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7년 3월 황오동 277번지(주차타워 건설중)에서 아버지 최종수와 어머니 월성 배씨의 아들로 태어난 최경상은 6세에 어머니를, 15세에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생계를 위해 누이동생과 포항 신광으로 이주하여 머슴살이와 제지소에서 일하며, 19C 혼란한 시기에 열심히 살아가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결혼 후, 흥해 검곡에서 화전민의 힘든 삶을 살다가, 1861년 6월(음력) 경주에서 무극대도(동학)의 큰 가르침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최경상(34세 해월 최시형)은 약 80리 길인 고향 경주 용담으로 한 달에 3~4번씩 수운 최제우 선생을 만나러 다녔다. 1861년은 조선 최고의 실학자 최한기의 영향을 받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나온 해 이기도 하다.
이 역사적 운명적 만남으로 우리나라 고유의 진정한 근대사가 시작될 수 있었고, 청년 최경상이 걸어온 그 깨달음의 길이 경주시에서 조성 중인 ‘동학가는 길’이다.
수운의 가르침을 받은 학자와 제자는 많았지만, 수운이 도통 전수자로 해월을 선택한 것은 지식과 학식이 아닌 해월이 갖춘 인품의 깊이와 순결한 의지로 그의 무극대도가 왜곡됨 없이 인류에 펼쳐질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에 길이 남을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해월 최시형은 수운의 유언인 고비원주(높이 날고 멀리 뛰어라)를 실천하며, 동학 도인들과 함께 우리민족의 세계적 저서인 수운의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관군을 피해 산간벽지를 다니며 간행을 계속이어갔다.
용담유사는 한글가사로 누구나 베껴 쓸 수 있었기 때문에, 반복하며 자연스럽게 암송되어 민중 속으로 수운의 말씀이 수운의 언어로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해월의 사인여천 사상에 의해 개벽세상의 간절한 염원이 프랑스혁명보다 더 위대했고,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전국적 동학농민혁명으로 실현될 수 있었다.
경주시민과 학생들이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여름 방학과 휴가를 이용해 꼭 읽어 볼 것을 권한다. 특히, 용담유사(도올 김용옥 역 통나무 출판사)는 19C 중엽 순우리말로 표현된 민중을 깨우치기 위한 수운이라는 한 인간이 고백한 아름다운 노랫말로 한글 가사문학 (8수)의 극치이다. 국정 국어 교과서에 문학작품으로 반드시 실려야하며, 경주문화재단의 창작뮤지컬로 용담유사가 무대에 올려져 전국적 공연과 아울러, 동학의 주도권을 경주시가 가져와서 발상지다운 지위와 역할을 다하는 관심, 노력과 투자가 지속되어야한다.
황오동 해월생가복원도 초가집 형태의 공원화가 아니라, 남여노소 누구나 동학사상을 체험할 수 있는 해월사상체험관으로 조성해서 관광상품화하여 동학브랜드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가야한다.
동학농민군들과 전봉준 장군이 전투에 임하기 전, 마음을 가다듬으며 밤새워 구송한 수운의 숭고한 철학을 담은 21자 주문소리와 용담유사를 암송한 옛 민중의 목소리가 개관을 앞둔 수운기념관의 컨텐츠에 반드시 담겨져 온 국민이 함께 그 가치와 이미를 공유해야한다.
오늘도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고, 만남을 통해 삶의 의미를 채워나가고 있다. 내가 오늘 걸어가는 그 길이 내일의 역사가 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임을 느끼는 하루하루가 되었으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