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러시아 예술사의 3대장은 문학의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 1828-1910), 미술의 레핀(Ilya Yefimovich Repin, 1844-1930), 그리고 음악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이다. 차이콥스키는 음악후진국인 러시아의 음악을 서유럽의 수준까지 끌어올린 음악가로 평가받는다. 처음에는 글린카(Mikhail Ivanovich Glinka, 1804-1857)나 발레키레프(Milii Alekseevich Balakirev, 1837-1910)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 색채를 띠는 음악을 선보였으나 이후 서구화에 경도되어 민족주의 러시아 5인조와 대립하게 된다. 차이콥스키의 부모는 그를 법률가로 키우려 했다. 차이콥스키는 1859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법무성에서 근무했다. 안정적인 직업이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그를 루빈시테인 형제에게로 이끌었다. 1860년에 안톤 루빈시테인(Anton Grigorievich Rubinshtein, 1829-1894)과 니콜라이 루빈시테인(Nikolai Grigorievich Rubinshtein, 1835-1881) 형제의 음악교실에 입학한다. 이 음악교실은 1862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으로 승격되었고, 차이콥스키는 이 음악원의 1기 학생이 된다. 이후 실력을 인정받아 1865년에는 동생인 니콜라이 루빈시테인이 설립한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가 된다. 차이콥스키는 동성애자였다. 이는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당시에 동성애는 죄악이라 여겨졌기에 차이콥스키는 여성과의 결혼으로 자신에 대한 성적 의심을 묻어버리려고 했다. 9살이나 어린 모스크바 음악원의 제자였던 안토니나 밀류코바가 그 상대였다. 마침 그녀는 차이콥스키에게 열성적으로 구애했다. 심지어는 결혼해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1877년(차이콥스키 나이 37살) 결국 비극적인 결혼이 성사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 생활이 행복할 리 만무다. 차이콥스키는 버티다 못해 도망쳐 버렸고 자살을 시도했다. 차가운 강물에 뛰어들었지만 다행히 목숨은 건진다. 차이콥스키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멀리서 지켜보며 가슴 졸인 여성이 있었다. 러시아 철도왕의 미망인인 폰 메크(Nadezhda von Meck, 1831-1894) 부인이었다. 그녀는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진정으로 좋아했다. 그래서 그를 후원하기에 이른다. 후원 조건은 단 하나, ‘서로 만나지 않는 것’ 이었다. 차이콥스키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음악에 전념할 수 있을 정도의 큰 돈을 받았다. 이때가 1878년 이었으니 결혼생활이 정리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10년이 넘은 세월동안 차이콥스키는 폰 메크 부인과 120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플라토닉한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1890년에 차이콥스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폰 메크 부인이 파산을 이유로 더 이상 후원할 수 없음을 통보한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폰 메크 부인의 파산은 후원중단의 구실에 불과하다. 결정적인 이유는 폰 메크 부인이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폰 메크 부인의 일방적인 후원중단으로 차이콥스키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그리고 불과 3년 후에 그는 죽는다. 이때가 1893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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