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나무 그늘 (모로코, 탕헤르 가는 길)                                                        박승민     소 두 마리를 풀어놓고 소년은 올리브 나무 그늘 밑에서 폰을 만진다 소는 예전처럼 풀을 뜯지만 소년의 눈에는 뜨거운 하늘과 바다를 가르는 푸른 화물선과 소와 마주치던 눈길이 사라졌다 음악을 들으면서 소는 갈증을 느끼지만 잘 익은 올리브 열매는 액정에 담겨 있다 화면에 갇힌 소년은 구름 밖으로 나오지 않고 소는 바위틈으로 오후의 마른 혀를 자꾸 핥는다 듬성듬성 찢어진 올리브 그늘 사이로 소와 소년은 등을 돌린 채 골똘하다     폰, 생태적 감수성을 잃어버린 손바닥 안의 작은 문명   어딜 가나 손바닥 안의 작은 액정에 빠진 장면을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찻집에서 만난 친구와 연인들도 거기에 눈은 거기에 두고 대화를 한다. 기차와 버스 안, 찻집 어디서나 나와 너, 나와 주변 생명체의 관계를 이제 스마트폰, 손바닥 위의 조그만 불빛이 가로막고 있다. 그건 비단 우리나라 같은 IT 강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구 반대편 대서양의 아프리카 대륙 북서쪽 평온한 나라, 모로코의 한가한 풀밭에도 그 바람이 옮겨 불었다. ‘올리브 나무 그늘’, 생각만 해도 두근거리는 공간이다. 그러나 시인은 지브롤터 해협의 모로코 항구 탕헤르로 가는 길의 올리브 나무 언덕에서 기이한 풍경을 만난다. 소치기 소년과 소가 “등을 돌린” 모습을 말이다. 예전에 소년은 소가 풀을 뜯으면, “뜨거운 하늘과 바다를 가르는 푸른 화물선과/소와” 눈을 마주치며 그의 생명을 지탱해주는 뭇생명들이 그의 몸속에 드나들었던 자연의 핏톨을 가진 영혼이 아니었던가. 그렇다. 그는 소에게 풀을 뜯기면서 하늘과 바다, 거기에 떠 있는 화물선을 보다가, 또 그가 기르던 가축에게 초롱한 눈망울을 맞추었다. 나와 우주의 유기적 관계망 속에서 ‘먼 곳’에 대한 꿈을 키웠던 소년, 멀고 가까운 곳, 크고 작은 것 속의 일원이었던 소치기 소년. 그러던 그가 어느새 소와 등을 돌린 사이가 되었다.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노래를 들을 수 있고, 영상을 볼 수 있는 작은 “화면에 갇”혀 “구름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않는다. 소년의 폰에서 나온 “음악을 들으면” 들을수록 소는 ‘갈증’이라는 이름의 뿔이 잔뜩 돋아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소년은 “잘 익은 올리브 열매”를 액정에 담느라 정신이 없다. 그래도 소식이 없자, “바위틈으로 오후의 마른 혀를 자꾸 핥는” 짐승의 모습. 끝내 “올리브 그늘 사이로/소와 소년은 등을 돌린 채” 각기 제 할 일만 하느라 골똘하다. 무엇이 저 순한 소를 화나게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을 저 불빛 속에 빠지게 하는 부조화를 만들었는가? 손바닥 안의 작은 물체 하나로 소년은 이제 구름이며 하늘, 소, 나아가 만물 속에 담긴 신비를 잃어버리고, 온 우주를 돈벌이와 착취 수단으로 삼는 자본주의의 족속이 되어버렸다. 이런 현상은 지구 곳곳에 들불처럼 번져나갈 것이다. 생태적 감수성을 잃어버린 문명이 품격있게 재편될 날은 언제인가, 한 편의 시가 우리에게 묻는 화두이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