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사이에 류춘호의 비석이 두 기가 세워졌다. 고종 19년(1893) 6월에는 [1]편에 소개된 철비 ‘영장류공춘호영세불망비’가 세워져 그의 덕을 기렸고, 7월에는 그의 청렴함과 지방 군사에 대한 세심한 보살핌을 추정할 수 있는 석비 ‘영장류공춘호청덕거사비(營將柳公春浩德去思碑)’가 세워졌다.비석의 전면에는 ‘營將柳公春浩清德去思碑 惠懷屏翰操潔水玉 撫卒惠普 愛民恩篤 一規清價愼 萬姓歌頌 片珉不磷 氷寓釿誦’, 후면에는 ‘光緒十九年癸巳七月日立 都監李基元 色吏 金潤軾 光武七年癸卯十二月下澣 移改 立 重侈都監朴文植, 色吏 斐興述’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를 국역하면 ‘영장으로서 베푸신 은혜 지조는 빙옥처럼 맑았네. 군사를 어루만지며 널리 사랑했고 백성을 사랑하며 두터이 보살폈네. 한 법도를 청렴하게 행하자 모든 사람들이 칭송하였네. 여기 비석은 인멸되지 않아 영원히 우러러 흠모할 것일세’ ‘광서 19년 계사(1893) 7월 어느 날 세우다. 도감:이기원, 색리:김윤식, 광무 7년 계묘(1903) 12월 하순에 옮겨 세우다. 중수도감:박문식, 색리:배흥술’이다. 두 기의 비석은 본래 동일한 장소에 나란히 건립된 것은 아니었다. 1977년에 발간된 ‘문화유적총람’에 따르면, 철비는 성건동 392-1번지에 위치했으나, 석비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석비는 1960년대 후반 소태고개 정상에 옮겨졌다.
도감을 맡았던 이기원의 증손자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도감을 맡았던 비석이 성건동 민가 인근에 방치된 것을 안타깝게 여겨, 1960년대 후반에 석비를 소달구지에 실어 소태고개 정상에 이건했다고 전한다. 이를 통해 류춘호를 기리기 위한 비석과 그 보존을 위한 후손들의 노력과 의지를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