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회장은 대학을 인수한 후 재단이사장에 취임하는 한편 모든 절차를 차곡차곡 밟아나갔다. 재단 이사에는 이병철 회장 자신과 둘째 아들인 이창희 씨를 비롯해 자신의 측근들로 구성된 일단의 사람들이 포진됐다. 물론 문파 선생의 요구대로 선생 역시 이사로 참여했고 그 역할은 최염 선생이 할아버지를 대신해 했다.   이 과정에서 이병철 회장은 끝내 문파 선생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해 작은 실수를 하나 범하게 된다. 당시 삼성에서 근무하다 대구대학 인수과정에서 상무이사로 참여하게 된 최찬영 상무란 이가 있었다. 이병철 회장과 동향으로 신임 받는 인물이었다. 그가 최염 선생을 찾아와 상의했다. 회장님께서 무슨 약정서라도 써놔야 한다고 믿으시는가 봅니다. 할아버님께 말씀을 좀 전해 주십시오! “최 선생, 아무래도 회장님께서 무슨 약정서라도 써놔야 한다고 믿으시는가 봅니다. 할아버님께 말씀을 좀 전해주십시오.” 최염 선생은 즉석에서 대답했다. “그런 것은 할아버지께 말씀드려 보나 마나입니다. 그런 말을 하면 오히려 이병철 회장님의 진의를 믿지 못하실 겁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드리지 않은 것이 오히려 낫습니다.” 사실이 그러했다. 약정서를 쓰자고 했다면 문파 선생으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평생을 신의 하나로 살아오신 문파 선생이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것을 내놓겠다는 선생에 반해 살얼음판 같은 기업을 이끌면서 모든 것을 문서로 처리해온 이병철 회장은 애초에 의식체계 자체가 다른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할아버지를 잘 아는 최염 선생은 단언하며 약정서에 대한 논의가 필요조차 없음을 역설했다. 그 완강함에 최찬영 상무는 더 이상 말도 못 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며칠이 되지 않아 다시 최염 선생을 찾아왔다. “아무리 그래도 회장님께서 문파 선생님께 무언가 성의라도 표해야겠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수고스럽겠지만 한 번만 문파 선생님께 여쭈어봐 주십시오.” 명령에 따르는 최 상무도 요지부동이었다. 어차피 위에서 오더가 내려왔으니 가부간 결정할 수 있게 도와 달라 말하며 문파 선생이 거절해도 좋으니 제발 말이나 전해 달라고 떼썼다. 그러나 최염 선생은 더 완강했다. 뻔한 걸 왜 묻느냐고 손을 저을 뿐이었다. 최 상무는 이번에도 긴 한숨을 쉬고는 돌아갔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후 이번에는 제일모직의 전무이사가 다시 최염 선생을 찾아와 어떤 대가를 주면 좋을지를 할아버지께 여쭈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세 번이나 사람을 바꾸어가면서 부탁했지만 할아버지 대답을 뻔히 아는데 그걸 전해드릴 수 없었지요. 결국 그분도 그냥 돌아갔어요!” 그러자 이번에는 숫제 제일모직 성상연 사장이 직접 최염 선생을 찾아와 똑같이 부탁했다. 최염 선생은 어쩔 수 없이 할아버지께 그 부탁을 전했다. “어허이, 염이 니가 도대체 우째 처신했기에 이런 말을 들고 오노?” 예상했던 대로 문파 선생이 준엄하게 나무랐다. 문파 선생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무언가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불벼락을 내실 줄 알았던 문파 선생은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그렇게 불안한 침묵으로 하루가 지났다. “염아, 니 이거 가지고 따라 나서라.” 문파 선생은 손자 앞에 아끼는 가보인 단계석 벼루를 꺼내 놓고 있었다. 단계석 벼루는 문자 그대로 중국에서 가장 질 좋기로 소문난 단계석으로 만들어진 벼루다. 위로 아름다운 문양이 아로새겨진 벼루는 최고의 장인이 만든 걸작이었다. 게다가 이 벼루는 일반 벼루보다 훨씬 커서 벼루 무게만 무려 5관(약 19Kg)이나 나가는 큰 벼루이기도 했다. 최부자댁에 전해져 내려오는 말로는 송나라 때 대문호이자 정치가인 소동파가 쓰던 벼루라는 말도 있었다.   벼루뿐만 아니라 그것을 담는 벼루집 역시 벼루와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수백 년이 지나면서 고풍스런 기품을 뿜어내는 보배로운 목함이었다. 이 벼루집은 오동나무로 만들어졌는데 나무를 통째로 켜서 속을 파내어 만든 것이 특징이었다. 귀한 벼루에 귀한 벼루집이었다. “할아버지의 의중을 모르는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 보자기를 가져와 소중하게 쌌지요. 나는 할아버지께서 어디 벼루 감정을 받으러 가시나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왜 그러시나 여쭈어 보지도 못한 채 할아버지 모시고 서울까지 들고 갔지요.” “삼성, 이병철이인테로 가자.” 특급 열차편으로 청량리역에 도착한 문파 선생은 곧바로 택시를 타고 서소문 삼성본관으로 달려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삼성 본관 사옥은 광화문에서 남대문으로 가는 태평로 오른편에 서 있었다. 삼성본관에 도착한 문파 선생은 본관 로비의 안내 데스크에 명함 한 장을 내놓고는 대뜸 이병철 회장을 만나러 왔으니 전하라고 했다. 형형한 눈빛의 노인이 다짜고짜 자기네 회장을 찾으니 데스크는 일순 긴장한 기색이 완연하며 분주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참만에 비서실에서 내려온 사람이 이병철 회장은 삼성본관에 있지 않으니 근처 중앙일보 사옥으로 모시겠다며 선생을 안내했다. 이병철 회장은 중앙일보 사옥 4층 어느 사무실에서 문파 선생과 최염 선생을 맞았다. 그게 회장실인지 아니면 별도의 집무실이나 응접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엄숙한 기운이 도는 잘 꾸며진 방이었다. “무슨 급한 일이 계셨기에 선생님께서 친히 이렇게 먼 길을 오셨습니까?” 이병철 회장의 공손한 물음에 문파 선생은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은 채 들고 간 보자기를 올려놓고 손수 풀어 헤쳤다. 보자기에서 큰 나무상자가 나왔고, 나무상자 속에서 고색찬연한 단계연이 나타나자 이병철 회장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자네, 골동품에 안목이 높다며?” 문파 선생이 묻자 이병철 회장이 ‘네’하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혹시, ‘온갖 골동품을 다 가지고 있어도 단계연 벼루가 없으면 현관 없는 집이다’ 카는 말을 들어 봤나?” 이병철 회장은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다시 ‘네’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잠깐 이거 한 번 살펴보게” 문파 선생이 단계연을 이병철 회장 앞으로 밀어주었다. 자네가 학교에 온갖 투자도 해야 하고 일도 많이 해야 할 낀데 선물은 오히려 내가 해야지 ! 골동품에 남다른 안목이 있던 이병철 회장은 특히 오래된 목가구나 목기에 대해서는 전문가 수준의 안목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벼루를 보던 이병철 회장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리기 시작했다. 이어 더 진중한 모습으로 나무상자를 살펴보았다. 역시 조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감탄하기도 했다. 한동안 벼루와 나무상자를 살펴보던 이병철 회장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선생님, 이 귀한 것들을 어찌 가져오셨는지요?” 조심스럽게 선생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선생은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어제 우리 손자를 통해 이 회장께서 내인테 무언가 선물을 주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었네. 그게 사실인가?” 선생의 물음에 이 회장이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선생이 답답하다는 듯 탁자를 몇 번 두드리시더니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아직도 내 뜻을 제대로 이해를 못했는갑네.” 이 회장이 ‘네?’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보라꼬, 내가 바라는 거는 오로지 이 회장이 학교를 제대로 운영해 주는 것밖에 없네. 그리고 이제부터 자네가 학교에 투자도 해야 하고 일도 많이 해야 할 낀데 선물은 오히려 그 무거운 짐을 떠안긴 내가 해야지 않겠나? 그래서 내가 이래 거꾸로 선물을 하나 가져온 기라” 최염 선생은 당시의 이병철 회장의 표정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고 회고했다. 그것은 선생의 말씀에 감동하거나 귀한 선물을 받은 사람이 기뻐서 짓는 표정이 결코 아니었다. 당혹감이라고 할까 아니면 거부할 수 없는 부담감이라고 할까. 의외의 선물에 이병철 회장은 무척 곤혹스러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고 한다. 어쩌면 이병철 회장은 문파 선생의 강렬한 뜻에 주눅 들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가벼운 마음으로 대구대학을 인수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렇게나 완고하고 투철한 문파 선생을 통해 이 대학을 사유재산처럼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마나 선생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손자를 향해 호령했다. “염아, 일 다 끝냈으니 우리는 도로 가자” 꿈을 꾸는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병철 회장을 뒤로하고 문파 선생은 총총걸음으로 중앙일보 사옥을 빠져 나왔다. 본관 로비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여름의 더운 기운이 훅하고 몰려왔다. 선생은 그 더위를 온몸으로 맞으면서 손자를 돌아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교육이라 하는 게 사고파는 게 아닌데…, 우리야 학교 잘 되기만 바라고 넘겨줬지만 이 회장은 평생 사업만 하던 사람이라 우리캉 뜻이 안 맞을 지도 모리겠다. 글치만 우야겠노, 기왕지사 학교를 넘겨주었으니 우야든동 잘 하라꼬 등을 두드려 줘야지...!” 상기된 문파 선생의 얼굴이 햇볕을 받아 붉게 보였다. 여름의 더운 날씨에 선생의 이마에는 금새 땀이 배어나고 있었고 이마의 주름이 더 깊어 보였다. 무더운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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