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최부자를 취재하면서 늘 안타깝고 어이없게 생각하는 ‘옹이’ 같은 주제가 있다. 그것은 세상이 문파(汶坡) 최준(1884-1970) 선생에 대해 지나칠 만큼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고의로 가두어둔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들 정도다.
잘라 말하건데, 문파 선생님은 경주최부자의 모든 정신을 구현한 결정판이자 당신의 조상님들을 뛰어넘은 선각자이자 애국, 애민의 화신 같은 분이다. 그런데 왜 이런 훌륭한 분이 한국사에서 이처럼 홀대받고 있을까?
왜 문파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가 이처럼 알려지지 않았을까? 세상의 눈에서 감추어진 애국·애민의 화신!
그런 의문에서라도 지금부터 문파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짚어볼 참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써나갈 문파 선생님 이야기는 손자이신 최염 선생님이 어린 시절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본 문파 선생님에 대한 회고를 정리하고 그 당시의 사회적 정황을 취재해 기술한 것임을 밝혀둔다. 최염 선생님의 회고에 따르면 문파 선생은 일제 강점기, 그 시대 부유층, 인텔리 젊은이들 상당수처럼 세상사에 관심을 두지 않고 한량으로 떠돈 아들을 건너뛰어 손자인 최염 선생님을 혼신을 다해 가르쳤다.
최염 선생님은 대학생이 된 이후 할아버지 문파 선생님을 바로 곁에서 모시고 다니며 문파 선생님의 모든 삶, 그 현대사의 질곡을 함께 나누신 생생한 증인이셨다. 특히 문파 선생님이 대구대학을 꾸려나가시는 과정에서 학교의 운영권을 삼성 이병철 회장에게 넘기는 사연, 이병철 회장이 박정희 정권에 학교를 바친 이유, 박정희가 영남대학 교주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경위, 나아가 전 대통령 박근혜가 영남대학교를 유린하고 문파 선생님이 희사하신 가문의 재산을 팔아치운 뼈저린 이야기를 마치 영상으로 찍어놓은 듯 기억하고 계셨다.
따라서 문파 선생님의 크고 높은 뜻이 어떻게 구현되었고 이 뜻이 어떻게 세상에서 잊혀졌는지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술될 것이다.
한가지 미리 말해 둘 것이 있다. 내가 이 원고를 쓰면서 문파 선생님을 일컬을 때는 늘 선생님이라고 했고 역시 최염 선생님께도 늘 님을 붙여 써왔다. 그 이유는 비록 대중을 향한 글이라도 나의 존경심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수시로 할아버지와 손자 두 분을 표현해야 하겠기에 문파 선생님은 그냥 문파 선생이라고 쓰고 최염 선생님은 오랜 경주최씨 중앙종친회 명예회장 생활로 세상에서 보통 부르듯 ‘최염 회장’이라고 부를 예정이다.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문파 선생이 태어나기 이전 조선은 밖으로 서구열강들의 침략 야욕이 본격화 되던 때다.
안으로는 신분을 떠나 인간의 존엄성을 역설한 동학이 급격히 교세를 넓힐 때였고 천주교 탄압이 절정기를 이루는 때였다. 고종의 등극(1863년)에 따른 흥선대원군 집권은 왕권 강화라는 명분을 내세운 경복궁 재건으로 또 다른 민생 수탈의 역사로 이어졌고 전국적으로 사액서원을 제외한 서원철폐 등의 개혁이 일어났다.
이 땅의 민중에게 스스로 존엄함을 일깨우던 수운 최재우 선생은 역모와 혹세무민의 누명을 쓰고 순교했고 프랑스 함대와의 전쟁인 병인양요로 이어진 병인박해는 수많은 천주교 순교자를 양산했다. 이로써 나라를 걸어 잠그는 쇄국정치가 시작되었고 민비를 중심으로 한 민씨 일파가 정치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서서히 조선 왕가는 권력투쟁의 장으로 변모해 갔다.
이 와중에 청과 일본을 비롯한 주변 강대국과 서구 열강은 다투어 조선을 침범해 들어왔고 조선은 세계 열강의 동북아시아 패권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신미양요를 통해 미국은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인해 별다른 소득 없이 철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일본은 침략을 전제로 운요호 사건(1875년)을 일으켜 결국 조일수호통상조약(일명 강화도 조약/1876년)을 강제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일본에 수신사가 파견되었는가 하면 그 결과의 하나로 최초의 근대식 군대인 ‘별기군’이 조직되기도 한다.
문파 선생이 태어나기 이미 10여년 전부터 조선은 국가를 영위할 수 있는 통제력을 상실했고 밖으로는 청나라의 외압이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가운데 일본이 호시탐탐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칼을 갈고 있었다. 여기에 프랑스,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서구 열강들의 침략 야욕이 갈수록 거세졌다. 문파 선생이 태어나기 직전의 조선은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고 영국과도 수호통상조약을 정식으로 맺었다. 그 사이 별기군과의 차별에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난을 일으키는 이른바 ‘임오군란’도 일어났다.
권력투쟁으로 나라는 풍전등화 지방은 가렴주구, 동학의 패망은 일본의 침략 가속화 해
이런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엄두를 못 내던 조정은 권력 쟁탈을 위한 힘겨루기에 급급해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것을 무시하고 있었다. 이름뿐인 왕인 고종을 두고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왕비인 민비가 번갈아 가며 정권을 농락하면서 백성들은 외면되었고 나라꼴은 붕괴 직전에 이르고 있었다. 누가 와서 손만 대면 무너질 것 같은 허약한 조정이었다. 전국은 유민들이 하얗게 산하를 메우며 떠돌았고 끄트머리 신분제 시대, 양반과 지역 토호들의 갑질과 패악에 맞선 화적들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국내의 선각자들이 이러한 국제정세를 그대로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동학 교조 최제우는 동학을 일으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려 들었지만 혹세무민의 누명을 쓰고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고 뒤를 이은 최시형은 전국으로 은신하며 암암리에 교세를 넓혀 나갔다. 최익현, 허유 등 지조 높은 유림의 세력들은 위정척사를 부르짖으며 조정과 유학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 노력했지만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한 채 수구적 자세로 일관했다는 평가를 떨치기 어려웠다. 그런 와중에 일본은 보다 교묘하고 보다 은밀하게 우리의 숨통을 죄어 오고 있었다.
문파 선생이 태어난 1884년은 이런 사정이 모두 얽혀 돌아가는 격동기였다. 그해 일어난 갑신정변은 겉으로는 나라를 쇄신하려는 개화 세력이 일으킨 혁명처럼 보였다. 그러나 급진적 개화파들은 자신들의 빈약한 정치적 기반을 보충하기 위해 엉뚱하게도 자신들조차 감당하기 버거운 일본을 등에 업으면서 또 다른 암운(暗雲)을 예고했다. 정권 탈취에 급급하던 개화 세력이 수구세력을 일시적으로 갈아 치웠지만 준비되지 못한 어설픈 정권은 불과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풍비박산 났다. 개화파 인물들은 급거 일본과 미국 등으로 망명하고 남은 자들은 살해당했다. 소수 주둔해 있던 일본군은 수구세력이 등에 업고 있던 청군과 변변한 교전조차 하지 않은 채 철수했고 청군은 비록 얼마 동안이긴 하지만 조선을 지배하는 점령국으로 행세했다.
그 어쭙잖은 정변은 서구열강들에게 침략의 기회와 구실을 제공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 조선은 서구열강들이 대놓고 침탈을 시작하며 그야말로 너나없이 조선을 뜯어먹기 위해 달려들었다. 1884년에는 조러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러시아가 조선에 공식 진출했다. 1885년에는 영국군이 수호통상조약을 무시하고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와중에도 임오군란 후 청나라로 납치되어 갔던 대원군이 환국하며 친러 경향의 민비와 대치하는 등 국내 정치는 여전히 암투의 상태였다.
한편 중앙의 통제력이 상실되자 지방 관속들의 가렴주구는 극에 달했다. 그 대표적인 곳이 전라도 고부였다.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며 들고 일어나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자 사방에서 분노한 민중들이 일어섰다. 전라도에서 교세를 떨친 동학군이 충청도, 강원도까지 일어나자 조정은 동학민중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한다. 그러나 텐진조약에 의거, 일본이 훨씬 더 적극적으로 조선에 침공하는 빌미만 제공한다. 결국 동학민중운동은 일본의 개입으로 우금치 등에서 비참하게 패하며 막을 내렸고 각종 개혁의 시도 역시 채 싹을 틔우기도 전에 시들어버리고 말았다.
동학군을 괴멸시킨 일본은 강제로 갑오개혁안을 개정하고 다시 이듬해는 을미개혁이라는 2차 개혁안을 발표하도록 종용한다. 일부 저항이 있었지만 강홍집, 박영효 등 조선의 수뇌부들은 일본의 주도하에 개혁안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런 한편 일본은 국내에 체류 중이던 청과 마찰을 일으킨 끝에 실질적인 조선 지배권을 두고 청일전쟁에 돌입한다.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된 조선을 깔본 나머지 마침내 민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1895년)의 참극을 일으켰고 고종은 왕비가 난자되고 왕궁이 불타는 것조차 막지 못한 채 부랴부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 다시 그 이듬해인 1897년은 일본이 세우다시피 한 허수아비 정권인 대한제국이 수립되었다. ‘황제국’이라는 그럴싸한 허울뿐, 실제 권력은 일본이 거머쥐고 있었다.
그런 일본에 대해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던 러시아가 일본과 전쟁을 벌인 것이 1904년.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다시 한 해가 지난 1905년 실제로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이로써 전국적인 항일 운동이 일어났지만 결과는 우세한 군사력과 신무기를 보유한 일본의 압승! 마침내 나라가 강제 병합되는 경술국치(1910년)로 치닫게 된다.
격동의 시기였다. 풍전등화의 국운..., 설 땅을 잃어버린 지사들...! 이런 시대적 격변 속에서 문파 최준 선생은 태어났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나라, 문파 선생의 삶은 처음부터 거대한 장벽에 맞닥뜨린 것이었다. 물론 그 장벽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막대한 이익을 주는 보호벽이 될 수도 있었고 권력을 쥐고 흔들 든든한 밑바탕이 되기도 할 것이다. 과연 최준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인가? 누구나 아는 부잣집, 그중에서도 과객을 후히 대접하고 백성 구휼에 온 힘을 쏟아온 흔치 않은 부자, 경주최부자의 마지막 후예가 역동이 현장에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