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하기 이를 데 없는 날씨였다. 멀리 남산 꼭대기에 서 있는 금오정이 훨씬 크게 보였고 집 뒤 가산(假山)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적당히 시원했다.
그날 특별한 손님이 오기로 한 최부자댁은 작은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문파 선생은 오랜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고 혹시라도 선생의 생각에 방해라도 될까 집안의 모든 사람이 말 소리를 죽이고 사랑채에는 아예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최염 선생도 매사에 조심하고 있었다.
오후 3시경, 활짝 열어놓은 대문 너머로 검은색 세단 승용차 2대가 도착했다. 곧이어 깡마르고 당차 보이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신사와 신현확 사장, 그리고 수행원들로 보이는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차에서 내렸다. 다소 젊은 사람도 한 명 있었는데 그는 이병철 회장의 둘째 아들 이창희 씨였다. 이창희 씨는 최염 선생의 대구 계성중학교 동기였다.
이병철 회장, 일제강점기, 20대부터 ‘삼성상회’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시작해 승승장구, 6·25 전쟁 후에는 삼성물산공사를 세워 무역업과 제조업을 키웠고 이후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으로 대기업의 틀을 닦은 인물이다. 그해 1964년에는 마침 한국비료를 세워 새로운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어디건 손만 대면 그 즉시 돈을 버는 기업가, 마이더스의 손을 가진 기업가 이병철 회장이 최부자댁에 온 것이다.
삼분산업으로 나빠진 기업 이미지를 바꾸고 싶었던 삼성 이병철 회장, 학교 세우려다 역풍 맞고 좌절
이병철 회장이 최부자댁을 찾은 것은 신혁확 씨의 중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현확 씨는 경북 칠곡이 고향이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가 경주군에서 공무생활을 했기에 경주에서 초등학교까지 다닌 인물이었다. 뒤에 상경하여 경성제국대학을 나와 일제강점기 어렵기로 소문난 고등문과시험에 합격하여 일본 정부부처 본청에 근무한 실력 있는 사람이다. 해방 후 대구대학교 교수로 잠시 재직하며 문파 선생과 인연을 쌓았으며 뒤에 공직에 투신하여 욱일승천, 이승만 정권에서 부흥부 장관을 지내며 우리나라 경제정책을 세우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독재정권 하의 장관직이란 독재의 비호세력일 수밖에 없어 4·19혁명 후 3·15 부정 선거와 연루되어 구속되었고 5·16쿠데타 때에는 ‘정치정화법’ 대상으로 분류되었다가 두 해 만에 해금되는 등 고난을 겪기도 했다.
이병철 회장이 신혁확 씨와 가깝게 된 것은 장관까지 지낸 경력으로 발이 넓었고 경제적 안목도 밝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신현확 씨는 당시 삼성의 계열사 사장을 지내며 이병철 회장을 위해 여러 가지 자문을 하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문파 선생이 세운 대구대학 인수에 관한 일이었다.
당시 이병철 회장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자신과 삼성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이 매우 나빠서였다. 당시 대학가에는 삼분산업(三粉産業)에 대한 비판이 극도로 고조되고 있었다. 삼분이란 세 가지 가루 즉, 설탕과 밀가루와 시멘트였다. 이 삼분 중 설탕과 밀가루는 가난한 국민에게 가장 필요한 기초적 생필품이었다.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인구에 비해 곡류의 생산이 상대적으로 모자랐던 시대 밀가루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었고 모든 음식에 소용되는 설탕 역시 현대 식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생필품이었다. 문제는 이걸 기업들이 독과점으로 운영하며 비싸게 팔아 막대한 이익을 남기는 것으로 알려지며 빈축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나 설탕과 밀가루는 완전한 소비재로서 2차적인 생산이나 산업발전과 무관하다고 해서 더 욕을 먹었다.
시멘트 역시 소비재 품목이긴 하지만 건설이나 토목사업에선 기간적 요체인데 이 역시 기업들이 독과점으로 장악하고 필요 이상 돈을 벌었으니 해당 기업들은 그야말로 국민의 고혈을 빨아먹는 장사치라는 것이었다. 설탕과 밀가루가 위주인 제일제당으로 막대한 돈을 번 삼성의 기업 이미지는 그중에서도 가장 나쁜 축에 속해 있어서 이병철 회장의 심기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를 간파한 신현확 씨가 이병철 회장에게 특별한 제안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대학설립안이었다.
“대학을 하나 만드시지요. 아직도 우리나라는 기초과학 분야가 열악하고 좋은 대학이 부족한 형편이니 제대로 된 대학을 설립하여 인재를 기른다면 기업 이미지도 좋아지고 국가 발전을 위해서도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교육사업은 돈을 버는 사업이 아니고 돈을 제대로 쓰는 사업입니다. 지금까지 나빴던 기업 이미지를 교육사업으로 개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뒤에 신현확 씨가 문파 선생에게 털어놓았던 말로 자신이 이병철 회장에게 했던 제안의 요지다. 신현확 씨의 제안에 이병철 회장도 귀가 솔깃했다. 그렇지 않아도 명색이 유가(儒家) 출신이라 자부하던 이병철 회장이었던 만큼 대학을 설립하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라 여겼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한수(漢水-한강)이남에서 가장 좋은 대학을 만들자!’
신현확 씨의 제안에 이병철 회장이 선뜻 동의했음은 물론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명문대학을 만들자고 두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삼성, 대학설립으로 국가 인재 양성!’
이병철의 뜻은 곧바로 방송과 언론을 통해 전국에 퍼져 나갔다. 메스컴들이 대거 이병철 회장의 계획을 보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방송 보도를 들으면서 이병철 회장과 신현확 씨는 이제 삼성의 기업 이미지가 바뀔 것이라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인심이란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보도가 나가기 시작하자 기대와 전혀 다른 엉뚱한 평가들이 봇물 터지듯 나오기 시작했다.
‘매판 자본 삼성이 이제는 대학까지 세워 돈을 벌려 한다!’
‘삼분산업으로 돈 번 삼성이 대학에까지 마수를 뻗친다’
이런 추측에 이어 대학생들이 삼성의 대학 설립안에 대해 대놓고 반대 데모를 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결국 이병철 회장은 여론의 뭇매를 맞은 끝에 대학설립 사업안을 전면 백지화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신현확 씨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떨어졌을 것이다.
“누구건 대구 대학을 대학답게 운영할 사람이 나타나면 아무런 조건 없이 대학을 넘겨주겠다.”
의외의 결과로 이병철 회장의 신임을 잃은 신현확 씨는 노심초사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이다. 이병철 회장에게 신뢰받는다는 것은 정부의 고위 관료가 되는 것보다 낫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차에 자신의 제안이 보기 좋게 어긋났으니 좌불안석이었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그러니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새로운 제안을 하여 다시 이병철 회장의 관심을 끌었다. 그게 바로 대구대학을 인수하는 것이었다.
마침 신현확 씨는 한때 대구대학의 이사로 등재되어 있었던 사람이라 문파 선생과 최염 선생도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 만큼 신현확 씨는 문파 선생의 사심 없는 교육관도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대구대학의 당시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학이 그러했던 것처럼 불법 입학과 불법 졸업증서 남발 등으로 돈을 번 다른 대학들과 달리 오로지 학생들의 등록금만으로 학교를 운영했던 대구대학은 해가 거듭될수록 경영난에 봉착하고 있었다. 그때쯤 문파 선생은 대부분의 재산을 학교에 희사한 터라 부자도 아니었고 더 이상 지원할 재원도 없는 상태여서 수시로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누구건 우리 대학을 대학답게 운영할 사람이 나타나면 아무런 조건 없이 대학을 넘겨주겠다”
신현확 씨는 문파 선생의 이런 확고부동한 신념이 진심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일찍이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희사한 어른이고 해방 후에는 어렵게 찾은 재산을 또다시 대구대학교 설립과 발전을 위해 내놓으신 선생이었다. 전쟁통에 그리고 전쟁이 끝난 어수선한 와중에 온갖 대학들이 부정입학과 부정졸업장을 남발하며 이른바 우골탑을 쌓을 때도 대구대학만큼은 추호도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새로 학교를 세우면 자금도 많이 들어가고 더구나 여론도 좋지 않은 터이니 차라리 적당한 대학을 인수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이병철 회장을 만난 신현확 씨는 대학 중에서 가장 인수하기 적합한 학교로 대구대학을 추천했다. 그 이유는 첫째로 독립운동에 전념하던 경주최부자가 해방 후 교육사업에 전재산을 내어 세운 학교였고, 둘째로 온갖 부정과 불법이 난무하던 대학들 중에서 유독 원칙을 지키는 학교로 알려져 있었고, 셋째로 재정 문제로 학교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제대로 된 적임자를 찾아오고 있다는 것 등이었다. 그중에서도 누구건 제대로 교육사업을 할 만한 사람이 나타나면 조건 없이 학교를 넘기겠다고 공언했던 문파선생의 신념이 어떤 조건보다 나은 것이라고 주장하며 대구대학 인수를 제안한 것이다.
‘대구대학을 인수해서 장학제도를 크게 늘이고 현대식 기숙사를 지어 학생들 전원을 기숙사 생활을 하게 하는 등 좋은 제도를 갖춘 다음 우수한 교수진을 대거 초빙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크고 좋은 학교가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회장님의 교육 이념이 그대로 드러날 것이고 결국 기업 이미지도 좋아질 것이다’
신현확 씨가 밝힌 설득 요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