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이 열흘 지난 1964년 8월 25일, 대구대학이 정식으로 설립인가가 난 1947년 9월 이후 만 17년 만에 대구대학은 삼성 이병철 회장이 재단이사장에 취임하며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처음 이병철 회장은 학교에 대해 상당히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학교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병철 회장이 대구대학을 인수하고 재단이사장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과연 제대로 학교를 운영하는지에 대한 세간의 관심도 집중되었지만 그 자신이 처음 문파 선생에게 약속했듯이 ‘한수 이남에서 제일가는 대학교’로 제대로 키울 마음이 분명히 있어 보일 만큼 착실히 학교를 키워나갔던 것이다. 이 회장은 그간에 자금이 부족하여 미루어 두고 있던 시설을 보완하거나 학교 진입로 공사를 하는가 하면 교수진을 보강하고 장학제도를 늘리는 등 성의를 보여주었다. “이래 쭈욱 간다면야 학교를 넘겨준 보람이 나겠지러 !” 이사로 참여하며 재단 돌아가는 형편을 주시하던 문파선생은 처음에는 다소 안심하고 흡족해했다. 이미 충분한 재산을 가진 사람이니 학교를 돈벌이 수단으로는 생각지 않을 것이라 추측한 바가 얼추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의 대구대학 재단이사장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당대 최대의 재벌로 일어난 삼성조차도 제어할 수 없는 보다 막강한 권력의 검은 구름이 또다시 대구대학을 뒤덮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과 박정희의 3선 개헌, 이 두 가지가 대구대학의 향방을 미궁으로 빠뜨렸다. ‘사카린’이란 것이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사카린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를 것이다. 사카린은 새커린(saccharin)의 일본어식 표현 ‘サッカリン’을 우리말로 다시 옮긴 것이다. 사카린은 설탕보다 100배 이상 단맛을 내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무색 혹은 백색의 결정분말로 만들어진 화학첨가물이다. 얼마나 단맛이 강한지 어지간한 음식에는 1킬로그램당 0.1그램만 넣어도 될 만큼 단맛을 낸다. 지금은 설탕으로 단맛을 내는 것을 당연시하여 사카린을 사용하는 경우가 별로 없지만 70년대 이전만 해도 사카린은 음식이나 과자, 음료를 만드는 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화학첨가제였다. 또 하나 ‘3선 개헌’이란 것이 있다. 5·16 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대통령 권한 대행 등으로 2년 6개월간 국정을 이끈 박정희 대장은 1963년 창당된 민주공화당 총재로 추대되었고 그해 치러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후 6대까지 대통령을 지낸 박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실현하기 위해 이전의 연임 금지조항을 삭제하고 3선까지 연임할 수 있도록 만들고자 개헌을 시도했다. 이 개헌안의 요지는 3선 연임을 골자로 하고 대통령을 탄핵하는 과정을 어렵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탄핵안 상정을 위해서는 종전의 국회의원 30인 이상의 찬성이 필요했던 것을 50인으로 올렸고 탄핵안 가결은 종전의 의석 과반수 찬성에서 3분의 2 찬성으로 올리는 것 등이었다. 이 두 가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대구대학의 향방을 전혀 엉뚱한 곳으로 끌고 가버렸다. 도대체 사카린이 3선 개헌과 무슨 연관이 있고 또 대구대학과는 어떤 악연을 가졌던 것일까? 1967년 5월, 삼성이 사카린 55톤을 밀수한 사건이 검찰에 적발되어 온갖 신문들이 대서특필했다. 당시 삼성은 울산에 한국비료 공장을 짓고 있었는데 일본 미쓰이 물산으로부터 건설자재를 빙자하여 사카린을 밀수한 것이 발각된 것이다. 밀수품은 사카린뿐만 아니라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는 물론 사카린 원료와 변기통 같은, 건설 자재와는 전혀 무관한 품목들도 들어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사카린이 주목되어 이 사건이 ‘삼성의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알려진 것이다. 당초 삼성은 정부의 지급보증 아래 일본 미쓰이사로부터 4000만 달러의 차관을 건설자재형식으로 빌려 오기로 협의했는데 공식적인 건설자재에 비해 즉각적인 돈벌이가 되는 밀수에 더 치중하다 덜미를 잡힌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삼성은 큰 고비를 맞게 된다. 처음 삼성은 밀수 사건을 최소화하기 위해 울산 비료에 근무하던 직원 개인의 밀수로 사건을 축소하려 조작했다. 그러나 이 조작극은 기자들의 끈질긴 추적으로 한계에 부딪쳤고 결국은 삼성이 조직적으로 획책한 일로 드러나 일파만파 파장을 일으켰다. 이렇게 되자 삼성은 정부로부터 온갖 압력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이병철 회장 자신은 물론 삼성의 기업 이미지는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 여기까지는 일반이 아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뒤에 이병철 회장의 장남인 이맹희씨가 쓴 ‘묻어둔 이야기’라는 책으로 인해 또 다른 비화가 얽혀 있음이 드러난다. 내용인즉 이병철 회장의 밀수 사건은 박정희 전대통령의 용인 아래 진행된 바, 박정희 대통령은 삼성의 뒤를 봐주는 조건으로 정치자금을 마련하고자 하였고 삼성은 손쉬운 자금 마련을 위해 밀수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밀수와 관련된 일은 이맹희 씨 자신이 직접 지휘했다고 기술한 만큼 사실과 다르지는 않을 성싶다.   여하간 이 일로 삼성에 대한 질타와 비판이 비등해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철저히 사카린 밀수 사건의 전모를 밝혀낼 것을 지시했다. 이것은 사건이 더 이상 커지지 않게 하려는 박정희 대통령의 꼬리 자르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전면적인 수사가 실시되어 밀수와 관련한 삼성의 전모를 낱낱이 밝혀내는 듯한 ‘제스처’가 보이게 된다. 여기서 방금 ‘제스처’라고 한 것은 이유가 있다. 이 희대의 밀수사건을 구제받기 위해 삼성은 특단의 조치를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정부에는 ‘한국비료공장’을 기증하고 박정희 대통령 개인에게는 이병철 회장이 재단이사장으로 있던 대구대학을 넘겨주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일 역시 정부의 감독 아래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삼성으로부터 한국비료를 넘겨받은 정부는 이 사건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고 삼성에 면죄부를 주었다. 벌때처럼 들고 일어나 삼성을 질타하던 언론들도 막대한 자금이 투입된 한국비료를 헌납한다는 사실을 보도하며 이 사건을 더 이상 주목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사카린 밀수사건이 은폐되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할 경우를 대비 박정희는 대구 경북에 자신이 이름으로 대학을 가지고자 조치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이병철 회장은 왜 대구대학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넘겨주려 했을까? 예의 3선 개헌은 따지고 보면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먼저 개헌을 하려면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회의석수를 확보하는 것이 시급했다. 결국 그 일차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정부와 민주공화당은 온갖 비리를 다 저지른 끝에 1967년 6월에 치러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게 된다. 의결 정족수를 확보한 민주공화당은 즉시 3선 개헌안을 상정하고 1969년 9월 14일 국회별관에서 여당 국회의원 122명만 참석한 단독국회에서 ‘날치기로’ 개헌을 통과시키게 된다.   이로써 3선 연임을 중심으로 한 개헌안은 ‘대통령 탄핵안 상정을 위한 국회의원 의석수를 30명에서 50명으로 늘일 것’, ‘탄핵의결은 종래의 과반수 찬성에서 3분의 2찬성으로 늘일 것’ 등 탄핵 자체를 어렵게 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박정희 대통령의 뜻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개헌을 하고 나서 또다시 대통령 선거를 치러야 하는데 군사정권에 대한 국민의 여론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박정희 대통령에 있어 국희의원 선거가 전초전이었다면 본선은 자신이 치러야 할 대통령 선거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박정희는 1971년 4월에 치르진 선거에서 야당의 윤보선 후보를 15만 표 차이로 겨우 누르고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러나 만의 하나라도 대통령 선거에서 패하게 될 경우,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노후를 보장받을 만한 또 다른 장치가 필요했다. 그게 바로 고향인 대구·경북 어름에 대학을 건립하고 스스로 재단이사장이 되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이 맡아서 진행하게 되는데 이후락은 아무리 따져 봐도 대학을 새로 만드는 것보다는 기존의 대학을 인수하는 것이 훨씬 쉬울 것으로 여겼고 이에 적당한 대학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청구대학 재단 이사들이 모종의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학교를 들어 청와대에 헌납하는 일이 생겼다. 이후락 등 박정희 측근들은 이 요청이 있자마자 일사천리로 학교 인수를 진행하여 청구대학 설립자인 최해청 선생이 채 제동을 걸기도 전에 학교 등기이전을 완료해버렸다. 그러나 청구대학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박정희 일당에게 뜻밖에도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졌고 이병철 회장이 스스로 학교를 들어 바치는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대구대학의 역사는 이로써 문파 선생이 예측한 것과 다른,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대학 창립사에서 가장 훌륭하고 눈부셨던 대구대학이 미증유의 회오리 속으로 말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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