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가 올해 유네스코 창의도시 네트워크 국내도시 신청을 포기하고 2026년 재도전을 결정했다. 2022년 3월 경주시장의 창의도시 가입 도전 언급 후 2년 동안의 결과다. 결과만 본다면 신청 연기는 2년의 시간을 허비했다고 판단될 수 있기에 비판받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본다면 올해 창의도시 신청 포기를 통해 얻은 것들로 2년 뒤 제대로 신청하면 된다. 어설프게 신청했다가 국내 창의도시 선정에 탈락해 버리면 추진 원동력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신 연기한 김에 정말 제대로 준비해야 한다. 올해 창의도시에 신청하지 못한 이유는 인력, 예산, 계획, 실적 등 모든 부분에서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경주시는 2년이라는 시간에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야 한다. 먼저 유네스크 창의도시 네트워크가 뭔지 모르는 시민들이 너무 많다. 더해서 문화·예술인들 조차 무엇인지 잘 모른다. 시는 창의도시가 무엇인지, 국내도시 선정에 이어 국제도시에 가입한다면 어떤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 경주의 문화·관광산업의 미래 먹거리 사업임을 알리고, 동참해야 하는 당위성을 일깨워줘야 한다. 또한 선정을 위한 예산을 당장 마련해야 한다. 창의도시는 지속가능발전을 전제로 하는 사업인 만큼 지방정부의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올해 신청을 포기한 이유 중 하나로 예산 부족과 실적 부족을 꼽고 있다. 이번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실적을 만들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예산이 동반돼야 한다. 마지막으로 관 주도가 아닌 시민, 유관단체, 전문가들이 꼭 참여해야 한다. 가령 경주문화재단에 맡길 일이 아니다. 경주문화재단은 참가하는 숱한 인적네트워크의 일부분이 돼야 한다. 창의도시 가입 추진의 중심이 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이 문제는 ‘대한민국 문화도시’ 탈락이라는 고배를 마시며 충분히 답습했다. 결국 진정한 의미의 민간 주도가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경주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도시다. 과거의 유산을 토대로 미래를 만드는 것이 유네스코 창의도시 네트워크라 판단된다. 이제라도 과거와 미래를 잇는 새로운 산업 동력을 위한 밑바탕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대구경북(TK) 행정통합 논의가 말 그대로 급물살을 타고 있다. 홍준표 대구시장과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지난 17일 통합에 공감 의사를 밝힌데 이어 23일 대구시와 경북도의 첫 실무자 협의가 있었다. 또 오는 6월 3일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과 우동기 지방시대위원장, 홍준표 대구시장,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TK 행정통합과 관련한 논의를 위해 서울에서 4자 회담을 갖는다. 4자 회담은 윤석열 대통령이 TK 행정통합 지원 방안을 마련할 것을 지시한 데 따른 것이다. 4자 회담에서는 대구시와 경북도의 통합의지를 확인하고, 향후 추진 방향,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 방안 등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3일 열린 대구·경북 실무단(TF) 회의에서는 대구·경북 행정통합은 화학적 결합을 통한 질적 통합이 돼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회의에서는 정부의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최대한 이끌어 내기 위한 신속한 실무적 절차와 준비방안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오는 2026년 지방선거 때 ‘통합 단체장’ 선출을 목표로 하는 만큼 논의에 속도를 내고 있는 모양새다. 하지만 서두르기만 해서는 될 일이 아니다. 시·도 통합 명칭, 청사 위치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도민의 지지와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다. 4년 전 TK 행정통합 시도가 실패한 것은 관 주도 위주의 추진으로 지역사회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던 것이 원인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에 따라 TK 행정통합이 왜 필요한지 주민들에게 명확하게 설명해야 한다. 또 통합에 따른 대구경북의 위상과 주민 삶은 어떻게 달라지는지 등 통합에 따른 실익도 제시돼야 한다. 효과가 주민들이 피부로 체감할 수 없다면 통합 논의는 동력을 얻기 어렵다. 지방자치제도 부활 후 지자체 간 통합을 시도해 결실을 본 지자체는 창원시 등 2곳이 전부고, 편입 또한 최근 대구 군위군 등 3건에 불과하다. 광역자치단체가 통합한 사례는 아직 없다. 부산·경남, 광주·전남이 통합을 추진했지만 여전히 답보상태다. 모두 주민 호응이 높지 않거나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통합이 쉽지 않은 탓이다. TK 통합은 수도권 일극 체제와 지방소멸, 저출생 및 인구 절벽 등을 해소하고, 주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논의되고 있다. 이 같은 목적과 당위성을 알려 주민들의 공감과 동참을 이끌어내는 것이 행정 통합의 최대 관건이다.
생성형 AI가 어마어마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얼마 전 발표된 ChatGPT-4o는 인간과 대화할 정도로 빠른 결과를 알려 주고 있다. 이런 변화와 함께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것이 친환경 에너지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탄소중립 화두가 전 세계적 관심을 끄는 가운데 이를 연구·개발하는 선구적 기업들은 대부분 기존의 화력발전을 자제하고 최대한 친환경 에너지를 기반으로 한 기업 경영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친환경 전기는 생산 단가가 너무 비쌀 뿐만 아니라 기상에 큰 영향을 받는다. 모두가 만족하는 지속 가능한 에너지원을 생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EU에서는 그린 텍소노미에 원자력을 포함시켰다. 양날의 검인 원자력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소형모듈원자로(SMR)에 관심을 가지고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현실적인 수단으로 주목하고 있다. SMR은 화석연료를 대체할 에너지원으로, 대용량 발전소를 도입하기 어려운 지역에 건설하거나 노후 화력발전소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 또한, 고온 열을 이용해 암모니아 분해, 물 분해 수소 생산, 고온 증기 공급, 천연가스-증기 개질 등 다양한 산업적 용도로 활용할 수 있다. 정부는 2030년까지 SMR(소형모듈원자로) 국가산업단지를 경주에 조성하기로 했다. 이 산업단지는 SMR에 대한 다양한 연구와 생산 기지 역할을 하게 된다. SMR은 300MW 이하의 발전용량으로 기존 대형 원전 대비 안전성을 높이면서도 모듈형 구성을 통해 경제성을 높인 소형 원자로다. 이 원자로는 수소생산, 해양, 도심항공모빌리티(UAM), 데이터센터, 자율주행 전기차 충전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이 가능하다. 경주는 신재생 에너지도 활발하게 생산하고 있으며, 토함산에 설치된 풍력발전과 주변의 태양광 발전을 연계하여 탄소중립 실현을 위한 중요한 에너지원이 될 수 있다. 경주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전기는 경주뿐만 아니라 포항과 울산에도 공급되어 한국의 에너지 혁신 중심지로 변모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얼마 전 산업부에서는 전력 구매 시 지역별로 차등화된 가격을 부여하기로 했다. 이는 발전소가 있는 지역에서 저렴한 전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경주와 인근 산업도시는 값싼 전력 공급으로 기업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인공지능과 클라우드의 핵심 거점인 데이터 센터 구축을 통해 경주는 미래 기술 혁신도시의 발판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된다. 인공지능(AI) 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산업의 모든 분야에서 혁신을 촉진하고 있다. 데이터는 인공지능 개발의 핵심 자료이며, 데이터를 저장, 처리, 분석할 수 있는 고성능 데이터 센터가 필수적이다. 경주는 이러한 중요한 전력 공급원의 핵심 인프라를 지역 내에 구축함으로써, 한국과 전 세계의 디지털 경제를 지원하는 핵심 허브로 성장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SMR 산업단지와 결합된 데이터 센터는 지역 내 고용 창출, 기술 교육, 연구 개발과 같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으며, 국내외 투자자와 다양한 기업들을 유치하여 경주 지역 경제의 다각화와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 공간정보기술과 AI, 그리고 SMR의 스마트한 에너지원의 통합을 통해 경주는 글로벌 에너지 시장에서의 리더십을 확립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의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 이러한 기술적 통합은 경주를 세계적인 기술 허브로 변모시킬 수 있으며 탄소중립 시대에 첨단 기술의 결합과 전략적 이용은 단순한 발전이 아닌, 경주의 미래와 전 세계적인 지속 가능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AI 혁명과 지역 데이터 센터를 결합한 SMR 산업단지의 결합은 IT 분야와 에너지 탄소중립과 관련된 경쟁력 있는 도시가 될 것이다.
요즘 원자력계의 화두는 소형모듈원자로(SMR)이다. 소형모듈원자로는 하나의 용기에 원자로와 증기 발생기, 냉각재 펌프, 가압기 등 주요 기기를 모두 담은 일체형 원자로라는 큰 장점이 있다. 또한 기후변화대응과 탄소중립이라는 세계적인 흐름에 호응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세계 선진국에서 기술개발과 투자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80여종의 소형원자로가 개발 중에 있으며 수출 경쟁이 치열한 상황이다. 지난 4월 24일 루마니아 클라우스 요하니스 대통령이 두산에너빌리티 경남 창원 본사를 방문하여 ‘SMR’ 제작 역량을 직접 확인했다고 한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체코, 폴란드, 이집트 등 여러 나라에 원전 수출을 꿈꾸고 많은 인력과 관계자들이 수주에 공을 들이고 있다. 우리나라 정부가 2030년까지 탄소중립을 주도할 세계 최고 수준의 소형모듈원자로(i-SMR)를 상용화한다는 야심찬 목표를 갖고 있지만 쉽지만은 않다. 아직까지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고,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인허가 규정, 안전성에 관한 규제 체계가 만들어지지 못했다. 천년역사도시 경주에는 한국원자력연구원이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미래원자력 시장을 선도적으로 개척하겠다는 슬로건으로 혁신원자력연구단지 ‘문무대왕과학연구소’를 조성 중이다. 감포 나정리, 대본리 일원에서 지난 2021년 7월 착공해 2025년 준공을 목표로 연구지원시설인(보안통제시설, 전력, 통신, 기계실) 행정동 등 일부 시설은 완공된 것 같다. 앞으로도 연구기반시설(첨단연구동, 방사선감시, 방재시설, 원자력비상훈련시설 등), 지역연계시설(방사성폐기물정밀분석시설, 지역협력, 시민안전소통센터 등), 기술협력센터(원자력기술기업입주, 창업 및 지역원자력기업협력), 핵심연구시설(SMR실증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다. 주요구축시설 내용만 보면 엄청난 규모인 것 같다. 경주시 자료에 보면 사업비가 7064억원(국비 3224억, 도비 410억, 시비 110억, 민간 2420억, 문무대왕면에 건립할 예정(무산됨)이었던 에너지박물관 건립 예산(2000억원)중 900억)이다. 여기서 민간투자비용을 빼면 4644억원 정도가 되는 큰 예산이다. 이렇게 황금 알이라도 낳는 것처럼 정부나 원자력산업계가 난리법석을 떨고 있는데 소형모듈원자로(SMR)의 장점도 많지만 단점과 위험 요인도 엄청 많고 아직까지 검증되지 않은 기술이라 섣부른 여론형성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럼 SMR(Small Modular Reactor)은 정말로 차세대 원전인가. SMR(소형모듈원자로)은 기존 대형원전의 약 100분의 1(전기출력 300MWe) 이하의 수준으로 축소한 것이 특징이다. SMR의 장점은 전력망과 무관한 분산형 전원, 수소생산, 해수담수화, 재생에너지의 간헐성 보완, 건설비용과 건설기간의 대폭 절감, 이동의 장점을 갖고 있다. SMR의 단점으로는 원전에 대한 주민수용성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고, 핵폐기물의 보관, 이동, 처리가 여전히 난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경제성과 재생에너지에 대한 유연성 확보가 우려된다. SMR(소형모듈원자로)도 전기출력의 용량이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핵연료가 장전되면 핵발전소이고, 그러면 핵폐기물이 나오고, 안전과 규제에 대한 국민의 불안감은 가중될 것이다. 해상용 상업원전의 선두주자인 러시아를 비롯해서 원전강국인 미국, 프랑스, 중국, 영국, 캐나다 등 여러 나라에서 SMR의 정책지원과 경쟁력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문제는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개발한다고 해도 안전성과 상업화를 이루지 못하면 용두사미에 그치고 만다. 최근 프랑스의 에너지 환경자문 단체(E&E 컨설턴트)의 앙투완 봉듀엘(프랑스 기후행동네트워크 공동창립자)이 작성한 보고서가 눈길을 끌고 있다. 110페이지가 넘는 보고서 ‘SMR 핵산업계의 새로운 신기루’에 따르면 “SMR은 많은 언론의 관심을 끌고 있지만 그것에 대한 소문은 현실이나 잠재력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SMR은 핵산업의 부흥에 대한 희망을 상징하며 그것들은 60년 전에 그럴만한 이유로 버려졌던 개념을 부활시키고 있다”고 말하면서 몇 가지 이유로 SMR의 비판적(회의론)인 분석을 했다. 앙투완 봉듀엘의 발표에 따르면 “SMR은 개발초기 단계에 있다. 초기 개발비용과 구축비용이 상당히 높다. 안전과 보안의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 핵 확산 위험을 증가시킬 것이다. 노심 냉각수 공급 정지로 인한 심각한 사고는 여전히 배제되지 않는다. 더 많은 핵연료 소모와 핵폐기물 발생을 낳는다. 수소를 생산하기 위해 SMR을 사용하는 것은 값싼 재생에너지와의 경쟁을 고려할 때 수익성이 없다. 탈탄소를 위한 옵션이 아니다”라고 독립적인 기술자 입장에서 견해를 표명했다. 물론 원자력계 전문가들의 견해가 다를 수 있다고 생각은 되지만 아직까지 소형모듈원자로(SMR)의 안전성, 경제성, 유연성, 상업화에 대한 불편한 진실은 여전하다고 생각한다.
무장사(鍪藏寺)는 경주시 암곡동 동쪽의 깊은 골짝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 사찰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38대 원성왕의 아버지 효양(孝讓)이 숙부 파진찬을 추모해 절을 조성하였으며, 고려 태종(太宗)이 삼국을 통일한 후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짝에 감추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평소 서화(書畵)와 고적(古蹟)에 관심이 많았던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1724~1802)가 경주부윤[재임1760.7~1762.6]으로 있을 때 아전을 시켜 무장사 옛 터에 신라의 명필가 김생(金生)이 쓴 비석을 찾도록 지시한 적이 있었고, 재차 주변을 수색하다가 결국 수풀 속에 쪼개진 비석을 발견하였다. 김생은 팔십이 넘도록 글씨에 몰두하여 예서ㆍ행서ㆍ초서가 모두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며 그의 글은 서화 수집가에게 귀한 대접을 받았다. 아전이 “절 뒤에 콩을 가는 맷돌[磨豆磑]이 있는데, 돌의 상태가 보통의 돌과는 달랐기에 세워서 그 뒤를 살펴보니 오래된 비석의 쪼개진 반조각이었습니다”라 보고하자, 이에 장인(匠人)을 보내 몇 장을 탁본하였는데 과연 ‘무장사비’였다. 하지만 글을 읽어보고는 신라의 사한(詞翰)으로 유명했던 한림(翰林) 김육진(金陸珍)의 글씨였고, 김생의 글이 아님을 비로소 알았다. 홍양호는 한양으로 돌아온 뒤 서예와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은 상국(相國) 유척기(兪拓基,1691~1767)에게 무장사비를 찾은 일의 전말을 아뢰고 탁본 한 본을 바쳤는데, 유척기 역시 1726․1737년 두 차례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며 무장사비를 찾고 있었으니 무척 반가운 일이었다. 이 비석은 신라 39대 소성왕(昭聖王)이 승하하자 계화왕후(桂花王后)가 세운 것으로 아미타불에 대해 기록한 무장사아미타불조상사적비(阿彌陀佛造像事蹟碑)로,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비신(碑身)이 진열되어 있고,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는 무장사 절터에 그대로 남아 있다. 홍양호가 경주부윤 시절에 찾은 쪼개진 비석 조각은 전면의 절반과 후면엔 콩을 갈아 마멸된 상태였고, 1817년에 추사 김정희가 추가로 쪼개진 조각을 찾았다. 추사는 이 두 조각을 합쳐 묶고 비바람을 피해 절 뒤편 회랑에 옮겨두고 비편을 발견한 경위에 대해 방각(傍刻)하였다.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1748~1807)은 신라의 깨어진 세 비석[新羅三殘碑:무장사비․문무왕비․김유신비)을 언급하며 “무장의 의미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부도를 세우고 투구를 묻었네. 왕후가 부처를 받들어 부지런히 복을 빌었고, 아미타상만 우뚝이 서있네(鍪藏之義果安在 有建浮屠薶首鎧 椒宮奉佛薦福勤 阿彌陀像䧺嵬嵬)”라며 지난날 무기를 감춘 일과는 무관하게 왕후가 복을 빌던 곳으로 무장사를 설명한다. 육교(六橋) 이조묵(李祖默,1792~1840)과 상고당(尙古堂) 김광수(金光遂, 1699~1770)는 조선의 서화 수집가로 유명하였다. 이조묵은 『나려임랑고(羅麗琳琅攷)』의 「신라무장사비」에서 무장사가 있는 곳을‘은참산(恩站山)’으로 기록하였다. 『고운당필기』에는 신라 여왕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태조가 병장기를 보관하였다며 무기를 감춘 시기에 대해 기록이 엇갈린다. 이에 이계 홍양호의 손자인 관암(冠巖) 홍경모(洪敬謨,1774~1851)의 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라 김육진 서 무장사비 - 홍경모 무장사는 경주부의 동북쪽 암곡촌에 있다. 예전부터 신라 여주(女主)가 무기를 감춰둔 곳이라 전하고, 『여지승람』에 고려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고 이 골짝 안에 무기와 갑옷을 감추었기에 ‘무장’이라 이름 지어졌다.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비문을 쓴 자를 살펴보면 신라의 한림 김육진이고, 절의 창건이 신라 때이고 이미 ‘무장’으로 이름 지어졌었다. 『여지승람』에 고려 태조가 무기를 감추었기에 ‘무장’이라 이름 지어진 것은 어째서인가? 또 골짝 안에 무기와 갑옷을 감추었다면 고려가 감춘 무기가 절 안에 있지 않고 골짝 안에 있는가? 그렇다면 절에 감춘 무기가 신라와 고려 태조로부터 시작되고 또 일찍이 이곳에 무기를 감추었기에 이 설이 존재하는가? 절이 신라 때 창건되었고, 비석 역시 신라사람이 썼다면 신라 때 감춘 무기로 의심할 수 없다고 단정하지만, 절은 터만 남았고 비석 역시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나의 조부이신 문헌공[홍양호]께서 계림에 부윤으로 계시면서 두루 탐방하고 절 뒤에서 비석을 얻었는데, 비석은 그 절반이 부러지고 콩을 가는 맷돌이 되었다. 마침내 몇 본을 탁본해서 오니 앞면의 절반이고, 후면은 콩을 갈아 마멸되었었다. 아! 이 비석은 천여 년 고적이지만, 수풀 사이에 매몰된 지가 또한 거의 백년이나 되었다.
아줌마가 되면 서러운 것이 있다. 아픈 곳이 하나둘 생기면서 나이가 드는구나 싶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 서러운 것은 세상이 무조건 공정하고, 모든 일이 상식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상적’이라는 말이 탄생한 연유가 이래서일까? 그래서 ‘홍길동이 만든 나라의 이름은 이상국이고 외국의 판타지 장르가 인기를 끈 것이 아닌가’하며 아줌마식 요상한 생각도 해본다. 이런 요상한 생각으로 이상국이 아닌 현실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그래, 그럴 수 있지’하면서 적당히 포기하고 살고 있지만, ‘이건 정말 아니지’ 한 것이 있다. 급발진 사고로 손자가 사망했는데, 그 차를 운전했던 할머니가 교통사고 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기소된 일이었다. 나중에 무혐의를 받았지만, 한순간에 아들을 잃은 부모가 어머님을 모시고 경찰서를 드나들고 언론 앞에 서는 모습을 보며, “이건 정말 아니다, 너무 하잖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동차에 갈수록 전자 기품이 많이 들어가고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우리가 쓰는 컴퓨터가 그렇지 않은가? 갑자기 오류가 발생하면 껐다 켰다를 하거나, 꺼지지도 않을 때는 강제 종료하면 대다수 오류가 해결된다. 문제는 자동차다. 자동차는 컴퓨터와 달리 우리 목숨과 연계되어 있다. 컴퓨터는 단순히 지켜보는 화면일 뿐이지만 자동차는 우리가 타고 이동하는 운송 수단이다. 나날이 늘어나는 전자기기들과 소프트웨어들이 자동차 안에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고 단순히 생각했다. 그래서 급발진이 생기는구나 싶었다. 그러나 CCTV나 블랙박스에서 보여주는 급발진 정황은 공포였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공포스러웠던 것은 급발진이 아니라는 것을 제조사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급발진이라는 것을 소비자가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결과로 단 한 건의 사고도 급발진으로 인정되지 않았으며, 현재 우리는 모두 급발진의 예비 피해자이자 급발진 교통사고의 가해자가 된 셈이다. 급발진은 운빨인가? 누구나 갖고 가야 할 시한폭탄인가? 그 차에 동승했던 가족이 다치거나 사망했다면, 커다란 슬픔에 빠지기보다 나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경찰서를 들락거려야 하는 것이 맞는 건가? 강릉 급발진 사고 이전에도, 이건 누가 봐도 ‘급발진이구나’ 싶은 일들이 있었지만, 인정되지 않는 과정을 보며 답답함을 느꼈었다. 그러나 금쪽같은 손자를, 자신이 운전하던 차에서 잃은 할머니, 그런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저곳을 다녀야 하는 아들이자, 아들을 잃은 아빠를 보며 이건 너무 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앞으로 다가올 자율주행 시대에도 급발진의 위험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완벽한 이상국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정한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너무 갔다 싶은 것은, 고쳐야 하지 않을까? 급발진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고를 다 보자는 것이 아니다. 운전자가 사고를 내면 일단 급발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안다. 핑계로 대는 모든 사고를 제조사에 무죄의 증명 책임을 전가하는 것도 무리라고 본다. 부메랑처럼 그 대가는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아는 아줌마다. 1, 2차적으로 급발진이 확신되는 사례만 거르는 과정을 만들고 이런 사고들을 모아서 지금 시스템으로 밝힐 수 없었던 이유와 이걸 밝힐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하는 것이, 두 번째 과정이 돼야 하며, 이런 사고에 대한 보상과 처리시스템을 기업과 사회, 보험과 관련된 전문가들이 논의하여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치지 않고 모두가 적당히 합의 볼 수 있는 안을 고심하는 세 번째 과정이 이루어지면 어떨까? 강릉 급발진 사고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두 번 다시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그가 저지르지 않은 잘못을 죄로 물어서는 안 된다.
19세기 러시아 예술사의 3대장은 문학의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 1828-1910), 미술의 레핀(Ilya Yefimovich Repin, 1844-1930), 그리고 음악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이다. 차이콥스키는 음악후진국인 러시아의 음악을 서유럽의 수준까지 끌어올린 음악가로 평가받는다. 처음에는 글린카(Mikhail Ivanovich Glinka, 1804-1857)나 발레키레프(Milii Alekseevich Balakirev, 1837-1910)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 색채를 띠는 음악을 선보였으나 이후 서구화에 경도되어 민족주의 러시아 5인조와 대립하게 된다. 차이콥스키의 부모는 그를 법률가로 키우려 했다. 차이콥스키는 1859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법무성에서 근무했다. 안정적인 직업이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그를 루빈시테인 형제에게로 이끌었다. 1860년에 안톤 루빈시테인(Anton Grigorievich Rubinshtein, 1829-1894)과 니콜라이 루빈시테인(Nikolai Grigorievich Rubinshtein, 1835-1881) 형제의 음악교실에 입학한다. 이 음악교실은 1862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으로 승격되었고, 차이콥스키는 이 음악원의 1기 학생이 된다. 이후 실력을 인정받아 1865년에는 동생인 니콜라이 루빈시테인이 설립한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가 된다. 차이콥스키는 동성애자였다. 이는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당시에 동성애는 죄악이라 여겨졌기에 차이콥스키는 여성과의 결혼으로 자신에 대한 성적 의심을 묻어버리려고 했다. 9살이나 어린 모스크바 음악원의 제자였던 안토니나 밀류코바가 그 상대였다. 마침 그녀는 차이콥스키에게 열성적으로 구애했다. 심지어는 결혼해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1877년(차이콥스키 나이 37살) 결국 비극적인 결혼이 성사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 생활이 행복할 리 만무다. 차이콥스키는 버티다 못해 도망쳐 버렸고 자살을 시도했다. 차가운 강물에 뛰어들었지만 다행히 목숨은 건진다. 차이콥스키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멀리서 지켜보며 가슴 졸인 여성이 있었다. 러시아 철도왕의 미망인인 폰 메크(Nadezhda von Meck, 1831-1894) 부인이었다. 그녀는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진정으로 좋아했다. 그래서 그를 후원하기에 이른다. 후원 조건은 단 하나, ‘서로 만나지 않는 것’ 이었다. 차이콥스키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음악에 전념할 수 있을 정도의 큰 돈을 받았다. 이때가 1878년 이었으니 결혼생활이 정리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10년이 넘은 세월동안 차이콥스키는 폰 메크 부인과 120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플라토닉한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1890년에 차이콥스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폰 메크 부인이 파산을 이유로 더 이상 후원할 수 없음을 통보한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폰 메크 부인의 파산은 후원중단의 구실에 불과하다. 결정적인 이유는 폰 메크 부인이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폰 메크 부인의 일방적인 후원중단으로 차이콥스키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그리고 불과 3년 후에 그는 죽는다. 이때가 1893년이다.
국립공원공단 경주국립공원사무소는 ‘경주국립공원 시민대학 15기’ 참여자를 모집한다. 시민대학은 국립공원에 대한 이해 증진 및 환경보호 이행 노력에 동참할 지역사회 환경리더 양성을 위해 운영한다. 올해 프로그램은 6월 15일부터 8월 3일까지 총 8주간 매주 토요일에 운영될 예정이다. 국립공원의 제도와 정책, 역사문화 및 강좌로 구성된다. 경주국립공원사무소는 시민대학을 2010년부터 매년 운영하고 있으며, 교육비는 무료다. 참여신청서는 6월 9일까지 방문·이메일·우편을 통해 접수하면 된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경주국립공원사무소 누리집(http://gyeongju.knps.or.kr) 혹은 사무소 담당자에게 문의하면 된다. 강순성 문화자원과장은 “환경보호와 국립공원에 관심 있는 분들은 누구나 참여 가능하다”며 “시민대학을 통해 환경 및 국립공원의 소중함을 느끼고 국립공원 관리에 적극 참여를 부탁한다”고 전했다.
(사)대한노인회 경주시지회 경로당행복선생님들은 지난 23일부터 국민건강보험공단 경주지사와 함께 ‘약물 오남용 예방 교육’ 강화에 나섰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경주지사와 노인회 경주시지회는 지난 2023년 업무협약 체결 후 어르신들의 건강과 관련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공단으로부터 관련 교육을 받은 행복선생님들은 앞으로 어르신들의 건강 유지에 도움이 되도록 약물에 대한 정보를 영상과 교육으로 제공할 계획이다. 주요 정보로는 ‘약은 충분한 물과 복용해야 한다. 약이 체내에 흡수돼 약효를 내기 위해서는 물과 함께 복용하는 것이 좋다. 물 없이 약을 복용하게 되면 식도나 위에 자극을 주어 염증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으며 약의 흡수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내용이다. 또 ‘약을 우유와 복용할 경우는 약 성분이 흡수되지 않아 약효를 방해하거나 위산과다로 위장 장애가 나타날 수 있다. 약을 음료와 함께 복용할 경우는 주스의 산성 성질로 원하지 않는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특히 자몽주스의 경우 일부 항암제나 약물의 대사 및 흡수에 영향을 주어 복용이 금지되는 경우가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행복선생님들은 “이번 교육으로 건강을 지키는 일은 현명하고 안전하게 의약품을 사용하는 것과 의약품에 대한 많은 정보를 많이 알게 됐다”면서 “앞으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하는 유해 약물 예방 교육으로 안전한 경로당을 만들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약물 오남용 예방 교육은 약물 전문가인 이향이 약사가 노인회 경주시지회를 방문해 진행됐다. 이 약사는 대구마약퇴치운동본부 본부장, 식품의약안전처 마약류안전관리 심의위원, 대구광역시약사회 다제약물관리사업단장 등을 맡고 있다. 이향이 약사는 “약에 대한 정확한 인지가 중요한 맞춤 교육을 통해 몸에 해로운 물질이 보편화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스스로 약에 대해 정확히 알고, 오남용하지 않도록 걱정 없는 건강한 경주시 경로당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주시시설관리공단은 토함산자연휴양림 야영장을 6월 1일 개장해 오는 10월까지 운영한다. 토함산자연휴양림 숲속에 자리 잡은 야영장은 넓은 면적(2228평)으로 자연 속에서 청량함 가득한 캠핑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아 매년 전국에서 많은 캠핑객들이 찾고 있다. 야영장에는 목재데크, 숲 도서관을 비롯해 취사장, 샤워장, 화장실 등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다. 데크는 3m*3.5m ~ 4.7m*4.2m의 다양한 크기로 구성돼있다. 또 야영장 운영기간 동안 하루 두 번(오전 10시, 오후 3시) 숲 해설 프로그램을 무료로 운영한다. 이외에도 화분만들기 체험, 목공 체험프로그램을 추가 운영해 토함산자연휴양림을 찾는 이용객에게 다양한 즐길 거리를 제공할 예정이다. 또한 야영장 이용객들이 안전하고 쾌적하게 캠핑을 즐길 수 있도록 사전 야영장 시설물 점검을 비롯해 야영데크, 전망대 및 양방향 데크로드의 오일스테인 도장 작업을 완료했다. 야영장은 ‘숲나들e’나 ‘토함산자연휴양림 홈페이지’에서 예약 가능하다. 이용료는 데크 1면당 1박에 2만5000원이다. 지역주민을 비롯해 장애인, 국가유공자 등 할인요건 해당 시에는 30% 할인된다.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를 참조하거나 토함산자연휴양림으로 문의하면 된다.
‘2024 한수원과 함께하는 경주 바람의 언덕 전국 힐클라임 대회’가 지난 26일 전국 자전거 동호인 6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한수원(주) 월성원자력본부 후원으로 경주시 자전거연맹이 주관한 대회는 올해 2회째다. 경기는 싸이클 15개부, MTB 15개부 등 총 30개의 종목으로 열렸다. 한수원 본사에서 기림사까지 왕복 약 16km의 퍼레이드 후 풍력발전소 주차장까지 총 7km의 언덕을 오르는 코스로, 맑은 공기와 푸른 숲의 토함산을 배경으로 활기찬 라이딩이 펼쳐졌다. 또 월성본부는 참가선수들과 가족들을 대상으로 ‘찾아가는 원·바·퀴’, ‘SNS 이벤트’, ‘무료음료 푸드트럭 이벤트’ 등을 시행했다. 특히 원자력바로알기 퀴즈를 맞추고 룰렛을 돌려 선물을 증정하는 홍보부스는 많은 참가자들이 찾았으며, 월성2·3·4호기 계속운전 의향 설문조사도 진행됐다. 김한성 본부장은 “자전거는 두 다리를 동력으로 움직이며, 건강과 환경을 보급하는 친환경적인 이동수단”이라며 “한수원도 친환경에너지 기업으로 미래 세대에 깨끗하고 맑은 자연을 물려주며 사회와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인사말을 전했다. 대회를 주관한 정상희 경주시자전거연맹 회장은 “토함산을 배경으로 무공해 청정고장인 문무대왕면 장항리에서 자전거를 사랑하는 분들과 함께 치러지는 대회는 우정을 나누면서 즐겁고 행복한 기억을 남길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이번 대회는 16개 종목에서 수상자가 나왔다. 사이클부문 최고기록자 남자4부(45세 이하) 1위 TAZA클럽 최주은(20분32초06), MTB부분 최고기록자 남자3부(40세 이하) 1위 와츠레이싱클럽 권기원(21분32초39) 등 60명이 수상했다.
미래 먹거리 산업인 푸드테크 트렌드를 제시하는 경상북도 식품박람회가 오는 6월 5일부터 7일까지 3일간 경주화백컨벤션센터에서 열린다. ‘Eat the 경북, 잇다 Future’를 주제로 열리는 이번 식품박람회는 도내 식품의 우수성과 다양성을 알리고 식품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제시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번 행사는 전시행사(주제 전시관, 식품 비즈니스관, 식품산업 정보관), 부대행사(요리대회, 푸드테크 컨퍼런스 등), 부대공간(휴게공간, 포토존 등)으로 나눠 진행한다. 특히 푸드테크의 집합체인 미래형 주방 K-키친을 선보이고,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외식테크 세미나, 전국 최초 푸드테크 요리경연대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주제 전시관에는 미래형 K-키친 홍보관과 조리형 로봇 소개를 비롯해 해외에서 각광받고 있는 스트릿푸드 소개·시식이 펼쳐진다. 식품비즈니스관에는 도내 우수한 식품 전시·판매, 식품산업 정보관에서는 외식산업 디지털대전환 및 마약류 근절 홍보가 이뤄진다. 부대행사 중 가장 눈여겨 볼만한 것은 행사 첫날 전국 제과제빵 및 공예 경연 대회와 푸드테크 요리경연대회, 둘째 날 나만의 김밥요리 경연대회다. 경주시는 이번 식품박람회 행사와 연계해 원데이클래스와 비건디저트 만들기 체험관을 운영한다. 원데이클래스는 6일 어린이들과 어른들이 친환경 재료인 커피 팥소와 천연가루를 넣은 APEC 경주 바람떡 만들기를 진행한다. 행사 마지막 날에는 식물성 단백질인 콩과 두부를 활용한 건강 비건 도시락인 쌈밥 만들기를 선보인다. 관람은 무료다. 행사 관련 보다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www.gbfoodexpo.co.kr)를 참고하거나 운영사무국으로 문의하면 된다. 경주시 관계자는 “이번 식품박람회에는 미래형 주방 K-키친 소개와 로컬의 세계화 K-food 트렌드를 전시하는 특별한 공간을 준비했다”며 “행사 기간 관심 있는 시민들과 관광객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란다”고 말했다.
여왕 선덕 구층탑을 세우다 황룡사 터는 8800여평에 달한다고 한다. 불국사의 8배나 된다는데 내 안목으로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1976년부터 시작된 황룡사 터 발굴은 1983년 11월까지 8년간 진행되었다. 절터에 형성된 민가 100여호를 매입하여 철거한 뒤 본격 조사가 시작되었다. 발굴에 동원된 인원만도 연인원 7만8000명에 달했다. 그만큼 광대한 범위였다. 황룡사 이야기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서 어렵기 않게 찾아볼 수 있을 만큼 이목을 끈다. 진흥왕 때부터 진평왕, 선덕왕에 이르기까지 약 100여 년에 걸쳐 완공된 대사찰이기도 했다. 신라 불교의 심장이자 자부심이었다. 백제나 고구려보다 불교를 늦게 받아들인 신라는 이차돈 순교 후 불교를 공인했고, 어느 나라보다 성심을 다해 불교의 꽃을 피웠다. 그도 그럴 것이 신라 왕경에는 가섭불이 임했던 일곱 땅이 있었다. 그중 한 곳이 황룡사였다. 황룡사에는 신라삼보(신라를 지키는 3개의 보물. 황룡사장륙상·천사옥대·황룡사구층탑) 중 두 개가 있을 만큼 중요한 사찰이었다. 절터의 면적만 보더라도 ‘신라 중심 사찰’이라는 말이 과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석가여래좌상과 두 협시보살 입상이 포함된 장륙상과 제자상이 서 있던 금당 터를 내려와 구층탑이 있던 토단에 오른다. 토단엔 사방으로 모두 8개의 초석이 흙과 풀 사이에 가지런히 박혀있다. 자로 잰 듯 일정한 간격이다. 가로 세로 1m 남짓한 초석들 중 심초석(心礎石) 하나만 토단에 우뚝 올라 있다. 매우 투박하며 둔탁하지만 매우 육중한 모습이다. 초석을 토단까지 올리려고 드잡이공이 꾀나 고생했을 것이다. 636년이었다. 선덕왕(신라 제27대 왕)이 즉위하고 5년째 되던 해(정관 10년 병신년)다. 자장법사가 중국으로 유학 갔다가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불법을 전수받을 때, 문수보살이 자장에게 일렀다. “그대 나라의 왕은 천축 찰리종(刹利種, 인도 신분 계급 가운데 왕과 왕족에 속하는 부류)의 왕으로 이미 후생에 부처가 되라는 예언을 받았습니다. 특별한 인연이 있으니 동쪽의 오랑캐나 지방 흉포한 종족과는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산과 천이 험준한 탓으로 성품이 거칠고 어그러져 미신을 많이 믿는 편입니다. 때로는 천신이 재앙을 내리지만, 법문 지식이 많은 승려들이 나라 곳곳에 있으니 군신이 편안하고 모든 백성들이 평화롭습니다” 자장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후 자장은 신비로운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곳에 어찌 오시었소?” “불타에 이르는 지혜를 얻기 위함입니다” 자장의 말을 듣고 그가 다시 물었다. “그대의 나라에 무슨 어려움이 있소?” “우리나라는 북으로는 말갈과 잇닿아 있고, 남으로는 왜국과 인접해 늘 위태롭습니다. 또한 고구려와 백제가 번갈아 수시로 국경을 침범하고 있으니 백성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자장의 걱정에 그가 말했다. “그대의 나라가 여자를 왕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여왕은 덕은 있지만 위엄이 없어 이웃 나라들이 얕잡아보는 것입니다. 그대는 지금 당장 본국으로 돌아가 나라를 살피시오” 자장이 고국으로 돌아가 무슨 일을 해야 이롭겠느냐고 물었다. “황룡사를 호위하는 용이 나의 장자입니다. 천축(인도) 바라문교 최고의 신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대는 본국으로 돌아가 절 안에 9층 탑을 세우도록 하시오. 그러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아홉 나라가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입니다. 그리고 탑을 세운 뒤에는 불교 의례인 팔관회를 열고 죄인을 사면하십시오. 그러면 외적들이 함부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오. 또 나를 위하여 서울(서라벌) 남쪽 바다 언덕에 절을 지어 나의 복을 빌어 주면 나도 역시 덕을 갚을 것이오” 642년(선덕왕 11년), 정관 17년 계묘년 자장은 당나라 황제가 내려 준 불경과 불상, 가사, 비단을 가지고 신라로 돌아왔다. 자장은 황룡사에 탑을 세워야 하는 이유를 왕에게 아뢨다. 신라는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 가 탑을 만들 장인을 보내줄 것을 청했다. 아비지(阿非知)라는 장인이 명을 받고 신라로 왔다. 이간(伊干) 용춘(龍春) 혹은 용수(龍樹)가 수하 장인 2백여 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했다. 아비지는 탑에 쓰일 나무와 돌을 다듬었다. 탑의 첫 기둥을 세우는 날 밤, 아비지는 백제가 멸망하는 징조의 꿈을 꾸었다. 아비지는 탑을 만드는 일을 그만두고자 했다. 그때 땅이 진동하며 어둠 속에서 한 노승과 장정들이 금으로 된 문에서 나와 기둥을 세우고 홀연히 사라졌다. 이에 아비지는 크게 후회하고 탑을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쇠받침 위로 높이가 42척이고 이하는 183척이다”고 찰주기(刹柱記)에 기록하고, 자장이 오대산에서 받은 사리 1백 개를 나누어 이 탑과 통도사 계단(승려가 계를 받는 제단) 및 대화사 탑에 봉안하여 용의 청을 들어 주었다. 탑을 세운 후 삼한이 하나가 되었고 고구려 왕이 신라를 치려다가 멈추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감히 범할 수 없다. 황룡사의 장륙존상과 9층 탑, 그리고 하늘이 왕(진평왕)에게 내린 옥대(天賜玉帶)가 그것이다” 해동 명현인 안홍(安弘)이 찬술한 《동도성립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신라 제27대에 여자가 임금이 되니 도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구한이 침범하니, 만일 용궁 남쪽 황룡사에 9층 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침략하는 재난을 억누를 수 있으리라’ 황룡사 목탑을 세운 후 여왕의 위엄은 높아졌다. 황룡사 9층 탑은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뻗어 올린 여왕의 위상을 더욱 확고히 했다. 신라 사람들은 지금껏 보아온 어떤 탑에서도 볼 수 없었던 기술적 도전과 성취에 놀랐다. 또한 눈앞에 펼쳐진 걸작을 목도하고 여왕의 위엄에 손을 모았다. 9층 탑은 여왕이 이루어낸 놀라운 업적과 끊임없는 열정의 상징이 되었다. 그렇지만 목탑은 많은 시련을 겪게 된다. 698년 효소왕 7년(제32대 왕) 6월, 탑에 첫 벼락이 떨어졌다. 868년 경문왕(제48대 왕) 때 두 번째 벼락이 떨어지고, 953년 고려 광종 5년 10월에 세 번째 벼락이 떨어졌다. 정종 2년 네 번째 벼락이, 1095년 현종 말년에 다섯 번째 벼락이 떨어졌다. 벼락이 떨어질 때마다 수리를 거듭하던 탑은 1238년 고종 16년 겨울, 몽골의 침략으로 화마에 휩싸이게 된다. 몽골의 침입으로 황룡사와 9층 탑, 장육존상과 제자상 및 모든 전각이 불에 타 사라지고 만다. 무려 29년간 진행된 몽골의 침입으로 흥왕사가 소실되고 대구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초조대장경이 불타는가 하면, 한반도 전역에서 수많은 문화재가 잿더미가 되었다. 동아시아의 중심이 되고자 했던 신라의 커다란 꿈과 희망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사라졌다. 황룡사 대종 어디로 갔을까 몽골의 침입으로 사라진 유물이 또 하나 있다. 대종이다. 황룡사에는 큰 종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는 754년 경덕대왕(신라 제35대 왕) 13년에 효정이왕(孝貞伊王, 삼모부인의 삼촌)과 아들을 못 낳는다는 이유로 경덕왕에 의해 출궁되어 사량부인에 봉해진 삼모부인(三毛夫人)의 시주로 종을 주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종을 만든 장인은 금입택 35채 중 한 곳인 이상택(里上宅) 집안의 하인이었다고 한다. 종의 길이가 1장(丈) 3치이고, 두께가 9치이며, 무게는 499만7581근이었다. 화마에 목탑이 전소되었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 거대한 종이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 국립경주박물관에 현존하는 성덕대왕신종보다 약 4배는 더 컸을 것으로 짐작되는 황룡사 대종은 어디로 갔을까? 경주 시가지에서 동해로 가는 길엔 ‘대종천(大鍾川)’이라는 큰 하천이 있다. 토함산 자락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시작해 감은사를 지나 동해와 만나는 물줄기다. 몽골군이 대종을 전리품으로 본국에 가져가기 위해 종을 배에 실었지만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대종천에 빠뜨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큰 비가 내리면 토함산에서 흘러내린 거센 물살에 대종도 동해로 쓸려갔다는 것이다. 감포 인근 주민들은 파도가 심한 날엔 바다 어디쯤에서 종소리가 난다고 한다. 대종을 찾기 위해 감포 앞바다를 여러 차례 수중 탐색했다. 어느 어민이 잠수 중 둥그스름한 무엇인가를 보았다는 제보를 했지만 대종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사라진 대종이 바다 속에 있다면 수중 초와 물고기들에게 신라의 이야기를 들려주겠지. 그러다 이 너른 초지가 그리우면 불쑥 나타나 이 너른 초지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지금 경주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신종처럼 힘차게 서라벌 초지에 울려 퍼지면 한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사단법인 환경운동실천협의회(이하 환실협)는 제23회 저소득층 아동 돕기 일일 바자회를 열어 마련된 수익금 300만원을 경주교육지원청에 장학금으로 기탁했다. <사진> 장학금은 지난 22일 경주교육지원청 교육장실에서 전달했다. 김헌규 환실협 총재는 “경주지역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저소득층 아동청소년들을 격려하기 위해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장학금을 전달하게 됐다”면서 “지속적으로 장학금을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권대훈 교육장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어려서부터 꿈을 끼우지 못하는 학생이 많다”면서 “기부단체의 고귀한 뜻에 감사드리며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한편 환실협은 저소득층 학생들을 돕기 위한 바자회를 23년째 이어오고 있다. 또 바자회 수익금의 일부는 해외 봉사를 통해 필리핀 실랑시에 쌀과 생필품을 후원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사단법인 가경사회서비스지원센터는 ‘2024년 경상북도 신중년 사회공헌활동 지원사업’을 시작한다. <사진> 신중년 사회공헌활동 지원사업은 만 50세~ 70세 미만의 퇴직한 신중년 세대의 경험과 노하우를 지역사회에 환원하는 동시에 사회공헌 활동으로 재능을 기부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활동 분야는 문화예술 및 행정지원, 사회서비스, 상담ㆍ멘토링, 요리, 이ㆍ미용 등 74개의 다양한 분야로 재능기부를 할 수 있다. 참여자 자격요건은 활동희망 분야에 해당하는 전문자격증, 3년 이상의 경력, 30시간 이상의 교육 수료 중 1가지 요건에 해당하면 된다. 강봉구 센터장은 “전문지식과 노하우를 가진 신중년이 사회적기업 및 비영리단체 등의 기관 연계를 통해 사회공헌활동으로 제2의 인생에 꽃을 피워 지역사회에 필요한 역할수행을 통해 긍지와 성취감을 함양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한편 경북도는 재능기부를 통해 지역사회를 위해 공헌하고자 하는 ‘신중년 사회공헌활동 지원사업’ 참여기관과 참여자를 모집하고 있다. 자격요건은 사회적기업, (예비)사회적기업, 사회적협동조합, 공공기관, 행정기관, 비영리법인 및 단체 등 전문인력의 도움이 필요한 기관이 참여할 수 있다. 신중년 사회공헌활동 지원사업 관련 세부사항은 사단법인 가경사회서비스지원센터(054-773-5002)로 문의하면 상세히 안내받을 수 있다.
대한노인회 경주시지회는 지난 21일, 22일 충주 수안보 연수원에서 열린 제25기 노인지도자 과정에서 73명이 교육을 수료했다고 밝혔다. 이번 교육은 최근 등록한 경로당 회장들을 대상으로 대한노인회 혜인중앙연수원에서 실시했다. 교육은 △지도자의 역할과 자세 △인문학과 소통 △아는 만큼 보인다 등으로 진행됐다. 경로당 운영에서의 갈등과 공감소통, 건강관리 교육, 간담회를 통한 토론과 화합을 위한 시간도 가졌다. 또 김호일 대한노인회 중앙회장이 ‘경로당 임원 리더십과 노인복지 향상 활성화’를 주제로 교육했다. 이날 수료증은 김칠식 외동분회장이 교육생을 대표해 받았으며, 표창장은 박장환 황오분회장과 박현준 천북분회장이 받았다. 특히 박장환 분회장은 93세의 고령에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어 귀감이 되고 있다. 김칠식 외동분회장은 “경로당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노후를 보내기 위해서는 임원분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리더십 교육은 모두가 꼭 들어야 한다”며 “이번 교육을 통해 어르신들께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경로당을 이용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구승회 회장은 인사말에서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교육의 중요성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경로당 회원 간 화합에도 힘써 달라”며 “특히 새로 임명된 경로당 회장님들이 겸손한 자세로 섬김과 봉사 정신으로 임해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최부자댁 가훈 중 최부자댁의 넉넉한 인심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과객을 후히 대접하라’는 말을 즐겨 인용한다. 그 해석 방법도 다양하여 누구는 이 가훈이 과객 대접을 통해 전국의 중요한 정보를 얻기 위함이라고도 하고 중앙이나 지방의 관리, 유림을 비롯한 명문가들과 우호를 증진시키는 방법이기도 하고 세상의 인심을 얻으려는 방책이었다는 평가도 한다. 대체로 다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과객을 대접하는 것은 비단 최부자댁뿐 아니라 조선시대 양반가나 부잣집에서 으레 해오던 오랜 관습이었다. 특히 양반가에서는 가장 중요한 의무가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다. 봉제사란 조상의 제사를 받들어 모신다는 뜻이고 접빈객은 과객 맞이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굳이 양반이나 부자가 아니라도 과객에게 관대했던 것은 우리 조상들의 미풍양속이었다. 60세 이상의 시골 출신 사람들이라면 어릴 때 자기 집에 낯선 외지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묵어가거나 밥을 얻어먹으러 오곤 하던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그럴 만큼 근대에 이르도록 과객들이 있었고 그들을 대접하는 문화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우리집만 해도 내 어린 시절 수시로 과객이라고 할 만한 분들이 드나들었다. 친구 사귀기 좋아하시고 온갖 모임에서 간부로 활동하셨던 아버지께서 수시로 사람들을 집으로 이끌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스님도 있었고 친척도 있었고 친구분들도 있었는데 집에 오면 며칠씩 묵어가거나 아예 몇 달씩 얹혀 살다시피 하는 분들도 있었다. 어떤 때는 큰댁에 다니러 온 분들이 우리집에서 머물다 가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우리 집만 그랬던 것도 아니고 좀 형편이 괜찮다 싶은 집에서는 보통으로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누대에 걸친 대단한 부자, 과객의 질적 수준이나 양적 숫자가 다른 집에 비해 훨씬 다양하고 많아 그런 시절에도 최부자댁의 과객대접이 남달라 보였던 것은 최부자댁이 누대에 걸쳐 대단한 부자로 지내다 보니 과객의 질적 수준이나 양적 수효가 다른 집에 비해 훨씬 다양하고 많아서 좀 더 주목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집 사랑채는 언제나 손님들이 드나들었어요. 그냥 사람들이 오가는 정도가 아니라 숫제 먹고 자고 하루 종일 붙어 있다시피 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렇지만 아무나 할아버지가 계시는 사랑채를 들락거린 것은 아니었지요. 유심히 살펴보면 사랑채는 손님들 중에서도 좀 특별한 손님들이 할아버지가 계시는 사랑채에서 함께 묵으셨어요” 최염 선생님의 회고에 따르면 최부자댁 손님들은 상객·중객·하객으로 나누어졌다. 물론 최부자댁에서 이렇게 나누었다기보다는 대체적으로 이런 경향이었다는 뜻이다. 상객대접을 받는 사람은 문파 선생님이 머무르시는 큰 사랑에서 대놓고 함께 먹고 잘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분들 중에서도 특별히 더 중요한 분들은 작은 사랑채를 통째로 비워서 편하게 계시도록 조처해 드리기도 했다. 여기에는 주로 중앙이나 지방의 권세가들 혹은 그들의 가족이나 친인척이 머물렀다. 경주는 신라의 수도였고 고려나 조선시대에도 매우 중요하게 존중받는 도시였다. 조선시대에도 ‘부(副)’를 둘 만큼 중요성을 꽤 인정해준 편이어서 경주부에는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유력한 벼슬아치들이나 경주를 유람오는 고관대작들의 친인척이 끊이질 않았다. 호텔이나 여관 같은 현대적 숙박시설이 없던 시대, 이들이 머물 수 있는 곳은 경주부에 딸린 관가의 공식 영빈관인 ‘동경관’이나 최부자댁과 같은 지방 유지의 집밖에 없었다. 특히 최부자댁은 대대로 명성이 높아서 행세깨나 한다는 사람들이 경주에 오면 대체로 최부자댁 같은 큰 집이나 내로라하는 명문가에 머무르는 것을 당연시했다. 그들 중 우대를 해야 하는 사람은 당연히 큰 사랑에 모셔졌고 거기서 선대(先代)의 최부자 가주들이랑 침식을 같이 했다. 때문에 역대의 선비나 학자 정치인 중 경주를 잠깐이라도 다녀간 분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부유하고 손님대접에 정성을 들이는 최부자댁에 머물렀다고 보는 것이 정설일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 최부자댁 뿐 아니라 다른 지방의 토호나 부잣집에서도 당연하게 여기는 것으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지만 이것을 가훈으로 정해 놓은 것이 최부자댁의 특별한 점이라 할 수 있다. 겸재, 추사, 면암, 해월, 신돌석 장군... 의친왕 이강 공, 위당, 육당, 의암, 인촌... 명사들이 모두 들렀다 간 경주의 명소 이렇게 최부자댁 다녀간 분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고 실제로 그분들이 남긴 흔적들이 있으니 대표적인 예가 겸재 정선(1676-1759)과 추사 김정희(1786-1856) 선생이다. 이런 명사들이 최부자댁 사랑채에 머물렀다는 증거는 이분들이 남긴 유적과 화첩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겸재 정선은 최부자댁 땅이 집중적으로 몰려 있고 특히 정무공 할아버지 산소를 모신 울주군에 정선이 다녀간 유적이 있어서 이를 증명하고 있다. 선사시대 암각화, 특히 고래 생태와 사냥방식이 그려져 유명한 반구대 암각화 근처에 집청정(集淸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곳은 영조 때 정무공의 후손인 사파 최진기 공이 경주 최씨 문중정자로 지은 곳인데 예로부터 풍광이 빼어나 시인묵객들이 무시로 드나들던 명소였다. 겸재 역시 이곳에 머물며 반구대 암각화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겸재는 내연산을 각별히 사랑하여 내연산 폭포도도 그렸고 그 자신 내연산이 오히려 금강산에 비해 못하지 않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겸재가 이처럼 내연산과 반구대를 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말년에 화양현감을 지냈기 때문인데 화양은 지금의 구미다. 최염 선생은 할아버지 문파 선생 당대에도 많은 유명 인사들이 최부자댁을 다녀간 것을 집중적으로 소개하셨다. 그중 역사적인 인물만 꼽아도 헤아릴 수없이 많다. 구한말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 일본에서 아사(餓死)순국한 면암 최익현(1833-1907) 선생,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1827-1898) 선생 등도 최부자댁을 다녀가신 분들이다. 최익현 선생이나 최시형 선생은 모두 경주 최씨 어른들이다. 자연히 최부자댁과 밀접한 관련되었을 것이다. 최익현 선생과 최시형 선생은 문파 선생 유년기에 최부자댁에 머무르면서 문파선생의 어린 마음에 독립운동의 정신과 사람을 존중하는 큰 뜻을 심어주신 분이다. 경상도 지방에서 활약하던 의병대장 신돌석(1878-1908) 장군도 최부자댁 사랑채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신돌석 장군은 문파 선생과 열 살도 차이가 나지 않는 분이시지만 윗대인 최현식 공의 총애를 받았고 최부자댁과 관련된 초인적인 용력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문파선생이 가주가 되신 이후로도 많은 권문세가와 저명인사들이 최부자댁을 드나들었다. 고종황제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1877-1955) 공은 낙척된 비분강개를 달래기 위해 영남일대를 유람하던 중 최부자댁에 들러 문파 선생과 사귀면서 선생께 문파(汶坡)라는 호를 직접 지어주기도 하고 직접 편액을 써 주기도 했는데 아깝게도 그 편액은 1970년, 사랑채 화재 때 함께 불타고 말았다. 지금 경주에 가면 사랑채에 문파 선생의 호를 적은 ‘汶坡’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것은 최염 선생님의 오랜 벗인 박병호 전 서울대학교 법학과 교수가 쓴 글이다. 그 편액을 자세히 보면 원래는 이강 공이 써준 글이 불에 타 없어져서 자신이 다시 쓴 내막이 적혀 있다. 일제강점기의 명사들도 최부자댁을 드나들었다. 선각자인 위당 정인보 선생과 육당 최남선 선생이 함께 최부자댁 사랑채에 머물면서 경주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동경지’를 만들기도 했다. 위당 선생은 내 모교인 경주고등학교 교정에 모셔진 학교 창립자 수봉 이규인 선생 동상에 수봉 선생을 추모하는 글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위당 선생은 끝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신 선각이셨고 육당 선생 역시 이 동경지를 만들 당시는 독립정신에 투철하셨던 시기로 일본경찰들의 탄압을 받고 있을 때였다. 이런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아무도 몰래 경주의 최부자댁에 숨어 살면서 문파선생과 유대를 이어갔던 것이다. 동학에서 천도교로 이름을 바꾼 천도교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 선생 역시 최부자댁을 다녀갔다. 손병희 선생은 문파 선생과 깊이 교유하신 분으로 나중에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학원을 문파 선생에게 인수하라고 권하셨던 분이기도 했다. 당시 문파 선생은 상해임시정부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백산주식회사를 설립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 제의를 받아들이셨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마도 지금 고려대학교의 창시자는 인촌 김성수 선생이 아닌 문파 최준 선생의 이름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문파 선생은 보성학원 인수를 인촌 김성수 선생에게 권한 장본인이다. 실제로 고려대학교를 이어받은 인촌 역시 자주 최부자댁을 다녀갔다. 김성수 선생은 특히 최부자댁 정원에 놓여있는 석수조를 고려대학교에 기증해달라고 탐냈는데 이 이야기는 뒤에 ‘최부자댁 가보’에서 상세히 할 예정이다.
건천읍은 지난 24일 올해 102세인 고령의 시어머니를 정성을 다해 봉양해오고 있는 효부 최복남(73) 씨에게 경북도지사 표창을 전달했다. 수상자 최복남 씨는 20살의 어린 나이에 시집와 시부모를 모시는 효행을 실천하고 남편을 내조하며, 자녀에게는 자애를 실천한 어머니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본인 또한 청각장애임에도 불구하고 최근 건강이 악화돼 거동이 불편한 시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며 생계를 위해 농사일에 종사하고 있어 지역 주민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김종순 건천읍장은 “최복남 씨의 헌신적인 효행은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최고의 미덕이다”며 “앞으로 효행과 같은 가치 있는 미덕을 장려해 주민들이 서로 돌보며 살아가는 따뜻한 건천읍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한편 수상인의 열악한 거주 환경을 발견한 건천읍 맞춤형복지팀 관계자는 사회복지서비스 연계를 통해 주택의 단열부분을 보강하겠다고 전했다.
고령 인구의 증가는 치매 인구 증가와 비례한다. 65세 이상 인구의 10.5%가 치매를 앓고 있다는 통계 자료를 보면 60세를 바라보며 은퇴를 앞둔 이들에게 치매 예방은 필수라고 할 수 있다. 일상에서 치매 예방을 위해 꼭 실천해야 하는 방법을 알아보자. 지난 4월 5일 보험연구원 컨퍼런스룸에서 ‘초고령사회, 치매관리 정책 방향과 보험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다. 당일까지 빈자리가 있는 여느 세미나와 달리 본 세미나는 오픈되자마자 예약석이 꽉 차는 이례적인 현상이 벌어졌다. 예약전쟁의 열기가 그대로 이어진 듯 세미나장은 열기로 가득했다. 치매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이 굉장함을 시사하는 한 장면이었다. 65세 이상 인구의 10명 중 3.3명은 치매 증상 중앙치매센터에 의하면 2024년 3월 17일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인구 중 치매 환자 수는 105만 2,977명으로 약 10명 중 1명(10.5%)의 고령자가 치매를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경도인지장애 환자는 226만 8,856명으로 65세 인구의 22.7%를 차지한다. 경도인지장애는 기억력이나 기타 인지기능의 저하가 객관적인 검사에서 확인될 정도로 뚜렷하게 감퇴된 상태이나, 일상생활을 수행하는 능력은 보존되어 있어 아직은 치매가 아닌 상태를 의미한다. 경도인지장애 환자는 일종의 치매 예비군인 셈이다. 치매 환자와 경도인지증 장애 환자를 합치면 65세 인구의 33.2%나 차지한다. 65세 이상 인구의 10명 중 3.3명이 치매 증상을 앓고 있는 것이다. 85세 이상으로 좁히면 치매 환자는 39.2%, 경도인지증 장애자는 23.3%나 된다. 이는 85세 이상 인구 10명 중 6명 이상이 치매에 노출됨을 의미한다. 2040년이 되면 어떨까? 65세 이상에서 치매 환자는 13.1%로, 경도인지증 장애 환자는 23.7%로 증가하고, 85세 이상에서는 각각 40.7%와 22.0%로 예상된다. 이날 ‘한국의 치매정책 현주소와 나아갈 길’을 발표한 상지대학교 보건의료경영학과의 송현종 교수는 우리나라의 치매 환자 수는 보수적으로 추정한 것이기에 실제로는 이보다 많을 것이라 말했다. 일본은 이미 치매대국 세계에서 가장 먼저 초고령사회에 진입했고, 흔히 노인대국이라 불리는 일본의 상황은 어떨까? 2014년 후생노동성은 일본의 치매 환자 수를 2040년 노인 4명 중 1명에서 2060년에는 3명 중 1명(34.3%)으로 증가할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2023년 닛세이기초연구소가 발표한 전망은 가히 충격적이다. 2040년 65세 이상 인구 중 치매 환자는 46.3%로 노인 2명 중 1명을 치매 환자일 것이라 추정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일본은 이제 노인대국을 넘어 치매대국으로 나아가고있다. 이에 치매[어리석을 치(癡), 어리석을 매(呆)]가 모멸감을 주는 명칭이라는 이유로 2004년 인지증으로 바꾸는 등 다양한 정책을 펼치고 있으며, 일본의 각종 단체는 치매 예방 및 관리를 위한 다양한 대책을 내놓고 있다. 이 중 공익재단법인인 인지증예방재단에서 발표한 ‘치매 예방 수칙 10’이 눈에 띄어 소개하고자 한다. 인지증예방재단의 치매 예방 수칙 10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염분과 동물성 지방을 삼가는 균형 잡힌 식사를 하자. ② 적당한 운동으로 하체(허리와 다리)를 튼튼히 하자. ③ 술과 담배를 끊고 규칙적으로 생활하자. ④ 고혈압, 비만 등 생활습관병을 예방하고 조기 발견해 치료하자. ⑤ 치매 위험을 높이는 낙상과 머리 타박상을 조심하자. ⑥ 흥미와 호기심을 갖고 생활하자. ⑦ 생각을 정리하고 표현하는 습관을 기르자. ⑧ 세심한 배려로 좋은 사귐을 만들자. ⑨ 항상 젊고 세련된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자. ⑩ 끙끙 앓지 말고 밝은 기분으로 생활하자. 노인들은 일상생활과 자신의 과거를 암흑으로 만들어버리는 치매를 암보다도 더 무섭고 두려워하는 노인질환 1위로 꼽는다. 치매의 색상이 암흑이라면, 치매 예방 수칙 10의 색상은 밝음이다. 밝은 분위기로 적극적으로 생활하면 암흑을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치매 예방 수칙 10의 특징은 큰돈 들이지 않고도 일상생활에서 얼마든지 실행할 수 있는 것들이란 점이다. 치매 예방 실천 방법 치매 예방 수칙 10의 실천을 위해 다양한 방법을 이용할 수 있다. 최근 일본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몇 가지를 소개한다. 먼저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는 ‘나가라(~하면서)운동’이다. 여기에는 빨래 개면서 노래 부르기, 여러 요리를 동시에 만들기, 걸으면서 끝말잇기하기 등이 있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모두 일상생활에서 쉽게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두 번째는 두뇌 훈련법이다. 치매 예방에 효과적인 두뇌 훈련법으로는 글자 쓰기, 계산문제 풀기, 종이접기, 색칠하기 등이 있다. 이러한 활동은 사고력과 판단력을 높여주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과정에서 뇌가 활성화된다. 한 가지 방법을 반복적으로 수행하기보다는 다양한 방법을 이용하면 효과가 더 좋다고 한다. 비디오게임과 바둑·장기도 두뇌 훈련에 좋다고 한다. 비디오게임은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생각하거나 눈으로 영상의 변화를 쫓아가는 과정에서 뇌가 자극된다. 특히 반사적인 조작을 요구하는 액션 게임이나 즐기면서 뇌를 단련하는 두뇌 트레이닝 계열의 게임이 좋다고 한다. 바둑과 장기는 상대방의 손이나 수의 전개를 생각해야 하므로 기억력과 사고력을 높여준다고 한다. 아울러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끼리 소통할 수 있는 점도 매력 포인트의 하나라고. 손가락을 사용하거나 숨을 불어넣는 악기 연주도 뇌의 자극과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악기 연주는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과 악보를 읽는 것을 동시에 수행하는 일이다. 손에 잡기 쉬우면서 가격도 비교적 저렴한 악기로는 오카리나와 하모니카, 리코더 등이 있다. 이들 악기의 연주법을 배울 기회는 각종 문화센터 등에서 자주 접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다양한 치매 예방법을 살펴봤는데 공통분모라 여겨지는 것은 두 가지의 일을 한꺼번에 실행하는 듀얼 태스킹(Dual tasking)이다. 하나도 어려운데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하라고! 너무 어려운 거 아닌가! 이렇게 불평불만만 토로하다간 어느새 치매 문턱에 다다를 수 있다. 치매 예방 수칙 10에서 강조했듯이 밝고 적극적인 분위기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자! 글: 한국연금연구소장 손성동 자료제공 : 한국건강관리협회 대구광역시지부 건강검진센터 자료출처 : 한국건강관리협회 건강소식 발췌
한국계 미국인 작가 진 마이어슨의 개인전 ‘Finding The Shore’이 우양미술관 2전시실에서 오는 9월 1일까지 열린다. 진 마이어슨(1972~)은 어린 시절 미국으로 입양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과정을 작품에 담아내고 있다. 그의 작품은 어린 시절의 기억과 정체성을 찾기 위한 여정을 섬세하고도 강렬한 시각적 언어로 풀어내며, 관람객으로 하여금 그의 내면 세계를 깊이 탐구하게 한다. 마이어슨 작가는 개인적 경험과 사회적 이슈를 폭넓게 아우르는 이미지를 수집하고, 이를 포토샵, 컴퓨터 그래픽, 3D 스캔 등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무작위 왜곡, 반전, 확장과 축소를 반복적으로 실행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뒤틀린 이미지는 붓으로 캔버스에 옮겨지며, 작가의 의지에 따라 변형된 형태로 표현된다. 이 왜곡은 사람의 기억의 한계를 시각화하고, 1976년 미국으로 입양됐던 작가의 트라우마와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그의 작품 속 왜곡된 이미지는 마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우리에게 기억의 불완전함과 정체성의 복잡함을 일깨워주는 듯하다. 전시는 대형 삼베에 투영된 아련한 그래픽 이미지로 시작되며, 이는 작가의 과거와 현재의 흐름을 한눈에 보여주는 주요 작품들로 이어진다. 전시장 전체에 흐르는 독특한 아우라는 진 마이어슨 작가의 ‘의미 있는 회복의 시간’을 강렬하게 느끼게 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마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우리를 작가의 기억 속으로 이끌어들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마이어슨 작가는 “항상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품고 있고, 그림을 그리면서 제 자신을 완성해간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을 통해 관람객은 작가의 내면 세계를 깊이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문은 단순히 작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한 번쯤은 고민해본 적 있는 근본적 질문으로,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 또한 우리의 정체성을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전시 기간 동안 우양미술관 1층에서는 관람객 참여형 프로그램이 상시 운영된다. 무료로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은 일반 관람객을 대상으로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콜라주를 만들어보는 활동이다. 마이어슨 작가의 작품 속 경험을 상상하고, 나의 경험을 작품의 빈 공간에 표현해볼 수 있다. 이러한 활동은 예술 창작의 과정을 직접 체험해보는 기회를 제공하며, 관람객들에게 더욱 특별한 추억을 선사할 것이다. 우양미술관 측은 “진 마이어슨의 ‘Finding The Shore’ 전시는 우리의 기억과 정체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불러일으키며, 관람객들에게 특별한 예술적 경험을 선사할 것”이라면서 많은 관심과 관람을 바랐다. 전시 관람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며, 입장 마감 시간은 오후 5시 30분이다. 월요일 휴관. 입장료는 성인 1만2000원, 학생 1만원, 미취학 아동 8000원이며, 단체 20명 이상, 경주시민, 경주 힐튼 투숙객, 만 65세 이상, 국가유공자, 장애인 등은 할인된 요금으로 입장 가능하다.한국계 미국인 작가 진 마이어슨의 개인전 ‘Finding The Shore’이 우양미술관 2전시실에서 오는 9월 1일까지 열린다. 진 마이어슨(1972~)은 어린 시절 미국으로 입양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과정을 작품에 담아내고 있다. 그의 작품은 어린 시절의 기억과 정체성을 찾기 위한 여정을 섬세하고도 강렬한 시각적 언어로 풀어내며, 관람객으로 하여금 그의 내면 세계를 깊이 탐구하게 한다. 마이어슨 작가는 개인적 경험과 사회적 이슈를 폭넓게 아우르는 이미지를 수집하고, 이를 포토샵, 컴퓨터 그래픽, 3D 스캔 등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무작위 왜곡, 반전, 확장과 축소를 반복적으로 실행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뒤틀린 이미지는 붓으로 캔버스에 옮겨지며, 작가의 의지에 따라 변형된 형태로 표현된다. 이 왜곡은 사람의 기억의 한계를 시각화하고, 1976년 미국으로 입양됐던 작가의 트라우마와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그의 작품 속 왜곡된 이미지는 마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우리에게 기억의 불완전함과 정체성의 복잡함을 일깨워주는 듯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관람객이 작가가 직접 제작한 AR(증강현실) 콘텐츠를 QR코드를 통해 체험할 수 있다. 스마트 기기를 통해 관람객은 실제 작품과 가상의 작품, 그리고 자신이 혼재된 상황을 경험하며, 이는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작품을 통해 모두와 공유되고 재생산되는 과정을 은유한다. 이러한 인터랙티브한 경험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작품 속에 더욱 깊이 몰입하게 하며, 진 마이어슨의 예술적 세계를 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전시는 대형 삼베에 투영된 아련한 그래픽 이미지로 시작되며, 이는 작가의 과거와 현재의 흐름을 한눈에 보여주는 주요 작품들로 이어진다. 전시장 전체에 흐르는 독특한 아우라는 진 마이어슨 작가의 ‘의미 있는 회복의 시간’을 강렬하게 느끼게 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마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우리를 작가의 기억 속으로 이끌어들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마이어슨 작가는 “항상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품고 있고, 그림을 그리면서 제 자신을 완성해간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을 통해 관람객은 작가의 내면 세계를 깊이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문은 단순히 작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한 번쯤은 고민해본 적 있는 근본적 질문으로,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 또한 우리의 정체성을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전시 기간 동안 우양미술관 1층에서는 관람객 참여형 프로그램이 상시 운영된다. 무료로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은 일반 관람객을 대상으로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콜라주를 만들어보는 활동이다. 마이어슨 작가의 작품 속 경험을 상상하고, 나의 경험을 작품의 빈 공간에 표현해볼 수 있다. 이러한 활동은 예술 창작의 과정을 직접 체험해보는 기회를 제공하며, 관람객들에게 더욱 특별한 추억을 선사할 것이다. 우양미술관 측은 “진 마이어슨의 ‘Finding The Shore’ 전시는 우리의 기억과 정체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불러일으키며, 관람객들에게 특별한 예술적 경험을 선사할 것”이라면서 많은 관심과 관람을 바랐다. 전시 관람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며, 입장 마감 시간은 오후 5시 30분이다. 월요일 휴관. 입장료는 성인 1만2000원, 학생 1만원, 미취학 아동 8000원이며, 단체 20명 이상, 경주시민, 경주 힐튼 투숙객, 만 65세 이상, 국가유공자, 장애인 등은 할인된 요금으로 입장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