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까지 강의 자료를 만들어야 했던 어느 영국 교사에게 AI는 결과물을 뚝딱 내놓는 마법 지팡이와 같다. 요정 지니나 해리포터의 마법 지팡이를 상상하는 것은, 그만큼 현실이 팍팍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전문성을 높이고 싶다는 바람은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현실적 잠재 불안이기도 하다. 더 많은 여가를 원한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지금은 즐길 여가가 없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더 정교한 방식으로 원해왔다. 더 많이 성취하고 싶고, 더 자유로워지고 싶으며, 더 의미 있게 살고 싶다고 말이다. 역사적으로도 우리는 자동화 기계나 인터넷, 스마트폰이 쥐어졌을 때도 한결같이 원해 왔다. 도구가 바뀌었을 뿐 우리의 근원적 욕망은 한결같다. 이게 사실이라면 어쩌면 마법 지팡이는 더 이상 마법 지팡이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역설로 들린다. 왜냐하면 도구는 욕망을 실현하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찰이나 교회당 숫자가 모자라서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한편 AI가 심리 상담이나 감정적 동반자가 되길 원한다는 비율(13.7%)도 흥미롭다. 13%가 비록 적은 숫자처럼 보이지만, 8만 명의 13%는 무려 만 명이 넘는다. 전 세계 1만 명 이상이 기계로부터 마음의 안식처를 얻는다면 이는 매우 크고 중요한 숫자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시련에 부딪힐 때마다 신(神)과 거기에 상응하는 존재에게 내면을 털어놓았다. 이처럼 인간은 오래전부터 비인간 존재에게 마음을 기댄 전통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고해성사는 신을 향했고, 일기장은 나 자신을 향했으며, 인형에게 비밀을 속삭이는 아이들 습성은 어른이 돼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경향으로 볼 때 AI는 완벽한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24시간 늘 깨어있고, 절대 지치거나 피로해 하지 않으며, 기억하지만 비밀을 누설하지 않고(그렇게 믿고 싶은지도 모르겠지만), 무엇보다 판단하지 않는다. 이런 덕목들은 실력 좋은 상담사나 진정한 친구조차 꺼내기 민망한 것들을 AI에게는 쉽사리 털어놓게 만든다. 이것을 ‘고독 문제의 해소’라고 이해할지, ‘고독의 새로운 형태’라고 볼지는 모르겠지만, 내적 친밀성을 기계한테 위탁하는 시대라면 친밀성을 다시 정의해야 할 때가 도래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흐름을 그저 낭만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AI와의 감정적 교류가 인간관계를 대체할지, 그 정도가 아니라면 보완할지를 차분하게 따져봐야 한다.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를 주변에서 도움을 청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AI가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면 굳이 불편하고 복잡할 수도 있는 인간관계를 감수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현실은 평면적이지 않기 때문에 전통적 해결 방식이 반드시 효과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다. 고독의 문제가 AI로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AI가 인간의 존재론적 고독감을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볼 거울이 될 수 있음도 인정한다.
전문성을 높이고 싶다(18.8%)는 욕구와 여가를 얻고 싶다(11%)는 욕구가 공존하는 것도 흥미롭다. 전문성을 위해서는 더 많이 일해야 하지만 여가와 여유를 위해서라면 일을 줄여야 한다. 표면적으로는 상반된 욕망처럼 보이지만 현실을 불안 요소로 인식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AI시대에 뒤처지고 싶지 않다는 생존 불안이나 어지러운 속도에서 제발 벗어나길 바라는 탈출 욕구는 다른 표정의 같은 얼굴이다. 가령 세탁기의 보급으로 여성의 가사 노동 시간이 줄어들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여성의 총 가사 노동 시간은 외려 늘어났다. 빨래에서는 해방되었을지라도, 여유 시간을 희생해야 할 새로운 일들이 넘쳐나게 된 것이다. ‘세탁기의 역설’은 인공지능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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