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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영화처럼 83년 만에 박물관 수장고에서 걸어 나온 고고학의 선구자 최남주(崔南柱) 선생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752호 입력 2026/10/29 10:45 수정 2026/10/29 10:50

정상천<br>한·프랑스 교류 사학자<br>프랑스 파리1대학<br>국제관계사 박사확대
정상천
한·프랑스 교류 사학자
프랑스 파리1대학
국제관계사 박사
2025년 경주 APEC 정상회의 이후, 찬란한 신라 문화의 정수를 느끼기 위해 많은 국내외 관광객이 경주의 유적지와 국립경주박물관을 찾고 있다. 신라의 고도 경주를 향한 필자의 애정과 향수는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언론인이자 영문학자이셨던 선친 정일영 선생은 서울의 한 언론사에 재직하던 중 신라 문화에 매료되어 1960년대 초 경주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자리를 옮겼다. 필자 역시 경주시 노서동 서봉총 인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신라의 얼이 서린 문화유산들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봉총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6년 10월, 방한한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Gustaf VI Adolf, 당시 황태자, 훗날 국왕)가 금관 발굴에 참여한 곳으로, 당시 최남주 선생도 발굴 작업에 참여하였다.


필자도 지난달 고향 경주를 방문했다.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천년보고(유물 수장고)에서는 ‘83년 만의 만남’이란 주제로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2026년 상반기 한국 고고학계와 상고사학계를 가장 뜨겁게 달군 화제가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 서체와 닮은 경주 월성 출토 비석 조각의 83년 만의 상봉이 그 주요 내용이다. 한국 고고학계의 이 대발견의 중심에는 신라 문화유산 발굴·보존을 위해 헌신한 고(故) 석당(石堂) 최남주(崔南柱) 선생(1905~1980, 고고학선구자)의 이름이 자랑스럽게 다시 한번 소환되었다. 고고학과 역사학의 우연을 넘어 필연 같은 이번 사건은, 최남주 선생이 비편을 남기지 않았다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잊힐 뻔한 일이었다. 여명기 한국 박물관인으로서 철저한 기록을 남기는 학예 정신과 현장을 꿰뚫어 보는 안목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고고학적 쾌거다.


월성비 발견의 고고학적 가치


최남주 선생은 서울 보성고보 시절 은사인 민족사학자 황의돈 박사로부터 조상들의 얼이 서린 조국의 문화유산을 발견하고 보존하는 길이 곧 항일 운동이라는 가르침을 사사 받았다. 이러한 뜻을 실천하고자 최남주 선생은 신라의 얼이 서린 고향 경주에서 수많은 유물을 발견하고 보존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석당 최남주 선생이 국립경주박물관 전시 중인 이차돈 순교비 옆에서 신라 시대 불두를 배경으로 1967년에 촬영한 사진. <사진=최정대 제공>확대
석당 최남주 선생이 국립경주박물관 전시 중인 이차돈 순교비 옆에서 신라 시대 불두를 배경으로 1967년에 촬영한 사진. <사진=최정대 제공>
1937년의 어느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라 천년의 옛 궁성터인 서월성지구(西月城地區)에 대한 지표 조사에 나섰다. 우거진 방초 아래 돌무지 속에서 신라 연화문와당편과 토제벼루편, 그리고 함께 주먹만한 크기의 비석 조각을 발견하였다. 가로 16.47cm, 두께 13.6cm, 무게 약 2.7kg의 비석 조각에는 여섯 글자가 쓰여 있었다. 자세히 살펴본 최남주 선생은 지금까지 자신이 발견한 해서체의 신라 금석문들과는 서체와 양식이 눈에 띄게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존(存)’ 자를 비롯하여 여섯 글자 모두 웅혼(雄渾)한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와 닮은 예서체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발견 당시에는 경주지방에서 고구려 금석문 유물들이 발견되기 전이라 비석 조각이 고구려계통의 비편일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고증으로 더 진전되지 못했다. 선생은 언젠가 조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는 날이 오면 후학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비석 조각의 뒷면에 먹글씨로 ‘소화일이.육이칠.서월성지 최(昭和一二.六二七.西月城址. 崔)’라는 발견날짜와 장소, 자신의 성 崔를 선명하게 기록해 두었다. 이 비석 조각은 그렇게 어두컴컴한 경주박물관 수장고에서 오랜 세월 동안 긴 잠을 자게 되었다.

1937년 최남주 선생에 의해 최초로 월성서편에서 발견 비편(오른쪽)과 2020년 장기명 학예사에 의해 발견된 비편(왼쪽)이 83년 만에 한 몸체가 되어 2026년 12월 31일까지 국립경주박물관 천년보고에서 전시 중이다. <사진=국가유산청>확대
1937년 최남주 선생에 의해 최초로 월성서편에서 발견 비편(오른쪽)과 2020년 장기명 학예사에 의해 발견된 비편(왼쪽)이 83년 만에 한 몸체가 되어 2026년 12월 31일까지 국립경주박물관 천년보고에서 전시 중이다. <사진=국가유산청>
그로부터 83년이 지난 2020년 12월,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주도로 월성 주변의 해자(垓子)를 발굴하던 중 후학인 장기명 학예사에 의해 또 하나의 비석 조각이 출토되었다. 그 후 다양한 방면의 연구진들이 참여하여 첨단 과학 장비를 동원하였고, 정밀하게 연구하여 비로소 결실을 보았다. 2020년에 발견된 비편과 1937년 최남주 선생이 발견한 비석조각과 하나의 몸체란 사실을 국립경주박물관과 국립문화유산연구소 공동으로 공식 발표를 하게 된 것이다. 83년 사이에 발견된 이 두 비석 조각이 하나의 몸체라는 사실이었다. 한국고고학계와 상고사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비석에 새겨진 글씨체 때문이었다. 2020년에 월성에서 발견된 비석 조각의 글씨체 또한 그동안 발견된 신라의 비석에 주로 새겨진 해서체(諧書體)가 아닌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 서체풍의 예서체(隸書體)’였기 때문에, 비석을 세운 이들이 신라인이 아닌 고구려인임을 추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2026년에는 국립경주박물관과 국립문화유산연구소 공동주최로 포럼을 열고 두 비석 조각을 특별 전시했다. ‘83년 만에 만남, 경주 월성에서 찾은 비석조각’ 및 ‘월성 서편 수습 비편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 등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하여 월성에서 발견된 비석에 대한 고고학적 가치를 조명하였다. 이 비석은 서기 5세기 초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5만의 군대를 파견했다는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과 그 개연성이 제기된 뜨거운 논쟁거리의 유물이 되었다. 이 비석이 어떻게 신라의 왕성 한복판에 세워졌다가 파괴되었는지 많은 학자들이 흥미진진한 가설을 발표했다. 아직 이 비석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좀 더 학술적인 연구가 필요하며, 많은 후학의 뜨거운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

1937년 발견된 비편 뒷면 발견날짜와 지역. 발견자 최남주 선생의 친필 서명 최(崔)자가 먹글씨로 선명히 기록되어 있다. <사진=국가유산청>확대
1937년 발견된 비편 뒷면 발견날짜와 지역. 발견자 최남주 선생의 친필 서명 최(崔)자가 먹글씨로 선명히 기록되어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석당 최남주 선생의 탁월한 안목이 없었다면 1937년 서월성지구 지표 조사 현장에서 무심코 지나버렸을 것이다. 또한, 발견한 비석 조각 뒷면에 묵서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국립경주박물관 유물 수장고에서 긴 세월 잠들다가 2020년에 발견된 비석조각과는 영원히 만나지 못할 이산가족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80년 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2026년 대한민국 고고학계에 거대한 화두를 던진 월성비석 조각의 연결은 마치 한편의 감동적인 영화보다 더 극적인 사건이다. 평생을 신라고도 경주 산야를 발로 뛰며 작은 돌멩이 하나도 소홀히 보지 않았던 석당 최남주 선생의 예리한 통찰력과 집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실향민이 고향을 찾듯, 긴 시간도 두 유물의 상봉을 막을 수 없었다. 이 영화 같은 사건은 우리 고고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앞으로 후학들의 연구를 통해 우리는 더욱 흥미로운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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