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가 되면 서러운 것이 있다. 아픈 곳이 하나둘 생기면서 나이가 드는구나 싶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 서러운 것은 세상이 무조건 공정하고, 모든 일이 상식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상적’이라는 말이 탄생한 연유가 이래서일까? 그래서 ‘홍길동이 만든 나라의 이름은 이상국이고 외국의 판타지 장르가 인기를 끈 것이 아닌가’하며 아줌마식 요상한 생각도 해본다. 이런 요상한 생각으로 이상국이 아닌 현실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그래, 그럴 수 있지’하면서 적당히 포기하고 살고 있지만, ‘이건 정말 아니지’ 한 것이 있다. 급발진 사고로 손자가 사망했는데, 그 차를 운전했던 할머니가 교통사고 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기소된 일이었다. 나중에 무혐의를 받았지만, 한순간에 아들을 잃은 부모가 어머님을 모시고 경찰서를 드나들고 언론 앞에 서는 모습을 보며, “이건 정말 아니다, 너무 하잖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동차에 갈수록 전자 기품이 많이 들어가고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우리가 쓰는 컴퓨터가 그렇지 않은가? 갑자기 오류가 발생하면 껐다 켰다를 하거나, 꺼지지도 않을 때는 강제 종료하면 대다수 오류가 해결된다. 문제는 자동차다. 자동차는 컴퓨터와 달리 우리 목숨과 연계되어 있다. 컴퓨터는 단순히 지켜보는 화면일 뿐이지만 자동차는 우리가 타고 이동하는 운송 수단이다. 나날이 늘어나는 전자기기들과 소프트웨어들이 자동차 안에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고 단순히 생각했다. 그래서 급발진이 생기는구나 싶었다. 그러나 CCTV나 블랙박스에서 보여주는 급발진 정황은 공포였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공포스러웠던 것은 급발진이 아니라는 것을 제조사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급발진이라는 것을 소비자가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결과로 단 한 건의 사고도 급발진으로 인정되지 않았으며, 현재 우리는 모두 급발진의 예비 피해자이자 급발진 교통사고의 가해자가 된 셈이다. 급발진은 운빨인가? 누구나 갖고 가야 할 시한폭탄인가? 그 차에 동승했던 가족이 다치거나 사망했다면, 커다란 슬픔에 빠지기보다 나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경찰서를 들락거려야 하는 것이 맞는 건가? 강릉 급발진 사고 이전에도, 이건 누가 봐도 ‘급발진이구나’ 싶은 일들이 있었지만, 인정되지 않는 과정을 보며 답답함을 느꼈었다. 그러나 금쪽같은 손자를, 자신이 운전하던 차에서 잃은 할머니, 그런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저곳을 다녀야 하는 아들이자, 아들을 잃은 아빠를 보며 이건 너무 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앞으로 다가올 자율주행 시대에도 급발진의 위험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완벽한 이상국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정한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너무 갔다 싶은 것은, 고쳐야 하지 않을까? 급발진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고를 다 보자는 것이 아니다. 운전자가 사고를 내면 일단 급발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안다. 핑계로 대는 모든 사고를 제조사에 무죄의 증명 책임을 전가하는 것도 무리라고 본다. 부메랑처럼 그 대가는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아는 아줌마다. 1, 2차적으로 급발진이 확신되는 사례만 거르는 과정을 만들고 이런 사고들을 모아서 지금 시스템으로 밝힐 수 없었던 이유와 이걸 밝힐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하는 것이, 두 번째 과정이 돼야 하며, 이런 사고에 대한 보상과 처리시스템을 기업과 사회, 보험과 관련된 전문가들이 논의하여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치지 않고 모두가 적당히 합의 볼 수 있는 안을 고심하는 세 번째 과정이 이루어지면 어떨까? 강릉 급발진 사고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두 번 다시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그가 저지르지 않은 잘못을 죄로 물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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