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사(鍪藏寺)는 경주시 암곡동 동쪽의 깊은 골짝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 사찰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38대 원성왕의 아버지 효양(孝讓)이 숙부 파진찬을 추모해 절을 조성하였으며, 고려 태종(太宗)이 삼국을 통일한 후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짝에 감추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평소 서화(書畵)와 고적(古蹟)에 관심이 많았던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1724~1802)가 경주부윤[재임1760.7~1762.6]으로 있을 때 아전을 시켜 무장사 옛 터에 신라의 명필가 김생(金生)이 쓴 비석을 찾도록 지시한 적이 있었고, 재차 주변을 수색하다가 결국 수풀 속에 쪼개진 비석을 발견하였다. 김생은 팔십이 넘도록 글씨에 몰두하여 예서ㆍ행서ㆍ초서가 모두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며 그의 글은 서화 수집가에게 귀한 대접을 받았다. 아전이 “절 뒤에 콩을 가는 맷돌[磨豆磑]이 있는데, 돌의 상태가 보통의 돌과는 달랐기에 세워서 그 뒤를 살펴보니 오래된 비석의 쪼개진 반조각이었습니다”라 보고하자, 이에 장인(匠人)을 보내 몇 장을 탁본하였는데 과연 ‘무장사비’였다. 하지만 글을 읽어보고는 신라의 사한(詞翰)으로 유명했던 한림(翰林) 김육진(金陸珍)의 글씨였고, 김생의 글이 아님을 비로소 알았다. 홍양호는 한양으로 돌아온 뒤 서예와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은 상국(相國) 유척기(兪拓基,1691~1767)에게 무장사비를 찾은 일의 전말을 아뢰고 탁본 한 본을 바쳤는데, 유척기 역시 1726․1737년 두 차례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며 무장사비를 찾고 있었으니 무척 반가운 일이었다. 이 비석은 신라 39대 소성왕(昭聖王)이 승하하자 계화왕후(桂花王后)가 세운 것으로 아미타불에 대해 기록한 무장사아미타불조상사적비(阿彌陀佛造像事蹟碑)로,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비신(碑身)이 진열되어 있고,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는 무장사 절터에 그대로 남아 있다. 홍양호가 경주부윤 시절에 찾은 쪼개진 비석 조각은 전면의 절반과 후면엔 콩을 갈아 마멸된 상태였고, 1817년에 추사 김정희가 추가로 쪼개진 조각을 찾았다. 추사는 이 두 조각을 합쳐 묶고 비바람을 피해 절 뒤편 회랑에 옮겨두고 비편을 발견한 경위에 대해 방각(傍刻)하였다.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1748~1807)은 신라의 깨어진 세 비석[新羅三殘碑:무장사비․문무왕비․김유신비)을 언급하며 “무장의 의미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부도를 세우고 투구를 묻었네. 왕후가 부처를 받들어 부지런히 복을 빌었고, 아미타상만 우뚝이 서있네(鍪藏之義果安在 有建浮屠薶首鎧 椒宮奉佛薦福勤 阿彌陀像䧺嵬嵬)”라며 지난날 무기를 감춘 일과는 무관하게 왕후가 복을 빌던 곳으로 무장사를 설명한다. 육교(六橋) 이조묵(李祖默,1792~1840)과 상고당(尙古堂) 김광수(金光遂, 1699~1770)는 조선의 서화 수집가로 유명하였다. 이조묵은 『나려임랑고(羅麗琳琅攷)』의 「신라무장사비」에서 무장사가 있는 곳을‘은참산(恩站山)’으로 기록하였다. 『고운당필기』에는 신라 여왕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태조가 병장기를 보관하였다며 무기를 감춘 시기에 대해 기록이 엇갈린다. 이에 이계 홍양호의 손자인 관암(冠巖) 홍경모(洪敬謨,1774~1851)의 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라 김육진 서 무장사비 - 홍경모 무장사는 경주부의 동북쪽 암곡촌에 있다. 예전부터 신라 여주(女主)가 무기를 감춰둔 곳이라 전하고, 『여지승람』에 고려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고 이 골짝 안에 무기와 갑옷을 감추었기에 ‘무장’이라 이름 지어졌다.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비문을 쓴 자를 살펴보면 신라의 한림 김육진이고, 절의 창건이 신라 때이고 이미 ‘무장’으로 이름 지어졌었다. 『여지승람』에 고려 태조가 무기를 감추었기에 ‘무장’이라 이름 지어진 것은 어째서인가? 또 골짝 안에 무기와 갑옷을 감추었다면 고려가 감춘 무기가 절 안에 있지 않고 골짝 안에 있는가? 그렇다면 절에 감춘 무기가 신라와 고려 태조로부터 시작되고 또 일찍이 이곳에 무기를 감추었기에 이 설이 존재하는가? 절이 신라 때 창건되었고, 비석 역시 신라사람이 썼다면 신라 때 감춘 무기로 의심할 수 없다고 단정하지만, 절은 터만 남았고 비석 역시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나의 조부이신 문헌공[홍양호]께서 계림에 부윤으로 계시면서 두루 탐방하고 절 뒤에서 비석을 얻었는데, 비석은 그 절반이 부러지고 콩을 가는 맷돌이 되었다. 마침내 몇 본을 탁본해서 오니 앞면의 절반이고, 후면은 콩을 갈아 마멸되었었다. 아! 이 비석은 천여 년 고적이지만, 수풀 사이에 매몰된 지가 또한 거의 백년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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