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시간 속에서 해가 금빛으로 굽이치는 갯벌로 향하는 아낙들의 모습은 마치 황금을 캐내는 듯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 순간, 나는 사진을 찍는 찰나의 시간을 오로지 나만의 것으로 소중히 간직한다. 그 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자연스러움이다. 사진을 통해 보는 이들도 같은 감정을 느끼길 바라며, 돋보이기보다는 촬영한 의도가 충실히 전달되길 바란다.
전국 곳곳의 소나무를 초토화시키고 있는 소나무재선충이 경주에서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최근 3년 사이 경주에서 소나무재선충병으로 고사하거나 피해를 입은 소나무가 5배 이상 증가했다. 경주시에 따르면 지난 2021년 감염목이 2만1848본에서 2022년 8만2820본, 지난해는 12만3819본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2002년 양남면 수렴리에서 소나무재선충병 감염목이 첫 발견된 이후 현재는 20개 읍면동, 169개 리·동으로까지 피해 면적이 확산된 상태다. 재선충 방제를 위해 매년 150억원에 이르는 예산을 투입하고 있지만, 확산일로를 걷고 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소나무재선충 방제를 위해 수종전환 등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경주시의회 김동해 의원은 지난 2일 5분 자유발언을 통해 소나무 재선충 방제를 위한 혼효림 육성 및 대체수종 전환 등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김 의원은 “경주시가 방제계획을 재수립하고 수종전환 사업을 계획하고 있지만, 예산과 산주와의 협의 등의 난관이 있다”면서 “적극적인 소나무 솎아베기와 혼효림 조성, 우량 소나무 수종 식재 등 방안을 시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재선충은 0.6~1㎜로 작지만 강력한 번식력을 갖고 있다. 북방수염하늘소, 솔수염하늘소를 매개로 소나무에 침투해 줄기부터 가지, 뿌리까지 파고들면서 수분과 양분의 이동통로를 막아 소나무를 고사시킨다. 한번 감염되면 1년 안에 말라 죽기 때문에 소나무가 멸종될지도 모른다는 예측이 가능할 만큼 위험한 존재다. 재선충병의 확산은 기후 변화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전문가들은 기온 상승에 따라 매개충의 활동 시기가 빨라지면서 감염지역도 지금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나무주사 등 예방대책이 먹혀들지 않고 있는 가운데 재선충병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감염목을 조기에 발견해 곧바로 제거하는 게 전부로 여겨진다. 문제는 소나무재선충병의 완전 방제는 지금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산림청은 소나무류의 밀도가 높고 매년 반복적으로 재선충병이 발생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수종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경주시도 재선충병의 효과적인 방제를 위해 피해 극심 지역을 중심으로 수종전환사업을 시행하고 있다고 해 귀추가 주목된다. 소나무재선충 방제체계가 사후 방제에서 사전 방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정부 및 경주시의 예산 확보와 수종전환 등 다양한 대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할 때다.
경북도의회가 개인형 이동장치(PM: Personal Mobility)에 대해 강화된 규제를 명시한 개정조례안을 가결해 곧 시행을 앞두고 있다. 개인형 이동장치의 안전한 이용을 위해 한층 더 강화된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경북도의회 정경민 의원이 대표 발의한 ‘경상북도 개인형 이동장치 이용안전 증진 조례 일부개정조례안’이 지난 6일 제349회 임시회 제2차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개정조례안을 살펴보면 개인형 이동장치의 무단방치 금지장소를 명확화했다. 무단방치 시 취할 수 있는 조치사항과 이용자 및 대여사업자 준수사항 등도 규정했다. 이중 주목할만한 규정은 개인형 이동장치를 무단방치해 통행을 방해할 경우 이동·보관·매각 등 조치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개인형 이동장치 사고는 2023년 기준 2389건으로 최근 5년간 5.3배 증가했다. 지난해 한 해에만 24명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경북도의 경우도 동일 기간 사고 건수는 무려 10배 증가했으며, 2023년 기준 83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동안 개인형 이동장치는 매년 급격히 늘어나고 있지만, 안전을 위한 규정 미비로 실효성 측면에서 많은 한계가 있었다. 경주에서도 아무 곳에나 내팽겨치다시피하는 무분별한 주정차와 위협적인 주행으로 위험천만하지만 마땅한 규제조치가 없어 교통사고와 통행 불편 등을 초래하고 있다. 이번에 경북도의회에서 개인형 이동장치의 불법 방치 등 무질서한 이용에 대한 규제 장치를 마련한 만큼 경주시도 제도적인 장치 마련을 서둘러 주길 바란다. 더 이상 개인 책임의식으로 돌릴 문제가 아니라 규제를 강화하는 법적 보완으로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
농민이 농업에 사용하기 위해 일반과세자로부터 구입하는 농업용 기자재는 ‘환급특례(농·축산·임·어업용 기자재 및 석유류에 대한 부가가치세 영세율 및 면제 적용 등에 관한 특례)’에 따라 부가가치세를 환급받을 수 있다. 자격 주체인 농민은 농업경영정보를 등록한 개인, 영농조합법인과 농업회사법인 등이다. 환급 가능한 기자재의 종류는 농민 등이 농업에 사용하기 위해 구입하는 농축산임업용 기자재다. 필름, 파이프, 포장상자, 폴리프로필레 포대, 과일봉지, 인삼재배용 지주목, 차광망, 부직포, 다겹보온덮개, 재지, 톱밥, 이야익용 멀칭종이, 방조망 및 방풍망, 양수기, 볍씨발아기, 동력배토기, 예취기, 가축급여조사료, 화훼·야생화용 종자류, 채소봉지, 버섯재배용기, 축산업용 차량방역기, 폐사축처리기, 축사세척기, 카우브러쉬, 축산 악취제거기, 동물용 의약품, 작물 지주대, 농임업용 무인 항공기, 농임업용 로더(2톤 미만) 농임업용 굴착기(1톤 미만) 동력제초기, 고압세척기, 농임업용 저온저장고(바닥면적 17㎡), 환풍기, 축산용 인공수정 주입기, 주입용기, 정액 희석제, 인큐베이터, 출하돈 선별기, 보온등, 컨트롤러 등 모두 60여 가지다. 농업용 기자재 부가가치세 환급신청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농민 등이 사업자등록이 있는 경우는 국세청 홈텍스를 이용해 환급신청이 가능하다. 둘째, 농민 등이 사업자등록이 없는 경우는 국세청 홈택스에 직접 환급신청이 되지 않지만 농업협동조합 등의 환급대행자를 통해 세무서에 환급신청이 가능하다. 조세특례제한법에 따라 각 농어민 등이 소재하는 농협 등에서는 환급신청을 대행한다. 농협 등에 대행신청서와 세금계산서, 농업경영체 등록확인서, 통장을 첨부해 구입일이 속하는 분기 말 또는 그 다음 분기말의 다음달 10일까지 신청하면 된다. 이 때 환급대행자의 조합원인 경우에는 농업경영체 등록확인서가 없어도 된다. 환급대행자는 환급받는 자로부터 1회 1인당 환급세액의 5%에 상당하는 금액을 환급대행수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규정돼있다. 농민 등이 부가가치세를 부당하게 환급 받은 경우에는 환급받은 부가세 상당액과 가산세를 추가해 세무서에서 추징한다. 실제 농민이 부가세를 부당하게 환급받을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환급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한데 과연 부당환급이라? 농민에게 농업에 필요한 기자재를 구입할 때 관련된 세금을 환급해 주는 이유는 첫째, 농민들의 경영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정책적인 이유다. 부가가치세를 환급해 줌으로써 농민들의 세금부담을 완화해 주자는 것이다. 둘째, 농민과 거래하는 거래상대방의 매출신고 누락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매출신고 누락을 예방하기 위해 거래자인 농민들에게 환급을 해줌으로써 거래상대방으로부터 세금계산서를 받도록 유도한다. 농어업, 임업용 기자재에 대한 부가가치세 환급은 농민, 어민, 임업인에게도 상당히 도움이 되는 제도다. 그러나 실제 환급을 받는 과정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고 이에 대한 개선이 필요해보인다. 첫째, 반드시 세금계산서를 첨부해서 제출해야 한다는 문제점이다. 요즘은 카드로 구매하는 경우가 많고, 현금으로 구매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카드영수증이나 현금영수증을 받게 된다. 문제는 이것으로는 부가가치세를 환급받을 수 없다. 카드영수증과 현금영수증에 부가가치세가 기재돼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환급을 해주지 않는 것은 잘못된 세무행정이라고 여겨진다. 법 개정을 빠른 시일 내 해서 카드영수증과 현금영수증도 증빙자료로 가능하도록 세무당국에 요청해야 한다. 둘째, 환급신청을 농민들 본인 스스로 세무서에서 직접 할 수 있도록 법률을 개정해야 한다. 환급대행기관을 통해 환급 신청하면 1회 최대 5만원의 수수료를 지급해야 하는데, 세무서에 직접 신청하면 수수료를 절약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왕 농민들을 위한 정책을 편다면 농민들이 편리하고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세무정책을 추진하면 좋을 것 같다.
지역사회(경주시)에서 수행할 수 있는 메세나 활동은 첫째, 찾아가는 경주시 메세나이다. 이는 지역·사회계층 간 문화 격차 해소를 위한 문화공헌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지역·계층 간 문화적 불평등 해소에 기여할 수 있다. 둘째, 경주시 출연기업들과 협력하여 문화소외계층, 지역사회, 기업 임직원, 예술을 사랑하는 일반인 등과의 ‘문화나눔’, ‘Arts for Children’ 및 ‘Access Arts’ 사업의 기획·운영이다. 이를 통해 각 기업에 맞는 맞춤형 문화공헌 사업을 통해 기업에는 브랜드 가치 상승의 기회를 제공하고, 일반 시민의 문화향유 기회 확대할 수 있다. 셋째, 미래세대가 예술을 배우고 체험하게 하는 사업이다. 아동·청소년을 위한 예술교육 사업으로 예술체험 캠프, 전시회 개최, 청소년 진로체험, 장르별 영재 육성 등 다양한 형태의 프로그램의 지원을 통해 성장기부터 일상 속에서 문회예술을 체험하게 하고, 건전한 시민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정신적 양식을 제공할 수 있다. 넷째, 경주시 예술지원 메칭펀드 조성활동이다. 이는 지역 기업이 예술단체에 지원하는 금액에 비례하여 문예진흥기금을 추가로 지원하는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경주시 문화예술 관련 기관과 기업의 예술지원을 장려하기 위해 공동으로 추진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1:1 매칭그랜트(Matching Grant) 방식으로 운영할 수도 있다. 다섯째, 기업과 예술의 만남에 대한 연구지원이다. 메세나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양질의 연구자의 확보, 기업 문화예술 지원 현황 조사와 연구가 수행되어야 한다. 기업 메세나 활동 DB(기업 메세나 활동을 수치로 확인할 수 있는 통계자료 확보) 구축 사업도 필요하다. 경주시와 기업, 경주문화재단은 메세나 도입, 적용, 활성화 관련 연구 사업을 지원하고 경주시 메세나 기본계획과 추진 전략 수립 연구를 통해 구체적인 전략과 로드맵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와 함께 경주시 기업과 지자체, 예술의 만남이 기록되고 대외적으로 모범사례로 확산될 수 있도록 연구 활동 지원이 지속되어야 한다. 여섯째, 제도와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경주시 메세나 관련 조례제정, 경주시 메네사협회와 경주시 메세나 기록 보관소 설립, 경주시 메세나 어워드 개최, 경주시 메세나 인증과 관련해서 경주시의회와 시(행정)의 책임감 있고 적극적인 역할 수행이 필요하다. 문화의 사회적, 경제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문화예술기본법의 제정, 문화경제전략의 책정 등 다양한 정책 분야와의 연계가 이루어지고 있다. 2018년 3월, 문화예술진흥위원회는 문화예술의 계승, 발전, 창조를 위해 문화예술이 창출하는 내재적 가치와 사회경제적 가치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활용하고 선순환을 창출’할 것을 문화예술 진흥계획 제1단계로 수립했다. 진흥계획은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들(예술가와 창작자)과 가치를 누리는 사람들(국가 전체)을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가치를 창출하는 인재의 국제 경쟁력 제고와 발표·공연· 관람환경 조성, 문화예술인의 경제적 자립과 발전을 지원하며. 가치를 향유하는 사람에게는 문화예술 활동에 친숙하게 하고 영감을 자극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지원은 기능에 따라 분류되어 지속가능한 문화예술 활동 전반과 활동 기회 제공, 활동 장소 제공 등의 대책으로 나뉜다(前田直之, 2021). 지역사회 지속가능발전문화 활성화는 다수의 사회적 행위자(social agents)에 의존한다. 지속가능발전문화는 좋은 거버넌스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 주요 원칙은 정보의 투명성과 문화 정책의 개념에 대한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참여, 의사 결정과정 및 프로그램과 프로젝트의 평가 등이 수반된다. 사회, 경제, 환경 기둥의 통합적 발전이라는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제는 지속가능발전문화 전략이 동반되어야 한다.
경주 불국사를 지나 외동 방향으로 7번국도를 타고 가다보면 우측으로 마석산(磨石山)이 우뚝하게 서있다. 마석산은 내남면 명계리와 외동읍 제내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두꺼비, 맷돌, 대포, 유두, 가시개 등 기이한 모양의 바위가 많아서 보는 즐거움이 있다. 마석산 동쪽기슭의 북토(北吐)마을은 신라 때 큰 못인 샘못[토상지(吐上池)]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리적으로 남쪽의 제내리와 냉천리, 북쪽의 정래동과 시래동, 동쪽으로 방어리와 죽동리, 서쪽은 내남면 명계리와 이어져 있다. 외동읍 북토마을 안 북토소류지를 지나 마석산 산자락에 이르면 석은(石隱) 박이민(朴以敏)을 모신 석은재(石隱齋:북토안길 49-32)가 나타난다. 비선문(飛仙門)을 통해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좌측에는 ‘密陽朴氏石隱公支下塋苑’이 있다. 박이민은 인조년간에 처사로 살면서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았고, 효도와 공경 그리고 충심과 신의로 여러 유생을 훈도하며 평생을 보냈다. 그의 존재를 알기에는 문인들의 글이 너무 소략하고, 그나마 족보를 통해 그의 행적을 다소 확인할 수 있다. 박이민은 인조 때 통정대부 첨지중추를 지냈다고 전한다. 선대의 내력을 보면 “사헌부 규정공(糾正公) 박현(朴鉉,1253~1340)부터 호조전서 박침(朴忱)은 고려 말기에 의리를 지키다 자결하였고, 아들 박강생(朴剛生,1369~1422)은 집현전 제학으로 양촌(陽村) 권근(權近,1352~1409)과 도의지교를 맺었다. 아들 박공문(朴功問)은 태종년간 좌찬성 밀성군에 봉해졌고, 아들 박중손(朴仲孫,1412~1466)은 단종년간 좌참찬 밀성군에 봉해졌다. 아들 박건(朴楗,1434~1509)은 중종년간 좌찬성 밀원부원군에 봉해졌고, 아들 박승약(朴承爚)은 의정부 검상사인(檢詳舍人)을 지냈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진계(進階)되었다. 아들 박분(朴芬)은 성균관 생원으로 중종년간 기묘사화(1519)가 일어나 양주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여러 세대를 월성의 동쪽에서 머물렀다”라며 경주에 세거한 내력을 언급하였다. 기묘사화는 훈구파가 반정 공신의 위훈(僞勳) 삭제를 빌미로 조광조 일파의 급진 개혁 정책을 막았고, 이로인해 많은 사림파가 사약과 유배를 당하였다. 이 시기에 박분이 경주로 내려왔고, 그로부터 네 세대를 지나 박이민이 광해년간에 태어났다. 정묘년(1987) 음력 5월에 지은 「석은재기」를 보면, 집안에서 재실 건립을 도모한 내력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경주부 동쪽 30리쯤 마석산 그 아래에 북토(北吐)마을이 있는데 박씨가 머물러 산지가 이미 십여 세대가 지났다. 마을 뒤에 우뚝한 봉우리 배석봉(拜石峰)이 있는데 통정 첨부를 지낸 밀양박씨 석은 박이민 공께서 살던 곳이다. 의례의 물품을 갖추고 숭배하였고, 봄과 가을 강신제(降神祭) 즈음에 제관이 재소(齋所)에서 지낼 공간이 없어 걱정이었는데, 을축년에 후손 박정래(朴炡來), 박용래(朴庸來), 박양래(朴陽來)가 여러 족친에게 묻고 도모하며 말하길, “우리 집안은 예부터 가난하여 여러 세대에 걸쳐 겨를이 없었지만, 선조의 묘소 역시 재실 하나 없다는 것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서로 정성을 다하고 힘을 모으는 것이 마침내 평소의 마음이었다”라고 하자, 모두가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재목과 기와를 옮기고, 인부를 모아서 병인년 봄을 넘겨 묘소 아래에 3칸 집채의 앞쪽에 달아 낸 칸살 집을 지었다. … 손자 박홍이(朴烘以), 박문의(朴門意)가 나에게 와서 기문을 부탁하였다. … 그 사실을 기록하고자 부족한 나에 보여주었는데, 뒤돌아보니 내가 부탁을 감당하기가 어려웠으나, 살펴보니 세대를 이어온 대략의 박씨 가문의 역사기록이었다. 후손이 선조를 기리는 일은 당연한 인간의 도리이다. 게다가 자손들이 선조를 모시는 건물을 지어서 추원보본(追遠報本:조상의 덕을 추모하여 자기의 근본을 잊지 않고 제사를 지내며 은혜를 갚음)의 정성을 다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다만 모름지기 후손들은 몸을 삼가고 행실을 닦아서 선조의 넉넉한 덕을 실추시키지 않고, 종족 간 화목을 잊지 않아서 후손들에게 오래도록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렇게 한 후에야 비로소 사람의 직분을 다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옛 법도도 쇠락하고, 천륜의 법도가 이지러져 풍속이 문란한 작금의 사태에 어찌 더욱 서로가 함께 삼가고 힘쓰지 않겠는가. 이는 모두가 공감하는 문제일 것이니, 외동읍 북토리에 자리한 석은재는 후손의 애틋한 마음이 서린 정결한 공간임이 분명하다. 필자는 올해 가을 어느 날 마석산을 오르기 전에 다시 석은재를 방문할 예정이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친일파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경험이 있다. 종이 쪼가리 한 장으로! 일본은 제국주의 성향으로 우리나라의 자원을 마구잡이로 수탈했다. 하물며 우리나라에서 생산한 쌀마저도 수탈해가서, 우리나라에서는 쌀값이 폭등하고 굶어 죽는 백성이 넘쳐났다. 더 많은 자원을 우리나라 국토 곳곳에서 일본으로 잘 수탈하기 위해 철도를 깔고 교통망을 확충했으며 전국적인 이런저런(자원에서부터 토지까지) 조사도 이루어졌다. 전쟁 이후 세대는 일제의 잔재로 인해 식민사관 교육을 받았고 그 영향은 아줌마에게도 이어졌다. 아줌마는 1980~90년대에 학교를 다녔다. 당시 선생님들이 하신 말씀 중에 식민사관의 잔재가 있었다는 것을 한참이 지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일본의 국화는 벚꽃, 우리나라의 국화는 무궁화. 벚꽃은 모이면 예쁘고 무궁화는 모아놓으면 안 예쁘다. 그래서 일본은 잘 단결하고, 우리나라는 잘 단결하지 못한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종목도 보면 단체전보다 개인전을 잘 따는 것도 그런 이유다.” 지금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고 은연중에 이런 생각을 했으며 자꾸 일본을 우러러보고 우리나라는 좀 모자라는구나 싶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서 힘든 시기를 거쳤지만, 그로 인해 우리나라 한글이 대중화되었고, 근대화되었다” 1930년대 일본은 우리나라 국민성을 말살하기 위해 한국어로 말하는 것조차 못 하게 했으며, 창씨개명(일본식 이름으로 개명)까지 시켰다. 아줌마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에서 학벌이 낮은데도 일본말을 하시는 분들의 경우가 이런 연유에서 일본어를 하시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말에 일본어의 잔재가 많이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근대화작업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리나라의 자원을 더 많이 효율적으로 수탈해가기 위해 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우리나라 정부의 출발점이 어디인가? 임시정부부터 시작인가, 독립하고 나서 이승만 정권 때부터인가? 다양한 시각의 사람들이 공존하고 의견을 나누는 것이 자유민주주의다. 그래서 다양한 시각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아줌마는 불만이 없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 때부터 우리나라가 시작되었기에 그 이전에는 주권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일본 시민이다. 그러므로 독립군은 반란군이고, 친일파는 의로운 국민이다. 그래서 친일파의 명예를 회복시키겠다고 한다. 식민사관 교육을 받고 자란 선생님께 교육을 받은 아줌마 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싶었다. 처음에는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하고 여전히 그 안에서 일본을 우러러보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한 사람이 독립기념관 관장이란다. 아줌마도 이제 반백인데, 혈압 좀 조심해야 하는 나이가 된 것 같은데, 안 도와준다. 인사청문회를 봤다. 가관이었다. 아줌마가 뒷목을 몇 번 잡았는지 모르겠다. 아줌마는 정치 잘 모른다. 머리가 뛰어나지도 않다. 학벌도 그냥저냥이다. 하지만 아줌마는 엄마다. 다른 건 모르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은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친일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고이즈미 총리가 이상한 말을 자꾸 할 때, 고이즈미 총리의 제국주의 사관과 정신을 비판했지, 노 재팬을 외치지 않았다. 역사는 반복된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전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전쟁의 폐허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경제 대국(세계 20위권 이내)을 이루었다. 그러나 잘못된 교육과 인식은 한순간에 나라를 다시 망칠 수 있다. 우리 모두 정신 바짝 차리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물감이 층층이 쌓이는 과정이 수없이 반복돼 만들어지고 표현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쌓이고, 수축해 버리는 것같이 우리가 쉽게 흘려보내는 마음의 소리들을 작가는 캔버스 위 물감들의 레이어를 통해 소리를 design한다. 이주희 작가의 초대개인전 ‘마음을 그리고 소리를 디자인하다’가 갤러리란에서 오는 29일까지 열린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매 순간 느끼는 마음의 다양한 감정과 생각, 그리고 소리와 한글을 모티브로 20여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작가는 오랫동안 대학에서 후학 양성해왔다. 이번 전시는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가의 성장과 변화를 드러내는 첫 개인전으로, 지난 작업들을 통해 발전해온 결과물이다. 그녀는 대학원에서 미술교육을 전공하며, 다양한 장르를 배우는 과정에서 느꼈던 아쉬움을 해소하기 위해 회화를 다시 전공하게 됐다고 했다. 디자인과 회화는 본질적으로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에는 많은 고민과 노력이 깊이 반영돼 있었다. 특히 한글에 대한 관심은 그녀의 작업에 중요한 요소다. 작가는 한글을 통해 디자인과 회화를 접목해 새로운 형태로 풀어내고자 많은 고민을 해왔다. “글은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으로 감정을 담아 확장된 의미를 지닌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앞으로도 다양한 창의적 작품을 통해 한글의 아름다움과 가치도 함께 전하고 싶습니다” 첫 전시를 오픈하고, 조심스럽지만 매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작가. “이전에는 다른 작가님의 개인전을 보며 그들의 노력을 단순히 감상했었는데,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저 또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작가님들이 작업을 지속하는 원동력이 감정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하게 됐고, 작품과 관객의 관점이 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물감이 층층이 쌓이는 과정은 단순한 재료의 결합이 아니라, 시간과 감정이 함께 스며드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 마음속에서 쉽게 흘러가는 소리들을 캔버스 위의 물감 레이어를 통해 디자인한 작품을 통해 관람객들이 각자의 감정을 되새기고, 나아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프로코피예프(Sergei Sergeyevich Prokofiev, 1891-1953·인물사진)는 현재 우크라이나 영토에 속하는, 당시 러시아 제국의 손초프카에서 태어났다. 음악을 하는 어머니는 프로코피예프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채고 조기 음악교육을 시켰다. 1904년(13세)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시켜 천재 아들을 후원했다. 프로코피예프는 음악원 시절에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행각으로 늘 화제를 뿌렸다고 한다. 음악원 졸업 후에도 그의 파격성은 자주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러시아 음악계는 이 젊은 음악가의 탁월한 실력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로코피예프는 1911년(20세), 러시아의 유명 음악 출판사인 유르겐손과 계약하여 작품들을 출판했고, 1913(22세)년부터는 해외 연주여행을 시작했다. 여행 중 1차대전이 발발(1914년)하자 프로코피예프는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작품 경향도 변한다. 그간의 파격 일변도에서 벗어나 교향곡 1번과 바이올린 협주곡 1번에서는 신고전주의적 성향을 보인다. 1917년(26세)에는 러시아 혁명이 터진다. 사회주의 정권 수립으로 음악활동이 위축되자 이듬해 미국으로 간다. 미국에서 프로코피예프는 피아니스트로서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회심의 작품이었던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의 초연 계획이 엎어지자 실망한 그는 다시 프랑스 파리로 간다. 여기서 수년 전 만났던 디아길레프에게 두 번째 발레 작품을 위촉받아 ‘어릿광대’를 작곡한다.(디아길레프의 첫 번째 의뢰작품인 ‘알라와 롤리’ 역시 초연 계획이 불발된 아픔이 있다.) ‘어릿광대’는 1921년(30세) 파리에서 초연되어 다행히도 큰 성공을 거둔다. 같은 해에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 역시 미국 시카고 초연에 성공한다. 1921년은 프로코피예프에게 새 도약의 계기가 된 해였다. 1927년(36세)에는 고국을 떠난 지 9년 만에 소련에서 연주 여행을 하게 된다. 레닌그라드에서 초연된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이 호평을 받게 되면서 프로코피예프는 소련으로의 복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결국 1936년(45세)에 그는 영구 귀국을 선언한다. 그리고 직전 해에 쓴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의 초연을 위해 소련 당국과 교섭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소련의 문화정책에 그의 활동은 곧바로 제동 걸린다. 결국 프로코피예프는 살아남기 위해 정권의 입맛에 맞는 작품을 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1939년 스탈린의 환갑에는 ‘건배’라는 제목의 어용 칸타타를 발표하여 정권의 칭송을 받기도 했다. 이후 프로코피예프는 거의 소련에 머물면서 영욕의 순간을 반복하다가 1953년(62세) 뇌출혈로 사망한다. 프로코피예프가 사망한 날, 스탈린도 죽었다. 스탈린 사망 소식에 묻혀 프로코피예프는 모차르트만큼이나 초라한 장례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소련을 대표하는 음악가의 명성을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사후 4년만인 1957년 레닌상을 수상했다. 소련에서 독립한 우크라이나의 대표 공항은 1973년 ‘프로코피예프 국제공항’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냉전 시절 프로코피예프는 스트라빈스키나 쇤베르크와 같이 서방에서 활약했던 음악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조명을 받았지만, 이념의 해빙기가 찾아오면서 프로코피예프는 재평가를 받는다. 지금은 가장 자주 연주되는 현대음악가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경주신문 직원협의회는 지난 9일 상반기 회의를 열고 경주신문 윤리강령 교육과 취업 규칙 개정, 주요 업무 처리 사항 등을 점검했다. <사진> 직원협의회에서는 △경주신문 윤리강령 교육 △신문사 주최 행사 진행 사항 점검 △기획취재 취재 방향과 보도 일정 점검 △지역신문 전문연수 참가 △하반기 주요 업무 계획 등을 논의했다. 직원협의회에서는 윤리강령 교육과 언론 분쟁 교육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 서약 서명과 실천, 분쟁 예방 참고 사항 등을 공유했다. 또한 직원협의회는 한국언론진흥재단과 지역신문발전위원회, 한국지역신문회 경북협의회, 바른지역언론연대, 지역신문발전기금 우선지원 대상 선정사 등 신문사 관련 기관들과 언론 환경을 공유하기로 했다.
경주시가 오는 25일까지 ‘경주 먹보왕 이벤트’를 진행한다. 시는 한국외식업중앙회 경주시지부와 지역 음식점 방문 후 SNS 채널(인스타그램) 인증 행사인 ‘먹보왕 이벤트’로 지역 음식점 홍보에 나선다. 무작위 추첨 방식으로 선정된 먹보 149명에게는 3만원권 경주페이(충전식 카드형)를, 우수 리뷰자로 선정된 먹보왕 1명에게는 경주페이에 닌텐도 스위치를 추가 지급한다. 참여자는 경주지역 음식점을 찾는 관광객, 방문객 누구나 가능하다. 참여 방법은 먼저 경주시 공식채널 인스타그램에 접속해 팔로우와 이벤트 게시글에 ‘좋아요’를 눌러야 한다. 이어 경주지역 음식점을 방문해 식사 후 음식사진과 영수증을 사진 촬영해야 한다. 이후 본인 인스타그램에 음식사진 및 필수 해시태크 3종 리뷰를 등록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네이버 폼을 작성하면 참여 인증이 완료된다. 시는 오는 30일 당첨자 발표 후 이벤트 참여자 주소지로 선물을 배송할 예정이다. 단 비공개 계정, 참여 방법 부분 누락 등 경우에는 당첨이 취소될 수 있다. 경주시 관계자는 “이번 이벤트로 지역 음식점 홍보뿐만 아니라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기대한다”며 “경주 곳곳의 맛집을 찾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행복하고 좋은 추억을 만들어 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세계보편문화인 탈과 탈춤을 기반으로 세계인을 하나로 만드는 대한민국 명예대표 문화관광축제 ‘2024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이 27일부터 10월 6일까지 중앙선1942안동역, 탈춤공원 및 원도심 일원에서 글로벌 축제의 모습으로 새롭게 단장하고 개최된다. 이번 축제의 주제인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문화의 춤’은 탈과 탈춤이 가진 상징적인 의미와 축제가 가진 대동과 비일상의 시공간을 연결해, 탈을 쓰고 춤을 추며 세계인을 하나로 만드는 희망을 표현한 것이다. 탈과 탈춤은 인간의 삶과 꿈, 그리고 희망을 상징하는 인류의 가장 일반적이고도 보편적인 문화다. 탈과 탈춤을 통해 모두가 동등하고 신분의 구분이 없는 자유와 평등한 세상을 표현하고, 다양한 퍼포먼스를 통해 서로가 소통할 수 있는 화합과 대동의 장을 만들어 세계인을 하나로 만들고자 한다. 포스터가 표현하는 다섯 가지 색상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오행사상을 상징하는 오방색이자, 탈춤축제의 다양한 프로그램과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을 상징한다. 다섯 가지 색상의 천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얽히고설켜 탈의 형상을 완성하는 과정을 통해 전 세계 사람이 문화의 가치를 만들고 공유하는 축제의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올해 축제는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기 위해 역대 가장 많은 외국공연단인 25개국 34개 팀이 참가한다. 공식적으로 초청되는 외국공연단 외에도 자발적으로 경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13개 팀이 해외에서 직접 우리 축제를 찾는다. 외국공연단 초청과 함께 해외 언론 홍보(KBS WORLD, 아리랑 TV, 중화권 방송 등)와 주한외국인 및 주한외교대사 초청 팸투어 및 인센티브 관광에도 노력하고 있다. 국제노선 항공기 래핑을 통해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인에게 직접적인 비주얼 노출 홍보를 진행하고 축제장 내 편의시설, 안내판, 통역안내 요원을 확대 운영해 많은 외국인이 찾는,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축제를 만들 계획이다. 축제 공간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탈춤공원과 원도심, 중앙선1942안동역 등이며 동서로 배치됐던 축제공간을 원도심을 포함한 남북으로 확장해 도심지역에서 경제적 효과를 증대할 수 있는 공간으로 더욱 확장하고 내실 있게 운영한다. 기존 탈춤공원에는 국내·외 탈춤공연과 각종 체험, 일반판매상가, 먹거리, 놀이동산 등이 운영된다. 특히 올해는 기존 벚꽃도로에 설치했던 야시장 상가들을 이동 배치하고, 다양한 탈과 탈춤의 콘텐츠를 만나 볼 수 있는 탈 문화 테마거리를 조성한다. 구기차역사 부지에는 메인(대동)무대를 비롯한 다양한 먹거리, 볼거리, 살거리 상점이 자리할 예정이다. 특히 먹거리 존에는 백종원 대표의 더본코리아에서 지역의 음식점을 운영하는 상인들을 모집, 레시피 교육과 친절 및 운영 컨설팅을 진행해 저렴하고, 다양하고, 맛있는 탈춤축제 만의 음식들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와 더불어 원도심 공간에서는 음식축제인 객주로드페스티벌과 시장상권활성화 사업단에서 진행하는 이벤트 행사들이 다채롭게 진행된다. 웅부공원과 문화공원에서는 문화예술공연과 전시, 체험행사를 진행하는 등 공간이 늘어난 만큼 탈춤 관련 콘텐츠를 확대하고, 지역 상권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상거래 행위가 이뤄지도록 할 예정이다. 그간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을 탈과 탈춤이라는 정체성이 뚜렷한 축제로 만들어 가기 위한 다양한 시도와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특히 올해는 마스크 체인지존을 운영해, 이 공간을 지나갈 때면 반드시 탈을 착용해야 하고, 축제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이 탈을 착용하게 함으로써 탈(Mask)이 많은 축제장을 만들 계획이다. 탈 문화테마거리를 조성하고 세계탈 전시, 창작탈 공모전 수상작 전시, 탈 오브제 전시, 탈 등거리 조성 등을 통해 어디서든 탈을 볼 수 있는 축제장을 만들고, 축제에 초청된 국내외 공연단도 탈을 쓰고 공연장과 축제장 곳곳에서 퍼레이드와 버스킹 공연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메를 찾아라 △우네모(우리는 네가 누군지 모른다) 탈 랜덤 댄스경연대회 △탈 탈랜트 노래경연대회 △마스크 EDM 파티 등 전통적인 탈놀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선보인다. 축제장 내에서는 전통탈춤인 하회별신굿탈놀이와 현대탈춤인 탈랄라 댄스, 비탈민 댄스 배우기 체험이 축제기간 내내 운영된다. 누구나 자신들이 만든 탈을 쓰고 탈춤 춤사위를 따라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24개 읍면동 주민이 끼와 실력을 뽐내는 주민자치경연대회, 시민이 직접 탈과 탈춤을 활용해서 기획한 공모사업, 현대판 창작탈춤 경연대회인 세계탈놀이경연대회, 탈 탈랜트 등 경연의 열기가 축제장의 흥을 한껏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축제기간 중 안동의 날, 청소년한마당, 영남가요제 등 20여개의 연계행사가 안동시 전역에서 진행된다. 특히 올해는 페루가 주빈국으로, 잉카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태양제 공연을 비롯한 페루 Q-pop 가수의 내한공연과 페루문화전시관을 축제기간 내내 선보일 예정이다. 한편 하회마을에서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한국의 탈춤공연과 하회별신굿탈놀이 매일 상설공연 그리고 선유줄불놀이가 9월 28일과 10월 5일 2회 만송정과 부용대 일대에서 진행된다. 축제의 첫날인 9월 27일 오후 5시 30분, 원도심 길놀이 퍼레이드를 시작으로 화려한 개막식 행사가 진행된다.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문화의 춤이라는 주제를 구현하는 다양한 퍼포먼스와 공연들이 진행된다. 공연자와 관객이 분리된 개막식이 아닌, 관객이 개막행사의 구성원으로 참여하도록 연출했다. 또한 축제에 참여하는 외국공연단을 한자리에서 만나 볼 수 있고 모두 하나 돼 탈춤판을 만드는 대동난장도 진행해 어느 해보다 화려한 개막식이 될 예정이다. 이번 축제 기간은 주말과 개천절, 국군의날 임시휴일과 10월 4일 징검다리 휴일로 이어져 10일간의 축제 중 7일이 휴일이다. 날씨도 좋고 연휴가 이어짐에 따라 많은 관광객이 축제장을 방문할 것으로 예상한다. 안동시와 한국정신문화재단은 ‘지역이 만들어 세계인이 함께하는 축제’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으며,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문화의 춤’이라는 주제로 올해 새로운 변화를 꿈꾸는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은 세계 각국의 탈과 탈춤을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여행의 장이 될 것이다. 한국지역신문협회 경북협의회
나원리 가는 길 경주의 동남쪽을 적시며 흐르는 형산강엔 어느새 가을이 서린 듯하다. 물의 기운이 일어서는 이른 아침, 강 언저리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물비린내가 제법이다. 모든 생명이 잠들고 깨어나는 동안 강은 쉬지 않고 흐르고 흘렀다. 여름 새가 한철을 살고 날아가면, 그 자리엔 또 어느 계절을 살기 위해 또 다른 새가 날아와 빈자리를 채우는 강. 형산강을 따라 달리다 어느 낯익은 마을 입구에 차를 세운다. 현곡면 나원리 마을 입구다. 여기서부터는 천천히 발품을 팔 참이다. 누구는 길이 좁아 차로 이동하기 불편하니 길부터 넓혀야 한다지만, 시골길을 걸어보는 자연이 주는 특별한 혜택을 누리는 것 같아 즐겁다. 입추가 지나면서 나락이 하나 둘 고개 숙이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안태봉(安胎峯·338m)이 자연스레 흘러내린 산기슭으로 접어든다. 안태봉은 신라 왕실의 태(胎)를 묻은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안태봉의 기운이 동남쪽으로 흘러내린 기슭에 탑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 부쩍 오게 된다. 경주의 오층석탑 이른 아침, 햇살을 정면으로 받으며 탑이 신성하게 빛난다. 짙푸른 나무 사이 흰빛의 무언가가 보인다. 의심할 겨를도 없이 탑이라는 것을 안다. 탑은 초록의 여름 숲이거나, 암갈색의 겨울 숲에서도 곱게, 환하게 제 모습을 다한다. 탑 아래 서면 고개부터 바짝 쳐들게 된다. 탑은 자신을 우러러보라는 것이 아닌, 세상살이에 풀 죽어 고개 숙인 사람들에게 당당히 고개 들고 살라며 용기를 주는 듯하다. 경주에는 탑이 흔하다. 대부분 삼층석탑이다. 그러나 보기 드물게 오층석탑이 있다. 토함산 동쪽 중턱에 있는 ‘장항리사 터 서오층석탑(국보 제236호)’과 현곡리 안태봉 아래 나원백탑으로 유명한 ‘나원리 오층석탑(국보 제39호)’, 그리고 일명 늠비봉 오층석탑으로 알려진 ‘남산 포석곡 제6사지 오층석탑(유형문화재 제555호)’이다. 나원 백탑으로 더 유명한 나원리 오층석탑 사람들은 장항리사 터 서오층석탑(국보 제236호)과 나원리 오층석탑을 서로 비교하곤 한다. 삼층석탑이 일반적인 경주에서는 보기 드문 오층석탑이기 때문일 것이다. 언뜻 보면 닮은 듯도 하지만 탑을 만든 돌의 재질, 빛깔, 몸돌에 새긴 문양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장항리사 터 서오층석탑은 구리 함량이 높아 옅은 분홍빛을 띠는 경주석으로 다듬어졌다. 나원리 오층석탑은 유달리 흰빛을 띠는 화강암으로 두 탑은 빛깔이나 재질에서 이미 다름을 알 수 있다. 고선사 터 삼층석탑(국보 제38호)이나 감은사 터 삼층석탑(국보 제112호), 용장사 터 삼층석탑(국보 제186호),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 국보 제21호)을 보는 듯한 웅장함은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비록 탑의 층수는 오층과 삼층으로 다르지만, 자태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인상은 같은 듯하다. 나원리 오층석탑은 오래전부터 ‘나원백탑’으로 더 유명하다. 일반적인 회백색의 탑보다 유난히 흰빛을 띤다. 이런 화강암이 흔하지도 않거니와 흰빛이 풍기는 순박함과 종교적 순결함, 또 흰빛이 주는 눈부심과 맑음은 인간 세계를 넘어 신(神)의 세계와 맞닿은 의식의 동경에서 그리 불리게 된 듯하다. 8세기 경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탑은 천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청태나 이끼가 끼지 않았다. 남산의 돌로 만들었다는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남산에서 나원리까지 거대한 돌을 옮겨왔다고 한다면 ‘이 거대한 돌을 어떻게 옮겨왔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지만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다. 기단석은 각 면마다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긴 것 외에는 어떠한 문양도 없다. 탑신부는 각 층 몸돌의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기고, 지붕돌은 경사면의 네 모서리에 예리한 각을 세웠다. 지붕돌 귀퉁이마다 처마처럼 하늘을 향해 살짝 쳐들게 해 상쾌한 모습을 보인다. 꼭대기인 상륜부에는 부서진 노반과 부러진 찰주가 남아있다. 안태봉 기슭에 9.7m 높이로 우뚝 솟은 탑은 웅장한 위엄과 순백의 청신한 기품으로 보는 이들을 감동케 한다. 무(無)와 백(白), 없는 것과 흰 것은 동일함을 뜻하는가? 금당은 어디에 있었을까. 백탑 3층 몸돌에서 국보급 사리장엄구가 나왔다. 금동으로 만든 사리함 바깥 면에 사천왕을 새겨 놓았다. 탑의 방위와 사천왕이 놓인 방위가 일치하도록 배치하여 안치한 것으로 보아 사리함을 안치할 때 상당한 불교식을 행한 듯하다. 사리함엔 황금으로 만든 불상과 3층 공양탑 1기, 9층 공양탑 3기, 사리 15과, 나무 공양탑 편(片) 다수와 구슬 4점 등이 들어 있었다. 또한 한지에 먹으로 쓴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일부분이 수습되었다. 보통은 탑신이나 탑의 주춧돌인 심초석에 사리장엄구를 안치한다. 그러나 나원리 오층석탑은 3층 지붕돌에 사리공을 만들어 안치했다. 후대에 도굴꾼이 들이닥칠 것을 예견이라도 한 걸까. 여러 차례 도굴범의 손을 탔지만 약간의 결실 외에는 거의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탑의 규모와 안치된 공양물만 봐도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금당 터조차 찾을 수 없다. 누구의 발원으로 어떻게 세워졌는지조차 확인되지 않으니, 백지상태인 나원리 절터는 그야말로 없는 것 즉 ‘무(無)’의 상태요, ‘백(白)’의 상태인 게다. 강산이 변해도 한국의 아름다움 품은 석탑은 변하지 않아 나원리 오층석탑은 찬란했던 신라 불교문화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탑을 돌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소원을 빌다 보면 어느새 인생 또한 돌고 도는 윤회의 과정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우리네 선조들의 삶과 애환이 깃든 석탑의 세계는 이미 불심 그 자체인 것이리라. 탑은 정남향을 향하고 있어 아침부터 오후까지 햇살이 아주 잘 든다. 실제 사찰이 존재했다면 부처님을 모신 금당도 정남향이 아니었을까. 사적은 무엇 한 줄 전하지 않지만, 어느 시대 누구의 발원으로 향을 피웠든 간에,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탑은 현재에도 존귀한 것이다. 거대하고 웅장한 탑을 세운 발원자는, 탑 옆에 띠풀 집을 짓고 부처님을 모셨던 걸까. 세월이 흘러 기둥 하나, 기와 한 장 남지 않도록 무(無)를 염원하면서 오로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을 경외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탑을 세우고 향화를 올리던 승려나 사람은 모두 세월 속으로 저물었지만, 탑은 이리도 굳건히 남아 지금 시대를 사는 누군가의 바람을 듣는다. 탑은 맑고 깨끗한 기도자들의 뜻을 하늘에 전하려는 불가의 기도처와도 같다. 큰 가람 속에 으레 서 있는 웅장한 탑이 아니라 소외된 곳에 우뚝 솟은 저 순백의 돌덩이에 누구는 숨결을 불어 넣고 누구는 생명을 주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을 비바람 속에서 지내온 탑, 그러나 그 탑은 차갑지 아니하고 부처님의 참뜻과 훈기가 서려 있는 듯하다. 강산은 변했어도 탑은 변할 줄 모른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오직 자연의 섭리와 불법의 가르침을 따라 오늘의 고행을 다르게 겪는다. 그리고 내일에 올 불심의 세계를 반겨 맞으며, 꽃피고 새우는 숲속에 홀로 서서 오는 이들을 반긴다. 그 환한 감동이 있기에 나는 기꺼이 새벽길을 달리는 것이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한국원자력환경공단은 지난 4일 경주 본사에서 아동복지시설 대자원에 자립준비청년 홀로서기를 위한 기부금을 전달했다. <사진> 공단은 지난달 16일, 17일 양일간 봉황대 일원에서 열린 ‘제5회 경주시 청년의 날’ 행사에서 공단, 경주시, 경주시청년센터와 함께 ‘착한소비’를 주제로 판매부스를 운영해 수익금 400여만원을 마련했다. 공단은 자립준비청년을 위해 대자원과 상호협력 MOU를 체결하고 진로설계 및 심리적 안정을 위한 지원과 보호자 부재, 경험 부족으로 인해 사회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기초 지식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김용완 한국원자력환경공단 부이사장은 “지자체뿐 아니라 유관기관과 함께 자립준비청년과 소통해 자립에 필요한 지원과 삶의 질을 높이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조영재 대자원 원장은 “자립준비청년들의 행복하고 안전한 자립에 큰 디딤돌이 되어주고, 건강한 사회구성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항상 응원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밝혔다.
경주시 다함께돌봄센터 8호점 ‘현곡도담도담마을돌봄터’가 지난 10일 개소식을 갖고 본격 운영에 들어갔다. <사진> 이날 개소식은 주낙영 시장을 비롯해 시·도의원, 지역 초등학교장, 주민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다함께돌봄센터는 민선 8기 주낙영 시장의 공약사업 중 하나다. 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초등학생(만 6세~12세)을 대상으로 돌봄 서비스를 제공해 돌봄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것이 주요 목표다. 긴급은 물론 정기적인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며, 학습 지도와 함께 미술, 체육, 요리, 댄스, 코딩 교육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제공된다. 이날 개소한 ‘현곡도담도담마을돌봄터’는 현곡초와 현곡푸르지오 아파트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수용 정원은 20명이다. 학기 중에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8시까지, 방학 중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된다. 사회적협동조합 ‘도담도담 덕숭’이 위탁 운영한다. 주낙영 시장은 개소식에서 “현곡도담도담마을돌봄터는 지역 내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며 “경주시는 ‘함께하는 돌봄, 맘(MOM) 편한 경주’라는 비전 아래 아이들이 행복한 공간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시는 현재까지 총 8개의 다함께돌봄센터를 운영 중이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센터를 확충해 나갈 계획이다.
2024년 9월 7일 이정락 변호사님이 별세하셨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빈소에서 뵌 사진에는 온화한 미소를 띠고 계셨지만 그분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었습니다. 문상 첫날부터 많은 분들이 다녀가셨는데, 모두들 고인의 인격을 칭송하고 그분의 뜻을 잘 이어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고인은 1939년 경주에서 태어나 경주고등학교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신 후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판사가 되셨습니다. 서울형사지방법원장을 끝으로 판사를 마치고 변호사 개업을 하신 후 사회활동을 활발히 하셨습니다. 고인은 고향 경주에 대한 애정이 깊으셨습니다. 2005년에 경주고도보존회를 창립하여 회장으로 고도보존운동을 이끄셨습니다. 경주를 사랑하고 아끼는 모든 사람을 회원으로 초대하여,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함께 공부하면서 경주의 현재 모습을 자세히 살피고 경주가 미래에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하셨습니다. 다른 나라의 고도와 비교하기 위해 해마다 회원들과 함께 고도답사도 다니셨습니다. 답사여행에서는 현지 도시의 문화재 담당부서와 회의를 개최하고, 답사 마지막 날에는 전원이 참석하는 좌담회를 통해 답사한 도시와 경주를 비교하면서 나아갈 방향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알게 된 사실은 경주시에 공식의견으로 전달하거나 언론칼럼으로 알렸습니다. 입법활동도 적극적으로 하셨습니다. 경주 세계역사문화도시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초안하기 위해 전문가들이 서울대학교에 모여 법률안 문구를 고민했고, 법안 통과를 반대하는 다른 지역의 성명서에 대응방안을 함께 논의하기도 했습니다. 매년 경주를 답사하면서 변화하는 도시 환경이 고도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보존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안을 고민하셨고, 불국사 입구 아파트 건설 현장을 보고 반대의견을 내기도 했습니다. 저는 고향 후배로서 그리고 고인과 같이 법조인의 길을 걸으면서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만날 때마다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고인은 회의 진행에도 능숙하셨습니다. 참석한 분들의 장점을 찾아서 소개해 주셨고, 그날 행사의 의미를 찾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기회를 주셨고, 어린 학생들의 의견도 소중히 받아들이셨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이 시대의 어른이셨습니다. 빈소에서 성유림 사모님을 뵙고 같이 울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평소의 삶이 훌륭하셨듯 저승의 삶도 평온하시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이정락 변호사님 영전에 삼가 올립니다.
2014년에 척추 수술을 받았다. 세 번째 받은 수술이라 입원 기간도 길었고 회복도 더디었다. 퇴원하고 나서 재활하느라 고생도 많이 했다. 그럴 때 이정락 회장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박사장, 듣자 하니 척추수술을 했다고! 내가 몸보신 한 번 시켜줄 테니 사양하지 말고 나오게!” 고마운 말씀과 거절할 수 없는 간곡함에 선뜻 말씀을 따랐다. 회장님 변호사 사무실에 들렀더니 경주고도보존회 황병길 국장도 미리 와 있었다. 회장님은 우리를 향해 대뜸 ‘게장 좋아하느냐?’고 물으셨다. 게장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기꺼이 사주십사 말씀드렸다. 회장님은 손수 차를 몰아 번잡한 시내를 빠져나가 교외로 나가셨다. 그런데 길이 이상했다. 게장집인데 이상하게 한적한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음식점에 도착했을 때 내가 크게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양탕!’ 음식점 간판에 이렇게 쓰인 것을 보고 ‘게장’이 아닌 ‘개장’인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우리 집안에는 희한하게 개고기를 먹으면 반드시 사고가 나는 징크스가 있다. 하여 집안 사람들이 다른 것은 몰라도 영양탕은 먹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기까지 와서 그런 내력을 말씀드릴 수 없었다. 이때부터 회장님께 들키지 않으면서 만족스럽게 먹는 시늉을 했다. 다행히 차려져 나온 고기에는 데친 정구지, 즉 부추가 가득했다. 일단 부추를 앞접시에 퍼담은 나는 고기도 두어 점 올렸다. 그런 다음 부지런히 밑반찬과 부추를 먹었다. 틈틈이 내 쪽의 고기를 회장님과 황국장 앞으로 밀어두는 센스도 발휘해 가면서...! 그런 상황을 모르시는 회장님은 “오늘 따라 고기가 많네!” 하시면서 식당 사장님을 불러 팁까지 넉넉히 주셨다. 이렇게 ‘스릴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식사를 마쳤다. 내 고기 먹는 시늉이 얼마나 완벽했던지 황 국장조차 끝내 눈치채지 못 했다. 회장님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들었을 때 그때의 감동이 가장 먼저 밀려오며 왈칵 눈물이 났다. 법경회, 경주고도보존회 등 손수 만들고 혼신 다해 후배들 이끌어, 국내외 답사, 다양한 고도보존정책에 크게 기여! 이정락 회장님은 경주 출향인사들 중 단연 으뜸인 분이시다. 재경경주향우회와 경주중고서울동창회 경주 출신 법조인모임인 법경회와 경주고도보존회 등을 손수 만드시고 직접 총무와 회장까지 맡으시며 출향인들을 하나로 묶고 당신 스스로 함께 발전하는 발판이자 방패가 되어주셨다. 법조인으로서는 서울형사법원장을 지내셨고 변호사로서는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을 맡아 힘없고 어려운 사람들을 법으로 보호해주셨다. 무엇보다 경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 2005년에 ‘경주고도보존회’를 만드시고 혼신을 다해 이 회를 이끄셨다. 나는 바로 이 경주고도보존회에서 회장님을 뵈었다. 경주중고등학교서울동창회 간사 겸 동창회보 편집위원으로 활동할 때 동창회보에 교토와 경주를 비교한 여행기를 올렸는데 그 글을 보신 회장님이 경주고도보존회 첫 해외답사로 교토를 떠올리고 여행사를 경영하던 나를 불러 답사를 맡기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초등학교 때부터 어린이 향토학교(뒤에 박물관학교)를 다녔던 나는 회장님 뜻을 받들어 고도보존회의 가치에 맞는 교토 여행을 기획했음은 물론 나 자신 함께 경주고도보존회에 참여하게 해주십사는 청을 드렸다. 이런 인연으로 뒤에 경주고도보존회 회보를 만들기도 했다. 회장님 추천으로 경주의 주간신문인 서라벌신문 서울취재본부장을 맡아 만 7년 동안 봉사하기도 했다. 회장님은 경주를 고도답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세계의 다양한 고도와 관광지를 답사하며 좋은 점은 배우고 나쁜 점을 미리 예방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해마다 세계의 고도를 답사하는데 진심을 쏟으셨다. 덕분에 경주고도보존회는 해마다 정기 해외답사를 통해 고도보존과 관광지 발전에 대한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이때 일본의 교토와 나라 아스카무라를 첫 여행지로 다녀온 고도보존회는 유명 온천 휴양지 유후인, 중국의 항주와 소주, 서안, 곡부와 맹부, 북경을 각각 따로 다녀왔고 앙코르와트로 유명한 캄보디아의 씨엠립,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와 히바, 베트남의 후에와 다낭을 직접 모시고 다녀왔다. 내가 직접 모시지 못 했지만 중국 운남성 차마고도와 튀르키에 이스탄불을 비롯한 고도들도 다녀왔다. 이들 답사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반드시 답사에 대한 평가회를 했다는 것이다. 이 평가회는 참석자 전원이 똑같은 자격으로 자신의 느낀 바를 토로하는데 심지어 초등학교 학생이라도 반드시 자신의 의견을 밝히도록 배려되었다. 그로 인해 어른들의 시각이 아닌 어린이와 학생의 시각에서 찾아낸 보석 같은 명품 평가가 쏟아지기도 했다. 이런 평가들은 따로 고도보존회 자료집이나 회보로 기록되어 경주시나 시민단체, 주요 정책기관에도 보내졌다. 회장님과 경주고도보존회는 해외뿐 아니라 경주답사와 경주에 대한 각종 포럼에도 열심이었다. 매년 경주에서 중요한 유적지와 새로운 관광지를 답사하고 그때마다 경주의 주요 인사들을 초청해 세미나를 열었다. 경주시가 당면한 중요한 현안에 대해서도 해당 부분 전문가와 시당국자, 고도보존회 인사들로 구성된 평가회를 열어 발전적인 여론을 조성하고 새로운 방향성을 찾도록 도왔다. 회장님은 부여, 공주, 익산 등 국내 다른 지역 고도도 경주와 함께 발전해야 할 매우 중요한 고도로 여기고 답사하고 교류하는 것을 중히 여기셨다. 또 우리나라 고도 보존과 경제 발전 관광문화의 총아로서 서울과 인근 수도권을 답사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정기적으로 답사했다. 경복궁과 숙정문, 인사동과 북촌, 송파 고구려 고분, 암사동 선사 유적지, 남양주 수종사, 하남 교산지구 등 많은 곳을 방문하며 조금이라도 나은 안목을 기르기 위해 노력하셨다. 지금 경주를 위한 특별법에 ‘신라왕경 특별법’이 있지만 그 법안의 기초는 ‘고도보존 및 발전에 대한 특별법’이었고 그 기초는 다시 ‘고도보존특별법’이었다. 이 특별법은 경주고보존회의 상임이사들이 대거 참여해 만들었지만 결국 통과되지 않았던 ‘경주 세계역사문화도시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상당 부분 참고했다. 이 역시 이정락 회장님의 경주를 사랑하는 마음과 위에서 나열한 꾸준한 실천이 바탕이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지극한 부부애의 모범, ‘선배들의 골수까지 짜 먹어라’ 격려하며 당신 스스로 골수 내어줘! 회장님은 많은 부분에서 후배들의 모범이 되신 분이셨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단연 부부간의 사랑과 예우였다. 이것은 회장님 세대의 다른 선배님들께는 찾아 보기 어려운 정말 특별한 모습이었다. 회장님은 경주고도보존회 전체 답사나 모임에 꼭 사모님과 동행하셨다. 그 이유가 고향사랑을 사모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그 진심과 추진력이 금방 떨어진다고 믿으셨기 때문이다. 사모님 역시 회장님의 이 마음에 기꺼이 공감하시고 거의 모든 답사와 행사에 꼭 함께 참여하시며 회원들의 기운을 북돋워 주셨다. 고도보존회 회원들도 이런 회장님의 본을 받아 부부 동반에 참여하기를 즐겼다. 회장님의 장례식에 고도보존회 회원들과 부인들이 함께 조문하는 모습이 눈에 띈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회장님은 웃음을 중요히 여기고 늘 실천하신 분이기도 했다. 어떤 말씀을 하시건 그에 합당한 유머를 붙여 말씀하시기를 즐기셨고 그게 특별한 자애로움으로 느껴졌다. 노마지로(老馬知路)-늙은 말이 길을 안다는 고사성어는 회장님이 선배들을 예우하는 동시에 나이 드신 당신을 상징하는 단어였다. 어디서나 당신을 기꺼이 늙은 말로 소개하며 후배들을 웃음으로 격려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래서일까? 회장님은 젊은 시절에는 선배들의 경륜과 지혜를 경청하고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경주고도보존회가 처음 출범할 때부터 한마음으로 참여하셨던 김수학 전 국세청장님, 권오찬 전 경주고 교장님, 김해석 시인님, 이영만 전 체신청장님..., 이런 분들에 대한 마음 가득한 예우는 후배들의 절대 모범이었다. 내가 ‘The 큰 바보 경주최부자’를 낸 후에는 경주최부자 종손이신 최염 선생님을 일부러 모시면서 나를 함께 불러 격려해 주셨다. 이때 ‘선배들의 골수까지 짜 먹어라’는 감동적인 말씀을 내려주셨다. 그 말씀은 이정락 회장님 자신의 골수도 기꺼이 후배들에게 내주시겠다는 말씀이었다. 그 골수를 짜 먹은 후배들이 또다시 경주를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제2, 제3...의 이정락’으로 남을 것이다. 회장님 변호사 사무실에 늘 걸려 있었던 액자가 하나 있었다. 경주최부자 정신인 ‘육연(六然)을 써놓은 액자였다. 회장님은 그 육연을 몸소 실천하신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경주최부자이셨다. 그러나 자처초연(自處超然)-혼자 있을 때 초연하라는 가르침은 끝내 실천하지 못하셨다. 회장님 주위에는 언제나 회장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많았기에 혼자 계실 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회장님은 세상을 떠나셨지만 사실은 떠나지 않으셨다. 많은 후배들의 가슴에 회장님의 밝은 웃음과 언제나 경주를 아끼셨던 마음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회장님을 추모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회장님은 오래도록 살아계실 것이다.
권영해 장군 공덕을 기리기 위한 공덕비 제막식이 지난 7일 거행됐다. 공덕비는 외동읍 입실리 472번지에 세워졌다. 공덕비건립추진위원회 주관으로 열린 제막식은 이원식 추진위원장(전 경주시장), 이진락 추진위원, 안동권씨 문중을 비롯해 약 200여명이 참석했다. <사진> 권영해 장군은 1959년 소위로 임관했으며, 대위 때 맹호부대로 월남전에 참전해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동해안 최북단 제88여단장으로 취임해 보병 제22사단 창설의 기틀을 마련했고, 이후 최정예 보병 제6사단장으로 보임돼 우수한 전투준비태세로 야전군 최우수부대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제3야전군사령부 참모장을 거쳐 대한민국 최초의 올림픽지원사령부를 창설하고 사령관으로서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전역 후에는 국방부기획관리실장, 국방부 차관,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현역 중장이나 대장을 거치지 않고 4성 장군의 예우를 받은 유일한 인물로 기록됐다. 장관 퇴임 후에는 한국프로야구위원회 총재를 맡았고, 국가안전기획본부 부장으로 임명돼 ‘교수고정간첩단 사건’ 등에서 큰 공적을 세웠다. 이원식 추친위원장은 “제막식을 통해 권영해 장관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며, 그의 뜻을 이어가고자 하는 우리의 다짐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자 한다”고 말했다.
‘받아쓰기를 너무 많이 틀려요’, ‘아이가 책을 오래 읽지 못해요’라고 걱정하는 부모가 많다. 이처럼 아이가 책 읽기를 매우 싫어하거나 글쓰기를 거부하는 모습을 마주할 때는 ‘아이가 단지 읽고 쓰는 것에 흥미가 없는 것일까?’, ‘혹시 난독증은 아닐까?’라는 고민을 해봐야 한다. 단지 읽기를 거부하고 맞춤법을 자주 틀린다고 하여 난독증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로 인해 아이가 학습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학습에 대한 자신감이 점점 낮아진다면 반드시 의심해보아야 한다. 난독증이란 글을 정확하고 유창하게 읽지 못하고 철자를 정확하게 쓰는 것을 힘들어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학습장애의 한 유형이다. 최근 연구들에 따르면 난독증은 뇌의 기질적인 문제에 의한 신경발달장애에 기인하며, 가족력 등 유전적인 영향이 매우 크다고 알려져 있다. 전체 인구의 약 8%가 난독증을 겪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난독증으로 진단받는 아동은 평균적으로 약 5~8%라고 한다. 난독증의 대표적인 원인은 음운처리능력(phonological processing ability)의 결함이다. 음운처리능력이란, 문장이나 낱말이 음절이나 음소(말소리)등 더 작은 단위로 나누어질 수 있다는 것을 지각하고 말소리를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는 문자해독(decoding)과 관련된 매우 중요하고 기초적인 읽기 능력이다. 난독증 아동의 연령대별 특징 학령 전기 아동 언어 및 조음 발달이 늦거나 단어를 종종 잘못 발음하는 경우가 있다. 글자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반복적인 학습에도 불구하고 자모음을 구분하기를 어려워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익숙한 단어 외에는 잘 읽지 못하거나 이중모음이나 받침이 있는 복잡한 단어 읽기는 어려워한다. 음운변동이 있는 단어는 읽기 힘들어한다. 보고 쓰기는 가능하나 받아쓰기는 어려워한다. 초등학교 고학년 유창하게 읽기가 어렵다. 글을 읽을 때 생략, 첨가, 대치 등 오류가 빈번하다. 읽기 이해력에 어려움이 있다. 맞춤법을 자주 틀리거나 띄어쓰기가 어렵고 글자를 쓰는 속도가 늦거나 글씨체를 알아보기 힘들다. 책 읽기를 기피하고 읽기에 관한 자신감이 매우 낮다. 한국어 읽기검사로 진단 난독증 아동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심층적인 검사와 진단이 우선돼야 한다. 난독증 아동은 적절한 검사와 중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읽기에 실패한 경험이 누적되어 학업에 대한 자신감이 매우 낮아질 수 있으므로 조기 선별과 중재가 중요하다. 난독증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난독증 검사에 앞서 정상 지능을 가지며, 정서적 문제나 외부 환경적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읽기 능력이 낮고, 이로 인해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상태인지 확인해야 한다. 이후 언어치료사가 실시하는 한국어 읽기검사(KOLRA) 등 표준화된 검사 도구를 사용해 난독증을 진단하게 된다. 난독증 검사 도구의 검사 항목 조기 발견과 치료가 중요 난독증은 유전의 영향이 크다고 알려져 있으나 조기에 발견해 개별적이고 집중적인 치료와 교육을 하면 읽기·쓰기의 어려움을 최소화할 수 있다. 난독증은 진단과 더불어 치료 또한 언어치료사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글 : 이소정 울산대학교병원 재활의학과 교수자료제공 : 한국건강관리협회 경상북도지부 대구북부건강검진센터 자료출처 : 한국건강관리협회 건강소식 발췌
공고번호 : 경북-경주-2024-00824 경주시 선도동 동사무소에서 구조 귀가 내려간게 매력 포인트 강아지!! 활발해요! 믹스견 / 남아 / 1차접종o / 중성화X / 3개월 / 1.46kg 공고기간 : 2024-09-04 ~ 2024-09-19 입양문의 054)760-2883 ※반려동물이 실시간 입양됐을 수 있으니 확인 전화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