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가 2025년 노인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사업 참여자를 모집한다. 모집기간은 9일부터 13일까지로, 총 4420명을 모집한다. 시는 내년 사업비로 187억4800만원을 투입해 올해 보다 184명 증가한 인원을 모집한다. 노인일자리는 △노인공익활동사업 3500명 △노인역량활용사업 610명 △공동체사업단 310명 등 3개 유형별..
우리광고사 박성범 대표가 어려운 이웃을 위해 또다시 기부했다.
규방공예의 매력에 빠지다 규방공예의 매력은 손끝에서 시작되는 일련의 섬세한 과정 속에 있다. 한 땀 한 땀 이어지는 느리고도 정교한 작업은 서로 어우러질 듯 어우러지지 않는 오묘한 색채의 조화로 각 작품에 고유의 옛스러움을 부여한다. 천의 특성에 따라 표현 방식이 달라지는 과정은 끊임없는 고민을 동반한다. 이로 인해 탄생한 작품들은 우리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그 조화로운 어우러짐이 실로 경이롭다. 과거와 현재, 동서양의 경계를 초월해 어떠한 어색함 없이 품격있는 인테리어로 완성되는 모습은 매력적이다. 소품 하나하나에 출산, 건강, 평화, 부귀영화 등 인생의 소중한 염원을 담아내며,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완성된다. 그래서 그 가치는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규방칠우에 어떠한 도구도 빠짐없이 포함돼야 하듯, 내 인생에서도 규방칠우가 오랜 시간 함께하길 간절히 소망한다. 조미경 작가 / 인스타그램@jomigyeong794 2024년 제45회 신라미술대전 특별상, 경주G-ART MARKET 참가, 갤러리미지 공예작가전 2023년 쌈지사랑 규방공예 예다미연구회 회원전, 제17회 쌈지사랑규방공예연구소 정기회원전, Art Festival : 부산해성아트베이
대규모 주거단지가 들어선 용강공단 내 입주기업들의 관외 유출 방지를 위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경희 의원은 지난달 28일 5분 자유발언에서 용강공단 내에 주거지역이 점차 확대됨에 따라 현재 운영 중인 기업의 관외 유출을 막기 위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의원에 따르면 용강공단은 1967년 공업지역 결정 후 많은 기업들이 입주하기 시작했고, 1988년 공업용지 조성사업을 통해 기반시설이 조성됐다. 현재 약 76만㎡ 부지에 32개 기업이 등록해 운영하고 있고, 3000여명의 근로자가 고용돼있다. 공단 내 건축물 중 51.2%가 공장시설로 가동 중이며, 20년 이상 운영한 기업은 21개로 전체의 65% 수준이다. 하지만 용강공단 인근에는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조성돼 이미 거주하고 있고, 특히 공단 내에는 608세대와 137세대의 아파트가 신축 중이다. 문제는 아파트 입주가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공장 소음과 악취, 교통혼잡 등 각종 민원 발생이 우려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향후 입주 완료 후에는 기업과 입주민 간 갈등으로 번진다면 기업에는 부담으로 작용해 공장 이전까지 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용강공단 내에는 공장에서 발생하는 악취가 존재하고 있어 주민과 기업 간 갈등을 초래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보인다. 이 의원의 발언대로 경주시가 공단 내 기업과 입주민 간 갈등을 조율하고, 주거시설과 공장시설의 공존을 위한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또 공단 내 기업의 관내 이전에 대한 대책도 세워야 한다. 갈등을 유발한 소지가 있는 만큼 지금부터라도 지혜를 모아 기업과 주민이 상생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경주지역에 산재한 비지정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보전·관리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될 예정이다. 경주시의회 오상도 의원을 비롯한 16명의 의원이 공동 발의한 ‘경주시 향토문화유산 보전 조례안’이 지난달 29일 문화도시위원회 심의에서 통과했다. 이 조례안은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오는 12일 열리는 제287회 제2차 정례회 제2차 본회의에서 최종 의결된다. 조례안은 국가 또는 도 지정문화유산 이외에 선대로부터 전해 내려와 보전가치가 인정되는 향토문화유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함으로써 향토문화의 발전에 기여하자는 것이 주요 골자다. 향토문화유산의 범위는 지정 문화유산을 제외하고 경주시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유형문화유산, 기념물, 민속자료 등으로 정했다. 향토문화유산의 지정 및 해제, 관리, 지원 등에 관한 사항을 심의하는 ‘경주시 향토문화유산위원회’도 구성하도록 했다. 조례가 제정되면 위원회를 구성한 뒤, 향토문화유산을 소유한 사람이나 단체 등이 지정 신청을 하게 되면 심의를 거쳐 최종 지정하게 된다.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 일단 소유자·보유자 또는 관리자가 보전 경비를 부담하되, 지원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필요경비의 70%를 지원할 수 있도록 지원 규정도 마련했다. 경주지역에는 지난 1월 기준 국보 등 국가지정문화유산 245건, 도지정문화유산 141건 등 총 368건의 지정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 지정문화유산은 국가나 경북도, 경주시의 관리 아래 제대로 관리되고 있다. 하지만 비지정문화유산은 보전을 위한 지원 근거인 조례가 없어 일부 가치 있는 유산들이 훼손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이다. 본보는 지난해 말부터 연중기획 ‘효자·열녀비’를 통해 일부 비각들의 훼손 위기 상황을 보도했다. 이어 지난 6월 열린 경주시의회 행정사무감사에서 비지정문화유산에 대한 관리부실과 관련한 지적이 나왔다. 그리고 이번 제2차 정례회에서 의원 발의로 ‘경주시 향토문화유산 보전 조례안’이 상정돼 조례 제정을 눈앞에 두고 있다. 경주에는 비지정문화유산이 파악조차 어려울 만큼 산재해 있다. 개인이 관리하고 있거나 그 가치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문화유산도 상당수일 것으로 추정된다. 조례 제정 이후 ‘경주시 향토문화유산위원회’를 구성해 가치 있는 유산 가운데서도 훼손 정도가 심각한 문화유산에 대한 보존 조치를 서둘러야 한다. 그리고 향후 그 가치를 인정받아 지정 문화유산으로 승격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문화재는 한 번 훼손되면 원형을 되찾을 수 없다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국내에서 보도자료는 정부나 기업이 언론을 대상으로 뿌리는 자료입니다. 기자들은 전달받은 내용을 토대로 본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다시 작성하기도 하고, 궁금한 내용이 있으면 홍보담당자에게 묻기도 합니다. 기업의 홍보팀은 보도자료를 기자들이 가공하기 쉽게 써야 하며, 육하원칙을 바탕으로 작성되어야 한다며 나름대로 사실 그대로의 객관성을 중시합니다. 그러다 보니 기자들의 입맛에 맞게 잘 쓴 보도자료는 별도의 수정 없이 배포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언론사가 기업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받아 쓰면 상업광고가 됩니다. 실제로 독일의 한 회사가 자사의 기부 캠페인을 홍보하기 위해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뿌렸습니다. 보도자료에는 회사 대표와 지역 정치인의 발언들이 인용되었고, 한 지역신문은 이 자료를 거의 그대로 기사화했습니다. 그러자 이 회사의 경쟁사가 이를 부정경쟁방지법 위반으로 소송을 걸었습니다. 이에 프랑크푸르트 고등법원은 해당 기사가 위법한 상업광고라고 판단했습니다. 기사는 해당 기업을 긍정적으로 묘사했고, 기업의 보도자료가 거의 그대로 사용되었으며, 결과적으로 관련 기사는 기업의 상업적 목적에 이용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보도자료에 나온 인용문은 마치 기자가 직접 취재하고 인터뷰한 것으로 독자를 오도한다고 법원은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방식의 보도는 언론자유의 보호 범위에 속하지 않으며, 언론사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언론자유의 보호 범위는 오히려 줄어든다고 판시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법원은 언론사가 광고비를 받지 않고 보도자료를 기사화했어도 이는 상업광고라고 판단합니다. 왜냐하면, 핵심은 언론사가 광고비를 받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도자료를 취재 없이 기사화하는 것 자체가 언론사의 저널리즘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이윤을 위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언론사는 이와 같은 보도자료를 광고란에 게재하던가 아니면 이 자료가 광고라고 알려야 합니다. 기업은 광고주로서 언론 기사와 광고를 명확히 구분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고, 이를 어기면 부정경쟁방지법 위반이 됩니다. 언론사는 보도자료와 취재 기사를 명확히 구분할 책임과 의무가 있고, 이를 위반하면 언론의 자유를 스스로 짓밟는 자해가 됩니다. 물론 독일의 관행이나 법률적 규정을 우리 것과 직접 비교할 수 없습니다. 나라마다 보도기사를 사용하는 방식 인식의 잣대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일 언론과 기업이 보도자료를 광고와 구분하고, 법원이 위반행위의 경계를 분명히 규정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언론사도 기업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자신들만의 원칙이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언론사는 비판적 저널리즘을 하기 위해서 돈이 있어야 가능한 구조적 딜레마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언론사가 저널리즘의 가치와 이윤 사이에서 합리적인 균형점을 찾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특히 요즘같이 AI 기술이 보편화된 시대에 이와 같은 구조적 딜레마는 더욱 두드러집니다. 왜냐하면, 디지털 공간에서 남의 도움을 받으면 현장 취재 없이도 단숨에 원하는 기사를 작성, 편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자의 역할이나 비판적 저널리즘의 활동이 무엇인지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합니다. 언론사가 베껴 쓰기나 보도자료에 크게 의존할지, 아니면 저널리즘의 가치를 구현할지 원칙과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경주는 신라 천 년의 수도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도시다. 신라의 건국 원칙이자 정치적 협력의 모델이 된 화백정신, 삼국 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도 정신, 조선 후기 최부자 가문의 윤리적 자본주의, 19세기 동학의 평등사상은 모두 경주가 시대적 요구를 수용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온 도시임을 보여준다. 화백정신은 전원 합의를 끌어냄으로써 잡음을 없애는 정치수단으로 신라가 정책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화랑도 정신은 개인의 수양과 공동체를 위한 헌신을 통해 강력한 리더십과 조화를 강조하며 국가적 목표 실현에 기여했다. 특히 우리나라 산업화를 이끌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경주의 화랑도 정신을 차용하여 개인과 국가가 하나로 융합되는 리더십을 강조하며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추진한 경험이 있다. 조선 후기 최부자 가문은 부의 축적을 공동체 이익으로 연결하며 윤리적 자본주의의 모범을 보였고,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을 통해 평등과 공존의 철학을 설파했다. 현대에 이르러 경주는 민주주의와 노동 운동, 생태 평화를 중심으로 새로운 진보적 가치를 창출했다. 유시민은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를 위한 목소리를 내며 지식인의 책임을 강조했고, 단병호는 노동자 권익과 평등을 위해 헌신하며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법륜 스님은 생태적 평화와 사회적 조화를 실천하며, 현대 문제 해결을 위한 철학적 통찰을 제공했다. 경주의 화백정신은 미국 매사추세츠의 월든 호수에서 시작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생태 철학과도 통한다. 소로는 월든 호숫가에서 단순하고 자발적인 삶을 실천하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성찰했다. 그의 철학은 환경 보존, 사회적 책임, 그리고 개인적 윤리적 실천을 강조하며 현대 생태 사상의 근간이 되었다. 화백정신은 이와 같은 소로의 사상을 지역적이면서도 세계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철학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과 생태적 전환을 위한 기반을 제공한다. 내년에 개최될 APEC 2025 정상회의는 경주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탄소중립과 환경 문제 해결을 논의하는 중심지로 자리 잡을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회의 장소인 화백컨벤션센터는 신라의 화백정신을 상징하며, 이해관계자 간의 협력과 조화를 통해 글로벌 비전을 구체화하기에 적합한 공간이다. 컨벤션센터가 위치한 보문호수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상징하며, 지속 가능한 발전 모델을 논의할 최적의 장소다. 신라의 첨성대가 하늘의 움직임을 읽어 미래를 설계했던 것처럼, 화백컨벤션센터는 협력과 합의를 통해 탄소중립과 생태적 전환을 위한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 경주의 생태 가치는 농업과 관광의 융합을 통해 더욱 확장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경주 곳곳에서 추진 중인 선진 농업 기술을 활용한 친환경 체험 농장과 지역의 자연 생태를 기반으로 한 자연 복원 프로젝트는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지속 가능한 관광과 경주의 맛을 전파하는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관광객들에게 자연과 문화가 결합된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며,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다. 또한, 경주의 전통문화와 현대 기술을 융합한 미디어아트와 문화 축제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며 관광의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 수 있다. 예를 들어, 유적지를 활용한 야간 디지털 전시나 지역 예술가들과 협력한 인터랙티브 전시는 경주의 유산을 새롭게 조명하고 세계 관광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신라정신을 바탕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지속 가능성과 협력을 위한 비전을 담는다면 경주의 신라정신이 환경 보호, 사회적 책임, 경제 성장을 통합적으로 고려하며, 경주를 세계적 협력과 번영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할 것이다. 경주는 신라의 여러 이야기들과 화백정신과 보문관광단지를 매개로 전통과 현대, 지역과 세계를 연결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하고 있다. 과거의 유산을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과 생태적 전환을 제안하는 글로벌 도시로, 경주는 글로벌 정신적 지주로 도약할 준비를 하고 있다. 세계적 정상들이 참여하는 글로벌 국제회의나 다른 회의를 통한 신라정신의 현대적 해석과 생태적 가치의 전파를 통한 글로벌 도약은 경주가 세계적 중심지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사서(史書)에는 첨성대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첨성대의 축조 시기를 밝힌 가장 오래된 기록인 『삼국유사』 ‘선덕여왕지기삼사조’에는 ‘선덕여왕 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만들었다[鍊石築瞻星臺]’고 하였다. 또, 「왕력(王曆)」에 제17대 내물마립간릉 위치와 관련하여 점성대(占星臺)라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 권12 지리지에 있는 동경유수에 관한 기록에도 첨성대가 있으며 ‘신라선덕여주(善德女主)가 쌓은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권 150 경주부에는 선덕여왕 2년(633년)이라는 축조 시기와 함께 첨성대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첨성대는 경주부 남쪽 월남리(月南里)에 있다. 633년(선덕왕 2년)에 선덕여주가 쌓은 것이다. 돌을 다듬어서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글다. 높이는 19척 5촌, 위의 둘레는 21척 6촌, 아래 둘레는 85척 7촌으로 속이 통해 있어서 사람이 그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 이후의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경잡기』에는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데 그 말미에 “이곳에서 천문을 관측한다.”고 덧붙였다.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신라 선덕여왕 16년(647년)에 첨성대를 만들었다. 돌을 다듬어 대를 쌓은 것인데 위는 네모나고 아래는 둥글고 높이는 19척이다. 그 속이 통해 있어 사람이 그곳을 오르내리며 천문을 관측한다. 경주부 동남 3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 시기는 647년은 진덕여왕 원년에 해당하며 『세종실록지리지』의 633년과 차이가 있다. 이상에서 축조연대를 633년, 647년으로 달리 기록하고 있으나 선덕여왕 때 축조되었고 천문을 관측한 곳이 분명하다. 『삼국사기』 분석 결과로 천문대가 확실하다. 한국천문연구원 김봉규 박사는 “신라시대 축조된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첨성대가 상징적인 건물이라거나 제사를 지내던 제단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김 박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증보문헌비고』 등에 실린 고대 천문관측기록을 분석한 결과, 첨성대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640년대 이후 기록된 유성이 떨어진 위치들이 모두 첨성대를 둘러싸고 있다.”며 “이는 첨성대에서 유성을 관측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주장했다. 이어 “첨성대가 완성된 이후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의 수가 이전보다 10배 이상 증가했다.”며 “기록된 내용도 매우 정밀해졌다.”고 덧붙였다. 즉, 541년부터 640년까지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이 3건에 불과했지만, 첨성대 축조 예상 시점인 641년부터 740년까지의 기록은 38건에 달하고 있다. 또 첨성대 축조 전인 467년 10월 『삼국사기』 기록에는 ‘큰 별이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떨어졌다.’는 식의 막연하고 간단한 내용이 있지만, 첨성대 축조 후의 718년 11월 삼국사기 기록에는 ‘유성이 묘수(황소자리)에서 규수(안드로메타자리)로 들어갔는데…’라는 식으로 정밀하고 체계적으로 기록돼 있다고 김 박사는 설명했다. 김 박사는 특히 “신라가 별에 대한 제사를 본피유촌(本彼遊村)에서, 해와 달에 대한 제사를 문열림(文熱林)에서, 오행성에 대한 제사를 영묘사(靈廟寺) 남쪽에서 지냈다는 사실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도 확인했다.”며 “이는 신라가 첨성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천문과 관련된 제사를 지냈다는 것으로, 첨성대가 하늘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 아님을 확고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 같은 내용의 논문을 이후 충북 청주 충북대에서 열리는 한국천문학회 봄 학술대회에서 발표하는 한편, 이어 영국에서 개최되는 ‘국제 고천문 학술발표대회’에서도 발표할 예정이라고 했다. 김 박사는 “지금까지는 결정적 증거 없이 그저 막연하게 첨성대가 천문대라고 말해왔지만, 신라가 남긴 『삼국사기』 기록들이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었다”며 “영국에서 열리는 학술발표회에서 인정받으면 첨성대가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후 국제 고천문 학술발표대회에서 첨성대에 대한 후속 논의를 했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팬들이 찍어놓은 자신의 영상이 좀 통통하게 나왔다고 생각했는지 어느 걸그룹 멤버가 사과를 했다. 운동을 다니고 있는 근황과 함께 “이제 다이어트 좀 할게요” 하며 몸 관리를 잘하겠다는 각오도 밝혔다고 한다. 그 사과문에 수많은 댓글들이 달렸다. “살이 찐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요”, “살이 조금 찌니까 더 보기 좋아요”, “지금도 충분히 말랐어요” 등 긍정적 반응이 주를 이루지만, 유독 눈길을 붙잡는 댓글도 있었다. “살쪄서 예쁘다는 말도 결국 평가입니다” 반백의 아저씨가 어린 팬들 댓글에 씁쓸했던 이유는 그 ‘평가’에서 한국인들의 숨 막히는 경쟁본능을 느껴서였다. 그래서일까, 이번 논쟁에 뛰어든 해외 팬들의 댓글에 가슴이 아려온다. “체형은 모두가 다르고 그녀가 말랐든 뚱뚱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 “예전에는 이런 헛소리를 보고 무시했지만, 이제는 인내심이 떨어졌다”, “살이 쪘다고 사과해야 한다는 현실은 비인간적이고 끔찍하다” 그들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헛소리(bullshit)는 지금 한반도의 구성원들이 겪고 있는 집단 무의식에 대한 죽비소리다. 한국인들은 왜 자신과 상관없는 타인의 몸무게까지 신경을 쓸까, 아니 써야만 했을까? 1950년대 한국은 경쟁이 내면화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집들은 파괴되었고 인구의 3분의 1이 당장 길에 나앉게 되었다. 쑥대밭이 된 전 국토 중에 농업에 적합한 땅은 21%가 채 되지 않았다. 전쟁은 전 국민에게 ‘평등한’ 가난을 남겨주었다. 이것은 무한 경쟁을 위한 평등한 출발점이기도 했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그 안에서 꿈틀대기 시작했다. 한국 재건에 있어 핵심 분야라면 공무원, 법조계, 의료계, 대기업 등이었다. 몇 안 되는 의자를 서로 차지하기 위한 전 국민 단위의 경쟁은 불가피했다. 무엇보다 좋은 머리와 성실함은 대체 불가한 무기일 수밖에 없었다. 대물림되던 가난을 교육이나 시험을 통해 끊으려는 경쟁적 사고방식은 결과적으로 한국인들을 ‘공부하는 기계’로 ‘일하는 기계’로 만들어버렸다. 연예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엄격한 미적 기준을 정해놓고 어린 연예인들을 혹독하게 몰아붙인 결과물이 K팝 문화이기에, 한국 문화를 사랑하는 만큼 외국 팬들의 비판은 신랄했다. 외모에 대해 긍정적인 댓글과 응원의 박수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구하는 식의 부정적 반응으로 일관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완벽을 추구하는 한국인들의 과한 본능이 만들어낸 슬픈 현실이다. 삶에 여유를 가지거나 가끔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는 게 그렇게 나쁜 것일까? 누가 지쳐 보인다면 주변에서 흔히 해주는 소리가 파이팅(fighting)이다. 휴식이 필요한데 외려 정신 무장을 독려한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등재된 대표적인 한국식 영어(콩글리시) 파이팅은 ‘힘내’라는 격려의 의미로 사용된다. 격려와 경쟁은 다르지만 끊임없는 경쟁을 부추기는 주문이 덕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극장 젤 앞줄에 있는 사람들이 일어서면 뒤에 앉은 모든 사람들이 일어설 수밖에 없다. 다들 앉아서 볼 수 있고 또 그것이 정상인데도 다들 까치발을 한 채 영화를 봐야 한다면 우습고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지금 한국 사회는 거대한 극장이고 관객 모두는 즐기지 못하고 있다. 자발적 선택으로 말이다. 더 이상 GDP가 100불이 안 되던 50년대가 아닌데 말이다. 심한 경쟁은 불필요한 피로감을 유발한다. 우리 자신도 이런 상황을 모순적이라고 느낀다. 이런 댓글이 그 좋은 예다. “남의 눈치를 왜 이렇게 볼까? 과한 열등감과 강박감으로 볼 때 한국은 자의식 과잉 사회다.”, “남들한테 관심 없다고? 말도 안 돼, 남의 흠에 득달같이 달려들어 즐기고 있잖아, 병적으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이런 와중에 한국인의 경쟁본능을 잘(?) 활용한 케이스도 있다. “트위터에서 뭔가를 알아내려고 할 때 예를 들어 ”한국에 설탕을 이용한 전통 요리가 있을까요?“하고 묻는 것보다 ”한국에는 설탕이 들어간 전통 요리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단정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그러면 벌떼 같이 달려든 (한국) 사람들이 설탕이 들어간 모든 요리를 제시해 준다.” 웃기지만 슬픈 이야기다. 살아남기 위해 몸에 새겨야 했던 경쟁본능이 가져다준 딜레마다.
하관(下棺) 박목월 관(棺)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 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下直) 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형(兄)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全身)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音聲)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쓰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를 소화하는 목월의 방식 ↑↑ 손진은 시인 죽음을 다룬 한국 현대시 가운데 백미로 필자는 소월의 「초혼」과 목월의 「하관」을 꼽는다. 두 편은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격절과 거리를 노래하지만 시의 어조는 완전히 다르다. 소월이 격정적 어조를 통해 화자의 정서를 표출하고 있다면, 목월은 절제된 어조와 표현으로 깊은 슬픔을 잔잔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그의 아우의 하관과 그 이후의 심정을 차분한 독백과 대화와 진술로 드러낸다. 1연은 화자가 마음속에 아우를 묻으며, 기도하고 작별을 고하는 화자의 단정적인 서술과 독백이다. 빈번하게 사용된 마침표는 이러한 화자의 절제된 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2연의 꿈에서 아우를 만나는 상황에서 펼쳐지는 대화는 아연 이 시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형(兄)님!”부르는 목소리에 화자는 반가움에 겨워 온몸으로 화답하는 경상도 남성의 절실한 음성 “오오냐”의 대화는 막막하고 불완전하다. 아우의 음성을 나만 듣는, 슬픔에 겨워 있음을 암시하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에 화자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3연은 소월과 목월의 시 전체를 비교하는 준거로 작용하는 구절이 나온다. 소월이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초혼」)의 수직의 공간으로 목소리를 침투시켜 이승과 저승의 공간을 나누고 있다면, 목월은 생명체(열매)가 죽으면 “툭하는 소리가 들”린다는 표현으로 죽음에 대한 화자의 적막감을 먹먹하게 드러낸다. 감정이입과 격절의 소월과, 내면화의 목월. 두 시인이 깊은 슬픔을 소화하는 방식이다.
경주경로당행복선생님들이 지난달 19일부터 경로당 어르신들과 간식으로 에그샌드위치 만들기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사진> 에그샌드위치 만들기 프로그램은 에그샐러드를 이용해 기호에 따라 오이, 당근, 양배추, 햄, 상추 등을 식빵과 식빵 사이에 올려 간식으로 만드는 것이다. 딸기쨈, 씻은 묵은 김치, 양배추 등 각 경로당마다 특색있는 재료와 이야기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삼보경로당(회장 김덕환) 어르신들은 “샌드위치를 이야기로 풀어내는 행복선생과 색으로, 손으로, 맛으로 먹으며 추억을 새겼다”고 말했다. 최태정 행복선생은 “어르신들이 계란과 빵에 얽힌 대화를 나누며 만드시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고 전했다.
대한노인회 안강분회와 안강유림회, 안강농협 등은 지난달 25일 안강읍 근계리 소재 순국군경위령비에서 위령제를 거행했다. <사진> 이 위령비는 6.25 전쟁 당시 안강 무릉산 주위에서 치열한 전투 중 전사한 수많은 무명군인, 경찰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53년에 세워졌다. 그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아 방치돼 있던 것을 근계1리에 거주하는 노인회 안강분회 추동윤 회장의 주선으로 이날 위령제를 올렸다. 위령제에는 이상철 안강농협 조합장, 최병준 도의원, 김동경 6,25 참전용사회 경북지구 부회장, 정성룡 시의원, 박현오 근계2리 이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거행됐다. 추동윤 분회장은 “억울하게 희생된 넋을 추모하는 위령제를 거행하며 순국영령들에게 애도를 표한다”며 “80이 넘은 어른들은 아직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기에 희생자와 유족의 넋을 기리는 위령제는 이어져야 하며, 강하고 튼튼한 나라를 후손들이 만들어 갈 수 있도록 그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경주시마을평생교육지도자협의회(이하 경주시평지협)가 지난달 30일 평생학습 페스타에 참가해 참가자들에게 다양한 체험활동을 제공했다. <사진> 경주시평지협 회원들은 이날 한지공예 부스를 운영하며 관람객들에게 한지보석함 만들기 체험을 무료로 제공했다. 또 쌀쌀한 날씨에 추위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기 위해 한쪽 부스에서는 따뜻한 어묵도 제공했다. 체험에 참여한 아이들은 각종 문양으로 꾸며진 아름다운 보석함을 만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한 어린이는 “선생님, 이거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어요. 제가 만든 보석함 어때요? 예쁘죠, 귀엽죠, 멋지죠?”라며 자랑거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체험에 동참한 최 모(여, 38) 학부모는 “경주시 홈페이지를 통해 평생학습박람회 소식을 접하고,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을 주고 싶어 참여하게 됐다”면서 “아이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체험 부스가 좋고, 참여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안술용 경주시평지협 회장은 “내년에는 시민과 함께하는 더 나은 평생학습을 제공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경주솔거미술관은 내년 6월 1일까지 ‘일체유심조’를 주제로 수묵화의 거장 박대성 화백의 기획전을 열고 있다. <사진> 이번 전시는 박대성 1~5관에서 진행되며, 관람객들에게 수묵화의 깊이와 매력을 선보인다. 전시는 관람객들이 일상 속 본질적인 질문을 떠올리고, 삶의 여정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기획됐다. 박대성 화백은 먹이라는 단일 매체로 색과 공간을 엮어내며, 동양 수묵화의 정수인 ‘여백의 미’를 독창적인 화면 구성으로 표현한다. 여백의 미는 채워진 공간보다 비워진 공간에 더 깊은 의미를 담아내며, 비움으로써 채움을 이루는 동양적 철학을 담고 있다. 이러한 박 화백의 작품은 동양적 미학이 서구의 미니멀리즘과 철학적으로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수묵화의 채움과 비움, 음과 양의 조화는 현대 모더니즘의 또 다른 형태로 평가받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박대성 화백의 수묵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작품과 미디어 파사드 작품도 함께 선보인다. 관람객들은 한국 수묵화 특유의 부감시(俯瞰視)와 다시점 구도를 3D와 다양한 시각적 기법으로 경험할 수 있다. 김남일 사장은 “이번 전시는 박대성 화백의 깊이 있는 작품세계를 조망하고, 그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예술적 경지를 탐구하는 시간이 될 것”이라며 “수묵화라는 전통 예술의 현대적 가능성을 함께 모색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연말연시 희망과 화합을 상징하는 성탄절 트리가 지난달 30일 경주문화관1918 광장에서 불을 밝혔다. <사진> 경주시는 이날 경주시기독교연합회 주관으로 점등식을 가졌다. 점등식에는 주낙영 시장, 김석기 국회의원, 이동협 시의회 의장을 비롯해 지역 기독교 관계자, 시민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이번 점등식은 오는 25일 성탄절을 기념해 종교적 의미를 떠나 한 해를 마무리하고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고자 마련됐다. 트리는 높이 13m, 폭 6m 대형 조형물로 설치됐다. 트리 불빛은 내년 1월 17일까지 광장을 아름답게 수놓을 예정이다. 주낙영 시장은 “트리의 아름다운 불빛이 시민 모두에게 사랑과 희망을 전하는 메시지가 되길 바란다”며 “얼마 남지 않은 기간 소외된 이웃을 보살피며 따뜻한 정을 주고받는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를 보내길 바란다”고 전했다.
본지가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를 제목으로 연재한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의 기사를 토대로 그 현장을 다시 찾아 점검한다. 함 선생은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경주의 문화재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함종혁 선생이 본지를 통해 전했던 경주지역의 효자, 열녀 이야기를 재편성해 선조들의 충효사상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현재 효자·열녀비에 대한 관리 상황도 함께 점검해본다. /편집자주 하늘도 감동한 부자지간의 효행 ‘양세정효비’ 경주 시내에서 내남면 방향 삼릉을 지나자 마자 도로 좌측편에 양세효자비(兩世孝子碑)가 세워진 한옥 구조의 비각이 있다. 이곳이 월성김씨 수만, 상태 부자의 효행이 담긴 양세효자각이다. 이 비에는 가선대부 예조참판 월성김공 수만지비(嘉善大夫 禮曹參判月城金公 壽萬之碑)와 동몽교관 조봉대부 월성김공 상태지비(孝子贈 童蒙教官 朝奉大夫 月城金公 相兌之碑)라는 비문에 새겨져 있다. 비문에 따르면 수만 선생은 예법을 존중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가르침을 잘 받아 행동거지가 올바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부모님 섬기는 일에 정성이 남달랐다. 맛 좋은 음식과 다과를 보면 반드시 부모님께 드렸고, 커서는 어버이를 극진하게 모시는 마음을 으뜸으로 삼았다.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으로 어버이를 편안하게 모셨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병에 들었다. 아버지가 겨울철에 포도가 먹고 싶다고 하자 병을 고치려는 일념으로 동지섣달 추운 눈 속에 포도를 구하러 다니는 정성을 보였다. 하지만 제철이 지난 겨울에 포도를 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려는 효심을 하늘이 알았던지 하루는 날아가는 까마귀가 포도 한 송이를 물고 와 땅에 떨어뜨리고 가더라는 것이다. 이 포도를 병석에 있는 아버지에게 드렸더니 그만 병석을 털고 일어났다. 수만 선생의 아들 상태도 아버지의 효심을 본받아 남달리 효심이 지극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니 엄동설한 추운 겨울에 형산강 상류인 앞 냇가의 얼음을 깨고 잉어를 낚아 어머니를 봉양했다. 이 같은 효심에 범도 감동했는지, 어느 날 밤 범이 개를 물고 와서 입 마당에 던져 주고 갔다고 한다. 아들 상태는 하느님이 내리신 효약으로 알고 개를 푹 다려 어머니를 봉양하니 병환이 언제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바로 쾌차했다. 또한 이들 부자는 예의범절을 주문공(朱文公) 가례를 따른지라 많은 선비들이 이들이 효행을 나라에 진정했다. 이에 1861년 조선 철종 임금이 양세효자로 정려(旌閭)했다. 1800년 문중에서 높이 95cm, 넓이 35cm, 두께 14cm의 양세효자비와 비각을 세워 이들 부자의 효행을 기리고 있다. 자신의 피로 어머니 살린 ‘효자 묵암달성서공정려비’ 경주에서 포항으로 가는 7번 국도 강동면 호명리 구간 도로 옆에 한옥 목조의 정려각이 보인다. 주유소 못 미쳐 도로변에 위치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이곳에 효자비가 있다. 효자 묵암달성서공정려비(孝子 黙菴達城徐公旌閭碑)다. 효자 서 씨는 달성 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엄격한 가정에서 충효 사상을 배우며 자랐다고 한다. 무엇보다 효성이 지극했는데 1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삼년상을 어른들과 함께 지냈다. 그리고 어머니를 30여년 동안 하루같이 봉양해 장수를 기원했다. 하지만 어느날 어머니가 병에 들어 위독하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나오는 피로 어머니에게 수혈했다. 이 같은 서 씨의 효심을 하늘이 알았는지 어머니가 회생했다. 그 후 4년을 더 살다가 어머니의 병이 재발하자 또다시 손가락을 끊어 수혈시켜 다시 4년간을 연명시켰다. 하지만 지극한 정성에도 결국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장례 후에는 어머니 묘소까지 20리길을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성묘를 다녔다고 한다. 이 같은 서 씨의 효행을 나라에서 알게 되자 이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정려(旌閭)를 내렸다. 1938년 달성서씨 문중에서 유학 월성 손영흔의 글을 받아 호명리 238-1번지에 정효비를 세우게 됐다. 충·효·열 행적 담긴 ‘이씨삼강묘비’ 본지가 강동면 소재 효자·열녀비를 찾아 나서던 중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의미 깊은 비각을 만날 수 있었다. 1986년 12월 11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씨삼강묘비(李氏三綱廟碑)다. 강동면 다산리 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비각으로, 비문에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이희룡 장군과 그의 아들 이문진 및 며느리 김씨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비에는 그들의 충(忠)·효(孝)·열(烈)의 행적이 담겨있다. 이희룡은 임진왜란 때 왕을 의주까지 호위했으며, 영남의 적을 정찰하라는 왕명을 받고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충주에서 적을 만나 전사했다. 아들 문진은 아버지의 시신을 찾으려다 신령에서 적과 대치하다 죽었다. 며느리 김씨가 이 소식을 듣고 손수 시신을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3개월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같은 충·효·열의 깊은 뜻을 전해 들은 나라에서는 이들의 공을 기려 조선 숙종 36년(1710)에 벼슬을 올려주고 정려각을 하사했다. 비는 네모난 비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려놓았다. 비교적 큰 규모이나 별다른 무늬는 두지 않았다. 영조 42년(1766)에 비를 세웠으며, 대제학 남유용이 비문을 짓고, 경주부윤을 지내던 홍재가 글씨를 썼다.
한수원(주) 월성원자력본부는 지난달 28일 동경주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의 월동준비를 돕기 위한 ‘사랑의 김장 나누기’ 봉사에 참가했다. <사진> 사회복지법인 해송이 주관하는 ‘사랑의 김장 나누기’는 월성원자력본부가 김장비용을 후원하고 지역 내 여러 단체들이 참가해 김장을 담아 동경주 지역 취약계층 200세대에 배달하는 행사다. 특히 동경주지역의 배추절임은 전통적으로 청정한 해수를 활용해 절이고 있으며, 김장에 이용되는 각종 재료는 모두 지역 내 직접 재배한 농수산물을 활용해 지역농가의 판로 확보에도 기여하고 있다. 이번 행사는 김한성 본부장 및 허대영 대외협력처장을 비롯한 월성원자력봉사대 50여명과 새마을부녀회, 생활개선회, 의용소방대, 자유총연맹, 농가주부모임, 감포제일교회, 양북제일교회 등 100여명이 함께 참여해 1200포기의 김장을 담갔다. 김한성 본부장은 “사랑과 정성으로 담근 김치로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이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경주최부자를 취재하면서 늘 안타깝고 어이없게 생각하는 ‘옹이’ 같은 주제가 있다. 그것은 세상이 문파(汶坡) 최준(1884-1970) 선생에 대해 지나칠 만큼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고의로 가두어둔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들 정도다. 잘라 말하건데, 문파 선생님은 경주최부자의 모든 정신을 구현한 결정판이자 당신의 조상님들을 뛰어넘은 선각자이자 애국, 애민의 화신 같은 분이다. 그런데 왜 이런 훌륭한 분이 한국사에서 이처럼 홀대받고 있을까? 왜 문파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가 이처럼 알려지지 않았을까? 세상의 눈에서 감추어진 애국·애민의 화신! 그런 의문에서라도 지금부터 문파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짚어볼 참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써나갈 문파 선생님 이야기는 손자이신 최염 선생님이 어린 시절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본 문파 선생님에 대한 회고를 정리하고 그 당시의 사회적 정황을 취재해 기술한 것임을 밝혀둔다. 최염 선생님의 회고에 따르면 문파 선생은 일제 강점기, 그 시대 부유층, 인텔리 젊은이들 상당수처럼 세상사에 관심을 두지 않고 한량으로 떠돈 아들을 건너뛰어 손자인 최염 선생님을 혼신을 다해 가르쳤다. 최염 선생님은 대학생이 된 이후 할아버지 문파 선생님을 바로 곁에서 모시고 다니며 문파 선생님의 모든 삶, 그 현대사의 질곡을 함께 나누신 생생한 증인이셨다. 특히 문파 선생님이 대구대학을 꾸려나가시는 과정에서 학교의 운영권을 삼성 이병철 회장에게 넘기는 사연, 이병철 회장이 박정희 정권에 학교를 바친 이유, 박정희가 영남대학 교주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경위, 나아가 전 대통령 박근혜가 영남대학교를 유린하고 문파 선생님이 희사하신 가문의 재산을 팔아치운 뼈저린 이야기를 마치 영상으로 찍어놓은 듯 기억하고 계셨다. 따라서 문파 선생님의 크고 높은 뜻이 어떻게 구현되었고 이 뜻이 어떻게 세상에서 잊혀졌는지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술될 것이다. 한가지 미리 말해 둘 것이 있다. 내가 이 원고를 쓰면서 문파 선생님을 일컬을 때는 늘 선생님이라고 했고 역시 최염 선생님께도 늘 님을 붙여 써왔다. 그 이유는 비록 대중을 향한 글이라도 나의 존경심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수시로 할아버지와 손자 두 분을 표현해야 하겠기에 문파 선생님은 그냥 문파 선생이라고 쓰고 최염 선생님은 오랜 경주최씨 중앙종친회 명예회장 생활로 세상에서 보통 부르듯 ‘최염 회장’이라고 부를 예정이다.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문파 선생이 태어나기 이전 조선은 밖으로 서구열강들의 침략 야욕이 본격화 되던 때다. 안으로는 신분을 떠나 인간의 존엄성을 역설한 동학이 급격히 교세를 넓힐 때였고 천주교 탄압이 절정기를 이루는 때였다. 고종의 등극(1863년)에 따른 흥선대원군 집권은 왕권 강화라는 명분을 내세운 경복궁 재건으로 또 다른 민생 수탈의 역사로 이어졌고 전국적으로 사액서원을 제외한 서원철폐 등의 개혁이 일어났다. 이 땅의 민중에게 스스로 존엄함을 일깨우던 수운 최재우 선생은 역모와 혹세무민의 누명을 쓰고 순교했고 프랑스 함대와의 전쟁인 병인양요로 이어진 병인박해는 수많은 천주교 순교자를 양산했다. 이로써 나라를 걸어 잠그는 쇄국정치가 시작되었고 민비를 중심으로 한 민씨 일파가 정치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서서히 조선 왕가는 권력투쟁의 장으로 변모해 갔다. 이 와중에 청과 일본을 비롯한 주변 강대국과 서구 열강은 다투어 조선을 침범해 들어왔고 조선은 세계 열강의 동북아시아 패권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신미양요를 통해 미국은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인해 별다른 소득 없이 철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일본은 침략을 전제로 운요호 사건(1875년)을 일으켜 결국 조일수호통상조약(일명 강화도 조약/1876년)을 강제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일본에 수신사가 파견되었는가 하면 그 결과의 하나로 최초의 근대식 군대인 ‘별기군’이 조직되기도 한다. 문파 선생이 태어나기 이미 10여년 전부터 조선은 국가를 영위할 수 있는 통제력을 상실했고 밖으로는 청나라의 외압이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가운데 일본이 호시탐탐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칼을 갈고 있었다. 여기에 프랑스,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서구 열강들의 침략 야욕이 갈수록 거세졌다. 문파 선생이 태어나기 직전의 조선은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고 영국과도 수호통상조약을 정식으로 맺었다. 그 사이 별기군과의 차별에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난을 일으키는 이른바 ‘임오군란’도 일어났다. 권력투쟁으로 나라는 풍전등화 지방은 가렴주구, 동학의 패망은 일본의 침략 가속화 해 이런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엄두를 못 내던 조정은 권력 쟁탈을 위한 힘겨루기에 급급해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것을 무시하고 있었다. 이름뿐인 왕인 고종을 두고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왕비인 민비가 번갈아 가며 정권을 농락하면서 백성들은 외면되었고 나라꼴은 붕괴 직전에 이르고 있었다. 누가 와서 손만 대면 무너질 것 같은 허약한 조정이었다. 전국은 유민들이 하얗게 산하를 메우며 떠돌았고 끄트머리 신분제 시대, 양반과 지역 토호들의 갑질과 패악에 맞선 화적들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국내의 선각자들이 이러한 국제정세를 그대로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동학 교조 최제우는 동학을 일으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려 들었지만 혹세무민의 누명을 쓰고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고 뒤를 이은 최시형은 전국으로 은신하며 암암리에 교세를 넓혀 나갔다. 최익현, 허유 등 지조 높은 유림의 세력들은 위정척사를 부르짖으며 조정과 유학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 노력했지만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한 채 수구적 자세로 일관했다는 평가를 떨치기 어려웠다. 그런 와중에 일본은 보다 교묘하고 보다 은밀하게 우리의 숨통을 죄어 오고 있었다. 문파 선생이 태어난 1884년은 이런 사정이 모두 얽혀 돌아가는 격동기였다. 그해 일어난 갑신정변은 겉으로는 나라를 쇄신하려는 개화 세력이 일으킨 혁명처럼 보였다. 그러나 급진적 개화파들은 자신들의 빈약한 정치적 기반을 보충하기 위해 엉뚱하게도 자신들조차 감당하기 버거운 일본을 등에 업으면서 또 다른 암운(暗雲)을 예고했다. 정권 탈취에 급급하던 개화 세력이 수구세력을 일시적으로 갈아 치웠지만 준비되지 못한 어설픈 정권은 불과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풍비박산 났다. 개화파 인물들은 급거 일본과 미국 등으로 망명하고 남은 자들은 살해당했다. 소수 주둔해 있던 일본군은 수구세력이 등에 업고 있던 청군과 변변한 교전조차 하지 않은 채 철수했고 청군은 비록 얼마 동안이긴 하지만 조선을 지배하는 점령국으로 행세했다. 그 어쭙잖은 정변은 서구열강들에게 침략의 기회와 구실을 제공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 조선은 서구열강들이 대놓고 침탈을 시작하며 그야말로 너나없이 조선을 뜯어먹기 위해 달려들었다. 1884년에는 조러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러시아가 조선에 공식 진출했다. 1885년에는 영국군이 수호통상조약을 무시하고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와중에도 임오군란 후 청나라로 납치되어 갔던 대원군이 환국하며 친러 경향의 민비와 대치하는 등 국내 정치는 여전히 암투의 상태였다. 한편 중앙의 통제력이 상실되자 지방 관속들의 가렴주구는 극에 달했다. 그 대표적인 곳이 전라도 고부였다.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며 들고 일어나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자 사방에서 분노한 민중들이 일어섰다. 전라도에서 교세를 떨친 동학군이 충청도, 강원도까지 일어나자 조정은 동학민중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한다. 그러나 텐진조약에 의거, 일본이 훨씬 더 적극적으로 조선에 침공하는 빌미만 제공한다. 결국 동학민중운동은 일본의 개입으로 우금치 등에서 비참하게 패하며 막을 내렸고 각종 개혁의 시도 역시 채 싹을 틔우기도 전에 시들어버리고 말았다. 동학군을 괴멸시킨 일본은 강제로 갑오개혁안을 개정하고 다시 이듬해는 을미개혁이라는 2차 개혁안을 발표하도록 종용한다. 일부 저항이 있었지만 강홍집, 박영효 등 조선의 수뇌부들은 일본의 주도하에 개혁안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런 한편 일본은 국내에 체류 중이던 청과 마찰을 일으킨 끝에 실질적인 조선 지배권을 두고 청일전쟁에 돌입한다.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된 조선을 깔본 나머지 마침내 민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1895년)의 참극을 일으켰고 고종은 왕비가 난자되고 왕궁이 불타는 것조차 막지 못한 채 부랴부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 다시 그 이듬해인 1897년은 일본이 세우다시피 한 허수아비 정권인 대한제국이 수립되었다. ‘황제국’이라는 그럴싸한 허울뿐, 실제 권력은 일본이 거머쥐고 있었다. 그런 일본에 대해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던 러시아가 일본과 전쟁을 벌인 것이 1904년.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다시 한 해가 지난 1905년 실제로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이로써 전국적인 항일 운동이 일어났지만 결과는 우세한 군사력과 신무기를 보유한 일본의 압승! 마침내 나라가 강제 병합되는 경술국치(1910년)로 치닫게 된다. 격동의 시기였다. 풍전등화의 국운..., 설 땅을 잃어버린 지사들...! 이런 시대적 격변 속에서 문파 최준 선생은 태어났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나라, 문파 선생의 삶은 처음부터 거대한 장벽에 맞닥뜨린 것이었다. 물론 그 장벽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막대한 이익을 주는 보호벽이 될 수도 있었고 권력을 쥐고 흔들 든든한 밑바탕이 되기도 할 것이다. 과연 최준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인가? 누구나 아는 부잣집, 그중에서도 과객을 후히 대접하고 백성 구휼에 온 힘을 쏟아온 흔치 않은 부자, 경주최부자의 마지막 후예가 역동이 현장에 태어났다.
공고번호 : 경북-경주-2024-1092 구조 : 경주시 강동면 천강로 824-5 품종 : 믹스견 성별 : 암컷 중성화 여부 : x 백신 정보 : 1차 접종 연령 : 3개월 체중 : 2.4kg 특징 : 순둥순둥 하고, 사람을 엄청 따르는 강아지 입양문의 : 054)760-2883 ※반려동물이 실시간 입양됐을 수 있으니 확인 전화바랍니다.
선덕여고 봉사동아리 心봉사(지도교사 한솔아·김윤지) 학생들이 김장 김치를 직접 담가 행복황촌 도시재생 구역의 취약계층 10가구에 전달해 연말 훈훈함을 자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