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구대학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넘어가는 그 와중에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게 된 것은 어쩌면 우연을 넘어선 것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그 죄과를 씻기 위한 방법으로 삼성 차원에서는 한국비료공장을 정부에 기증하고 이병철 회장 개인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구대학을 헌납하는 모종의 시나리오가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삼성 이병철 회장에게는 전혀 손해될 일이 없는 또 하나의 거래가 있었다. 그것은 성균관대학을 이병철 회장이 물려받는 것이었다. 이것은 오히려 특혜였다.
성균관대학교는 이름에서부터 그 연원을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이후 우리나라 유생들이 들어가는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인재들이 더 깊은 학문을 익히고 대과를 준비하던 곳이 바로 성균관이다. 이 성균관이 1895년 3년제의 근대적 고전대학으로 바뀌었다가 경술국치 이후인 1911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경학원, 명륜전문학원, 명륜연성소, 명륜전문학교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43년 일제에 의해 폐교된다.
그러다 1946년 9월, 독립운동가이자 유림의 대표로 사회활동을 하던 김창숙(金昌淑, 1879~1962) 선생에 의해 근대 단과대학으로 재탄생하여 동양철학과를 중심으로 문학부와 정경학부를 개설하고 현대적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1953년에는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다가 같은 해 각 도의 향교 재산을 성균관에 거출하면서 성균관대학이 ‘성균관’에 통합되었고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뒤인 1963년에는 정부 산하기관으로 독립하게 된다.
다시 말해 당시 성균관대학은 탄탄한 경제적 기반과 국가의 관리 아래 안정적으로 운영되던 국립대학이었고 성균관의 오랜 전통과 상징성, 명성을 물려받은 최고 수준의 대학교였다. 여기에 인지도와 학생 보유수 등 지방의 대구대학보다 훨씬 좋은 대학이었다. 이 대학을 굳이 사유화시켜 이병철 회장에게 넘긴 것은 누가 봐도 분명한 특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병철 회장의 입장에서는 대학 인수 자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대규모 밀수라는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특혜가 주어진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아이러니였다.
이병철 회장은 문파 선생으로부터 대학을 대학답게 육성하겠다는 약속 한마디로 일 원 한 푼 내지 않고 대구대학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그 뜻이 채 식기도 전에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자신은 눈곱만큼의 공만 들인 대학을 독재자 박정희에게 헌납해버리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썼다. 더구나 그 자신 성균관대학이라는 더 좋은 대학을 선물로 받으면서 꾸민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닥쳐왔다. “이병철이를 불러오너라. 이 자리서 내가 그놈 낯짝을 좀 봐야겠다!!”
1967년 12월 15일 반도호텔 924-B호, 문파 선생의 고함이 창백하게 울리고 있었다. 선생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다 못해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당시 이 장면을 함께 지켜 보았던 최염 선생의 얼굴도 그 당시를 회상하며 검붉게 물들었다. “할아버지가 어찌나 역증을 내시는지 나는 할아버지가 혹시라도 기함하시기라도 할까 봐 할아버지를 꽉 붙들어 부축하고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이병철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셨지만 결국 이병철 회장은 나타나지 않았지요!” 청와대가 멀리 바라보이는 반도호텔 924B호에서는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을 통합하는 이사회가 열렸다. 최염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청구대학 측 인사로 박정희 권력의 실세들인 이후락, 김성곤, 이동녕, 신기석, 이효상 등이 참석했고 대구대학 측에서는 성상현 사장과 신현확 사장을 비롯한 이사진들이 참석했다. 문파 선생 역시 이사의 한 사람으로 참석했지만 처음부터 대구대학설립자인 문파 선생의 의중을 들어보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청구대학설립자인 최해청 선생은 처음부터 보이지 않았다. 대신 문교부에서 파견된 법무관이 배석했다. 그가 일일이 학교 합병 절차를 점검하면서 회의가 진행되었다. 다시 최염 선생의 회고!
“이날 합병은 사립대학의 이사회이므로 문교부에서 간여할 사항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문교부에서 법무관이 파견되어 이사회에서 오케이 사인을 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지요. 여하간 합병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나갔어요.”
이 광경을 지며보시던 문파 선생은 매순간마다 부당함을 주장하며 빨리 이병철을 불러오라고만 고함쳤다. 얼마나 핏대를 올리며 소리쳤는지 최염 선생이 노심초사 오히려 할아버지를 달랠 지경이었다. 그리고 문파 선생의 반대의견을 분명히 밝힌 것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문파 선생이 빠진 회의는 ‘만장일치’라는 허위 의결로 두 대학을 합병한다고 결의했다.
그렇게 회의실을 빠져나온 문파 선생은 그길로 곧장 이병철 회장을 만나겠다며 삼성본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삼성본관에 도착해 다짜고짜 이병철 회장을 만나시겠다며 회장실로 들어가려고 하셨다. 그러자 비서진들이 이병철 회장은 출타 중이라는 답변 뿐 한참 후 성상현 사장과 신현확 사장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신현확 사장이 간곡한 어조로 문파 선생을 붙들고 매달리며 ‘이병철 회장을 만나기 전에는 꼼짝도 하지 않겠다’는 문파 선생을 달래 지금의 정동교회 근처에 있던 자신의 사무실로 선생을 안내했다. 성상현 사장도 함께 신현확 사장의 사무실로 따라왔다.
자신의 사무실에 도착한 신현확 사장은 우선은 문파 선생께 차부터 권해드리고는 달리 말을 나눌 새도 없이 문파 선생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돌발적인 신현확 사장의 모습에 선생의 눈이 가볍게 떨렸다.
“자네, 이게 무진 일이고?”
꿇어앉은 신현확 사장이 고개를 깊이 숙여 보였다가 겨우 다시 쳐들며 힘겨운 듯 말했다.
“참봉 어른, 고마 화를 푸시고 저희들이 하는 대로 한 번 맡겨봐 주시소”
선생의 눈꼬리가 더 무섭게 올라갔다.
“자네, 지금 머라 캤노? 머를 맡게 달라는 거고?”
선생의 노한 음성이 사무실을 낮게 울렸다.
“참봉어른이 늘 말씀하셨다 아입니까? 누구든지 학교를 키우고 발전시키기만 하믄 댄다꼬요? 학교를 키우는데 이가보다 박가가 더 잘 할지 어찌 압니까?”
그러나 그 말은 오히려 선생을 들쑤시는 말과 같았다. 선생의 노한 음성이 사무실 안을 울려 퍼졌다.
“말이 말 같아야지!!”
다시 머리를 조아리는 신현확 사장에게로 선생의 노한 지팡이가 무서운 기세로 쳐들렸다.
“에잇!!”
“…”
신현확 사장은 선생의 지팡이를 피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팡이는 끝내 신현확 사장을 내려치지 못한 채 기운을 잃고 떨어졌다. 대신 선생의 힘 잃은 지팡이로 몇 차례나 신현확 사장의 책상머리를 두드렸다.
“그 판단을 와 너거가 하노? 이병철이는 돈 한 푼 내지 않고 학교를 물려받았지. 지가 학교를 지대로 운영 못 하면 사정을 이야기하고 도로 내놓아야지. 나는 지안테 일을 잘 하라꼬 단계연 벼루까지 주지 않았던가”
“…”
“내가 이런 꼴을 볼라꼬 자네의 말을 들었던 거가? 내가 이런 꼴을 볼라고 자네 말을 그리 믿었더냐꼬…!”
선생의 외침이 검붉은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렇듯 두 대학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설립자들의 의중은 완전히 무시된 채 합동이사회를 열고 강제적 합병을 단행하게 된다.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이 다른 점이 있다면 대구대학은 설립자인 문파선생이 이병철 회장에게 직접 학교를 넘긴 다음 그것을 이병철 회장이 문파 선생의 의견을 구하지 않고 학교를 넘겼다는 것이고, 청구대학은 재단 이사들이 설립자 몰래 학교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넘긴 것이다. 어쨌거나 큰 뜻을 가지고 학교를 세운 두 분 설립자의 꿈은 독재자의 서슬에 제대로 저항조차 못 한 채 무너졌다.
이튿날 신문에 발표된 이사진 명단에는 예의 박정희 측근 인사들과 함께 문파 선생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이병철 회장은 ‘위임’이라는 형식으로 그 자리를 피했다. 선생은 결단코 그 의결에 동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이 이사진 명단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다. 선생의 이름이 이사진 명단에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선생의 이름을 함께 기재함으로써 그 합병의 대외적 명분과 정당성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였을 뿐이었다. 문파 선생이 자신의 전 재산은 물론 자신의 명의로 된 가문의 전 재산까지 희사해 만든 대구대학이 창립 20년 만에 선생의 뜻과 상관없이 허무하게 그 이름을 내리고 말았다.
그 이후로 문파 선생과 이병철 회장의 인연도 끝났다.
이런 억압 속에 발족한 영남대학은 그 뒤로도 문파 선생이나 최염 선생에게 이사회에 참석하라는 연락도 없었고 그나마 몇 년이 지난 후에는 문파 선생의 이름을 이사진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역시 선생께 일언반구 상의나 동의를 구하지도 않은 채였다.
“할아버지는 가끔, 이병철 회장이 생각보다 배포가 작다고 혀를 차면서 사람을 잘못 보신 당신의 지혜롭지 못함을 자책하셨어요. 적어도 이병철 회장이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고 사과라도 했다면 할아버지의 울분과 원망이 그처럼 깊지 않았을 겁니다.”
최염 선생은 그래도 할아버지께서 박정희 대통령이 영남대학을 제대로 대학답게 잘 꾸려 주기를 진심으로 바랐다고 회고한다. 대학은 빼앗겼지만 올바른 발전의 희망은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