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이 제정된 지 100주년이다. 어린이란 말은 누가 처음 만들었을까? 그 이전에는 어린이를 어떻게 불렀을까? 장유유서, 남존여비 등 우리나라에 유교사상이 전래되던 예전에는 어린이, 부녀자를 귀하게 대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어린아이를 ‘애 녀석’ ‘아이놈’ ‘이 자식’처럼 아무렇게나 불렀다.
방정환 선생(1899~1931)은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기,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어린이도 어른처럼 존중하기 위해 1920년 ‘어린이’란 말을 처음 만들어 사용했다. 그는 어린이에게도 항상 존댓말을 하시고, 어린이를 만나면 머리 숙여 인사를 나눴으며, 아동문학가, 어린이 인권운동가 활동을 하시며, 어린이날을 만든 장본인이다. 사회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의 또 다른 형태였던 것이다. 방정환 선생은 어떻게 어린이날을 만들 생각을 하게 됐을까?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힘든 유년기를 보낸 그는 인간·생명·자연 존중의 동학사상에 영향을 받아, 어린이날을 만들게 됐다. 그럼, 누구의 영향을 받았을까? 경주가 낳은 위대한 사상가 해월 최시형이다.
해월 최시형 선생은 1885년 아이를 때리는 것은 하늘님을 치는 것이니 ‘아이를 때리지 말라’라는 ‘물타아’를 널리 설법하셨다. 그의 영향으로 훗날, ‘방정환에 의해 1923년 세계최초 어린이 인권선언을 선포하며, 어린이날을 만드는 사상적 배경이 됐다. 그는 민족대표 33인의 대표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된 의암 손병희 선생의 셋째 사위이기도 하다. 어린이날의 출발은 바로 이곳 경주다.
지난해 3월 뉴스 앵커가 마무리 멘트로 스페인의 교육자 프란시스코 페레를 예로 들며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고 했다. 해월 선생의 생명존중을 담은 훌륭한 말씀이 그보다 앞서지만, 우리의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서양의 사상, 문화, 종교를 추종하는 결과라고 판단된다.
방정환 선생은 일제 억압의 어려움 속에서 손수 글을 쓰고, 어린이 잡지를 편찬 발행했다. 우리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선, 우리말과 글, 위대한 우리 문화와 역사의식을 아이들에게 심어줘야 한다며, 연극, 이야기, 잔치, 강연회 등 어린이를 위한 많은 일을 했다.
그는 천도교 소년회를 창립하고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우리나라 최초로 소년소녀 운동을 제창했고, 김기전, 정순철, 윤석중과 함께 어린이 운동을 사회적으로 보편화시켰다.
1920년 우리나라 최초의 월간지 ’개벽‘ 창간호 발행됐고, 개벽 3호에 방정환의 ’어린이‘ 용어가 탄생했다. 이어 1922년 5월 1일, 첫 노동절에 ‘어린이날’을 선포했다. 또 1923년 봄, 뜻을 같이하는 젊은이들과 ‘동화 및 동요를 중심으로 하고 아동문제까지 연구한다’는 취지로 ‘색동회’를 조직했다. 윤극영의 ‘반달’, 이원수의 ‘고향의 봄’ 등 창작동요를 발표했으며 그 해 5월 1일 천도교 대교당에서 ‘첫 어린이날 행사’를 통해 어린이 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일제는 어린이날의 격을 떨어뜨리기 위해 공휴일로 만들고, 창덕궁을 창경궁으로 만들어 어린이날에 무료로 개방했으며, 상업화된 선물과 유희적 놀이로 어린이들의 해방 정신을 약화시켰다.
고인이 된 경주의 향토 사학자 고청 윤경렬 선생 또한 방정환 선생이 펴낸 ‘어린이’ 잡지를 어릴 적 많이 읽으셨다. 당시 일제 강점기라 우리 역사에 관한 올바른 이야기는 싣지 못했지만, 어린이 잡지에 경주를 무대로 한 신비롭고 찬란한 이야기들로 인해, 그때부터 경주는 선생의 동경의 대상이 됐고, 일본 유학을 마치고 곧장 경주로 내려와 깊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됐다고 전한다.
결국 고청 선생께서 방정환 선생의 영향으로 이곳 경주에서 우리나라 최초 ‘어린이 박물관학교’를 만들고, 고고학 발전을 도모하며 많은 후학을 길러낸 것이다.
건강 악화로 33세의 아쉬운 짧은 생애를 마친 영원한 어린이의 벗 소파 방정환! 어린이를 통해 희망을 보고, 어른과 같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며 그 결정에 책임을 지는 주체적인 인격체로 판단했다. 지식 위주의 틀에 박힌 특정 교과 중심의 교육시스템이 아니라, 어린이들의 재능과 능력을 맘껏 펼칠 수 있는 교육을 방정환 선생은 100년 전 ‘어린이 해방선언’에서 갈망했던 것이다. 그것의 궁극적 실현을 위해 독립을 염원했던, 한 분의 독립운동가였다.
경주시가 아동친화도시, 여성친화도시로 선정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동학 발상지에 그 사상적 연원을 두고 있는 경주의 정체성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