가장 많이 노력하시고 가장 많은 비용을 희사하신 분으로서 그 운영을 책임지신 분이지 학교를 소유한 분은 아니었기에 학교를 찾자는 제안에 찬성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문파 선생의 손자다운 발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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