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름날 신선이 노닐었던 신유림 낭산을 오르며 지난 역사의 이야기를 듣는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의하면 실성니사금 12년(413) 8월에 “구름이 낭산(狼山)에 일어 바라보니 누각 같고, 향기가 자욱하여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았다. 실성왕이 ‘이는 필시 선령(仙靈)이 내려와서 노니는 것이니, 응당 이곳은 신선들이 사는 복지(福地)다’라 하였고, 이후부터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 없애는 것을 금지하였다”라 하였고, 『여지승람』에 낭산은 경주부 동쪽 9리에 있고, 진산(鎭山)이라 기록한다.
‘복지’는 신선들이 사는 곳 그리고 ‘선령’은 세속을 떠나 산속에서 불로불사의 기술을 닦고 신통력을 얻은 사람을 말한다. 『동사강목』에는 선령(僊靈)으로 표기되고, 모두 신선을 칭하는 말이니, 신라 때 도교의 입장과 통하는 신선이 등장하는 신비의 장소가 선령강유(仙靈降遊)하는 낭산이었다.
이에 대해 안정복(安鼎福,1712~1791)은 “산천의 기운이 오르면 구름이 되는데 수레의 일산 같기도 하고, 누대 같기도 하고, 옷과 같고, 개와 같기도 하여 그 형상이 천만 가지가 된다. 뭉쳐 모여 이것저것의 물건 형체를 이루는 것이 모두 기운이 그렇게 되는 것인데, 신라왕은 이것을 길조로 여기어 선령이 내려와 노는 것이라 하였으니, 진실로 그의 말과 같다면 낭산은 왕도와 가까운 곳에 있어 인물이 번잡하고 시끄러운 곳인데 어찌 신선이 내려와 노니는 곳이 되었겠는가! 하물며 이러한 이치가 없으니 왕의 어리석음이 너무나 심하다. 이 시기에 동국의 풍속은 거칠고 촌스러워서 불교를 받든 뒤에는 허망한 말이 이르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이는 성인의 도가 행해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이치를 밝혀 봄이 분명하지 못한 까닭이다. 슬프도다!”라고, 유학자의 입장에서 평범한 구름의 형상을 보고 상서로운 징조로 여긴 신라왕의 어리석음을 비판하였다.
『삼국유사』에는 명랑(明朗)법사가 당나라 군사를 물리치기 위해 낭산의 남쪽 신유림(神遊林)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울 것을 건의하고, 문두루법을 설하였다. 신이 노니는 숲에 과연 신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삼국사기』에 의하면 679년 이곳 신유림에 사천왕사가 건립되었다.
낭산 일대에 선덕여왕릉, 능지, 진평왕릉, 신문왕릉 등 왕릉으로 추정되는 곳이 있고, 선덕여왕의 무덤과 관련된 도리천과 사천왕사지, 문무왕 때 창건된 중생사와 마애불, 황복사지 그리고 낭산 서쪽 기슭에 최치원의 독서당과 우물이 아직도 남아있다.
게다가 거문고 명인 백결선생은 『삼국사기』에 어느 때 사람인지 모르고 낭산 아래에 살았다고 전한다. 영해박씨 족보에 의하면 신라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아들인 박문량(朴文良)으로 소개된다. 이처럼 낭산에는 신라의 다양한 문화가 산재해있다.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1664~1732)는 「동도잡록(東都雜錄)」에서 “낭산의 산세는 북쪽에서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서쪽으로 이어졌다. 남쪽은 가려있고 동쪽은 빙 둘렀고, 그 북쪽으로 통하므로 여러 물줄기는 도리어 서북쪽으로 흐른다. 그 땅이 동쪽 모퉁이에 치우쳐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이곳이 천년이 지나도록 삼한을 통치하였던가? 오직 낭산ㆍ토함산ㆍ함월산 등 여러 산이 동해의 한쪽 면을 막았으니, 이곳은 지세가 모여듦이 조밀하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신라의 지리적 방위의 중요성에 대해 낭산을 언급한다.
경주부윤을 지낸 강한(江漢) 황경원(黃景源,1709~1787)은 조정의 보고에 무열왕이 영토를 통일한 업적과 국가를 안정시킨 일을 내세운 적이 있었다. 당시 한무제가 설치한 사군(四郡)의 땅이 셋으로 분열되고, 백제 사비(泗沘)의 병사가 아침에는 임관(臨關:경주의 옛 이름)을 침범하고, 고구려 왕험(王險)의 병사가 저녁에는 낭산(狼山)을 습격하였으니, 칠백 년 동안 전쟁의 북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무열왕이 당을 진정시키고, 영토를 통일한 업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때 경주를 남산이 아닌 낭산으로 표현하였다.
낭산이 주는 의미가 산의 상징성을 들여다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신라의 진산인 낭산은 동해 왜구를 막는 방어의 공간으로 인식되고, 신선이 노닐고 왕의 정령이 머무는 신성한 장소로 여겼다. 불교의 흥함과 신비한 비법을 간직한 낭산의 여러 사찰에 명랑·월명 등 고승이 머물렀고, 죽어서 신선이 된 최치원이 수학한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